멕시코 고지 '범' 내려왔다
황인범 1골 1도움, 최우수 선수로

“월드컵에서 그런 골을 넣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12일 북중미 월드컵 첫 경기 체코전에서 동점 골을 터뜨리고, 오현규의 역전 골까지 어시스트하며 승리의 주역이 된 미드필더 황인범(30·페예노르트)의 얼굴에는 담담함 속에서도 기쁨이 묻어났다. 경기 초반부터 공세를 펼치던 한국은 후반 14분 체코의 롱 스로인 상황에서 라디슬라프 크레이치에게 기습적인 헤더 선제골을 내줬다. 패배의 위기감이 엄습하며 자칫 무너질 수 있는 흐름을 황인범이 살려냈다. 그는 불과 8분 뒤 상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절묘한 접는 동작으로 체코 수비수와 골키퍼를 한꺼번에 따돌리더니 재치 있는 로빙 슈팅으로 동점 골을 넣었다.
황인범은 후반 35분엔 상대 진영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어 정확한 크로스로 오현규의 역전 결승골까지 도우며 경기 최우수 선수(The Player of the Match)로 선정됐다. 이날 경기를 지켜본 해외 팬들은 2010년 스페인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두 미드필더를 소환해 ‘이니에스타가 여기 있다’ ‘사비의 재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황인범은 “우리가 경기를 내내 주도했기에 승리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며 “동료들이 동점골을 넣자 한마음으로 축하해줬고, 일부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고 했다. “벤치에 있는 선수들까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 월드컵 때 느꼈던 ‘팀 정신’을 다시 한번 떠올렸습니다.”
황인범은 월드컵 개막 3개월 전 소속팀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네덜란드 리그 경기 도중 거친 태클을 당해 오른쪽 발목 인대가 파열됐다. 황인범이 부상으로 빠진 대표팀은 지난 3월 A매치에서 코트디부아르에 0대4, 오스트리아에 0대1로 무기력하게 패했다.
월드컵 출전이 무산될 위기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한국에 돌아와 대표팀 의료진과 함께 재활에 매달린 끝에 극적으로 회복했고, 북중미 월드컵 1차전에 선발 출전해 ‘인생 경기’를 펼쳤다. 황인범은 “돌이켜보면 3월에 다친 것이 오히려 월드컵을 더 철저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파울루 벤투 전 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18년 태극마크를 처음 단 황인범은 정교한 패스와 뛰어난 볼 키핑 능력, 왕성한 활동량과 수비력을 자랑하며 대표팀 핵심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4경기에서 총 45㎞를 뛰어 대표팀 선수 중 가장 많은 활동량을 기록하며 한국의 통산 세 번째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황인범의 가족과 그를 지도했던 스승들은 입을 모아 “근성과 독기, 승부욕이 남다른 선수”라고 말한다. 아버지 황서연(63)씨는 “어릴 때 키가 작아 점프력을 키우겠다고 집에 이불을 깔아놓고 반복해서 점프 연습을 했다”고 회상했다. 충남기계공고 시절 이른바 ‘뺑뺑이 훈련’에서도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 지쳐 나가떨어지는 동안 1시간 내내 선두를 놓치지 않는 ‘악바리’이자 ‘연습벌레’였다고 한다.
프로 데뷔 후에도 북미와 유럽 변방을 오가며 험난한 도전을 이어갔다. 2019년 캐나다 밴쿠버 이적을 시작으로 러시아 루빈 카잔, 그리스 올림피아코스, 세르비아 즈베즈다를 거쳤다. 아버지 황씨는 “혹독한 겨울의 러시아, 거친 환경의 세르비아 등 ‘저니맨’으로 여러 리그를 떠도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아들은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도전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2024년 네덜란드 명문 페예노르트에 입단하며 유럽 정상급 무대에 안착했다. 페예노르트 팬들이 ‘우리의 한국인 황인범을 누구도 이길 수 없다. 북한의 김정은도 황인범은 못 이긴다’는 응원가를 만들어 부를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체코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한 황인범은 한국 축구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1994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1골 1도움을 올린 홍명보 감독, 2022 카타르 월드컵 가나전에서 멀티골을 터뜨린 조규성에 이어 한국 선수로는 세 번째로 월드컵 한 경기에서 2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황인범은 “멕시코와의 2차전은 정말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라면서도 “오늘 경기에서 보여줬듯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상대를 만나도 맞설 준비가 돼 있다”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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