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카테고리

조선왕조실록

한문역사 2026. 1. 12. 13:59

1. 개요2. 편찬
2.1. 세초(洗草)
3. 보관, 그리고 수난
3.1. 현황
4. 관련 에피소드5. 세계기록유산 등 등재현황6. 평가
6.1. 내용의 방대함6.2. 지우개를 쓰지 않는 역사6.3. 사관의 촌평6.4. 한계
7. 사관들의 집념8. 현대화 노력
8.1. 영인8.2. 번역과 전산화8.3. 번역의 문제점8.4. 실록 전산화의 영향
8.4.1. 사극8.4.2. 교양서8.4.3. 그 외
9. 목록과 분량
9.1. 태조 ~ 철종실록9.2. 고종 ~ 순종실록
10. 의의11. 여담12. 관련 영상13. 관련 문서
13.1. 관련 역사서
1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 왕조가 자신들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과 함께 국보명으론 기타산엽본이 유네스코 측에는 상편 21책으로 되었다.

국가유산청에서는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의 25대 472년의 기록만을 조선왕조실록으로써 취급하여 국보 151호 지정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정도 이들 기록에만 되어 있다. 고종실록 순종실록도 조선왕조실록의 연장선으로 편찬되었으나, 이 실록을 편찬한 시기는 이미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전통적인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방법으로 편찬하지 않았고, 일제가 의도적으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 별도로 취급된다.

북한도 적상산사고본의 대부분을[1] 보유했는데, 북한에서는 '조선봉건왕조실록', '리조실록' 등으로 칭한다. 북한에 있는 적상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대한민국의 손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지도 못했고, 유네스코에 북한과 공동등재하지 않았으므로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빠졌다.

유네스코에서 사용하고 있는 영어 명칭은 "Annals of the Joseon Dynasty"다.[2] "Annals"는 대략 '연대기' 정도의 의미로, 직역하면 '조선왕조 연대기'라는 의미다.[3] 등재 당시 국가유산청에서는 아래 4가지를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유로 밝혔다.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2. 일본 중국에도 모두 실록이 있는데 편찬된 실록은 후손 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4]
  3. 이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권수로 치면 중국 명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 실제 지면수로는 조선왕조실록이 이보다 훨씬 많아 분량면에서 세계 제일이다.
  4. 일본과 중국의 다른 실록들은 모두 당대 만들어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2. 편찬[편집]

 
실록 편찬은 고려  고려실록부터 있었는데, 조선건국 시에도 마찬가지로 춘추관을 만들고 기록자인 사관(史官)을 두었다. 사관들은 왕들을 따라 다니면서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물 사초(史草)를 만들었다. 그 이외에도 춘추관 사관들은 3년마다 자신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5]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어 의정부와 사고에 보관했다.

사초와 시정기 모두 실록편찬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국왕 중 자신의 사초를 읽어본 왕은 거의 없다.[6] 연산군 무오사화 때 자신의 사초를 보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오해로 연산군 본인의 사초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초를, 그마저도 직접이 아니라 문제가 된 부분만 신하가 베껴온 것을 읽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최악의 선례가 되어 오히려 더욱 금기시되었다.

국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 사망하면[7], 현직 국왕은 사관 같은 춘추관의 구성원과 정승급 고위 인사를 넣은 임시기구인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하고, 위에서 언급한 사초,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같은 각 관청의 기록들을 모아서 죽은 국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편찬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지며 첫 단계는 실록청을 도청(都廳) 아래에 방(房) 1-3곳으로 나누고(세종, 성종 같이 분량이 많은 실록의 경우 방을 6개까지 늘렸다고 한다). 각 방에서 1차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初草)를 작성하고, 다음으로 방에서 작성한 초초본을 도청에서 편집해 중초(中草)를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실록청의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正草)를 작성하면 실록이 완성된 것이었다.

이후 완성된 실록은 5개를 복사해서 춘추관에 1개를 두고 지방에 만들어 둔 사고(史庫)마다 1개씩 보관한다. 그리고 실록청은 마지막 작업으로 초초본과 중초본을 시냇물에 씻어 없애는 세초를 했는데, 이것에 대해선 하위 문단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2.1. 세초(洗草)[편집]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김을 막고자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초식은 실록 편찬의 '쫑파티'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세초식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기도 했다. 세초가 시행되는 곳은 현재도 남아있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의 '세검정'. 세초 후에는 세초연이라는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실록 편찬 과정은 세계적인 역사기록의 편찬 과정이면서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기록 말살의 과정인 셈이기도 하다.

