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640] 변색 없이 300년 된 초상화

소중한 이의 모습은 언제든 볼 수 있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된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에 저장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지갑에 사진을 한 장씩 꽂아뒀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상류층에서는 미니어처 초상화를
펜던트나 시계 케이스에 넣는 게 유행이었다. 1630년대에는 에나멜 기법이 나타났다.
에나멜은 금이나 구리 같은 금속판 위에 유리가루를 섞은 안료로 그림을 그린 뒤,
가마에 구워 녹여 붙이는 기법이다. 색마다 녹는 온도가 달라,
고온에 녹는 색부터 차례로 한 층씩 올려 여러 번 구워야 하는 까다로운 공정이지만,
보석처럼 반짝이는 표면과 영롱한 색채가 변색 없이 오래가서 큰 인기를 누렸다.
스웨덴 출신으로 유럽 전역에서 널리 활동했던 찰스 보잇(Charles Boit·1662~1727)은
세밀화와 세공 기술에서 모두 탁월했던 에나멜 미니어처 초상화 전문가였다.
그는 초상화 한 점에 일반 장인의 수십 년 치 소득에 맞먹는 막대한 값을 선금으로 받으면서
영국 여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고객으로 둘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보잇의 초상화 속, 진주 같은 피부에 매혹적인 눈매를 가진 앤 처칠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딸로서, 선덜랜드 백작 찰스 스펜서의 부인이자,
이후 말버러 공작과 스펜서 백작으로 갈라지는 두 가문의 어머니로,
어릴 때부터 소문난 미녀였다. 그녀의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비운의 왕세자빈 다이애나 스펜서가 모두 그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앤은 이 초상을 남기고 몇 년 뒤 서른셋의 나이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앤의 고운 얼굴은 다이애나가 나고 자란 스펜서가(家) 저택에서
수백 년 동안 변치 않고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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