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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지 10층 석탑,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지광국사탑, ▣평안감사향연도, ▣오타니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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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가의 기원은 금관가야일까?, ▣무녕왕릉, ▣충주 탑평리 7층석탑, ▣혜원풍속화첩 <단오풍정>,
⊙『배한철의 역사 품은 국보』Ⅳ https://blog.naver.com/ohyh45/222554345904
▣황남동고분의 토우들,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 ▣조선의 분청사기, ▣정병, ▣어필(御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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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묘사한 고려왕, ▣정조를 빼닮은 왕세자 피를 토하며 죽다, ▣서산 보원사지, ▣세조어진 초본-피의 군주 얼굴,
▣김홍도필 군선도병풍, ▣안견-사시팔경도, ▣신사임당-조충도, ▣아내에 바치는묘지명, ▣음식디미방-최초 한글요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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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철의 국보의 자취』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1794530267
①다보탑 사자상,②금동미륵반가사유상,③북한산 진흥왕 순수비,④첨성대,⑤ 황남대총 금관,⑥징비록,
⑦백제금동대향로, ⑧지광법사 현묘탑, ⑨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⑩부석사 무량수전
『배한철의 국보의 자취』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1795506728
① 통일신라 3대 불상, ②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 ③ 성덕대왕 신종, ④ 법주사 팔상전, ⑤ 보원사 철조여래좌상,
⑥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⑦ 윤두서 자화상, ⑧ 백성이 불태운 경복궁, ⑨ 인왕제색도·금강전도, ⑩ 조선왕조실록
『배한철의 국보의 자취』 Ⅲ https://blog.naver.com/ohyh45/221795504690
①청자상감운학문매병, ②석굴암, ③불국사,④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⑤분황사 모전석탑, ⑥한글 세종과 아들딸이 만들었다,
⑦국보 경천사10층석탑,⑧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⑨익산 미륵사지 석탑,⑩ 고령(대가야)금관,
『배한철의 국보의 자취』 Ⅳ https://blog.naver.com/ohyh45/221908561605
①아미타여래삼존도, ②백자 달항아리, ③삼국사기, ④낙랑 금제 띠고리, ⑤ 혜원전신첩,
⑥이순신 '난중일기, ⑦무구정광대다라니경. ⑧몽류도원도, ⑨숭례문과흥인지문, ⑩ 국보 도난사건
『배한철의 국보의 자취』 Ⅴ https://blog.naver.com/ohyh45/222061236165
① 이형석탑, ②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③ 국보 12점 발견된 무녕왕릉, ④ 고유섭, ⑤ 미국으로 피난갔던 신라 금관,
⑥ 간송의 국보청자 값140억, ⑦국보168호,274호,278호가 결번인 이유 ⑧ 포항 중성리 신라비,
31.황남동 고분의 토우들 - 왕릉 옆 고추밭 파니 나체 인형이 '우르르'

사진1. 1926년 경주 황남동 고분 발굴 현장.
토사를 채굴하기 위해 흙더미를 무너뜨리자 헤아릴 수 없는 토기편과 토우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926년 5월, 경주역에서는 협궤철로였던 경동선(대구~경주~울산~부산)이 광궤로 확장되는데 따른 확장공사가 벌어졌다. 공사업체인 경동철도주식회사는 저지대 땅을 돋우기 위한 토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초대 경주박물관장은 금관총 발굴비가 필요했고 경동철도측에 황남동 대릉원 황남대총과 93호분 사이 고추밭으로 쓰이던 둔덕의 채굴을 허가했다.
작업은 경주역에서 대릉원까지 1㎞ 남짓한 거리에 임시 레일을 깔고 흙을 운반하는 대공사로 진행됐다. 그런데 토층 상부에 말뚝을 박아 흙더미를 무너뜨리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덧널(돌로 짠 외관)들이 드러났고 그속에서 토기편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부장품은 주로 단경호(배가 나온 항아리)나 고배(다리가 붙은 접시)였지만 출토 토기에는 예외없이 다양한 모습의 토우(土偶)들이 붙어있었다. 신고를 받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직원들을 현장에 급파했다. 정식 발굴조사에서도 다량의 토기가 수습되자 흙채굴은 중단된다.

