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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農 金嘉鎭 先生談

한문역사 2025. 12. 22. 16:01

조선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표방한 상징 독립문의 〈독립문〉 글자를 쓴 사람은 누구일까....

2025. 5. 15.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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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진 초상

경기도박물관,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광복80-합合〉 3부작(김가진, 여운형, 오세창) 선보여

첫 번째 시리즈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로’ 김가진의 예술과 삶

 

 

[서울문화인]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관장 이동국)은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합合”을 모토로 독립(獨立)완성과 통일(統一)성취의 미래를 역사에서 찾는 3부작 특별전을 연중 개최한다. 3부작은 지난 4월 11일부터 선보이고 있는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4.11~6.29)을 시작으로 《여운형 : 남북통일의 길》(7.17~10.26), 《오세창 : 문화보국》(11.27~‘26.3.8)으로 마무리 한다.

 

그 첫 번째 시리즈의 주인공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1561-1637)의 11대 직손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약육강식의 혼란이 거듭되었던 시대에 개화선각자이자 혁신관료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로(國老:큰 어른)로 독립전쟁에 투신하였다.

 

동농 김가진 관복을 입은 모습

평상복 차림의 사진

동농 김가진 무관들과 함께

특히 김가진이 남긴 수많은 글과 글씨에는 척사(斥邪)와 개화(開化), 제국(帝國)과 민국(民國), 망국(亡國)과 건국(建國), 중국으로부터의 독립(獨立)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중 과제가 교차하는 시대 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한 고뇌와 실천이 녹아있다. 이러한 김가진의 유물과 정신은 충절혈맥과 동시대 인물들과의 대화는 물론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전해져 우리 모두의 과제인 남북통일 내일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김가진이 익숙하지 않다면 그가 남긴 글씨는 우리들 주변에 가까이 남아있다. 바로 청(淸)으로부터 조선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표방한 상징인 독립문의 〈독립문〉 석자와 함께 창덕궁 후원의 정자의 편액들이 그의 작품이다.

 

창덕궁 후원의 정자 편액 탁본

이번 《김가진 :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는 김가진의 시문(詩文)과 글씨, 사진, 그림을 중심으로 충절가문, 독립전쟁에 투신한 동시대와 후대 인물들의 작품 120여 점을 그물망처럼 엮었다. 이 중에서도 전시에서 주목하는 작품은 〈김가진초상화〉와 김가진이 쓴 〈독립문〉 〈獨立門〉 현판, 그리고 제2 독립선언서인 〈조선민족대동단선언〉이다.

 

〈김가진 초상화〉, 대한제국의 당당함 속에 깊게 드리운 망국(亡國) 근심

일본화가 덴카이(田慶)가 유화(油畫)로 그린 〈김가진 초상화〉(1905년, 동농문화재단 소장)은 조선왕조에서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수립을 꽃과 색, 훈장으로 주체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대한제국 칙임관 2등 대례복을 입고 있는 김가진의 초상화에는 금사(金絲)로 수놓은 활짝 핀 무궁화가 4개, 흰색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손과 흰색 장식털을 두른 대례모, 그리고 오른쪽 가슴에는 훈2등 팔괘장, 목 아래에는 훈3등 팔괘장을 패용했고, 왼쪽 가슴에는 황제망육순등극10주년기념장을 비롯해 3개의 기념장을 패용하고 있다.

 

실제 『고종실록』에도 김가진을 1901년 훈3등, 1905년에 훈2등에 서훈해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김가진이 초상화에 스스로 지은 시〉는 을사늑약 이후 망국(亡國)의 쓰나미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대한 깊은 근심이 드러나 있다.

 

대한제국 2등 칙임관 대례복을 입고 있는 김가진의 초상화에는 금사(金絲)로 수놓은 활짝 핀 무궁화가 4개, 흰색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손과 흰색 장식털을 두른 대례모, 그리고 오른쪽 가슴에는 훈2등 팔괘장, 목 아래에는 훈3등 팔괘장을 패용했고, 왼쪽 가슴에는 황제망육순등극10주년기념장을 비롯해 3개의 기념장을 패용하고 있다. 실제 『고종실록』에도 김가진을 1901년 훈3등, 1905년에 훈2등에 서훈해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김가진이 초상화에 스스로 지은 시〉

爾身挺立, 若無所求. 爾容太瘦 若有所憂.

滔天洪水, 疇與同舟. 江湖廊廟, 白髮滿頭.

光武 九年 南至日 六十叟 東農 題

우뚝 선 너의 몸, 바라는 게 없는 듯하나,

바짝 마른 너의 몸, 걱정 담긴 듯하구나.

하늘에 닿는 홍수의 소용돌이에서, 누구와 배를 함께 탈까.

