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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역사속의 why,개경탈환한 영웅,허무한 죽음

한문역사 2025. 9. 1. 13:56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개경탈환 영웅의 허무한 죽음

이한우
입력 2009.07.18. 03:16업데이트 2009.07.1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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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0년(1361) 10월 20여만 병력의 홍건적(홍두적)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공해왔다. 그 전해에 수만 병력으로 침입해 서경(평양)까지 점령했다가 고려군의 반격으로 참패를 한 1차 홍건적에 이은 2차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1차 때와 달리 파죽지세로 남진을 거듭한 홍건적은 11월 24일 수도인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미 공민왕을 비롯한 왕실은 11월 19일 남쪽으로 몽진길에 나선 후였다.

고려가 정세운(鄭世雲·?~1362)을 총사령관격인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진용을 정비하고 20만 병력을 동원한 반격작전에 나서게 되는 것은 이듬해 1월이다. 정세운의 휘하에는 안우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김득배 안우경 이구수 최영 등 쟁쟁한 장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고려말 혼란기에 '20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조선 시대 때 선조가 병조판서 이이를 불러 "지금 우리의 군사력이 고려만도 못하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이때의 20만 병력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20만 병력으로 홍건적 몰아내

1월 17일 홍건적이 점령하고 있던 개경을 포위한 고려군은 다음날 새벽 이성계가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성에 올라 교두보를 확보하자 불과 하루 만에 개경을 탈환한다. 이때 적의 목이 베인 것이 10여만이라고 하니 홍건적은 사실상 개경에서 몰살당했다. 나머지 10여만명은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중국의 북서지방에서 시작해 북동지방으로 왔다가 고려로 몰려들어온 홍건적은 개경 땅에서 뿌리째 뽑히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 두고두고 기록돼야 할 대첩(大捷)을 이룬 것이다.

정세운은 영웅 중의 영웅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禍根)이었다. 오래전부터 정세운과 함께 공민왕의 총애를 놓고서 경쟁해 왔던 김용(金鏞·?~1363)이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공민왕이 몽골에서 인질생활을 할 때부터 함께 모셨던 정세운과 김용은 한때는 동지로서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때 정세운의 공이 워낙 컸기에 공민왕의 총애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김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음모를 꾸민다. 개경 탈환 불과 5일 후의 일이다.

정세운 질투한 김용의 제거음모

김용은 먼저 공민왕의 편지를 위조해 반격작전에 참여했던 장수 안우와 이방실을 포섭했다. 정세운을 죽이라는 왕의 밀명(密命)이라며 위조편지를 보여준 후 "정세운이 평소에 그대들을 꺼리는데 이번 홍건적 격파로 큰 공을 세워서 그대들은 결코 화를 면하기 어려울 테니 먼저 손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설득했다.

안우와 이방실 두 사람은 동료 장수 김득배를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김득배는 견결하게 반대했다. "이제 겨우 적을 격파하자마자 어찌 우리들끼리 서로 죽인단 말인가?" 그러나 두 사람은 억지로 김득배를 술자리에 참석케 한 다음 정세운을 초청했다. 정세운이 술자리에 들어서자 안우는 주변에 있던 장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개경탈환의 영웅 정세운은 그 자리에서 허무하게 격살(擊殺)되고 말았다.

그것은 김용이 벌이게 될 연쇄살인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김용의 거짓편지를 믿고 있던 안우는 개경탈환 및 정세운 제거를 보고하려 당시 안동을 떠나 상주에 머물고 있던 공민왕을 찾아간다. 그것은 2월말의 일이었다. 안우 등이 공민왕을 만나는 순간 김용의 음모와 공작은 백일하에 드러날 판이었다. 이에 김용은 목인길을 시켜 행궁 입구 중문(中門)을 들어서던 안우를 쇠망치로 내리쳐 죽인다. 당시 안우의 손에는 김용이 만든 거짓편지가 들려 있었다고 한다.

연쇄살인 부른 위조편지 한장

다시 김용은 공민왕에게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이 함부로 주장(主將·정세운)을 죽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아뢴 다음 이방실과 김득배를 차례로 제거했다. 이렇게 전쟁영웅들을 간계(奸計)로 제거한 김용은 결국 이듬해 역모를 꾸미다가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득배의 제자인 정몽주는 제문을 지어 스승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다.

"오늘의 모든 사람이 여기에서 먹고 여기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누구의 공로인가? 비록 죄가 있어도 공으로써 덮어주어야 옳을 것이며 죄가 공보다 크다 하여도 반드시 그 죄를 자복시킨 후에 처형하여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전쟁에서 흘린 땀이 아직 마르지도 않고 승리의 노랫소리가 아직 그치기도 전에 마침내 태산 같은 공로를 칼 끝에 피로 화하게 하였는가?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온 세상에 호소하는 바이다."

'고려사'는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충신편에 실었고 김용은 반역편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