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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

한문역사 2025. 12. 15. 16:26

碑石 前左面에는 만주문자.

前右面에는  몽골문자

碑石 後面에는 한문으로 쓰여져있다.

세 나라의 문자로 새겨져 있는 유일무이한 비석입니다.

 
 
 
 
 
 
 
 
 
 
 
 
 
 
 
서울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Samjeondobi Monument in Seoul
 
주소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크기
높이 395cm, 너비 140cm
면적
200㎡
지정연도
제작시기

1. 개요2. 역사
2.1. 군림과 오만의 상징
2.1.1. 비문은 너희들이 써라!2.1.2. 굴욕의 상징이 세워지다2.1.3. 청 사신의 필수 방문 코스
2.2. 수난과 오욕
2.2.1. 고종이 엎고 일제가 세우고2.2.2. 땅에 묻히고 물에 빠지고2.2.3. 치욕적 역사의 교육장으로
2.3. 2000년대 이후의 근황
3. 내용4. 참고 자료5. 외부 링크6. 사적 제101호

1. 개요[편집]

 
현재 삼전도비의 모습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비석.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식 이름은 만주어로 '대청국의 성스러운 한의 공덕비(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ᡳ᠋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ᡳ᠋ ᡤᡠᠩ ᡝᡵᡩᡝᠮᡠᡳ ᠪᡝᡳ)', 한문으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청황제가 청태종 홍타이지이므로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라고도 한다.

내용은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을 청나라 입장에서 미화하여 기록한 것이다. 사실상 단종실록(노산군일기)과 세조실록의 이민족 침략자 버전이자 고종실록 순종실록의 청나라 버전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삼전도비의 내용에 대해서는 교차검증이 필수다. 다만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이 자신들의 조선 식민지배와 중국 침략 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청태종을 미화함에 따라 삼전도비의 내용을 교차검증 없이 곧이곧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되었으며, 이는 8.15 광복 이후로도 한국에서 오랫동안 청태종이 자비로운 침략자로 미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내용을 두고 앞면에는 만주 문자(좌)와 몽골 문자(우)로,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겨놓았기에 로제타 석처럼 17세기 세 나라의 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2. 역사[편집]

2.1. 군림과 오만의 상징[편집]

2.1.1. 비문은 너희들이 써라![편집]

인조 15년(1637), 청나라 조선을 기습 공격하며, 결국 조선 왕 인조가 포위당해 전쟁은 조선의 패배로 끝났다. 자세한 전개는 병자호란 문서 참조.

같은 해 2월 24일,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조선 왕 인조는 청 황제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두로 항복(삼전도의 굴욕)한 뒤에야 가까스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직후 청나라는 병자호란에서 선봉으로 활약한 마부대를 보내어 인조의 항복을 받은 자리에 자신들의 승리를 기록한 비석을 세우도록 요구하였기에, 당시 경기도 광주부 중대면 송파리,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자리인 삼전도(三田渡)에 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인조부터가 자신의 굴욕이 쓰인 비석을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비석을 세우는 일을 보류했다가 '크게 손해보지 않고 생색은 많이 낼 수 있으니 해버리자'는 김류의 청원에 마지못해 사업이 재개되기도 했다.[A] 이로써 그해 8월 16일(음력 6/26)부터 홍타이지가 인조의 항복을 받은 단을 개조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홍수가 나면 침수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 당시보다 오히려 더 높고 크게 만들어야 했다.[B] 이후 공사가 꾸준히 진척되어 12월 18일(음력 11/3)에는 기초가 완성되었고, 그 위에 정문과 담장까지 세웠다. 이제 비석과 비각만 만들면 되었다.[C]

청나라 측에서도 이 비석을 세우는 데 상당한 관심을 보여서, 이듬해 1월 8일(음력 11/24)에는 책봉사로 온 용골대 마부대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기도 했다. 다음날 인조가 청나라 사신들을 접견하는 과정에서 사신들이 담장과 귀부(비석의 거북이 모양 받침)에 대해 언급한 것이 확인되는데, 이 대목의 기록이 소실되는 바람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크기나 형태를 문제삼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미 만든 귀부는 버리고 더 큰 귀부를 새로 만들어 쓰게 되었고, 이때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귀부가 지금도 삼전도비 곁에 나란히 있다.[4]

문제는 비문 내용이었다. 자랑스러운 승전비도 아니고 굴욕적인 항복 내용이 담긴 비석이었기에 조선에서는 아무도 비문을 쓰려 하지 않았고,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만 지났다. 이에 조선 측은 청나라에서 비문 내용을 내려줄 것을 은근히 원했지만, 청나라 사신은 단호히 자기 황제가 조선에서 (자신의 귀국 전까지) 작문시켜 그걸 직접 보고 개찬하고 싶음을 명했다며 거절했다.
사신: 비문은 우리들이 돌아가기 전에 지어서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들이 비록 문자를 알지 못하나 다른 사람에게 해석하게 하면 글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조: 비문은 당초 대국에서 지어 보내 주겠다는 영(令)이 있었으므로 이번에 대인이 올 때 반드시 가져오리라 생각하였는데, 뜻밖에 지금 이렇게 지어 보여 달라는 명이 있으니, 이것은 소국이 감당하여 할 바가 아니오.