재야와 정부에서 백발만 머리에 가득하구나.

- 광무 9년(1905) 동지에 육십 늙은이 동농

 

김가진이 박달나무 방망이 같은 필획으로 쓴 〈독립문〉, 〈獨立門〉

〈독립문〉, 〈獨立門〉은 청(淸)으로부터 조선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표방한 상징으로 김가진이 한글 한자로 직접 쓴 것이다. 그 근거는 서체와 서풍의 일치, 소장내력, 그리고 독립문 완공 후 김가진이 ‘제국독립문帝國獨立門’이 새겨진 먹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다는 사실, 한글에 대한 선각자적인 인식과 실천에서 종합적으로 확인된다.

 

김가진의 독립문(한글)

김가진의 독립문(한자자)

먼저 독립신문 1898년 1월 25일자 기사에 “황해도관찰사 김가진씨가 해주 먹판을 금범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하였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하였더라. 물건에까지 이렇게 판각하였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 두 글자를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 두 글자를 생각하기를 이 먹에 다 각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라는 기사를 통해 확인되며, 김가진의 후손들도 〈독립문〉, 〈獨立門〉 휘호당시의 탁본작품을 집에서 대대로 소장해오고 있었다는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증손녀 김선현의 일관된 증언이다.

 

또한, 한글 〈독립문〉을 한자 〈獨立門〉과 대등하게 세운 철학 자체와 실천에서 한글에 대한 김가진의 선각자적인 각성이 지목될 수밖에 없다. 김가진은 이미 1887년 즈음부터 주일공사관 외교서신 암호규칙과 암호편지를 한글의 자모를 응용하여 사용하였고, 그 초안까지 직접 써서 남겨놓았다.

 

〈암호 편지〉(1890년경, 50.0×25.6cm, / 66.2×23.0cm, 동농문화재단 소장) / 주일공사관 판사대신 이학규(李鶴圭)가 보낸 편지의 말미에 “힘묭쟈츄을번푼슈뒤슨 슨 그훅냐”라고 적은 것은 “흠명쥬챠일본판샤대신(欽命駐箚日本辦事大臣) 신(臣) 니학규(李鶴圭)”의 모음을 회전시켜 쓴 것이다.

암호규칙 초안 / 김가진은 1887년(고종24)에 주차일본국서리판리대신(駐箚日本國署理辦事大臣)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공사관의 판사대신으로 승진하여 1890년까지 일본에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김가진의 후손가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외교 서신의 암호 규칙이 전한다. 여기에는 외국인이 알아볼 수 없게 한글이 사용되었고 그 모양 또한 변용하여 쓰도록 규정되어 있다. 한글을 변용하는 방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모음을 90도 회전시키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모음을 회전한 다음 자음의 종류를 바꾸는 방식이다. 이러한 규칙은 실제로 시행되어, 이 규칙에 따라 작성된 서신이 함께 전한다.

물론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서도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또한, 그가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및 비원장을 겸할 58세 때인 190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언문학교를 설립하여 한글교육에 앞장섰다. 황성신문 1902년 1월 29일에 의거하면 동농 김가진이 학부 인가를 받아내고, 자신이 교장에, 부교장에는 황족인 의양군 이재각, 교감에는 지석영을 내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檀君)자손으로 ‘제2독립운동’의 혈전(血戰)을 천명한 〈대동단선언大同團宣言〉

3·1운동 직후에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김가진이 총재를 맡았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항일 무장조직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 대동신보大同新報 등의 선전물을 비밀리에 제작·배포하여 민중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총재인 김가진은 1919년 10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상해 임시정부2주년기념식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11월에 발표한 독립선언서 〈대동단선언大同團宣言〉는 김가진이 기초한 것으로, 그가 망명한 뒤 11월 28일에 일어난 이른바 ‘제2차 독립 만세 운동’ 때 배포되었다. 단군과 고구려의 자손인 우리 민족의 자주를 선포하고, 일본의 폭압을 규탄하며 혈전을 불사하겠다는 내용이 의친왕 이강, 김가진, 전협, 백초월, 나창헌, 이신애, 염광록 등 33인의 조선 민족 대표 이름으로 적혀 있다.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誠衷)을 의지[仗]하여 국가의 독립됨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 됨을 천하만국에 선언하며 또한 증언하노라. 근역 청구(槿域靑丘)는 남의 식민지가 아니며[非人之植民地] 단군과 고구려의 자손[檀孫麗族]은 남의 노예의 종자가 아니다[非人之奴隸種] . . . . . 원한과 고통을 삼키고 마시며[飮恨茹痛]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십 개 성상(星霜)을 지난지라. . . . . . 세계 개조의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이론은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의 독립국과 우리나라의 자유의 소리는 나라 안에 울려 펴졌도다[漲於宇內] . . . . .이제(於是乎) 3월 1일에 선언 독립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했으나 . . . .만일 일본이 끝내 뉘우침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血戰)을 불사(不辭)코자 이에 선언하노라.” - 대한민국 원년 11월

 

조선민족대동단은 이 선언서 이전에 〈대동단결선언〉(1917.7)을 시작으로 이후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1919.2), 〈3.1독립선언서〉(1919.3.1.), 〈국민의회선언〉(1919.3.17.)로 이어졌다.

