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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재

한문역사 2024. 7. 27. 10:51

조선의 여성 문인, 김호연재(金浩然齋)의 유고시집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여성문인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 바닷가다. 지금은 마을 주변이 육지로 변했지만, 옛날에는 바닷물이 출렁이던 아름다운 어촌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 열여덟 살 때 대전 송촌(宋村)의 은진 송씨 가문으로 출가했다. 

호연재(浩然齋)는 이름이 아니고 호(號)다. 이처럼 이름이 아니고 호가 알려진 데에는 당시 조선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17세기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이 불려 지지 않았으며, 결혼을 하면 누구의 배(配, 부인)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때문에 양반가의 여성들은 자신이 거처하던 안채의 당호를 자신의 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김호연재가 대전 송촌가로 출가하여 거처하던 안채의 당호가 ‘호연재(浩然齋)였다. 이런 이유로 본명 대신에 김호연재라는 이름이 세상에 전해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호연재는 어린시절부터 부모형제들의 영향을 받아 시와 친근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친가는 아버지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가 부부시인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살이로 멀리 떠나 있을 때도 부모님은 시로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자녀들도 모두 시를 잘 썼다. 김성달·이옥재 부부가 오두리에서 주고받은 시집이 『안동세고(安東世稿)』이며, 부모와 아홉 자녀가 함께 지은 시가 『연주록(聯珠錄)』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다. 김호연재는 부모의 5남 4녀인 9남매 중에서 8번째 자녀이다. 김호연재는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 송요화와 혼인하여 대전 법천에 살았다. 신혼 초기부터 남편은 과거공부 등으로 집을 자주 비웠다. 젊은 새댁은 송씨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며 시집살이가 힘들었다. 그때마다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집과 형제들을 생각하며 시를 썼다.

김호연재가 42세 때인 172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까지 그녀가 썼던 시들은 은진송씨 가문의 후손들에 의해 소중하게 보관되어 전해왔다. 1796년 7월에 외손자 김종걸이 김호연재의 「자경편(自警編)」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1814년 6월에는 증손며느리인 청송심씨가 김호연재의 한시 192제 237수를 『증조고시고(曾祖姑詩稿)』라는 제목으로 필사했다. 1834년 5월에는 5대손 송문회가 『안동세고부연주록』을 필사했다. 1977년 5월에는 9대손 송용억이 김호연재의 시 72제 91수를 묶어 『호연재 시집(浩然齋詩集)』으로 간행했다. 1995년에는 10대손인 송봉기가 김호연재의 시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를 간행했다.

이처럼 김호연재의 시들은 후손들 중심으로 집안에서 전해왔다. 이후 2000년대 들어와 세상이 알려지며 17~18세기의 여성문학사에 중요한 연구자료로 떠오르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은 김호연재의 유고집을 번역하여 출판함은 물론이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마당극 등이 공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