사신: 비록 그렇기는 합니다만 지어서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인조: 대국에서 지어 보내겠다는 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방(小邦)의 사람 중에는 찬술할 만한 문장이 훌륭한 인재가 전혀 없으니, 반드시 대국에서 지어 보낸 뒤에야 될 수 있을 것이오.

사신: 이것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고, 실은 황제의 교령(敎令)입니다. 오직 귀국이 지어서 우리들의 이번 행차 편에 부쳐서 황제께서 보시게 하기를 바라니, 전에 하던 대로 개찬하는 것은 황제께 달린 일입니다.

인조: 이것은 심상한 비문이 아니고 황제의 덕을 찬송하여 천년토록 전할 것인데, 우리나라의 문사(文詞)가 졸렬하여 찬술할 수 없소. 어렵게 여겨 주저하는 것은 이 때문이오. 그러나 이렇게까지 수고스러이 말씀하시니 감히 어기지 못하겠소. 대신에게 물어서 문예에 조금 장기가 있는 자를 택하여 지어 보도록 하겠소.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음력 11월 25일

결국 조선에서 비문 내용을 적어보내야 했다. 조정에서 급히 물망에 오른 사람은 장유 · 이경전 · 조희일 · 이경석의 네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문의 크나큰 굴욕이 될게 뻔한 데다가 개인적으로도 좋다고 나설 일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삼전도비의 비문 내용을 지어 올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장유 · 이경석 · 이경전은 '임금님 저는 글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부터 시작해 온갖 핑계를 대며 못 쓴다고 상소를 올렸고, 조희일은 일부러 채택되지 않도록 거칠게 글을 써서 내는 등 그야말로 비문의 작성자가 되지 않기 위한 당시 선비들의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나마 장유와 이경석이 글을 써서 낸 덕분에 간신히 청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날짜에 맞춰 글을 보낼 수 있었다.[D]

이로써 어찌어찌 조선에서 보낸 글을 받아본 청나라 대학사 범문정[6]은 장유의 글에 '견양(牽羊)'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춘추시대 정나라 양공이 초나라 장왕에게 항복한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후끼리 서로 침략한 고사이므로 인용하는 것이 온당치 않고, 이경석의 글은 쓸 만하지만[7] 내용이 소략하므로 적어준 내용을 추가하라고 회답했다. 흥미롭게도 이 당시 범문정이 적어준 당안 원본이 대만에서 발견되었는데, 실제로 거의 전부 삼전도비문에 반영되어 있다.[전문] 이에 인조는 이경석을 불러다가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E]
저들이 이 글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고자 하니, 이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구천이 회계에서 신첩 노릇을 하다가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적을 이루었으니(와신상담), 다른 날 힘을 기르는 것은 오직 나의 할 일이다. 오늘 할 일은 단지 문자로만 저들의 마음에 들게 지어서, 사태가 악화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난후시사

사실 비문에 적힌 전반적인 내용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시기에 오간 국서(國書)에 이미 있었던 내용들이며, 여기에 범문정의 문안까지 반영하여 짜깁기한 것에 가깝다고 한다.
특히 인조 15년(1637년) 정축년 1월2일 청 진영에서 조선에 보낸 청의 1차 국서와 그 다음날 조선측이 이에 답한 조선의 1차 국서 가운데 삼전도 비문의 기본 구성과 표현들이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필자만의 생각일까? 논문 표절기를 돌린다면 비문의 국서 표절률은 50% 이상 나올 게 틀림없다. 범문정의 메모까지 겹치기 표절 검사를 한다면 표절률은 그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경석이 쓴 비문은 청나라에 아부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창작품이 아니라 국가의 위기 앞에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짜깁기한 영혼 없는 시험답안지가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경석은 범문정이 써 준 글을 완전히 베끼지는 않았으며 그 나름대로의 소심한 저항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시각이 있다.
한편 범문정은 조선이 병자년 3월에 지방 관리에게 신칙(申飭)한 절화교서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이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음을 강조하였지만, 이경석은 ‘우리나라에서 변신(邊臣)에게 신칙(申飭)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다’고만 적었다고 한다. 또한 그(서울시립대 배우성 교수)는 이경석이 범문정의 문건에는 보이지 않는, ‘인조가 종사를 보존하고 백성을 보전하기 위해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대명의리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주화파의 주장을 삼전도비문에 넣어 나름대로 조선측 입장을 반영하였다고 주장한다.