사진2. 황남동 고분 발굴을 주도한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직원 고이즈미 아키오.
고이즈미는 1939년 평양박물관장으로 부임해 질펀한 술판을 벌이면서 서봉총 금관을 기생에서 씌운뒤 사진까지 찍어 큰 물의를 빚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대신 모로가는 서북쪽 노서동의 서봉총 봉분을 업체에 팔아먹었다. 봉분 채취에 앞서 진행된 서봉총 조사에서는 세마리의 봉황이 장식된 금관(보물 제339호)과 여성용 귀고리와 허리띠 장식 등 여성 장신구가 출토됐다.
황남동 고분과 서봉총 발굴을 주도한 사람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1939년 평양박물관장으로 부임해 요란한 술판을 벌이면서 기생에게 금관과 금목걸이, 허리띠 등 서봉총 출토품을 두르게 한 뒤 기념사진까지 찍어 큰 파문을 일으킨다.
토우(土偶)는 흙을 재료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토우는 사람의 형상 뿐만 아니라, 동물, 집, 수레, 배, 신 등 생활용구의 모습을 본떠 제작한다. 사람이나 동물 등의 특징을 잡아내 간단하게 빚어내는게 특징이다.
토우는 주술적 목적에 따라 신에 받치는 제물의 대용으로, 또는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개는 장례의식을 위해 만들어졌다. 죽은이를 사후세계에 인도하거나 죽은이가 봉사자, 양식, 용품으로 사용토록 무덤에 부장했던 것이다.

사진3. 황남동 출토 `성행위 묘사 토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우의 확산은 야철기술의 발달과 무관치 않다. 3세기 후반 4세기 초반, 신라와 가야 등 한반도 남부에서는 불의 온도를 1000도 이상 끌어 올릴 수 있는 가마가 등장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널리 제작된다.
토기는 대구에서 함안에 이르는 낙동강 유역이나 옛가야 지역에서 발생해 경주지방으로 전파됐다. 물건의 형상을 본뜬 상형토기 중에서 세련된 솜씨의 수작들이 여러점 전한다.
토우는 크게 이러한 상형토기와 토용, 장식토우로 분류된다.
상형토기는 다시 인물형 토기, 동물형 토기, 기물형 토기로 구분된다. 대체로 내부가 빈 형태를 하고 있어 액체 같은 담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인물형 토기는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 인물형 토기'(국보 제91호)가 대표적이다. 주인과 종으로 보이는 두 인물이 각각 말을 타고 있다. 말은 중국에서 제물로 바쳐졌고 죽은 이를 사후세계로 실어 나르는 동물로도 인식됐다.
말엉덩이에는 잔이 놓여있다. 가야지역인 김해 덕산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기마 인물형 뿔잔'(국보 제275호)은 말을 탄 무사 뒤에 쌍뿔 잔이 세워졌다.

사진4. 가야시대 `사슴 장식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물형 토기는 새나 오리가 대부분이며 주로 달성, 창녕 등 낙동강 일원에서 발견되고 있다. 새 역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사후세계로 안내하는 인도자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으며 죽은이를 위한 식량으로도 무덤에 넣어졌다.
동아대박물관 소장의 부산 복천동 출토 '말머리 모양 뿔잔'(보물 제598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가야시대 '멧돼지 모양 뿔잔'은 소박하면서도 탁월한 조형미가 돋보이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가야시대 사슴 장식 항아리도 이에못지 않게 뛰어나다.
기물형 토기 중에서는 집모양이 다수지만 수레, 배, 짚신, 그릇모양도 보인다. 가야문화권의 집모양 토기는 중국 남부나 동남아시아에 분포하는 네 다리가 있는 고상(高床)건축 형태가 자주 눈에 띄어 당시 가야지역 주거양식이 유추된다.
집모양의 토기는 죽어서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자하는 염원이 깃들어있다. 수레나 배는 중요한 수송수단으로 역시 피장자를 사후세계를 태워보내려는 목적이다. 수레바퀴 모양은 대체로 받침대 위에 2개의 수레바퀴가 높이고 그 사이에 뿔잔·항아리를 뒀다.
국립진주박물관 소장의 가야시대 '수레모양 뿔잔'은 보물 제637호로 지정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경남 출토 '수레모양 토기'도 구조는 유사하다.
금령총 출토 '배모양 토기'는 그릇 받침 위에 배가 얹혀있다. 선체 안의 한쪽에는 성기를 과장한 남자가 노를 젓고 있다. 배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토기도 발견된다.

