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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창설 주역 (24) 청사 조성환

한문역사 2025. 11. 25. 15:27

한국광복군 창설 주역…이국땅 오가며 독립군 양성
중앙선데이
입력 2025.11.22 00:16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24〉 청사 조성환

조성환 선생은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항일운동을 주도했고, 임시정부 핵심 인물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이끌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청사(晴蓑) 조성환 선생은 1875년 서울 낙원동에서 명문가의 후예인 조병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주의 창녕 조씨 문중 자료에선 선생이 여주 대신면 보통리 고택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1900년 25세 때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고 동기생 신규식, 교관 노백린 등 후일 독립운동을 함께 할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1902년 학교와 군부의 개혁을 요구하며 동맹퇴교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육군 법원에서 15년 형을 선고 받은 후 유배됐다. 2년 후 석방되어 보병 참위로 임관했으나 보직을 받지 못하고 1907년 군대 해산을 맞는다. 선생은 초급 장교 시절 이동녕·이승만 등 많은 민족 운동가를 배출한 상동교회에서 구국 활동에 참여했고, 평양의 기명학교 교사로 일하며 안중근을 만나 교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9인 중 한 명
이후 안창호·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 신민회에 참가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선다. 신민회가 만주 밀산에 무관학교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자 선생은 1909년 베이징으로 망명해 동포 청년을 모아 조직화하는 활동에 나섰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대종교에 가입해 민족운동을 병행해 나갔다. 1912년 중국 신해혁명 당시에는 신규식과 함께 난징으로 가서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만나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면서 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된다. 이어 신채호·박은식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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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으로 돌아온 선생은 가츠라 일본 총리의 러시아 방문 시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동지들과 함께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로 유배됐다. 1년 남짓 후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 선생은 1917년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14인의 이름으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는 민주국가 시대를 처음 선언한 것으로 임시정부 수립의 연원이 됐다. 같은 해에는 독립군 양성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연해주를 거쳐 길림성 유하현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유하현은 경학사, 부민단, 신흥강습소, 서로군정서 등이 설립되면서 남만주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 곳이다.

1919년의 3·1운동은 국외 독립운동계에 큰 영향을 미쳐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9인은 한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며 한국인은 자주민으로서 일본의 강제 병합은 무효라고 주장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선생은 만주와 연해주 등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선생 등 29명이 참석한 제헌의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두는 임시헌장을 통과시켜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이 탄생하게 된다. 선생은 임시의정원 러시아 지역 대표가 되었고 임정의 군무차장(후에 군무부장)을 맡아 군사 문제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만주로 돌아와 김좌진과 함께 독립군 군정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군사부장을 맡아 무장부대 양성, 군자금 확보, 작전 지휘 등 실질적인 군사 활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대량 확보해 청산리대첩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봉오동·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은 독립운동 근거지를 초토화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대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조직들은 전열 정비를 위해 흑룡강성의 밀산으로 집결해 러시아로 이동하기로 하고 각 단체를 통합,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서일이 총재를, 선생과 김좌진·홍범도는 부총재를 맡았다. 러시아로 향하던 독립군 부대는 무장 해제를 강요하는 러시아 적군 등의 공격으로 일어난 자유시참변으로 수백 명이 희생되는 등 사실상 해체되고 일부 병력만이 만주로 돌아왔다. 선생은 당시 군자금 모금을 위해 상하이에 있어 화를 면했으나 참변 소식을 접하고 베이징으로 가 만주 독립군 전열 재정비에 나섰다.

이즈음 임정에서는 선생을 영입하려 외교위원과 학무총장 등으로 임명했으나 선생은 부임하지 않았고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한인동포사회·대종교를 아우르면서 활동했다. 선생은 독립군 조직화에 앞장서 1920년대 만주의 세 독립 단체의 형성과 통합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압록강변의 만주 지역에서는 ‘참의부’ 설립에 참여했고, 남만주 지역에서는 ‘정의부’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북만주 지역에서도 ‘신민부’를 조직하고 외교부장을 맡았다. 이후 전개된 만주 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운동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계속했다.

1926년 이상룡이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선생 등 만주 3부의 인사들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했으나 임정의 세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이어서 이들은 부임하지 않았다. 1926년 미국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안창호는 정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국가를 운영해 나가고자 하는 유일당 운동에 나섰고, 선생은 좌우가 합작한 대독립당 북경촉성회를 맡아 그 중심에 섰다. 그 결실로 임정 중심의 우파세력이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게 된다.

1932년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임정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베이징 일대에서 활동하며 상하이 임정과 만주독립군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 1935년 정당 간 갈등으로 임정이 해산 위기를 맞았으나 이동녕이 주석, 김구가 외무장, 선생이 군무장을 맡아 임정을 지켰고 10년 가까이 군사 문제를 책임지게 됐다. 임정을 꾸려갈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이 조직되자 김구가 이사장, 선생이 감사를 맡았고 국무위원으로도 선출되는 등 임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옮겨갔고 임시정부도 난징에서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이동하게 된다. 선생은 피난 중에도 군대를 조직하는 노력을 계속했고 한인 청년들을 모아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군사특파단 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 기념 사진. 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해 5개의 징모분처를 만들어 대원들을 파견했다. 앞줄 가운데 김구, 뒷줄 왼쪽 조성환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독립기념관]

1940년 충칭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우파 3개 정당을 통합, 한국독립당을 출범시키고 선생을 군무부장으로 다시 선임해 9월 17일 임시정부 직할부대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전진 배치되자 앞서 시안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군사특파단 업무를 총사령부로 넘기고 충칭으로 돌아온다. 이후에는 군무부장으로서 군사 활동 지원을 위한 군정을 도맡아 일했다.

무기 대량 확보, 청산리대첩 승리 뒷받침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좌우통합을 추진했다. 군사적으로는 한국광복군에 조선의용대를 편입시켜 통합군대를 출범, 김원봉이 부사령관과 제1지대장을 겸임하게 된다. 이어 정치적으로도 민족혁명당이 임정에 합류하면서 좌우통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1944년 김원봉이 군무부장을 맡고 선생은 무임소 국무위원이 되면서 10년 가까이 맡아왔던 군정 업무에서 물러났다. 조선의용대를 받아들여 광복군을 확장하고 통합정부가 자리 잡도록 하려는 그의 결단이었다.

임정은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해 선생과 김원봉 등 5인으로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일본의 항복으로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광복 후 12월 1일 임정요인 환국 2진으로 귀국한 선생은 신탁통치 반대 투쟁에 참여했고 이승만과 김구를 총재, 부총재로 하여 출범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김구 계열의 통일정부 우선 노선에 섰으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1948년 만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효창공원에 있는 조성환 선생의 묘역. [사진 김석동]

선생은 대한제국 군인으로 출발해 중국으로 망명,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군사 활동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국땅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신명을 다했고 마침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데 주역을 맡았다. 선생은 군사 지도자이자 군사 전문가로서 조국 해방을 위해 오직 한길을 걸으면서 독립운동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남겼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효창공원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여주에 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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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84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