서울대 구범진 교수는 2020년 3월 발표한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논문에서 청태종의 최후통첩 여부와 그 기만성을 추적하여 청의 ‘의로운 전쟁 서사 만들기’의 실상을 폭로한 바 있었다. 이 논문에서 구범진 교수는 범문정의 메모 가운데 청태종의 최후통첩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삼전도 비문의 비밀(?) 하나를 파헤치는 성과를 올렸다. 그가 언급한 청태종의 최후통첩 관련 범문정의 메모는 다음과 같다.

  • (황제께서는) 우리 조선이 화호(和好)를 깼음을 밝히 알고도 오히려 호생(好生)의 마음으로 그 죄를 밝히 헤아리시면서 모년 모월 모일(某年月日)에 가서 정토(征討)한다는 기밀을 (알려 주시고), 정토의 시비(是非)를 우리에게 명명백백하게 가르쳐 주시기를 마치 하늘이 재이(災異)로써 사람에게 보여주듯,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듯, 마치 형이 동생을 가르치듯 하시었다. 만약 정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불의(不意)에 (군사를) 내시고 그 방비 없을 때 공격하셨으리니, 어찌 기꺼이 밝게 우리에게 가르쳐주셨겠는가? (그런데도) 국왕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 까닭에 황제께서 대병(大兵)을 몸소 이끌고 우리 조선을 정토(征討)하시었다.

그에 따르면 이경석은 상기 범문정의 메모를 비문에 옮기면서 청태종의 최후통첩 언급과 기습공격에 대한 변명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저항한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이경석은 구체적인 최후통첩일을 암시하는 ‘모년모월모일’을 ‘사기(師期:군사를 일으키는 때)’라는 애매한 말로 바꿔 쓰고, ‘만약 정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불의(不意)에 (군사를) 내시고 그 방비 없을 때 공격하셨으리니, 어찌 기꺼이 밝게 우리에게 가르쳐주셨겠는가?’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이경석은 청태종의 ‘새빨간 거짓말’을 은연중 폭로하였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결국 이경석이 비문을 고쳐 쓰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심적으로 큰 고통을 겪어서 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구나'[10]라는 시를 지어서 한탄하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어렵사리 만들어진 비문은 다시 6월에 청나라로 들어가는 사신 편에 보내져서, 그해 7월에 청나라 측의 승인을 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F] 그러나 삼전도비문을 쓴 것은 이경석에게 평생토록 마음의 짐으로 따라다녔고, 말년에는 이 건으로 12살 어린 송시열에게 수이강 사건으로 모욕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에서 비석을 더 크게 만들라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주문했기에, 그해 9월 23일(음력 8/16)에는 충주로 석공들을 보내 돌을 캐는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충주에서 캐낸 비석을 한강으로 삼전도까지 실어와야 하는데, 돌이 워낙 큰 데다 장맛비가 내리지 않아 그만한 크기의 배가 충주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비석은 겨우내 충주에 방치되었다가 다시 이듬해 1639년(인조 17) 봄이 되어서야 간신히 삼전도까지 실어올 수 있었다. 또한 이 비석을 강가에서 비각까지 끌고 오는 데 다시 4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만큼 이 비석은 당시 조선에서 유례가 없던 크기였다.[G]

2.1.2. 굴욕의 상징이 세워지다[편집]

1639년 7월 25일(음력 6/25)에 청나라 사신 마부대가 다시 한양에 들어왔다. 마부대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삼전도비부터 찾아서, 조선 조정에서도 다시 작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문과 비석이 모두 준비되었으니 남은 건 글꼴을 갖추어 새기는 일이었는데, 당초 비문 상단의 전액(전서체로 쓴 제목)은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본문은 영접사를 맡은 오준(吳竣)이 쓰도록 하였으나, 다음날 바로 신익성이 '오른팔이 마비되어 붓을 못 든다'는 상소를 올려버렸다. 결국 제액은 신익성 대신 예조참판 여이징(呂爾徵)이 쓰게 되었고, 7월 27일(음력 6/27) 밤을 새워가면서 간신히 완성을 볼 수 있었다.[H]
비문을 지을 자와 베낄 자 등을 일체 전교에 써넣은 대로 즉시 비석을 세울 곳에 내보내어 이대로 쓰고 즉시 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칙사가 역관 등으로 하여금 새기는 일을 신에게 독촉하도록 하고 말하기를, '반드시 떠나기 전에 새기고 인출한 다음 세워야 하며, 세우는 날에는 국왕도 나가고 우리들도 가서 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석면을 나누어 3등분하니 쓸 곳이 지극히 좁아져서 각수(刻手)가 그 돌에 많이 오를 수 없고 불과 두세 사람이 작업을 하므로 이 때문에 새기는 공사가 더욱 늦어져서 적어도 20여 일은 걸릴 것이다. 또 이처럼 무거운 돌은 매번 세웠다 눕혔다 할 수가 없으므로 청나라 글자와 몽골 글자를 다 새긴 뒤에야 세울 수 있다'고 하였더니 비록 귀담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재촉해서 서둘러 하라고만 명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7년 기묘(1639), 음력 6월 28일