사진5. 경남 출토 `수레모양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용(土俑)은 세밀하게 제작된 흙인형으로 물감을 칠하기도 했다. 노동력 활용 등을 위해 순장제가 폐지되면서 이를 대신해 토용을 제작해 장사 지냈다. 1986년 통일신라 진골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는 청동제 십이지신상과 함께 채색 토용이 발굴돼 모두를 놀라게 했다.
토용은 15명의 남자상과 13명의 여자상으로, 남자는 시립한 문관상, 태껸자세의 병사 등이, 여성은 쇼울을 어깨에 걸친 높은 지위의 부인 등이 있다. 온화한 얼굴에 단아한 자태, 섬세한 옷자락의 표현 등으로 당시의 인물 모습이나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황남동 고분에서 마구 쏟아져 나온 토우들은 장식용 토우다. 현재 따로 떨어져 보관되고 있지만 애초 항아리와 접시 등의 어깨, 목, 뚜껑에 붙어 있었다. 조선총독부 촉탁자격으로 황남동 고분을 조사했던 고이즈미 아키오도 "발굴 과정에서 토우들을 토기에서 뜯어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들 토우는 10㎝를 넘지 않고 또한 표현도 간결하지만 신체와 얼굴의 특징을 포착해 인간의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인은 출산의 고통이 극심한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다.
탄생과 죽음은 일맥상통한다. 죽은이의 얼굴은 작은 천조각으로 가려져 있고 그곁에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고개를 숙인채 비탄에 잠겨 있다.
여성토우들은 가슴과 성기가 과장돼 있다. 여인의 풍만한 모습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 성행위는 낯뜨거울 만큼 노골적이다. 남녀가 전신을 밀착시켜 누워 있지만 남자가 앉아 있기도 한다.
신라의 가무, 주악은 <삼국사기>에 기술된 가배(嘉俳·궁중놀이)와 팔관회(호국적 종교행사)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지만 구체적 자료는 안남아있다. 토우는 신라인의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도 놓치지 않는다. 팔뚝만한 피리를 불고 있는 토우는 신라에서 피리가 널리 불려졌음을 추측케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계림로 출토 토우장식 긴목항아리(국보 제195호) 목부분의 임신한 여인이 연주하는 가야금은 양이두(羊耳頭·가야금 끝에 줄을 잡아매는 곳)가 뚜렷해 우륵의 가얏고 원형을 제시한다.
고대사회에서 수렵은 생존과 직결됐다. 사냥을 끝낸 사냥꾼이 말등에 네발을 꽁꽁 묶은 멧돼지를 싣고 간다. 사냥꾼과 시종으로 보이는 인물이 반대편의 멧돼지 어미와 새끼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에서 신라인이 사냥하는 형상이 구체적으로 연상된다.
신라인의 옷차림을 어땠을까. 남자는 머리에 상투를 틀었으며 상의는 긴 저고리에 허리띠를 두르고 하의는 주름지고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다. 용강동 토용은 중국의 영향으로 소매나 바지통이 넓은 저고리와 바지차림이다. 일반백성은 몸에 붙는 옷을, 귀족층은 헐렁한 옷을 입었던 것이다.
동물도 다수 등장한다. 먹이를 물고 있는 개, 나무 위에 올라앉은 원숭이, 말, 소, 사슴, 호랑이, 용, 멧돼지, 물고기, 거북, 게, 뱀, 개구리, 도마뱀 뿐만 아니라 개미핥기, 수달, 물개, 불가사리 등 종류도 다양하다.
고대의 실상을 알려주는 역사 문헌은 극도로 부족하다. 이런 실정에서 다채로운 표정과 일상을 고스란히 담은 토우는 고대인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것이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 <배한철의 역사를 품은 국보> - 31.황남동고분의 토우들 - 왕릉 옆 고추밭 파니 나체 인형이 '우르르' / 매일경제 , 2021. 6. 21.
32.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 - 인도승려의 지극한 효행설화 서린 걸작탑

사진1. 파격적 실험성이 돋보이는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는 10층까지만 보인다.
국보 제35호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은 이색적인 형태와 사실감 넘치는 조각수법의 걸작 탑이다. 신라시대 탑중에서 유일한 사자탑이며 다보탑과 함께 한국 이형(異形) 석탑의 쌍벽을 이룬다. 탑에는 인도 승려의 절절한 효행설화가 서려있다.
탑이 있는 구례 화엄사는 호남 제일의 사찰이다. <화엄사 사적기(寺蹟記)>는 "진흥왕 5년(544) 인도 출신 승려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세웠다"고 기술한다. 연기조사는 제자 3000명을 길러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됐다고 <사적기>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화엄종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이보다 훨씬 늦은 671년 의상대사(625~702)에 의해서다. 과연 연기조사가 인도인이며 그가 맨 먼저 신라에 화엄종을 전파했던 걸까.
1978년에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은 연기조사가 황룡사 승려로 경덕왕(재위 742∼765) 때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기조사는 인도인이 아닌 신라인이며 화엄사 창건연대도 진흥왕 때가 아닌 경덕왕 때라는 것이다.
어쨌든, 조사는 화엄경을 가지고 비구니인 모친과 함께 화엄사가 자리한 지리산 노고단 황둔골에 들어왔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고 불법을 가르치면서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마을 사람들은 조사에게 감동받아 신도가 됐고 화엄사를 짓는 일도 도왔다.

