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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6사단과 장도영,파로호 이야기

한문역사 2026. 6. 18. 16:12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전쟁 흐름 바꾼 6·25의 ‘살수대첩’, 성 안차는 전적 기념

2026. 6. 16. 00:11
 

화천 파로호와 장도영의 6사단

김정탁 노장사상가
강원도 화천에 가면 파로호가 있다. 파로호 물은 춘천에서 소양호 물과 합류해 의암호로 흘러 들어간다. 파로(破虜)는 ‘오랑캐(虜)를 패배시키다(破)’라는 뜻인데 소양호나 의암호에 비해 왠지 이름이 어색하다. 원래 이름은 화천호였는데 한국전 때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바뀌었다. 이름이 바뀐 건 1951년 5월 국군 6사단이 도망가는 중공군을 이 호수에 엄청나게 수장시켜서다. 한국전 때 중공군은 총 11만~12만 명쯤 전사했는데 이 전투에서만 무려 1만70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때문에 파로호에선 10여년간 물고기를 잡지 않았는데 그건 중공군의 익사체를 먹고 자라서다.
 

「 중공군 1만7000 무찌른 대승 현장
시발점 된 용문산 등에 전적비 없어

백선엽의 다부동 전투와 다른 대접
장도영이 박정희에 팽 당해서인가

링컨, 승리연설에서 남군 비난 자제
적 무찔렀다는 뜻의 호수명 바꿔야

1961년 5월 16일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 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계엄사령관 장도영 중장(왼쪽)과 부의장 박정희 소장. [중앙포토]

6사단은 어떻게 해서 이런 빛나는 전공을 거두었을까? 이 승리가 있기 불과 한 달 전인 1951년 4월만 해도 이 부대는 화천 사창리에서 중공군에게 크게 패해 양평 용문산까지 후퇴했다. 이 패배에 이어 국군 3군단도 인제 현리에서 중공군의 공격으로 와해돼 원주까지 후퇴했는데 이때 유엔군 사령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3군단은 당장 해체되었는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질 않았다. 유엔군 지휘부는 한국군이 북한군과 동족이라고 해 몰래 내통하는 게 아닌가 하고서 오해했다. 국군이 개인 화기를 버려가며 후퇴해서인데 이는 전투 행위의 포기를 넘어 중공군의 부실한 무장을 보충해 주는 일이어서다. 그래서 국군은 이런 부정적 이미지를 빨리 씻어야 했다.

파로호 전투의 결정적인 첫 승리를 가져다준 청평호 옆 신선봉. 이곳에 6사단 2연대 2대대가 주둔했다. 중간쯤 다리는 가평대교. [사진 김정탁]

철모에 ‘결사’ 새겨 넣게 한 장도영
한편 6사단은 한국전에서 승패의 기복을 가장 많이 경험한 부대다. 한국전이 개시되자마자 춘천을 3일간 방어해 북한군의 남하를 늦춤으로써 전쟁 초반 국면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6사단이 춘천에서 이처럼 버티지 않았으면 북한군의 남하가 빨리 이루어져서 낙동강 방어선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또 6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가장 먼저 북상해서 초산진까지 진출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 이는 6사단 관할에 광산이 많아 이곳 트럭을 징발해서 부대의 기동력이 뛰어났던 탓이다. 그런데 사창리에서 크게 패하자 이런 전공도 한순간에 날아갔는데 용문산 전투의 승리로 다시 일어섰다.

당시 6사단장은 장도영이었다.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이 크게 패하자, 미 9군단장 윌리엄 호그 중장은 6사단을 직접 찾아가 장도영에게 “당신이 군인이냐?”라고 힐난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의 승리를 소재로 한 영화 ‘레마겐의 철교’의 주인공이라 그럴 만도 했다. 이에 잔뜩 열을 받은 장도영은 설욕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병사들에게는 붉은색 페인트로 ‘결사(決死)’, 즉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겠다는 글자를 철모에 쓰게 했다. 그리고 사창리 전투에서 적에게 가장 먼저 등을 보인 2연대를 최전방으로 보내 어떤 경우라도 철수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겠다는 각오를 내보였다.