여기에 새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최초에는 비석 앞면을 삼등분해서 만주글자 · 몽골글자 · 한문으로 나누어 쓸 예정이었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 작게 새기다 보니 작업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마부대는 기어이 세우는 꼴을 보고 떠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조선 조정에서는 석공이 하루에 몇 자씩, 몇 사람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는지까지 파악해서 관리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마부대가 조선 측 하소연을 받아들여 '늦더라도 제대로 새기라'는 요지로 귀국길에 올랐고, 마부대가 떠난 지 22일 만인 8월 26일(음력 7/28)에 드디어 작업이 일단락되어 서둘러 탁본을 마부대에게 보냈다.[I]

그런데 연말이 되자, 다시 조선에 들어온 청 사신단이 갑자기 앞면에는 만주글자 · 몽골글자만 새기고, 한문은 뒷면에 새기는 것으로 체제를 바꿔버렸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 독촉해서 공사를 강행한 것이 말짱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형조참판 오준이 다시 한 번 삼전도로 가서 뒷면에 가득 들어가는 크기로 글씨를 썼고, 오준이 현장을 감독하는 가운데 12월 24일(음력 11/20) 저녁부터 스물세 명의 석공들이 밤낮으로 글자를 새겨서 청 사신이 도착하는 28일 오후에 간신히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J]

이제 남은 건 한문으로 된 비문을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번역하여 새기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를 구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누르하치가 마부대와 함께 차바하이(cabahai), 이서봉(李棲鳳), 비릭투(biliktu)등 박시(baksi)[16] 세 사람을 보내 삼전도비의 비문을 확인하고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번역하게 했다. 이들은 12월 28일(음력 11/24)에 한양에 도착하였고, 그 다음날부터 삼전도를 오가며 비문을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해 사흘 만에 번역이 모두 완료되었다.[K]
이에 앞서 상(上)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조선을 정벌하시어, 국왕 이종(李倧, 인조)을 남한산성에서 포위하고 그 처자를 사로잡으니, 군민의 위험이 박두하여 국세가 거의 망하였다. 이종이 비로소 남한산성을 나와서 군문에 이르러 복종하니, 상께서 특별히 동정하여 용서하고는 왕을 나라로 돌려보내고, 그 처자는 귀가시키고 그 국토는 회복시키고 그 인민은 안정시키고, 이종에게 왕작(王爵)을 봉한 것이 예전과 같았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왕이 상의 공덕을 반포하여 삼전도 지방에 비를 세워 만세토록 전하여 보이고자 하니, 그 일을 주문(奏聞)하였다. 상께서 내원관(內院官) 차바하이(查布海), 이서봉(李棲鳳), 비릭투(畢禮克圖)와 함께 호부승정 마푸타(馬福塔 마부대), 예부참정 초거르(超哈爾), 형부참정 종실 오다하이(吳達海) 등을 보내서 살피게 하였다.

청태종실록 숭덕 4년(1639) 음력 11월 6일

그렇게 해를 넘긴 1640년 1월 1일(음력 11/28)부터 비석 앞면에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사이에도 청 사신은 수시로 공사 현장을 확인하면서 비가 완성된 뒤에 떠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비문의 제목에 해당하는 큰 글자에는 금을 씌우고 다른 글자에는 붉은색을 입힐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1월 8일(음력 12/5)에 세 글자로 각각 "숭덕 4년 12월 8일 세우다"라는 글씨를 새기면서 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완료되었고, 1월 10일(음력 12/7)에는 청나라 사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글자에 색을 입히고 비석을 세우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완공을 본 사신단은 다음날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L]

끝으로 4월 1일(음력 2/11)까지 비석에 비각을 씌우는 공사가 완료되면서, 삼전도비를 세우는 모든 공사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이후 삼전도비와 그 비각은 경기감영에서 맡아 관리하면서, 죄 지은 자 3~4인을 배정하여 지키도록 했다.[M] 이로써 삼전도의 굴욕에서 장장 3년 2개월이 걸린 모든 공정이 끝났다. 홍타이지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거대한 비석이 들어서서 조선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영원히 상기하도록 만든 것이다.