사진2. 화엄사 4사자3층석탑.
인도승려의 효행설화가 서려있다. 사자들 가운데서 인도승려의 병든 어머니가 탑을 이고 있고 승려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있다. 사진 문화재청.
높이 6.7m인 석탑은 마주 보고 있는 높이 2.8m짜리 석등과 한 쌍이다. 사자들에 에워쌓인 석탑 중앙에 비구니상이 합장한 채 서 있다. 비구니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다. 석탑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12명의 천인상을 도드라지게 새겼고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바로 옆 석등에는 탑을 향해 꿇어 앉은 스님상이 있다.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나타냈다. 두 석조물에는 조사의 효심과 불심이 혼연일체가 돼 스며 있는 것이다.
탑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사자 조각으로 더욱 유명하다. 위층 기단에 암수 사자 네 마리를 각 모퉁이에 기둥 삼아 세워놓았다.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 미뤄 제작시기는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탑은 부처 사리를 봉안하는 묘이다. 탑은 나무, 금속, 벽돌, 석재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풍부해 석탑이 성행했다.
전형적인 석탑은 불국사 3층 석탑(국보 제21호), 경주 황복사지 3층 석탑(국보 제37호), 경주 고선사지 3층 석탑(국보 제38호), 경주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국보 제112호), 경주 나원리 5층 석탑(국보 제39호) 등에서처럼 방형(4각형) 평면의 기단에 중층(3층 또는 5층 높이)의 몸돌·지붕, 상륜부의 구조를 한다.
이런 모양의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7세기 후반~8세기 중엽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목조건축을 모방하는 백제 조탑 기술이 반영된 것으로, 백제 기술이 수용된 통일신라 때 형성돼 한국 석탑의 주류를 이뤘다.
신라 성대인 8세기 중엽 이후에 오면 양상이 바뀐다. 귀족 문화가 절정을 맞고 사치와 향락풍조가 극에 달하면서 문화 전반에 걸쳐 화려함과 장식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된다. 석탑에서도 종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구조의 '이형 석탑'이 출현하게 된다.
이형 석탑은 크게 2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탑 구조나 건축 방법이 전형적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석탑이다. 형상과 층수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40호), 전술한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등이 여기에 속한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의 정혜사지 13층 석탑(높이 5.9m)은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파격적 실험성이 돋보이면서도 높은 완성도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를 상징하는 '13'이 불교에서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평면을 뜻하는 8방에 하늘과 땅을 더하면 10방의 세계, 즉 온 우주가 된다. 여기에 시간적 세상인 과거, 현재, 미래 3세를 합치면 1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정혜사탑은 이런 사상을 반영했다. 탑은 비대한 1층에 비해 2층 이상은 급격하게 줄어드는 행태로 석탑 조성 방식이 전형적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정혜사는 뜻밖에도 동방 5현의 한 명인 회재 이언적(1491~1553)과 인연이 깊다. 회재는 젊은 시절 정혜사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말년에는 이 절 바로 밑에 독락당을 짓고 기거했다.
정혜사에서 800m 정도 떨어진 하류에 회재 사당인 옥산서원이 있다. 옥산서원은 국보 제322-1호 삼국사기가 보관돼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혜사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1933년 최준이 동경잡지를 보완해 발간한 <동경통지>에
"선덕왕(신라 제37대 왕·재위 780~785) 원년 당나라 첨의사 백우경이 모함을 피해 신라에 귀화해 자옥산 아래에 자리를 잡고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다. 이에 왕이 거둥했으며 친히 만세암을 정혜사라 고쳤다"
고 적혀 있다. 백우경은 중국 시성 백거이의 사촌인 인물로 귀화 후 신라 조정에서 벼슬도 했다. 수원 백 씨는 그를 시조로 받든다.
사찰은 회재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공부방으로 쓰이면서 조선시대에도 잘 보존됐지만 1834년 발생한 화재로 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폐사됐다. 탑도 시련을 겪었다. 1911년 도굴범들이 부장품을 훔치기 위해 탑을 해체했는데 도중에 발각돼 도굴 위기는 모면하지만 해체 상태로 방치됐다.
이후 다시 복원됐지만 도둑들이 버려놓은 탑재를 원상으로 복구하지 못해 10층 탑으로 남았다.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4권에도 10층 탑 모습이 실려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9년 유리건판 사진 자료에는 13층으로 회복돼 있다. 그 몇 년 사이 탑을 재차 쌓은 것이다. 그러나 탑 상륜부는 영영 잃어버렸다.

