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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氏 三綱門

한문역사 2025. 8. 19. 12:08

양씨 삼강문 - 임진왜란 의병장 양산숙 일가, 제주 양씨 사액 (賜額) 삼강문 (三綱門)

2020. 9. 15.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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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양씨 삼강문입니다.

1914년 이전에는 함평군 오산면이었으며 1914년 광산군 임곡면 박호리가 되었는데요, 1988년 광주직할시 광산구 박호동으로 행정동인 임곡동의 관할에 있습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 양산숙(梁山璹 1561~1593) 일가의 충(忠)·효(孝)·열(烈)·행(行)을 기리기 위해 1635년 나라에서 내린 정려 양씨 삼강문이 있는데요, 광주시 기념물 제11호입니다.

양씨 삼강문 옆에는 제주양씨삼강전 기록이 있는데요, 비문의 기록을 중심으로 양씨 삼강문의 충(忠)·효(孝)·열(烈)·행(行)이란 어떠했는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의병장 양산숙은 진주목사, 경주부윤, 공조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한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1)의 아들로 할아버지는 1516년 문과에 급제해 교리로 재직 중 기묘사화로 삭직된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 1480~1545)입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에만 전심했으며 천문, 지리, 병학에 뛰어났다고 하는데요, 동서 분당시 서인으로 조헌과 함께 이율곡과 성혼을 지지했으며 동인 이산해와 유성룡을 배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양산숙은 관직을 멀리했지만, 의로움에는 앞장섰는데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양산룡과 함께 나주에서 의병 창의해 의병장 김천일의 부장이 되어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했으며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격문들 돌려 의병으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수원으로 출진했으며 선조가 강화도로 몽진할 때 선조에게 호남, 영남의 정세와 의병 활동을 자세히 보고했는데 이에 선조가 공조좌랑에 제수했다고 합니다. 이후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끝까지 항전했으나 중과 부족으로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해 자결했습니다.

양씨 삼강문에는 양산숙 외에도 효자, 절부, 열녀 각 두 명씩 총 7명의 정려가 있었으나 나주 회진의 임씨 문중에서 따로 한 명의 정려를 모시고 있어 6명의 정려가 있습니다.

충신 양산숙은 이미 설명했고 효자 2명은 형 양산룡과 동생 양산축인데요, 삼양포에서 형과 함께 어머니를 구하려다 순절했고 절부 2명은 양산숙의 어머니 죽산박씨와 양산숙의 처 광산 이씨입니다.

어머니 죽산 박씨는 정유재란 때 나주 삼항포(무안 몽탄)에서 왜구를 만나자 지조와 정조를 지키기 위해 영산강에 투신했으며 양산숙의 처는 동서인 양산축의 처 장흥 고씨를 갈대밭에 숨기고 왜구를 산으로 유인해 승달산에서 자결했습니다.

열녀 두 명은 김광운에게 출가한 누이와, 양산룡의 딸로 무주현감, 문화현령을 지낸 임환의 부인 제주 양씨 두 명인데요, 누이는 어머니와 함께 영산강에 투신해 순절했고 양산룡의 딸은 부군 임씨 가족이 탄 배가 영암 용당에서 왜구에 막히자 배를 피신시켜 가족들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은 바다에 투신해 순절했습니다.

 

일문삼강(一門三綱) 삼세구정려(三世九旌閭)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전국 유일의 사액(賜額) 삼강문인 양씨 삼강문은 1635년 인조의 명으로 모시고 있는데요, 양산숙 일가 어머니와 아들, 며느리, 손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7정려가 내려져 삼세칠정이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2019년 제주 양씨 종회에서 문헌 고증을 통해 두 분을 추가 배향하면서 현판을 봉안했는데요, 양산룡의 부인 고흥 유씨와 양산축의 처 장흥 고씨 입니다.

양산룡의 부인 고흥 유씨는 삼향포에서 시어머니 죽산 박씨가 먼저 영산강에 뛰어들 때 같이 따라 순절했고, 이어 형제가 어머니를 구하고자 뛰어들었고 외손자 김두남과 양산축의 부인 장흥 고씨, 양산숙의 처도 함께 자결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두 여인만 노비들에게 구출돼 갈대밭에 몸을 숨겼는데요, 당시 장흥 고씨는 임신한 상태여서 양산숙의 처는 왜구들을 승달산으로 유인했고 결국 그곳에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양산축의 처 장흥 고씨는 이후 유복자를 낳았는데요, 그가 바로 오재 양만용(梧齋 梁曼容 1598~1651)입니다.

박산마을 송촌 양응정의 후손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모두 순절하는 등 송천의 대가 끊길 뻔했지만, 바로 양산숙의 처 광산 이씨의 기지로 살아남은 양산룡의 처 장흥 고씨로 인해 제주 양씨의 대가 이어지고 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보살핌이 아닌지 생각되군요.

양만용에 관한 이야기를 박산마을 옛 담장길을 따라가면 벽화로 만날 수 있습니다.

양만용은 1633년 생원과, 진사과, 대과를 한꺼번에 치러 급제하는 연관삼장을 통과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요, 양만용과 어머니 장흥고씨에 대한 일화가 박호동 마을 벽화로 남아 있습니다.

장흥 고씨는 아들이 너무 영특해 더 가르칠 것이 없어 영광의 선비 강항에 맡겼는데 3년 만인 12세 때 어머니가 보고 싶어 30리를 걸어 불쑥 찾아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냉정하게 내쫓았다는데요, 스승에게로 돌아가다 날이 어두워 숲에서 잠을 청하였는데 소나무 옆 초분 속 귀신들이 '박산마을 양한림으로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니 지켜주자'라고 속삭이는 말을 듣고 다음날부터 한림이 되려고 글공부에 매진했다는 내용입니다.

광산구 박호동 양씨 삼강문을 찾았다면 당장 길 따라 충효열 벽화골목까지 함께 보시면 더 유익한 여행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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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삼강문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산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