2.1.3. 청 사신의 필수 방문 코스[편집]

비석을 세운 직후부터 이미 삼전도비에 대한 수난설이 돌고 있었고, 청국은 또 이것을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빌미로 써먹었다. 비석을 세운 바로 그해 7월 5일(음력 5/21)에 용골대 정명수를 시켜 소현세자에게 '삼전도에 세운 비석을 부수었다는 말도 있던데, 조선이 군사 원조를 일부러 지체하고 있는 것 아니냐'[20]는 식으로 압력을 넣기도 했다. 연말에 새로 들어온 청 사신이 삼전도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면서 일단 의심은 풀리게 되었지만, 그 뒤로도 청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삼전도비를 찾아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반복했다.[N]

이러한 청 사신들의 지속적인 확인은 1643년(인조 21)이 되어서야 중단되었으나, 그 뒤에도 사신들은 비정기적으로 종종 삼전도비를 찾았다. 그러다 숙종 시기부터는 다시 청 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찾는 필수코스가 되었고, 사신들은 삼전도비를 보지 못하면 탁본이라도 챙겨서 돌아가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22] 물론 현장에서 사신을 대접하는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닌 데다가, 조선 조정도 근처에 있는 남한산성의 위치나 구조(엄연히 군사 기밀이다)가 노출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어찌되었든 외교적인 차원에서는 쏠쏠하게 잘 써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물론 중간에 위기도 있었는데, 1728년(영조 4)에 이인좌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삼전도비를 깨부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이 소문이 청나라로 흘러들어갈 것을 걱정하기도 했고, 게다가 하필이면 이 와중에 대홍수[23]까지 터지면서 삼전도비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물론 지금 보기에는 쌤통이지만, 이게 또 자칫하다 외교문제로 번질 수 있는지라 조선 조정에서는 서둘러 삼전도비 주변을 정비했고, 이듬해 5월에 청 사신이 왔을 때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O]
장붕익(張鵬翼)[25]이 아뢰기를

"지난 변란(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언비어가 퍼져 삼전도비를 깨부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과 병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각각 장교를 보내 나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헛소문이었고 조금도 손상된 부분이 없었습니다. 다만 일종의 요사하고 간악한 무리가 지어낸 망측한 말이 청나라로 흘러들어가, 저들이 혹 그 헛소문을 믿어 칙사라도 나온다면 그때를 틈타 불순한 무리가 예상치도 못하게 튀어나와 변을 일으킬 우려가 있을 듯합니다. 우환을 방비하는 도리에서 만일의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 비각을 보니, 담장도 높지 않고 문빗장도 허술하였습니다. 응당 즉시 병조 판서에게 분부하여 수직하는 사람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다시 담장을 높게 쌓고 문빗장도 쇠로 얽어 두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청나라 사람이 혹시 와서 문과 담장을 개축한 일에 대해 물으면 실상대로 대답한다고 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뜻으로 병조에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음력 7월 16일
1735년(영조 11)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으니, 바로 비문에 써 있는 강홍립의 이름이었다. 새로 즉위한 건륭제의 이름이 훙리(弘歷)로 홍립(弘立)과 글자와 소리가 같아 피휘 문제가 걸릴 우려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강홍립의 이름은 졸지에 강황래(姜黃來)로 개조되었다.[26] 이런 일도 있고, 이 즈음에 들어서 청 사신이 삼전도비를 찾을 때마다 백성들에게 상당한 민폐가 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1737년(영조 13년)부터는 청 사신이 비각을 직접 찾지 않고 탁본만 받아가는 것을 상례로 삼게 되었다. 이로부터 삼전도비에는 청 사신의 발길이 끊기게 된다.[P]
 
1741년, 겸재 정선의 그림. 오른쪽에 삼전도비각이 보인다.

2.2. 수난과 오욕[편집]

2.2.1. 고종이 엎고 일제가 세우고[편집]

이후로도 청국은 남송 포지션이었던 남명을 멸망시키고 중국대륙 전역을 기반으로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기에, 조선에서는 삼전도비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계기로 사태가 뒤집어진다. 1895년(고종 32) 2월에 일본 육군이 랴오둥 반도를 장악하고 청나라 북양함대가 웨이하이에서 궤멸되면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조선도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고종은 사대관계를 상징하는 영은문과 함께 삼전도비각을 무너뜨리고, 비석은 귀부에서 뽑아서 엎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귀부의 오른쪽 일부도 파손되었는데, 이 일을 전하는 매천야록의 일화가 재미있다.[Q]
김가진 김상용의 후예인데, 어깨를 들썩이면서 말하였다.
"이제 누조(累朝) 동안 피폐(皮弊)하던 치욕을 씻고, 신자(臣子)의 사사로운 원수를 갚았으니, 개화가 얼마나 좋습니까?”