사진3. 날렵한 형상의 남원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 사진 문화재청.
둘째는 장식적인 석탑으로, 전형적인 방형 중층의 기본형을 하고 있지만 기단과 탑신부 각 면에 천인상, 안상(눈 모양 장식),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 십이지신상, 사방불(동서남북으로 새긴 부처), 보살상, 인왕상(사찰이나 불상을 지키는 수호신) 등 여러 상을 조각해 표면 장식이 화려한 게 특징이다.
이 부류의 탑으로 남원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국보 제10호), 산청 범학리 3층 석탑(국보 제105호),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국보 제122호) 등이 있다.
장식 석탑에서는 남원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이 제일 두드러진다. 지리산 천왕봉 서편에 위치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 홍척(생몰년 미상)이 당나라 유학을 다녀와 건립했다. 백장암은 실상사에 딸린 암자로 실상사에서 북쪽으로 3㎞ 남짓 떨어져 있다.
백장암 3층 석탑은 높이 5m로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보살상, 신장상, 천인좌상, 삼존상, 연꽃무늬 등 갖가지 모습들의 화려한 조각으로 가득하다.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 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다.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 수법에서 벗어나 층을 이루지 않고 한 단으로 처리돼 있다. 날렵함이 부각된 염려(艶麗)하기 그지없는 석탑이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 <배한철의 역사를 품은 국보> - 32.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 - 인도승려의 지극한 효행설화 서린 걸작탑 / 매일경제 프리미엄 , 2021. 6. 25.
33.일본이 끝장낸 조선의 미니멀리즘 '분청사기'

사진1. `분청사기 철화 연꽃물고기무늬 병`.
분청사기에는 익살과 파격 등 서민들의 생활감정이 잘 표현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본은 임진왜란을 '야키모노 센소(燒物戰爭)', 즉 '도자기 전쟁'으로 불러오고있다. 전대미문의 인적, 물적 피해를 입힌 7년간의 참혹했던 이 전쟁을 그들은 무슨 사연으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지칭하고 있는건가. 내막을 알려면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조선전기 200여년간 풍미한 분청사기(粉靑沙器)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12세기 고려청자는 종주국인 중국이 천하의 명품에 포함시킬 만큼 널리 진가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고려말기에 오면서 국가정세의 극심한 혼란 속에 화려했던 청자도 퇴화의 과정을 걷게 된다. 중앙통제와 국방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틈새를 노려 남해안 전역에 왜구가 창궐했다.
고려사절요 등 기록을 종합하면, 고려말 40년 동안 무려 500차례에 달하는 왜구의 침입이 있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당한 전체 외침의 절반에 해당한다. 고려 32대 우왕이 재위한 14년(1374~1388) 동안에만 무려 378회나 쳐들어왔다.
왜구는 100척이 넘는 배를 끌고 와 마을과 사찰을 불태웠으며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양식은 물론 무수한 문화재들을 약탈했다. 왜침의 여파로 청자생산 기지인 강진·부안의 도자 기술자들이 전국으로 뿔뿔히 흩어지면서 청자생산 기반도 와해됐던 것이다.

사진2.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무늬 매병`(보물).
고려청자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독창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으로는 지방으로 퍼져 나간 기술자들은 도처에 소규모 가마를 짓고 귀족적 취향의 청자가 아닌 실생활용 서민 도기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청자에 비해 정교하고 화려한 맛은 떨어지지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파격과 해학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이것이 바로 분청사기이다.
강진으로부터 전국으로 확산된 분청사기 가마는 300개가 훨씬 넘었다. 1424년에서 1432년 사이에 기록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가 조사돼 있다.
분청사기 도공들은 청자의 정형성에서 과감히 탈피해 장식의 기법과 소재, 제작방법에서 종전과 전혀 다른 실험적 자기를 만들어냈다.
편병(몸체의 양면이 납작한 병), 자라병(자라 형태의 병), 장군(액체를 담는 장구모양의 그릇) 등 자유분방하면서 실용성이 강조된 기형과 익살스러우면서도 대범한 물고기, 새, 버드나무, 모란, 국화, 연꽃 등 문양은 분청사기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이 시기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다도가 다이묘들의 최고급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다완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일본의 후진적 도자기 기술은 그들의 욕구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투박한 듯 보이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창적이면서도 자연적인 멋을 발산하는 조선의 분청사기에 매료됐다.