장도영 장군. [중앙포토]

중공군은 한국전 참전 이후 5차례나 벌여 온 공세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1951년 5월 총력을 기울여서 공세를 폈다. 이때 최전방에 있던 2연대는 많아야 1만 명의 중공군과 대적하리라 예상했는데 63군 예하의 3개 사단 5만 명이 가평군 청평면을 통해 북한강을 건너서 쳐들어왔다. 2연대는 그 반대편인 설악면에서 진지를 쌓고 기다렸는데 미군이 막강한 화력으로 지원해도 15대 1이란 엄청난 전력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2연대가 철수하지 않고 버티자, 중공군은 이 부대가 주력인 줄 알고 여기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는데 이 틈을 타 6사단 예하의 7·19 연대가 측면에서 공격하자 중공군은 한순간에 포위돼 국군의 사냥감이 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당황해 가장 빠른 길로 후퇴했는데 후퇴하는 길목에는 이미 유엔군이 잠복해 화천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이때부터 중공군의 전열이 흐트러지자, 국군 6사단은 이들을 밀어붙이고 유엔군은 대포와 항공기를 이용해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63군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통해 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팔로군으로 편성된 부대인데도 6사단의 이런 민첩한 차단으로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전까지 국군은 중공군을 만나기만 하면 밀렸는데 6사단이 통쾌하게 복수해 국군의 나약한 이미지를 말끔히 씻었다.

파로호 기념비. [사진 김정탁]

이승만, 화천호를 파로호로 개명
파로호에서 거둔 승리는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수나라 대군을 수장시킨 승리에 비견할 정도로 한국전의 흐름을 바꿀만한 큰 승리였다. 이 패배로 중공군은 한국전에서 더 이상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유엔이 제안한 휴전 협상을 받아들였다. 또 6사단의 별칭이 푸른(靑) 별(星) 사단인데 푸른색이 뜻하는 대로 이 승리는 당시 국군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을 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승리 소식을 듣고 당장 화천호로 달려가서 호수 이름을 파로호로 바꾸고 이를 휘호로 남겼다.

 

그런데 파로호 전투의 승리는 그 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꺾은 설악면 일대는 물론이고, 용문산에도 그 흔한 전적비가 없어서다. 낙동강 방어전이 벌어진 칠곡 다부동은 이와는 너무 다른데 파로호 전투 승리의 주역이 장도영이어서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장도영은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군사정부의 얼굴마담을 하다 곧바로 팽 당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주의 조그만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삶을 마무리했다. 반면 낙동강 방어전의 주역인 백선엽은 박정희가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되자 그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인연들이 전공을 기리는 데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 가면 남북전쟁 기념관이 있다. 여기를 관람하고 나면 이 기념관이 다른 전쟁기념관과 다르다는 점을 발견한다. 게티즈버그에서 거둔 북군의 승리를 찬양하기보다 전쟁을 통해 생겨난 남북 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서다. 총이 발명된 뒤 단위 시간당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투 5개 중 4개가 남북전쟁에서 발생했는데 이중 게티즈버그 전투가 가장 치열해 일주일간 4만8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투가 첫 사흘에 집중된 점을 고려하면 게티즈버그 전투는 군사적 싸움이 아니라 적개심으로 뭉쳐진 광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더욱 빛이 난다. 개전 초 북군이 쉽게 승리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계속 패하다가 이 승리를 처음 보고받자, 링컨은 여기를 국립묘지로 만들라고 명한 뒤 3개월 후 조성되었을 때 연설하러 왔다. 원래는 공식 연설자가 아니었는데 일부로 참석해 2분 30초간 짧은 연설을 했는데 이것이 불후의 명연설이 되었다. 이 연설은 이곳에 묻힌 군인들에 대한 추모, 살아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과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란 문장이 있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마지막에 속한 이 문장만 잘 아는데 이 문장은 링컨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장을 인용한 거다.

파로호 전경. 멀리 화천댐과 하단의 파로호 기념비가 호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파로호’라는 비문을 직접 썼다. [사진 김정탁]

메타포 사용할 줄 모르는 정치인들
그런데도 링컨이 이 표현을 굳이 인용한 건 영국과 프랑스가 남군을 암암리에 지원해 남북전쟁이 의외로 오래 끌자, 이 나라들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정부는 (왕정국가인 영국과 프랑스가 방해해도) 이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져선 안 된다”라고 해석하면 어째서 인용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파로호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한국민의 의지가 이처럼 강렬하니까 이웃 나라 중국은 대한민국을 함부로 침범해선 안 된다는 의미가 담긴 호수 이름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치에선 메타포가 중요한데 오늘날 정치인은 과거에 비해 메타포를 더 사용할 줄 모른다. 그래서 정치는 양극화로 치닫고, 심지어 극단적인 발언을 경쟁적으로 하는 걸 정치의 전부로 안다. 이것이 정치가 국민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큰 이유일 텐데 지금 우리 정치인에게 링컨과 같은 인문적이거나 철학적인 사유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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