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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의 발굴 이야기(41~78)

한문역사 2026. 3. 24. 15:20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41회~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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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1회~40회]  https://blog.naver.com/ohyh45/221206691100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1회~78회]  https://blog.naver.com/ohyh45/221334115302
 
 


41.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 '요절한 왕자'의 무덤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국보 91호, 국립중앙박물관.
 
 
경성에 머물며 금관총 발굴품을 정리하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1924년 4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에게 불려갔다. 경주 주민들의 거듭된 요청으로 고분 발굴을 실시하게 되었으니 책임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신라 고분에 관심이 많았던 차라 단박에 승낙했다.

경주 봉황대 남쪽에 동서로 배치된 폐고분 2기가 발굴 대상이었다. 5월 1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 직원들과 함께 발굴을 시작했다. 고분 주변에 여러 채의 초가집이 들어서면서 봉분은 이미 많이 깎여 나간 상태였다. 서쪽 고분의 경우 남아 있는 봉분 지름은 약 18m, 높이는 4.5m 정도였다.

우메하라는 금관총처럼 이 무덤도 봉분만 제거하면 바로 유물이 출토될 것으로 추정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봉분을 제거했지만 고분 상부를 덮었던 돌무지는 지하로 함몰된 양상이었고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무덤 주인공을 안치한 공간이 지하 3m 지점에 자리한 지하식 구조였던 것이다.
 
 
유물이 처음 발견된 것은 5월 19일이다. 이날 토제 방추차(紡錘車) 1점이 출토된 것을 시작으로 매일매일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5월 22일에는 정교한 금령(金鈴), 5월 27일에는 금관이 차례로 발굴됐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연이어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틀 후 토기와 칠기(漆器) 무더기를 조사하던 중 옆으로 쓰러진 토기 2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자(注子)의 형태였지만 의관을 정제한 주인과 그를 어디론가 안내하는 시종의 모습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학계에서는 요절한 왕자를 다음 세상으로 인도하는 모습이라 해석하고 있다. 실제 이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는 다른 것보다 작아 그러한 추정에 부합한다.

발굴 후 보고서를 준비하던 우메하라는 스승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제언을 받아들여 '서쪽 무덤'에 금령총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이 금령총이 94년 만에 다시 발굴된다고 한다. 경주박물관의 재발굴로 금령총을 둘러싼 수수께끼들이 풀리길 기대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주인상과 하인상


경주시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토기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주인상은 높이 23.4㎝, 길이 29.4㎝이고, 하인상은 높이 21.3㎝, 길이 26.8㎝이다.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배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하여 저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두 인물상은 두꺼운 직사각형 판(板)위에 다리가 짧은 조랑말을 탄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 모습이다. 말 엉덩이 위에는 아래로 구멍이 뚫린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긴 부리가 돌출되어 있어 비어있는 말의 뱃속을 통해 물을 따를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인물상의 모습은 말 장식이 화려한 주인상의 경우 고깔 형태의 띠와 장식이 있는 삼각모(三角帽)를 쓰고 다리위에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하인상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맨 몸으로 등에 짐을 메고 오른손에 방울같은 것을 들고 있어 길을 안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인물상 형태의 토기는 신라인의 영혼관과 당시의 복식, 무기, 말갖춤 상태, 공예의장(工藝意匠) 등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문화재청]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주인상, 국보 제 91호, 주인상 높이 23.4㎝·길이 29.4㎝, 경주 금령총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하인상, 국보 제 91호,하인상 높이 21.3㎝·길이 26.8㎝, 경주 금령총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주인상은 높이 23.4㎝·길이 29.4㎝, 하인상은 높이 21.3㎝·길이 26.8㎝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인상은 삼각형 관모()를 쓰고 마구()를 갖춘 말을 타고 있다. 인물 뒤에 있는 배형()의 구부()는 속이 빈 말의 몸통으로 통하는 병아가리이고 말꼬리는 손잡이 구실을 한다.

하인상은 주인상과 같은 형태이나 상투머리에 수건을 동여 매었고 웃옷을 벗은 맨 몸으로 등에 전대()를, 오른손에 방울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말의 앞가슴에 뻗친 것은 물을 따르는 부리이다.

삼국시대의 공예조각으로서는 드문 수작()이며, 1924년 가을에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제작된 기마인물형 토기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유물로서, 입수구와 출수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점으로 보아 액체를 따라 마시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이 기마형 토기는 당시 신라의 기마 풍습과 복식, 무기, 마구, 공예의장() 등에 대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두산백과]



42. 후포리 유적의 『마제석부』 - 신석기인들의 '집단 매장터' 




​1983년 3월 26일, 경북 울진군 후포리 주민들은 등기산 정상에서 조경수 식재용 구덩이를 파다 석기 34점을 발견했다. 4월 25일 한병삼 관장과 최종규 학예사 등 경주박물관 연구원들은 유적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긴급 발굴에 착수했다.