사진3. `분청사기 인화무늬 항아리`. 꽃무늬가 반복적으로 새겨진 수작 분청사기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조선의 분청사기 기술을 빼내가기 위한 목적도 컸다. 왜군은 전쟁기간 조선 도공들을 계획적, 조직적으로 싹쓸이 하듯 끌고갔다. 그들 스스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조선에서 분청사기 명백이 끊긴 것에 대해 광주 관요를 중심으로 왕실백자가 제조되면서 이에 흡수된 것이라는 견해와 함께 전쟁이 분청사기 소멸의 원인이라는 의견도 제시된다.
혜곡 최순우(1916~1984)가
"분청사기 기법은 15세기 중엽 새로운 문물이 싹트던 세종 때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공들을 수백명씩 일본으로 빼앗겨서 분청사기의 전성기도 사라지게 된다" 고 기술했다.
결국, 조선의 뛰어난 분청사기 도공들을 빼내간 덕에 일본은 17세기 이후 세계적인 도자기 선진국으로 거듭난다.
사실, 분청사기라는 원래 존재하지 않던 명칭이다. 20세기 들어와서 새로 생긴 용어다. 우리의 문헌은 그냥 도기, 자기, 그릇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인들은 '미시마테(三島手)'로 불렀다. 분청사기의 인화문(印花文·도장으로 토기 표면에 찍어 만든 세밀한 무늬)이 미시마 신사의 달력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그랬던 것이 미술사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1905~1944)이 1941년 <춘추>라는 잡지에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줄여 비로소 '분청사기'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됐다.
분청사기는 청자처럼 환원염(가마 내 산소 공급을 줄여 도자기 속의 산소를 모두 배출하고 철분이 푸른색을 발현토록 하는 소성방식)으로 굽는다. 따라서 바탕은 푸른색을 띠지만 그릇 표면에 백토(분)가 얇게 칠해져 있어 분청사기라고 했던 것이다.

사진4. `분청사기 박지 연꽃물고기무늬 편병`(국보).
분청사기의 시대를 앞선 기형과 문양은 현대미술과 맞닿아 있다. 호림박물관 소장.
고유섭의 언급대로, 분청사기 하면 백토로 자기를 분장(粉粧)해 원하는 무늬를 그린뒤 무늬를 제외한 배경의 백토를 긁어내는 제작방식이 우선적으로 떠올려진다. 전문적으로 '박지(剝地)'라는 기법이다.
호림박물관 소장의 국보 '분청사기 박지 연꽃물고기무늬 편병'은 자연스럽게 묘사된 연잎과 여러 개의 연꽃 봉오리, 그 사이의 물고기무늬가 능숙한 박지솜씨를 뽐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분청사기 박지 철채모란무늬 자라병'도 자라모양의 특색있는 자기로 여백에 검은색안료인 철채를 칠한 수작이다.
백토를 분장한뒤 원하는 무늬를 선으로 그리는 '음각기법' 또는 '조화(彫花)기법'도 분청사기에서 자주 쓰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분청사기 음각 물고기무늬 편병'은 두마리의 물고기와 모란, 파초 등을 생동감 넘치는 선으로 나타내고 있다.
'상감기법'(반건조된 그릇표면에 무늬를 음각하고 백토·흑토로 메워 구워내는 기술)도 많이 응용됐다. 상감기법에는 다시 선으로 무늬를 만드는 '선상감', 넓게 무늬를 새긴 '면상감'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분청사기 상감 용무늬 항아리'는 선상감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분청사기를 통틀어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보물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무늬 매병'과 '분청사기 상감 연꽃덩굴무늬 병'도 빼어난 상감 분청사기다.
꽃 모양의 도장을 찍어 눌린 부분에 백토를 채워넣는 '인화(印花)기법'도 활용됐다. 뛰어난 분청사기 작품들 중에는 인화자기가 많다.
'장흥고(長興庫·궁중물품 조달 관청)' 글자가 새겨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과 '합천장흥고'가 새겨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분청사기 인화무늬 항아리'은 일정한 도장을 반복해 찍어 추상적인 분위기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두 작품 모두 국보·보물이 아니다.
백토 분장한 후 검은색 안료인 철채로 무늬를 그리는 '철화기법'도 있다. 철화기법의 분청사기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분청사기 철화 덩굴무늬 항아리', 삼성리움 소장의 '분청사기 철화 물고기무늬 항아리' 등이 있으며 회화적인 것, 익살스러운 것, 추상적인 것 등 서민들의 생활감정을 담은 무늬들이 주를 이룬다.
분청사기의 시대를 앞서간 질감과 표현법, 문양 등은 놀랍게도 현대미술의 미니멀리즘(단순·간결을 추구하는 예술경향)과 추상주의와 연결되고 있다. 실제로 분청사기의 형태와 문양은 이중섭 등 여러 현대 화가들의 의해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200년의 길지 않은 시간에 명멸했지만 한국미의 원형을 형성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예술정신 속에 살아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분청사기는 국보가 6점, 보물은 27점에 불과하며 여전히 무수한 명품 분청사기들이 국가문화재로 분류돼 있지 않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 <배한철의 역사를 품은 국보> - 33.일본이 끝장낸 조선의 미니멀리즘 '분청사기' / 매일경제, 2021. 7. 8.
34.정병(淨甁) - 인도의 물병, 고려예술의 황금기를 꽃피우다

