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카테고리

만물상)이병철 회장의 공수래공수거

한문역사 2026. 7. 8. 18:22

만물상] 이병철 회장의 '공수래공수거'

입력 2026.07.07. 21:01업데이트 2026.07.07. 21:02
15
 
 
 
 
 

20년도 넘은 우스갯소리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저승에 막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삼성 이병철 회장이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는 대뜸 “잘 왔네, 정 회장.

나 저승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 먹게 500원만 빌려주시게.

” 정 회장이 주머니를 샅샅이 뒤졌지만 동전 한 푼 나오지 않았다.

겸연쩍어하는 후배에게 선배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빈손으로 왔소? 나도 빈손으로 왔는데.”

▶대한민국 최고 부자도 세상 떠날 때는 빈손이다.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이 직접 쓴 서예 작품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경매에 나왔다.

호암이 붓글씨를 배워 수련한 뒤 오랜 지음(知音)이었던 김재순 전 국회의장에게

선물한 1호 작품이라고 한다. 사연이 있다. 김 의장이 만든 국내 최장수 교양 잡지

‘샘터’는 올해 1월호를 끝으로 창간 56년 만에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디지털의 거센 파도에 휩쓸린 종이 잡지의 가혹한 현실이랄까.

아들인 김성구 발행인은 “오직 샘터를 살려야겠다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모든 것을 내놓는다”고 했다.

 

▶얼핏 가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돈과 권력의 정점에 섰던 ‘회장님’이

“인생은 어차피 빈손”이라 말하는 것은.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아무것도 쥐어보지 못한 사람은 손을 펼쳐도 잃을 게 없고,

오히려 모든 것을 가져본 사람이 떠날 때 더 미련이 남지 않을까.

호암은 ‘공수래공수거’ 글씨를 여러 점 남겼는데, 아들인 이건희 선대 회장도

그룹 영빈관이자 집무실이었던 승지원에 선친 글씨를 걸어두고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를 호령하며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32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으며 기이한 유언을 남겼다.

관 양쪽에 구멍을 뚫고 자신의 두 손을 밖으로 나오게 해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천하를 통일한 영웅도 떠날 때는 빈손이었다. ‘명상록’을 쓴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 역시

“알렉산더 대왕이든 일개 마부든 죽어서 돌아가는 곳은 결국 똑같다”며 권력의 무상을 토로했다.

우리 모두는 늙고 죽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부자와 영웅의 ‘공수래공수거’는

평범한 우리를 위로하는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것을 가졌던 이들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일종의 마지막 고백이기 때문이다.

생전에 쥐었던 게 무엇이든 간에, 저승길에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호암은 손 수(手) 한 글자만 1년을 고쳐 썼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손 안에 움켜쥐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