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우암 송시열 신도비 (御製 尤庵 宋時烈 神道碑) 이 비는 1779년(정조 3년) 충청북도 괴산에 건립된 송시열비(宋時烈碑)로 당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직접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당나라의 명필인 안진경(安眞卿)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송시열(1607년~1689년)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주자학의 대가로 노론의 영수였다. 숙종 15년에 장희빈의 아들(후일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다가 사약을 받았다. 처음에 수원의 무봉산에 장사 지냈다가, 1757년(영조 33)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로 이장하였다. [해설] 유명조선국 좌의정 우암 송선생 지묘 공은 명나라 만력(萬曆) 정미 1607년(선조 40)에 태어나 기사 1689년(숙종 15)에 말명(末命 : 사약을 받음)을 받았으니 이 때는 숭정기원 후 62년이다. 우리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네 임금을 섬겨 관직은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니 학자들은 우암선생(尤菴先生)이라고 칭하였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후에 또 효종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되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유가(儒家)의 학문을 체득하여 성명(性命)의 심오한 이치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안팎으로 수양이 쌓였고 일동일정에 빈틈이 없었다. 그 공부를 함에는 오랫동안 쌓아나가 매우 익숙하게 하니 그 효과를 거두는 것이 매우 확고하고 정밀하였다. 또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대한 뜻이 매우 간절하여 올바른 도리를 밝히고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아! 이 때는 곧 성하(城下)의 치욕(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의 항복)을 당해서 우리 효종대왕은 자나 깨나 영웅호걸의 기상으로 분발하여 그 치욕을 씻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공을 조정에 나가게 하여 유악(帷幄 : 측근)에 두고 아래로 맡긴 책임에 힘쓰게 하였으니 그 기밀과 큰 계획은 두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
공도 또한 명을 받고는 조심하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의리에 힘쓸 것을 기약하였는데
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시어 성스러운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아! 이른바 “하늘이 실로 한 일이니 어찌하란 말인가?”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공의 묘에는 공이 남긴 뜻에 따라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91년 후인 기해 1779년(정조 3)에 조정의 신하가 과인(寡人)에게 아뢰기를,
“옛날 제왕(帝王)들은 공로가 있는 옛 신하를 기려서 친히 비석 머리의 전자(篆字)를 하였습니다.
하물며 선현의 무덤에 대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에 공의 비면(碑面)에 글씨를 쓰고 글을 지어 공의 사적을 서술하니
아! 이른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광세지감(曠世之感 : 세월이 오래 지나간 감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공의 이름은 시열(時烈)이고, 은진송씨(恩津宋氏)이며, 젊어서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김장생의 학문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에 명(銘)하노니, 이곳이 바로 문정공의 산소이니 후세 사람들은 공경할지어다.
하교를 받들어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숭정기원 후 세 번째 기해년(정조 3, 1779) 월 일
[原文]
有明朝鮮國 左議政 尤庵 宋先生 之墓」
公生于 大朙萬曆丁未獲末 命于 肅祖己巳是 崇禎紀元之六十有」二秊也事我 仁祖 孝宗 顯宗 肅宗四朝官至議政府左議政謚文正學者」稱尤菴先生腏食 文廟後又追配 孝宗室廟庭公夙契儒者之學凡於性命藴」奧靡不潜究力賾外内交修動靜無間其用工也積累純熟其收效也剛毅精密又」惓惓於春秋大儀以朙理正倫尊華攘夷爲己任嗚呼時則丁城下之羞惟我 孝」宗大王寤寐英豪奮發有刷耻之念進公于朝廷寘帷幄 俯勤仔肩之託密勿訏」謨外人莫有得以知之者公亦受 命屛營期效盡瘁之義而 仙馭遽昇 聖志」未伸嗚呼所謂天實爲之謂之何㢤者非歟公墓以公遺意封前不立石後九十一」秊己亥廷臣有言于寡人曰古帝王尙於勲舊躬爲之篆首况先賢之隧乎予乃書」公碑面著爲文叙公之蹟嗚呼是謂有時存焉者乎又可謂有曠世之感也歟公名」時烈系出恩津之宋少師文元公金長生長生之學自於文成公李珥云銘曰」
是惟文正之宅後之人其可式」奉 教集唐顔眞郷字」
崇禎紀元後三己亥 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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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4호, 경기 여주시 여주읍 |
여주 대로사(驪州 大老祠) 송시열이 여주에 머물 때마다 이 곳에서 영릉(寧陵-효종릉)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또 후진들에게 북벌 대의를 주장하였다는 말을 정조가 1785년 영릉에 행차하다가 전해 듣고 수행한 김양행에게 이 사우를 세우게 하였고 또 친히 대로사비(大老祠碑)라는 비문을 지었다. 정조가 대로(大老)라 사액(賜額)을 내리고 몸소 제문을 지어 근시(近侍)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우암선생이 명실상부 세간에서 존경 받는 어진 노인 즉 ‘조선의 대로’로 추앙해서 그해(1785년)에 대로사(大老祠)로 사액을 받았다. 사묘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효종의 영릉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사우에 대한 훼철을 단행할 때 전국을 송시열을 제향하던 서원 및 사우가 70여개소가 되었고 사액서원, 사우(祠宇)만 해도 37개소였다. 그러나 서원 훼철 시 독향 서원인 대로사만은 강한사(江漢祠)로 개칭하여 남게 되었다. 정조 때 사액 당시 대제학인 김종수가 쓴 대로사의 현판이 현재 사묘(祠廟) 안에 보관되어 있다. 1787년(정조 11)은 우암선생 탄신 3주갑(180년) 되는 날에 맞춰 기영(箕營;평양감영)에서 송자대전(宋子大全)이 간행되고 대로사 어필 비문, 대로사 사제문을 내림으로써 우암선생에 대한 정조의 마음을 전했다. 특히 비 앞면에는 대로사비(大老祠碑)라는 두전(頭篆)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정조의 어필(御筆)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위에는 전액(篆額)으로 어제어필(御製御筆)이라고 쓰여져 있고 그 아래에 대로사비명병서(大老祠碑銘竝書)라고 쓰여 있다. 비문 끝에 황명숭정기원후삼정미동십일월(皇明崇禎紀元後三丁未冬 十一月)이라는 기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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