사진1. 경주 석굴암 `십일면관음` 부조상.
머리에 사방으로 총 11개의 얼굴이 있는 관음보살로, 11개의 머리는 관음보살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상징한다. 관음보살 왼손에 신성한 물을 담은 정병이 들려져 있다. 사진 문화재정(故 한석홍 기증 자료).
많은 종교는 깨끗한 물을 성스럽게 여긴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권에 성수(聖水)가 있다면, 불교는 '법수(法水)'가 있다. 건조지대인 중동이 그렇듯 남방의 열대 기후지역인 인도 역시 먹을 수 있는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식수가 귀한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이들 지역은 물을 신성시했던 것이다.
불교는 청정수를 존귀한 부처에 공양했다. 불상을 목욕시키는 관불(灌佛) 또는 욕불(浴佛)은 석탄일에 제일 중요한 의식으로 행해졌다. 8세기초 당나라 승려 의정이 한역한 <욕불공덕경(浴佛功德經)>은 "석가가 태어날 때 아홉 마리의 용이 날아와 청정수를 토해내며 관정(灌頂·목욕)시켰다"고 했다.
석가모니의 탄생설화인 '구룡토수(九龍吐水)'다. 후세에 와서 탄생불 형상의 머리에 물을 붓는 행위에 복을 구하고 죄를 멸하는 의미가 덧붙여진다. <욕불공덕경(浴佛功德經)>은 "관불은 모든 공양의 으뜸"이라며 "현재에 부귀와 안락을 받고 병이 없이 오래토록 평온하고 원하고 구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사진2. 국보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
신비스런 청동 표면의 녹색과 물가풍경이 어우러진 최고의 걸작 정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의 확산 과정에서 등장한 제 존상들도 물과 연결 짓는다. 관음(觀音)보살 또는 관세음(觀世音)보살은 현실의 고통에서 중생의 소리를 들어 모두 구제해 주는 보살 중 가장 전지전능하면서 인기 있는 보살이다. 보살은 깨닭음을 얻었지만 중생 구제에 전념하려고 부처가 되기를 거부한 존재다.
5세기 초 인도출신 승려 축난제(竺難提)가 번역한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呪經)>은 "버드나무 가지와 정수를 갖추어 관세음보살에게 바치니 대비(大悲)관세음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어여삐 여기고 가엾게 여겨 구호하고자···"라고 했다.
관음보살의 물은 감로수(甘露水·한 방울만 마셔도 온갖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불법의 영액)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득한 미래에 출현해 수많은 중생을 구원으로 이끄는 미륵불 상징도 물이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의하면, 미륵은 인간 세상에 하생(환생)할 때 성직자계급인 브라만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브라만들이 포교를 위해 물을 뿌리던 데 근거한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법수는 중생을 제도하는 핵심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법수는 정수(淨水)로, 용변을 본 후 손을 씻는 촉수(觸水)와 엄격히 구분했다. 정수를 담는 병도 '정병(淨甁)'으로 호칭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무형의 법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이자, 각 존상의 소지품으로서 중요하게 다뤄졌던 것이다.
실제 정수는 불전에 바치는 기본 공양인 만큼 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정병을 배치하며 관음보살, 미륵불에게도 정병이 항상 들려져있다. 관음보살의 정병은 감로수를 담아 감로병 또는 보병(寶甁)으로도 호칭했다.
정병은 또한 승려의 필수품이었다. 서역 출신의 승려 구마라집(鳩摩羅什·344~413)이 한역한 <법망경(梵網經)>은 승려가 수행을 할 때 반드시 몸에 지녀하는 18가지 물품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정병(淨甁)과 녹수낭이 포함돼 있다. 녹수낭은 물속의 벌레를 걸러내는 여과주머니로, 맑은 물을 얻기 위한 도구다.

