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길을 걸으며] [37] 소서에 누린 '적당한' 행복

하지(夏至)가 시작될 무렵만 해도 걱정스러울 만큼 비가 내리지 않아서
인왕산 수성동 계곡 물고기가 다 죽을 지경이었는데, 소서(小暑) 들어
오랜만에 산에 오르니 우렁차게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울려 퍼진다. “아, 진짜 여름이다!” 싶다. 계곡물로 달려들어 발을 담그자,
발목을 휘감고 도는 물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나도 모르게 외마디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된다.
깊은 산속에서 온갖 나무뿌리와 바위와 이끼를 어루만지며 흘러온 청량한 계곡물은
내 발가락들 사이에 짙은 인상을 남겨 하루 종일 발이 서늘하다.
장맛비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도 계곡물 앞에서는 힘을 잃으니,
이런 기분 좋은 낙차도 무더위가 주는 선물이리라.
막힘없이 흐르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네 인생도 저리 시원하게 흐르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꽉 막혔던 생각이 뚫리고, 답답했던 관계가 뚫리고, 말라붙었던 돈줄이 뚫리고,
지난했던 인생의 계획이 속도를 내며,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 꽹과리 소리처럼 굉
굉 들려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산골짜기를 압도하는 물소리에 몸을 맡긴 채,
한낱 인간인 나는 속세의 욕심에 젖는다.
모든 게 저 물길처럼 술술 풀리는 나날,
그저 막힘없이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인생.
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흙바닥이 쩍쩍 갈라질 만큼 메마른 시기를 지나왔기에
물줄기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되는 것이다.
애타게 바라본 사람만이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의 행복을 안다.
그리하여 나는 너무 많이 바라지 않기로 한다. 발목에 찰랑찰랑 닿는 물살을 느끼며,
여기 물 한 방울 없어 갈증이 나던 지난 유월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떠올리기로 한다.
이 정도가 딱 좋다. 너무 많은 것은 너무 없는 것과 같다 했다.
지나치게 욕심부리지 말고 적당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자고 다짐하며,
계곡물 속을 이리저리 걸으면서 작은 더위 소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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