매천야록 고종 32년 을미(1895)
 
1916년 방치되어 있는 삼전도비의 모습

이로부터 20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삼전도비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1913년부터 한반도 각지의 고적을 파악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1916년 7월 4일에 이르러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을 제정하고 고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문화재의 조사 · 보존 활동에 착수했는데, 이때 삼전도비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의 조사 · 보존 대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R]

이에 따라 8월 30일에 고적조사위원회는 삼전도비를 다시 세우고 목책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통제할 것을 의결하였고, 9월 15일에는 예산이 책정되어 토목국 영선과 기수 이지마 겐노스케(飯島源之助)가 현장 조사에 착수하였다. 위에 있는 1916년도 사진은 바로 이 과정에서 촬영된 것이다. 이후 구체적인 공사 과정에 대한 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지만, 다이쇼 5년(1916) 12월 제출된 조사 보고서에 지반을 지적하는 대목이 있고, 조선총독부의 고적 및 유물 등록대장에 '다이쇼 6년(1917) 9월 고쳐 세웠다'는 부기가 있어 이 사이에 기초를 새로 다지고 비를 세우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S]
 
 
조선총독부 고적 및 유물 등록대장
조선고적도보 13권 1938쪽의 사진

조선총독부의 이런 조치가 효과가 있었는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 전역이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유독 삼전도비는 끄떡없이 남아 있었다. 위 사진에서 갑자기 주위에 있던 집들이 사라지고 허허벌판이 된 것은 바로 홍수 때문. 이후로도 고적 및 유물 제11호로 관리되던 삼전도비는 1933년 8월에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이 제정되면서 새로운 번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조선보물고적보존회는 1934년 5월 1일에 삼전도비를 보물로 지정할 것을 의결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삼전도비는 바로 번호를 받지 못하고 이듬해 4월 24일이 되어서야 보물 제164호로 추가지정되었다.[T]

2.2.2. 땅에 묻히고 물에 빠지고[편집]

이렇게 보존된 삼전도비는 6.25 전쟁의 난장판 속에서도 어찌어찌 살아남아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 1955년 대한민국 정부가 일제강점기 지정한 보물을 일괄 국보로 격상[32]하면서 자연스럽게 국보 제164호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삼전도비가 김장흥 치안국장의 눈에 띄게 된 것으로, 그의 건의에 따라 이승만 정부는 그해 11월 4일에 개최된 국보고적 명승천연기념물 보존회 제2차 총회에서 삼전도비의 국보 지정을 해제하고, 이듬해 1월 5일에는 비신을 다시 뽑아서 땅 속에 묻어버렸다. 대신 그 남은 자리가 고적 제147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지(址)'로 새롭게 지정되었다.[U]

하지만 기껏 묻어놓은 삼전도비는 이로부터 고작 5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당시 삼전도비의 위치가 송파강 바로 옆이기 때문이었는데, 강물에 의한 침식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땅 속에 있던 비석이 도로 지표면에 노출된 것이었다. 거기다가 비석이 다 드러나고도 계속 침식이 진행되어서 급기야 비석과 귀부가 물에 잠길 지경에 이르자, 막 정권을 인수한 장면 내각에서는 삼전도비의 비석과 귀부를 건져내어 애초부터 물에 잠길 걱정이 없도록 본래 위치에서 700m 남쪽에 있는 석촌동으로 가져가 세워놓았다.
삼전도의 유명한 청태종기공비의 비신은 비문이 치욕적이라 해서 1958년 봄에 부근 지하 7척 깊이에 매몰하였던 것인데, 그 후 홍수에 의한 하안유실로 인해 비신 · 귀부가 모두 수중으로 전락하였으며 이대로 두면 강바닥에 매몰되어버릴 위험이 뚜렷하므로 문교부에서는 시급히 이를 인양하여 석촌리의 고지에 이건할 계획이다. 그런데 비신의 무게만 약 15톤, 귀부의 무게가 25톤이나 되고 현위치의 지반이 매우 약하고 함몰되기 쉽기 때문에 그 공사는 여러 가지로 난공사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한국미술사학회, 「고고미술 뉴스」, 『고고미술』 제1권 제1호, 1960년 8월
1945년 해방후 민족적 수치라 하여 또 다시 파묻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뒤 장맛비로 인하여 흙이 흘러내려가는 바람에 비신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으로 강 언덕 비탈에 비스듬히 자빠져 있던 것을 근자에 다시 일으켜 세워서 보관하고 있다고 들었다. 필자가 연전에 사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탁본차 갔을 때는 강 언덕 비탈에 비신이 비스듬히 누워져 있어 혹시 큰물이라도 나서 밑의 흙이 파여져나가면 강 속으로 굴러떨어져 들어가지나 않을까 하고 안타깝게 여긴 바 있었는데 그 후 다시 건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였던 것이다.