 

1919년 2월, 중국 지린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의군부의 조소앙(趙素昻)이 기초하여 애국지사 39명이 대한독립을 선포한 〈대한독립선언서〉(1919년, 51.2×36.8cm, 개인소장)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중국 동부 지린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의군부의 조소앙(趙素昻)을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 39명이 한국의 민주독립을 선포한 선언서이다. 국내의 3·1운동 때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와 함께 일제의 속박을 거부하며 한국민의 자주독립을 만방에 선언한 대표적인 독립선언서의 하나다. 이 선언서는 1919년 1월 말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된 뒤 조소앙에게 의뢰하여 작성된 것으로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외에 상해, 미주, 하와이 등지의 독립운동가 등 해외 각지에서 활동 중인 민족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했다.

서명자는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여준, 유동열,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승만, 이시영, 이종탁, 이탁,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정,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임방, 윤세복, 조용은, 조욱, 정재관, 최병학, 한흥, 허혁, 황상규이다. 여기서 보듯 서명자 대부분이 대종교(大倧敎)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선언서는 국내에 전해지긴 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본 자료는 연변역사연구소의 故 강용건 선생이 입수한 것으로 국내 유일본이다.

〈대동단선언大同團宣言〉원문 풀이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誠衷)을 의지[仗]하여 국가의 독립됨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 됨을 천하만국에 선언하며 또한 증언하노라.

근역 청구(槿域靑丘)는 남의 식민지가 아니며[非人之植民地] 단군과 고구려의 자손[檀孫麗族]은 남의 노예의 종자가 아니다[非人之奴隸種]. 나라는 동방 군자요, 민족은 선진(先進)의 선인(善人)이었으나 움직이면 비틀거리고(運當蹇屯) 다스림이 오래니 어지러움이 일어났다(治久生亂). 밖으로는 고래가 삼키는 듯한[鯨呑] 강한 이웃[强隣]이 있고, 안으로는 병든 나라[病國]의 간교한 역적[奸賊]이 있다.

5천년의 신성한 역사와 2천만 예의의 민족과 5백년 황황종족(皇皇宗族)이 하루아침[一朝]에 인멸(湮滅)하니, 조정에는 순국의 신하[殉國之臣]가 있고 재야(在野)에는 절개를 지켜 죽은 백성[死節之民]이 있으나, 황천(皇天)이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不弔) 국민이 복이 없어[無福] 황제 성명에 황급히 폐천(廢遷)의 욕을 당하여(遽遭廢遷之辱) 사민(士民)이 거의(擧義)에 곧바로 민족이 섬멸되는 화를 받았으며(輒受殲族之禍), 남발하는 세금과 가혹한 법[濫稅苛法]과 노예처럼 처우하고 부림[處遇奴使]으로써 민족이 안심하고 살 수 없는지라[族不聊生].

불평하여 외치면 강도로 다스려[不平而嗚則律以强盜] 찢어 죽이니[磔之戮之] 범부(凡夫)의 충의의 혼[忠義之魂]이 잔인한 칼 아래 쓰러진 자[消滅於殘刃之下者]가 몇 천 몇 만인가?

원한과 고통을 삼키고 마시며[飮恨茹痛]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십 개 성상(星霜)을 지난지라. 어둠이 다하면 밝음이 돌아오고(陰極陽回)하고 막힘이 가면 태평함이 오게 되는 것(否往泰來)은 천리의 호운(天理之好運)이며 죽음에 처하여 삶을 얻고(處死求生) 오래 굽혀 일어남을 생각함(久屈思起)은 도의 지극한 정리(道之至情)일세.

세계 개조의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이론은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의 독립국과 우리나라의 자유의 소리는 나라 안에 울려 펴졌도다[漲於宇內]. 이제(於是乎) 3월 1일에 선언 독립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했으나, 간악한 저 일본이 시세(時勢)의 추이(推移)를 살피지 아니하고 오로지 표범과 이리[豹狼]의 만성(蠻性)을 부려 무자비한 압억(大肆壓抑)에 맨손[白手]의 도중(徒衆)을 총으로 죽이고 성읍 촌락을 불태우니 이것이 인류 양심에 참아 할 바인가?

