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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 시조 <이런들 어떠하며>

2009. 9. 2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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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들 어떠하며

【시조】- 이방원(李芳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어휘 풀이】

<만수산(萬壽山)> : 개성 서문(西門) 밖에 있는 산.

<드렁츩> : 칡덩굴.

【전문 풀이】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어떠한가?

   저 만수산에 마구 뻗어난 칡덩굴이 얽혀진 것처럼 그렇게 살면 또 어떠한가?

   우리도 이와 같이 어울려서 오래도록 살아가리라.

【해설】

   조선 건국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조선 왕조의 태종(太宗0이 된 이방원이 반대파인 정몽주(鄭夢周)의 의중을 떠보기 위하여 지었다는 하여가(何如歌)다. 이에 화답(和答)한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와 함께 고려의 멸망 과정에서의 회유(懷柔)와 충절(忠節)의 대립적인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시조이다.

   정치적인 복선을 깔고 있으면서도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부드러운 정서로 표현하였다. 백년까지 새 나라를 건설해서 살아보자는 이방원의 여유와 정치가다운 기질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개관】

▶작자 : 이방원(李芳遠: 1367∼1422)

▶연대 : 고려말

▶갈래 : 평시조, 단시조, 하여가(何如歌), 회유가(懷柔歌).

▶성격 : 비유적

▶표현 : 직유법, 대구법, 상징법.

▶제재 : 드렁칡

▶주제 :

  - 충신의 회유(懷柔), 시세에 따라 살려는 인생관.

  - 처세(處世)애의 지극한 권유

▶출전 : <청구영언>

【구성】

▶초장 : 시세에 따라서 살아감

▶중장 : 세세에 따라서 살아감

▶종장 : 함께 영화를 누림

【하여가(何如歌)의 한역사(漢譯詩)】

   광해군 때 심광세(沈光世: 1600∼1655)가 지은 <해동악부(海東樂府)>에 다음과 같이 한역되어 있다.

   此亦何如 (차역하여)

   城隍堂後垣 頹圮亦何如 (성황당후원 퇴비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감상】

   역성(易姓)혁명의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왕위를 위해 두 번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켰던 지은이의 정치적 야욕과 결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노래이다. 혁명 전야(前夜)에 고려의 중추적인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회유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 노래는 일명 하여가(何如歌)라고도 한다.

   결국 단심가(丹心歌)로서 굳은 절개를 회답했던 정몽주는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고 만다. 이와 같은 사연을 가진 이 노래는 정치적 복선을 깔고 있으면서도 아주 부드러운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정치가다운 기질을 느끼게 한다.

 

    이 시조는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려는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넌지시 속을 떠보려고 지은 것이다. 곧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산다'는 것은 왕씨의 고려 왕조를 섬기면 어떻고, 신흥 이씨의 조선 왕조를 섬기면 어떠냐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써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기의 굳은 절개를 피력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역사(力士) 조영규를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고 말았다.

 

   조선 초기에 이방원(李芳遠)이 지은 시조. 1수. 작자는 조선 건국에 공이 큰 태종으로, 이 작품은 반대당인 정몽주(鄭夢周)의 진심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마련된 자리에서 지어 부른 <하여가(何如歌)>이다. 이에 대하여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응수하였다. 이 두 작품은 <하여가>가 직설적인 말을 피하고 우회적 기교로 여유롭고 느긋함에 비에, <단심가>는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굳은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즉 이방원은 얽힘의 논리로 화해와 조화를 희구하고 있는데, 정몽주는 죽음의 논리로 의지와 단절을 노래하고 있어, 당시 두 사람이 처한 입장, 곧 지략적인 정치가와 비타협적인 학자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조는 이방원(李芳遠)이 고려 왕조(王朝)를 끝까지 지키려는 정몽주(鄭夢周)를 회유(懷柔)하기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넌지시 속을 떠보려고 지은 시조이다. 곧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는 것은 왕씨(王氏)의 고려왕조(高麗王朝)를 섬기면 어떻고, 신흥(新興) 조선왕조(朝鮮王朝)인 이씨(李氏)를 섬기면 어떠냐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써 고려왕조에 대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늕 자기의 굳은 절개를 피력했던 것이다.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역사(力士)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지 3개월 뒤 이성계(李成桂)가 왕으로 추대되어 조선의 건국을 보게 되었다.

 

   이 시조는 태종(太宗)이 정 몽주에게 절개를 굽혀 같은 무리에 들어올 것을 넌지시 떠본 시조이다. 이를 가리켜 '하여가(何如歌)'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절개를 굽히면 어떻고 안 굽히면 또 어떠냐는 식의 회유다.

   개성(開城) 서문 밖을 가로막고 선 만수산에 칡덩굴이 얽혀 험한들 무슨 일이 있을까보냐, 우리도 이같이 얽히고 얽혀서 몇 백 년이라도 권세를 누려보자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절개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정 몽주의 군신론(君臣論)을 지칭하고 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조(李朝)를 창건한 이 태조는 봉건시대의 모든 혁명이 그러했듯이 일종의 역성혁명(易性革命)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더구나 정 몽주와 같은 대학자(大學者)로서는 고려조(高麗朝)의 한 무관(武官)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을 왕으로 섬기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힘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왕권을 잡은 권력에 아랑곳없는 정몽주는 한편으로 다시없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왕의 덕(德)과 인(仁)을 백성에게 보여 줌으로써 민심을 수습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고 보면 정 몽주의 가담(加擔)이야말로 그것을 수습하는 열쇠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방원으로서는 머리를 숙여서까지 그를 끌어드릴 수는 없는 군주(君主)의 입장이고 보니, 고두백배(叩頭百拜) 모셔올 수는 없었다. 신하의 길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정 몽주의 군신론에 망설임과 재고(再考)를 촉구하는 암시나 해 볼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그러기에 넌지시 만수산에 칡덩굴이 우거져 왕조의 갈 길이 험한들 뭐 두려울 게 있겠느냐고 허세를 부려 정 몽주의 전향(轉向)을 권고해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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