겉흙을 제거하니 남북 3.5m, 동서 4.5m 규모의 원형에 가까운 구덩이 윤곽이 확인됐다. 주위에는 띄엄띄엄 자연 석괴가 놓여 있었다. 흙을 조금 파냈을 때 그곳에 크고 작은 마제석부(磨製石斧) 여러 점이 쫙 깔려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석부 주변 흙을 노출하던 조사원들은 예기치 못한 발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많은 인골이 뒤엉킨 채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제석부, 후포리유적, 국립경주박물관


석부 발견 지점부터 바닥 면까지는 약 60㎝ 정도의 두께를 이뤘다. 그 사이에 여러 겹의 인골이 겹쳐 있었다. 인골은 최소 40구 이상이 묻혀 있었다. 감정 결과 남녀 비율은 비슷했고 치아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이 유적에선 주민들이 신고한 것까지 합치면 석부 180점, 석제 장신구 4점이 출토됐다. 석부 가운데 큰 것은 길이가 50㎝나 됐다.


최 학예사는 인체 각 부분의 뼈가 제 위치에 놓여 있지 않은 점, 두개골·대퇴골 등 비교적 굵은 뼈만 골라 묻은 점, 2~3구의 인골이 섞여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세골장(洗骨葬·육탈 후 뼈를 추려 다시 묻음)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석기를 분석하여 이 유적이 신석기시대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다.

근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무덤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발굴됐다. 신석기인들은 무덤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주검을 처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중에서도 울진 후포리의 사례는 특이한 편이다. 바다로 돌출된 산정에 자리한 자연 구덩이를 묘지로 택해 다수의 인골을 차례로 묻었으며, 세골장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점이 그러하다.


올해로 발굴된 지 35년이 지났지만 이 유적을 둘러싼 여러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새로운 발굴과 연구가 기다려진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3. 구의동 유적의 장동호(長胴壺), - 한강변의 고구려 유적



1977년 5월 29일, 서울시 구의동 소재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개토제(開土祭)가 열렸다. 정부가 추진하던 화양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부지에서 지름 25m의 큼지막한 고분 1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서울대박물관이 주관하고 여러 기관이 지원하는 방식의 발굴 조사였다.

윤대인, 윤덕향, 최은주 등 조사원들은 토층 확인용 둑을 남기며 조심스레 파 내려갔다. 며칠 만에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정연하게 쌓인 석축(石築)의 전모가 드러났다. 가장 높은 곳은 높이가 1.8m나 됐다. 무덤의 호석(護石)치고는 상당한 규모였다. 게다가 고구려 산성 같은 돌출부가 확인되자 유적의 성격을 둘러싼 의문은 커져 갔다








장동호(長胴壺), 구의동 유적, 서울대박물관




정상부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하면서 조사원들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네모난 무덤구덩이를 예상했지만 둥근 구덩이의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그 속에선 불타서 주저앉은 기둥과 판재, 온돌이 차례로 나왔고 유물이 쏟아졌다. 1354점의 철기 가운데 화살촉이 1300여 점에 이르렀다.


 
6월 13일, 김원룡 단장은 긴급히 조사위원회의를 소집했다. 참석한 조사위원 모두 처음 보는 유적이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어려웠다. 무령왕릉을 발굴한 바 있는 김 단장은 이 유적을 백제의 장례 전통과 관련지어 해석했다.

1989년에 이르러 새로운 해석의 단초가 열렸다. 서울대박물관 박순발 조교가 몽촌토성 출토품을 정리하다가 고구려 토기를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같은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구의동 유적 토기가 고구려 양식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어 최종택 학예사가 1991년 이래 구의동 유적 발굴품을 새롭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시설임을 밝혀냈다.

서울에 고구려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기까지는 이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고고학자들에게 '최초'란 양날의 칼과도 같다. '치명적 매력'의 이면에는 언제나 해석의 오류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4. 화왕산성의 『목각 여인상』- 연못 속의 목각 여인상

 
2005년 2월 7일 경남문화재연구원 정의도 실장과 김시환 연구원 등은 경남 창녕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발 739m의 화왕산 정상에서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발굴을 시작했다. 3년 전 찾아낸 연못 내부를 조사해 유적의 성격을 해명해볼 참이었다.







목각 여인상, 화왕산성, 국립김해박물관

 
 


정방형 연못의 호안 석축은 한 변 길이 14m, 높이 2m 규모였고 그 속엔 진흙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연못은 통상 오랫동안 사용되므로 어떤 유물이 어느 층위에서 출토되는지를 잘 살펴야 했다. 김 연구원 등은 켜켜이 퇴적된 흙을 조금씩 제거하며 조사에 임했다.

오래지 않아 백자 조각, 상평통보 등의 모습이 보였고 임진왜란 때 위력을 떨쳤다고 전하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출토되면서 이 연못이 조선시대에 사용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신라 토기 조각도 여러 점 섞여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기가 많아져 조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어느 날 연못 안에 쪼그려 앉아 꽃삽으로 진흙을 제거하던 조사원들은 나무토막 하나를 발견했다. 길이가 49.1㎝였고 한쪽이 둥글게 가공되어 있었다. 물로 깨끗이 닦아내니 마치 금방 만든 것처럼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목각 여인상이었다.