우리 민족의 붉고 뜨거운 충성심(丹忠熱血)은 결코 이러한 비정리적(非情理的) 압박에 움츠러들[減縮] 바가 아니오, 날이 갈수록 정의 인도로써 용왕(勇往) 매진할 뿐이로다. 만일 일본이 끝내 뉘우침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血戰)을 불사(不辭)코자 이에 선언하노라.

대한민국 원년 11 월 일, 조선 민족 대표

의친왕 이강, 김가진, 전협, 양정, 이정(李政), 김상열, 전상무(田相武),

백초월(白初月), 최전구(崔詮九), 조형구(趙炯九), 김익하, 정설교, 이종춘,

김세응(金世應), 정의남(鄭義男), 나창헌, 한기동, 신도안(申道安), 이신애,

한일호, 박정선, 노홍제(魯弘濟), 이직현(李直鉉), 이내수, 김병기(金炳起),

이겸용, 이소후(李宵吼), 신태연(申泰鍊), 신형철(申瑩撤), 오세덕(吳世德),

정규식, 김횡진, 염광록(廉光祿).

 

이 외에도 이번 전시에는 ▲청일전쟁 승리를 그린 일본다색판화 〈아산 성환 아육군 대승리 개선지도(牙山成歡 我陸軍 大勝利 凱旋之圖)〉(19세기 말, 개인소장), ▲명성왕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895)가 영의정 심순택에게 휘호하여 내려준 〈옥골빙심玉骨氷心〉(19세기 말, 개인소장)과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와 함께 시해된 이병직을 애도하는 〈김가진의 묘표초고〉(1895년, 동농문화재단 소장), ▲을사늑약 때 자결한 민영환閔泳煥을 추모하는 〈김가진의 만장輓章〉(1905년, 동농문화재단 소장), ▲평양에 설치된 신식군대의 현판을 김가진이 휘호한 〈진위제사연이대대鎭衛第四聯二大隊〉(1900년경, 동농문화재단 소장), ▲〈대한독립선언서〉(1919년, 개인소장), ▲김가진이 직접 짓고 쓴 〈대동단大同團 선언서〉(1919년, 김가진 후손소장), ▲김구가 김의한에게 써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시〉(1936년, 김가진 후손소장) ▲오세창이 김의한에게 써준 〈성엄정거省俺靖居〉(1945년, 김가진 후손소장) ▲〈장강일기長江日記〉의 저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꾸려낸 정정화의 〈장강일기 초고(草稿)자료〉 등을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시를 설명하고 있는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

아산성환 경기도 성환, 충청도 아산지역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의 일본승리 개선 장면을 묘사한 일본의 다색판화 〈아산성환 아육군 대승리 개선지도(牙山成歡 我陸軍 大勝利 凱旋之圖)〉(19세기 말, 35×71cm, 개인소장) / 청일전쟁淸日戰爭(1894.7.24.~1895.4.17)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아산만 입구의 풍도, 성환, 평양 등 한반도에 벌어진 전쟁이다. 아산과 성환 주둔 4,000여명의 청군과 3,500여명의 일본군 전투에서만 해도 청군 500여명, 일본군 100여명이 전사했는데, 전승국 일제의 주도로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면서 끝났다. 청일전쟁 결과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메이지유신(1868) 이후 일제는 근대화 서구화는 물론 조선의 일제식민지화를 도미노로 전개켰다. 갑오경장(1894), 을미사변(1895), 러일전쟁(1904), 을사늑약(1905), 군대해산(1907), 한일강제병합(1910)이 그것이다.

명성왕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895)가 영의정 심순택에게 휘호해준 〈옥골빙심玉骨氷心〉(19세기 말, 150×40cm, 개인소장) / 경복궁의 건청궁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가 영의정 심순택에게 하사한 휘호이다. 옥호루는 명성황후의 거처로서 여기서 일제 낭인에게 시해되었다. 치화穉華 심순택沈舜澤(1824~1906)은 사대부 중 유일무이하게 대한제국 공작으로 청녕공靑寧公에 봉작되었는데,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때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주창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하자 조병세의 자결自決과 의병 운동이 발발하는 가운데 반대 상소로 매국노를 규탄하였다.

김구가 김의한에게 써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시〉(1936년, 38.6×148.0cm(2), 김가진 후손 소장)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서약하니 어룡이 꿈틀대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네

誠广志弟雅正 回甲之日 於金陵隱舍

書忠武公李舜臣詩一句 以作紀念 白凡金九

성엄 지제께 드리다.

회갑날에 금릉(남경)의 비밀가옥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시 1구를 써서 기념으로 삼는다. -백범 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