세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이다. 왕도정치를 표방한 조선 왕조는 꽤 검소하게 정부를 운영했기 때문에 모든 물자를 귀하게 여겼다. 조선 조정에게 초조본과 중초본의 제작에 들어가는 종이는 무척 아까운 지출이었다. 굳이 검소를 표방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종이는 현대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이었고, 반도 내에 널리 퍼져있는 험난한 산세같은 환경의 문제들로 인해 세금을 거두는 것이 한계가 있었던 조선 입장에선 너무 많은 지출이었다. 특히 한지는 제작공정이 까다로워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고, 고급지는 더욱 귀했다. 여기에 두 가지 판본 외에도 사료 편찬을 위해 왕의 재위기간 동안 사관들이 열심히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한 원본사료인 사초에 쓰인 종이까지 합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 양을 한번 쓰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여 정초본이 완성되면 필요성이 줄어든 다른 사료들의 종이를 재활용하고 전부 세초하는 것. 한지는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물로 잘 씻어 먹물을 빼낸 뒤 잘 말리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
  2. 사초 기록에 있어 사관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정쟁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다듬어서 완성된 형태로 만든 실록과는 달리 사초는 그야말로 어떤 상황에 대해 사관의 생각이 여과없이 기록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사관들이 화를 입거나 정쟁이 불거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연산군  김일손의 사초에서 비롯된 무오사화는 사초의 내용이 공개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무오사화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연산군이 사초를 열람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신하들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중종 때 대대적으로 세초를 하고, 아예 세초를 의무로 규정하여 이전에 세초하지 않고 남겨뒀던 사초까지 모두 씻어버렸다.[8] 연산군 이후 사초를 보려 한 임금은 없었다. 연산군 이후 사초 열람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나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다! 하고 선언하는 짓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기록물'인데 국왕이 실록을 참고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왕이 실록을 직접 읽지는 않되, 조정에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전례를 찾아보기 위해서 국왕이 사관에게 지시를 내려 열람하여 기록을 찾도록 했다. 과거에는 연산군 때부터 세초가 시작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성묘보전세초록이 발견되며, 조선 초기에도 세초가 행해져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작업 때문에 사라진 어마어마한[9] 초초와 중초, 생생한 현장 자료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애석하게 여기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나마 조선 후기는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다른 자료들도 남아있지만 조선 전기는 하필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기록이 거의 증발했으니...

단, 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다. 그래서 정초본에 없는 광해군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는 광해가 폐위되었고 그의 세력이 재기할 가능성이 아예 사라졌기 때문에 굳이 중초본을 없애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라면 양대호란 때문에 돈이 없어서...

조선 왕조 내내 사초와 실록을 열람할 수 없도록 하는 금기가 대체로 지켜져왔고, 왕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깨고 열람을 시도할 때마다 대신들의 격렬한 항의에 의해 뜻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관이 나에 대해 어떻게 써 놓았는지 직접 보고 그것을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신하들이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신다면 전대의 역사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옵니다."라고 나오자 더 말을 못 한 적이 있다. 세종 태종실록 편찬이 끝난 뒤 부왕의 실록을 보려고 했다가 '열람한다면 후대 임금들도 본받아 실록을 보고 고칠 겁니다.' 하고 신하들이 반대해 뜻을 접었다.세종 13년 기사 같은 기사에 따르면 이 금기의 원형은 태종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당시에는 사초와 역대 실록 전부를 포함하는 전적인 금기는 아니었고 선왕의 실록만 열람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이후 세종이 태조실록 편찬본과 태종실록의 사초를 열람하면서 태종실록을 열람하지 않은 이유로 태종실록 편찬자가 아직 살아있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든 것을 보아 태종 역시 비슷한 이유로 열람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10]

3. 보관, 그리고 수난[편집]

컴퓨터도, 소규모 기억장치도 없던 시절에 백업을 정말 철저하게 했다. 고려실록은 궁궐에 1부, 소실을 대비해 해인사에 1부, 총 2부를 만들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항상 4~5부를 만들었다. 고려실록도 몽골제국의 고려 침략전쟁이나 거란군의 고려침략전쟁인 여요전쟁으로 파괴당했고, 홍건적 왜구와의 전쟁때도 소실되기도 하는 등 이렇게 오랑캐의 침략으로 소실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11]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한 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해서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라는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지방의 세 곳은 충주[12]·전주·성주였는데, 겉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지만 대사헌 양성지는 보관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며 세조 12년(1466) 11월 17일에 상소를 올렸다. '춘추관은 한양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하삼도(下三道)[13]에 있는 사고는 관청 옆에 붙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으며 장차 외적이 침입하면 소실될 수도 있으니, 인적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가령 전주 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 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겨 그 고장의 절에 보관하고 땅을 지급해서 인근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72년이 지나 중종 33년(1538) 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소되자, 나머지 사고에서 인쇄·필사해서 성주로 보냈는데, 사고의 위치를 바꾸진 않았다. 그런데 54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주 사고본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14] 전주 사고본도 전주의 유생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고 이듬해 관청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서 지켜보며 간신히 지켜냈다(이때 안의가 남긴 기록이 수직상체일기).[15] 결국 광해군 때 춘추관과 함께 마니산·오대산·태백산·묘향산에 사고를 마련하고, 전쟁 뒤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출판하여 실록 5부[16]를 갖추었다. 그랬는데도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버렸으며, 청국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으로[17], 마니산 사고본은 정족산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들 사고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왕실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각 사고가 소재한 산의 사찰에 있던 승려들, 승군들이었다. 정족산의 전등사[18], 오대산의 월정사, 태백산의 각화사, 적상산의 안국사[19]가 모두 사찰에 속해서 유사시 승군으로서 동원되는 승려들로 사고 관리 및 보존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적상산본은 창경원 장서각으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총독부로 옮겨졌으며[20]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면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어 근대적 장서학에 따라 관리를 받았다. 실록을 처음 학술적으로 연구한 곳도 경성제국대학이었다. 그리고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했는데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대출본 47권을 제외하고 소실되었다.[21]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에 살아남았다가 서울대학교 개교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있던 실록들은 임시수도 부산으로 수송되었는데, 서울대 도서관의 태백산사고본과 정족산사고본 등은 군용 트럭에 실려 부산으로 수송되어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상남도청 창고 등에 보관되었다. 창경원의 적상산본은 제때 피난하지 못하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월북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의 건의를 김일성이 받아들여 평양으로 옮겼다.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서 소장한 듯하다. 이는 북한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조실록 판본으로, 대한민국보다 먼저 번역된 《리조실록》의 원전이 되었다고 하는데, 북으로 이송되는 도중 수 차례 폭격 맞을 뻔한 기회를 넘기고 천운으로 살아남은 판본이다. 분명히 피난 갈 때 부산행 기차에 실어서 출발했음을 확인했는데 불구하고 통째로 사라져버린 6.25 전쟁의 미스터리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인민군이 기차를 통째로 노획했던 것.[22] 그렇게 북한으로 넘어가버렸다고 생각한 적상산본은, 다는 아니지만 일부가 남한에 남아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권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서각에서 3권을 발견했다. 관련 기사[23]