김성균, 「삼전도비 수립시말」, 『향토서울』 제12호, 1961년 11월
어찌되었든 비석을 다시 세웠으므로 1962년 12월에는 문화재의 이름도 다시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로 복구되었지만, 일찍이 박탈된 국보 지정은 되찾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삼전도비는 국보에서 사적으로 격하되었다. 곧이어 문화재보호법이 발효되면서, 삼전도비의 지정번호는 1963년 1월 21일을 기해 사적 제101호로 재분류되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W] 국민정서도 있고 하니 삼전도비가 국보로 돌아갈 일은 없어 보인다.
 
1975년, 석촌동에 다시 세워진 삼전도비의 사진

2.2.3. 치욕적 역사의 교육장으로[편집]

이후 논 가운데 처박힌 채 근근이 이어지던[35] 삼전도비의 운명은 1981년 4월 26일을 변곡점으로 또 한번 가파르게 바뀌게 된다. 1980년 9월에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이 이날 남한산성을 시찰하는 과정에서 굴욕의 역사를 잊으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지시한 것 때문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 입장에서 공덕비라는 명칭이 곤란하다"는 서울시 지방문화재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문화재 지정명칭도 종래의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에서 오늘날과 같은 '삼전도비'로 변경되었다.[X]
전 대통령은 먼저 남한산성 관리사무소에 들러 관리소장으로부터 현황을 브리핑 받고, 성곽 복원보전 상태를 살펴보고 수어장대까지 도보로 올랐다. 전 대통령은 수어장대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점심을 들며 "역사적 사실과 유적은 영광스러운 것이든 굴욕적인 것이든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은 영광스러운 사적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얻고, 굴욕적인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유적은 어떤 것이든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 대통령은 병자호란 때 인조대왕이 청장(淸將)에게 항복했던 장소인 삼전도를 훌륭하게 복원할 것을 관계관에게 지시했다.

경향신문, "유적원형 잘 보존하도록… 전 대통령 남한산성 시찰", 1981년 4월 27일

전두환의 지시에 대해 문교부에서는 삼전도비는 그대로 두고 남한산성에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관(現 남한산성 역사관)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타이밍 좋게도 그해 9월 30일에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결정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서울 잠실지구 개발이 격화되면서 삼전도비 주변 정비 사업도 덩달아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도시계획사업의 일환으로 7천만 원을 투입하여 삼전도비 일대 500평 규모의 사적공원 조성을 추진하였고, 이때 삼전도비 곁에는 삼전도의 굴욕을 묘사한 동판 부조가 설치되었다. 이 사업은 1982년 말에 착공하여 이듬해 5월에는 민간에 개방되었다.[Y]
 
공원으로 조성된 삼전도비 일대
문제는 이 동판 부조를 서울시립대 산업미술과 김창희 교수가 맡았는데, 역사에 문외한이다 보니 삼전도의 굴욕 당시 인조의 모습을 철릭 익선관이라는 기괴한 조합으로 그리는 재현 오류를 저지르고 말았다.[38] 분명히 당시 김창희 교수의 말을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에는 "인조가 임금의 옷도 입지 못한 채 다른 신하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라고 되어 있어서 역사적 정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신하들이 사모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보이듯 이 지식을 순수하게 옷에만 적용하고 관모에는 적용하지 않아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 1980년대의 열악한 재현 실태를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동판은 당초의 목적과 달리 인터넷에서 혐한 세력에게 이용되면서 조선의 열등함을 조롱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동판을 조선시대 당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착각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 동판은 2010년에 삼전도비가 석촌호수로 이전되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철거되었다.

2.3. 2000년대 이후의 근황[편집]

찾아가기도 어렵고 잘 보이지도 않는 비석 위치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엄창섭(嚴昌燮) 송파구 문화재위원은 "원래 위치인 석촌호 주변(옛 송파나루터)으로 옮겨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 게다가 석촌호 주변이 삼전도비의 원래 위치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17일 삼전도비 앞에서 한 시민은 "와서 보니 기분이 씁쓸하군요. 굳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세워 놓을 필요까지 있는지…"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이광표의 메트로스케치] 최남선 古宅과 석촌동 '삼전도비'", 2003년 1월 17일