사진3.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 국보·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도에서 기원한 정병이 중국에 도입된 시기는 불교가 전래된 2세기 무렵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8세기에서 14세기 유행했다. 중국은 원대 라마교 영향으로 12세기 이후 명실상부한 정병은 사용되지 않는다.
동아시아 각 국에서 정병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했지만 대체로 몸통의 어깨가 넓은 광견형(廣肩形), 구형(球形), 편구형(扁球形), 마름모꼴(능형세장경·菱形細長頸), 군지형(軍持形) 등으로 분류된다.
이 중 군지형은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유형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옆쪽에 달린 새부리 모양의 구멍으로 물을 주입하고 꼭대기의 긴목에 있는 구멍으로 물을 따르는 구조다. 입수구와 출수구를 분리한 것은 더운 낮에도 물을 시원하게 보관하려는 목적이다. 독특한 외형의 이 군지형은 유독 고려에서 독보적으로 발전하면서 높은 경지의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 주목 받아왔다.
정병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7세기말. <삼국유사> 권 제4 '승전촉루(승전의 돌무더기)'조는
"현수국사가 승전법사를 통해 의상에게 '지금 서국(인도)의 군지(물병) 조관(대야) 한개를 보내 작은 정성을 표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부쳤다"고 했다.
현수국사(법장)는 당나라 승려로 의상대사와 동문수학한 인물이다. 신라 출신의 제자인 승전법사가 692년(효소왕 1) 귀국하자 그의 편으로 의상에게 정병을 선물 보냈던 것이다.
정병과 관련한 첫 기록으로, 이로 미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정병의 형태가 중국의 것이 아닌 인도의 군지형 임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엽 건축된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상과 범천상(梵天像·불교 수호신)에서도 정병이 관찰된다. 이를 포함해 조각 몇 점을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정병은 고려시대 제작됐다.
고려 정병의 구체적 모양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잘 적혀 있다.
"목은 길며 배가 불룩하다. 옆에는 부리가 있다. 물만 담을 수 있고 높이는 1척2촌(37.4㎝), 배의 지름은 4촌(12.5㎝), 용량은 3되이다."
전형적인 군지형 정병인 것이다. 새부리 모양의 주입구는 줄을 맬 수 있는 고리역할도 했다.
고려 정병은 인기가 높았다. <고려도경>도 "존귀한 사람과 나라의 관원, 사원, 민가에 다 쓴다"고 했다.
전형적인 형태의 정병은 그러나 고려 말부터 사라지고 조선시대에는 간소화된 주전자 모양의 물병이 생산됐다.

사진4. `청자 참외모양 정병`. 국보·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정병은 금속제와 도자기로 제작됐으며 일부 토기로도 만들어졌다. 바탕을 홈을 판뒤 이질적 소재로 메워 무늬를 표시하는 상감기법이 주로 쓰였다.
금속정병은 은입사(금속 표면에 음각선을 파 가는 은실을 박아넣어 문양을 새기는 기법)를 이용해 화려한 무늬를 연출한다. 청자정병은 상감법(자기표면에 무늬를 새기거나 무늬 면을 파내고 성분·색이 다른 흙을 메워 굽는 방식)을 통해 청자 본연의 색과 무늬의 다양한 색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은 금속정병 중 가장 탁월한 금속공예기술과 조형미를 자랑한다. 신비한 푸른 색조와 어우러진 문양의 서정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둥근 몸체의 어깨와 굽 위를 꽃무늬로 장식했으며 그 사이에 우거진 갈대와 수양버들이 늘어진 언덕이 있고 주위로 물새들이 헤엄치거나 날아오르는 평화로운 풍경을 묘사했다.
먼 산에는 철새가 줄지어 날고 물가에서 사공이 한가로이 배를 젓고있다. 뿐만 아니라 형태의 안정감이 높고 곡선의 윤곽도 물흐르듯 유려하다. 사실 이 정병의 은은한 녹색빛은 청동의 부식된 녹이다. 세월의 흔적인 녹이 정병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사진5. `청자 상감 모란국화무늬 정병`. 국보·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간송미술관 소장의 국보 '청자 상감 연못원앙무늬 정병'은 청아한 담록색 유약에 백토 상감만으로 새겨진 버드나무와 갈대, 연꽃, 원앙새 한쌍을 회화적으로 배치했다. 병 목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꽃을 하나씩 상감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팔각으로 기품있게 빚었다. 맑고 투명한 비취색 유약을 특징으로 하는 이른 시기의 상감청자다. 국보 정병은 두 점이 전부다.
보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 양각 갈대기러기무늬 정병', 국립대구박물관 소장의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중 정병, 불교중앙박물관 소장의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 중 정병' 등 3점이 있다.
이들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청자 참외모양 정병', '청자 음각 모란넝쿨무늬 정병', '청자 상감 모란국화무늬 정병', 여러 점의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 등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수작 정병들이 다수 소장돼 있다.
종주국인 인도는 물론 중국을 압도하는 고려 정병, 그 정제되고 세련된 아름다움은 찬란했던 우리 공예기술 황금기의 자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 <배한철의 역사를 품은 국보> - 34.인도의 물병, 고려예술의 황금기를 꽃피우다 / 매일경제, 202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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