최종적으로 현재 남한에는 사고본 2종이, 북한에는 1종이 남아있다. 이 중 태백산본은 만일을 대비해 1985년부터 부산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하고 있다. 일본에 있다가 일부만 남은 오대산본은 2006년에 영구대출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었다.[24]

반환 직후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소장되었는데, 소장 장소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본래 사고가 있던 월정사에선 사고본을 월정사의 조선왕조실록박물관으로 옮겨야 합당하다고 주장하고, 문화재청[25]에서는 국보급 문화재를 민간 전시관에서 보관하기엔 곤란하다는 입장을 폈던 것. 사고본의 복제품과 영인본을 월정사 측에게 기증해서 보관·전시 중이지만 월정사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계속 원본 소장을 주장했다. 여기에 서울대까지 나서서 서울대에서 기증받았으니 서울대에서 소장해야 한다며 실록을 서울대 박물관에 두려고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월정사가 경내에 건립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오대산본 실록의 원본을 전시하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애초에 오대산본 실록의 환수 과정에서 월정사가 일조한 부분이 적지 않았기에[26] 월정사의 요청이나 오대산본과 관련한 월정사의 역사적 인연을 무시할 수 없었기도 하고.



이렇게 온갖 수난을 회피했지만 아쉽게도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00%가 아니다. 문종실록을 편찬할 때 전주 사고본의 제11권 표지를 제9권에다 입히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전주 사고에는 제11권이 없고 제9권만 두 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11권이 없는 전주 사고본만 살아남고, 이후 판본은 전주 사고본을 원본으로 삼아 복제한 것이기 때문에 문종실록 제11권은 소멸되었다.

3.1. 현황[편집]

하여튼 현재까지 만들어진 모든 조선왕조실록 판본의 행방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이전
  • 춘추관 사고본: 임진왜란으로 전소
  • 충주 사고본: 임진왜란으로 전소
  • 성주 사고본: 화재로 부분 소실 → 임진왜란으로 전소
  • 전주 사고본: 문종실록 11권 제외 보존

임진왜란 이후
  • 춘추관 사고본: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전소
  • 마니산 사고본: 정족산 → 총독부 → 경성제국대학 → 서울대학교 규장각
  • 태백산 사고본[27] : 총독부 → 경성제국대학 → 서울대학교 규장각 → 부산 국가기록원
  • 묘향산 사고본: 적상산 → 창경원 →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
  • 오대산 사고본: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 관동대지진으로 부분 소실 뒤 반환→ 국립고궁박물관 → 월정사 내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피소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세계기록유산 등 등재현황[편집]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이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공식명칭
한글
조선왕조실록[28]
영어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한자
朝鮮王朝實錄
프랑스어
Annales de la Dynastie Jo-Seon
영어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국가·위치
분류번호
국보 151호
소장·관리
소재지
정족산사고본: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103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태백산사고본: 부산광역시 연제구 경기장로 28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오대산사고본: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적상산사고본: 서울시 용산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평안남도 평양시 김일성종합대학
기타산엽본: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모당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등재유형
기록유산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필사본 / 고본
등재연도
시설
1181책[29], 848책[30], 75책[31], 21책<a style="color: #0275d8;" href="https://namu.wiki/w/%EC%A1%B0%EC%84%A0%EC%99%95%EC%A1%B0%EC%8B%A4%EB%A1%9D#fn-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