시간이 흐르면서 삼전도비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한 의미가 점차 퇴색하였고, 비석 자체가 역사적 치욕의 상징인지라 2003년부터 송파구의회에서는 지속적으로 문화재청에 삼전도비의 위치 이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파구 내에서는 부지 확보가 어려워 이전이 불가능하고, 다른 곳으로 보내자니 반기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남은 방법은 삼전도비가 원래 있던 위치를 다시 찾아가는 것인데, 그 자리는 위에서 본 것처럼 1960년대에 물 속으로 잠겨버린 상태였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에서는 송파구의회의 삼전도비 이전 요청을 2003년 8월과 2005년 6월에 두 차례 기각했다가, 송파구에서 아예 삼전도비 이전계획까지 세워서 들이밀자 그제서야 삼전도비의 원래 위치를 고증하는 학술적 연구용역을 실시해서 가져오도록 송파구에 회신했다. 그러나 정작 송파구에서는 돈을 들여서까지 학술적 연구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는지,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1년 반이 넘도록 묵혀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애물단지가 되어 관리가 허술해진 와중에 기어이 사달이 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삼전도비 스프레이 훼손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3. 돌고 돌아 고향으로 돌아오다[편집]

기어이 이 사달이 난 뒤에야 송파구에서는 부랴부랴 삼전도비의 원래 위치를 고증하는 학술용역을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서울학연구소에 의뢰하였고, 배우성 교수의 주도로 이루어진 연구 끝에 비석의 정확한 원래 자리가 석촌호수 서호 동북쪽 구석(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동쪽)으로 고증되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1960년대에 송파강 전체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과거 송파마을이 있던 지역 전체를 삼켜버린 것이다.

연구 결과를 접수한 송파구청에서는 2008년 3월에 용역연구 결과와 함께 추가적인 훼손 우려와 주민들의 여론까지 들어가며 문화재청을 설득했고, 앞서 삼전도비 훼손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상황인지라 문화재청에서도 현지조사를 거쳐서 4월 18일 삼전도비의 이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 보존 작업, 보호각 설치와 공원화 작업 등을 병행한 끝에 삼전도비는 2010년 3월 19일에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공원 서호 언덕으로 이전되었고, 4월 25일에는 모든 공사를 마치고 민간에 개방되었다.
 
 
삼전도비의 본래 위치(원)와 현위치(네모)
현재

2011년 7월 28일에는 사적의 지정명칭에 대해 일관된 지침을 적용하면서 지역명칭이 붙은 '서울 삼전도비'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어서 문화재행정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사적 가치 재평가 심의'에 회부되었는데, 사적의 지정요건인 면적 개념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으나 그렇다고 국보나 보물로 변경하기에는 국민정서상 문제가 있고, 지방자치단체의 유형문화재로 격하하자니 좋든 싫든 과거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상징하는 유물로 역사적 가치는 상당하기 때문에 결국 사적의 지위를 유지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실제로 삼전도비는 2018년 기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사실상 유일한 비석이다.[39]

삼전도비는 석촌호수 보행자 산책로와 도로 바로 옆에 있으며, 롯데월드  롯데월드타워에서도 바로 옆이라 해도 무방한 위치에 있다. 매일 수많은 인파가 이 비석에서 멀지 않은 지점을 지나가지만, 정작 비석은 묘하게 오르막과 나무로 살짝 숨겨진 듯한 위치에 있어 비석 근처는 썰렁하다. 한국인들에게 좋지 않은 역사적 함의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안내판도 그리 눈에 띄게는 만들어 놓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40], 찾아가는 길도 중요성이나 주변의 잠실 지역의 개발 상태에 비해서는 잘 닦여 있지 않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거의 볼 일이 없는 절묘한 자리에 사실상 위리안치된 셈이다.

인조와 관련된 사적(장릉 등)이 별점테러를 당하고 있어서 카카오맵 별점이 2.7점이다.

3. 내용[편집]

 

4. 참고 자료[편집]

  • 배우성, 「서울에 온 청의 칙사 馬夫大와 삼전도비」, 『서울학연구』 제38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0년 2월, 235~271쪽.
  •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 사적편(上)』,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5년 12월 30일, 318~319쪽.
  • 문화재청, 「서울 삼전도비 보호각 교체(안) 검토」, 『2015년도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제5차 회의록』, 문화재청, 2015년 5월 18일, 79~82쪽.
  • 노형석, "삼전도비여, 이제 푹 쉬시라 : 문헌사료 고증 결과에 따라 원래 자리 찾아…", <한겨레 21>, 2008년 6월 5일. #

5. 외부 링크[편집]

6. 사적 제101호[편집]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 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만주글자, 오른쪽에는 몽골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2010년 3월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위치하던 비석을 고증을 통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삼전도비 → 서울 삼전도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