자세히 살펴볼수록 놀라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면엔 거친 붓 터치로 그려진 반라(半裸)의 여인상이, 다른 면에는 세로로 빼곡히 내려쓴 묵서가 있었다. 모두 판독하긴 어려웠으나 용왕(龍王)이란 두 글자가 선명했다.



게다가 정수리, 목, 몸통의 급소 6곳에 홈을 낸 다음 금속제 못을 박았던 흔적들이 확인됐다. 주변에선 9세기 무렵의 신라 유물들이 쏟아졌다. 마구, 차를 갈던 다연, 통나무를 깎아 만든 북[鼓] 몸체, 쇠솥 등이 포함돼 있었다.

발굴 성과가 공개되자 학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화왕산성에서 거행된 제사를 기우제로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뤘지만 목각 여인상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용왕에게 바친 인신희생의 대용품으로 보기도 하고, 특정 여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분신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5. 육곡리 7호분의 『은제 관식』- 백제 고위 관료의 상징



1986년 6월 13일, 안승주 관장과 이남석 학예사 등 공주사대박물관 조사원들은 충남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에서 한 달 예정으로 백제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왕도인 공주·부여와 달리 베일에 가려져 있던 지방의 고분 문화를 밝혀 볼 셈이었다.






은제 관식(측면), 육곡리 7호분, 국립공주박물관



발굴 대상 능선 곳곳엔 도굴꾼이 훑고 간 흔적이 뚜렷했다. 이 학예사는 도굴로 파괴된 1호분을 조사한 다음, 또 다른 고분을 찾아 나섰다. 1호분 서쪽으로 약 45m 떨어진 곳에서 지형이 조금 봉긋한 부분을 발견하곤 무덤일 것으로 생각하고 파보았다.


예상대로 석실이 있었다. 2호분이라 이름 붙인 이 무덤에서는 금동 귀걸이와 함께 다량의 토기가 출토됐다. 뚜껑접시(蓋杯) 1점에는 계란껍데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당초 모든 고분이 도굴되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2호분 발굴을 계기로 '중요한 발견'에 대한 희망이 생겨났다. 희망은 곧 현실이 됐다. 1호분 동쪽에서 찾은 무덤 가운데 7호분은 큼지막한 판석(板石)을 조립해 만든 석실분으로, 석실 단면이 육각형을 띠는 등 부여 능산리의 백제 왕족묘와 흡사했다.


 
석실 입구를 처음 열었을 때 어두컴컴한 바닥에 무엇인가 잔뜩 깔려 있었다. 손전등을 비추며 자세히 살피니 머리를 북쪽으로 둔 채 묻힌 성인 세 사람의 인골이었다.


그중 석실 서벽 쪽 인골의 두개골 주변에는 경험 많은 고고학자들도 좀체 발견하기 힘든 특별한 유물 1점이 놓여 있었다. 길이 18cm에 5개의 꽃봉오리 모양 장식을 갖춘 은제품이었다.

이 학예사는 이 유물을 '삼국사기' 등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백제의 나솔(奈率) 이상 관료들이 관에 꽂았던 은꽃(銀花)' 실물로 해석하면서 소유자를 7세기 무렵 세상을 뜬 백제의 고위 관료라 추정했다.



나주 흥덕리, 남원 척문리, 부여 하황리에 이어 네 번째로 발굴된 것이지만 학술조사를 통해 출토 맥락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첫 사례였다. 은제 관식은 그 후로도 간간이 출토되어 현재는 13점을 헤아리며, 백제 관료들의 복식 연구와 복원에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6. 만의총 1호분의 『토우장식 서수형 토기』- 조선 義兵의 무덤이 된 백제 고분 


2008년 12월 26일, 동신대 문화박물관 이정호 교수와 이수진·홍민영 연구원 등은 전남 해남 옥천면 성산리에서 만의총(萬義塚) 1호분 발굴을 시작했다.

이 무덤은 정유재란 때 왜군과 전투하다 순절한 의병들을 합장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년 전 실시한 시굴 조사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이 있었기에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확인해볼 참이었다.

수많은 의병이 묻혔다면 봉분에서 유골이 여럿 나올 가능성이 있어 조사원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흙을 걷어나갔다. 80㎝가량 내려간 곳에서 검은색을 띤 토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굴 때 이 층에서 흙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인(phosphorus) 성분이 많이 나와서 더욱 주의를 기울였으나 유골은 남아 있지 않았다 






토우 장식 서수형 토기, 만의총 1호분, 동신대 문화박물관 
 


아래로 더 파 내려가자 정연한 석곽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굴 때 조사원들을 놀라게 한 '예상치 못한 발견'이 바로 이것이다. 뚜껑 돌을 제거하자 인골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백제 웅진 시기의 유물이 쏟아졌다.

백제 도성에서 만든 귀금속 장신구와 함께 가야 토기, 왜에서 반입한 청동 거울 등이 포함돼 있었다. 만의총 1호분의 원주인은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토기 한 점이었다. 이 토기에는 용처럼 생긴 상상의 동물과 그 동물 등에 올라탄 남성이 조각되어 있었다. 원래 주자(注子)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구가 따로 달려 있지 않고 구멍만 뚫려 있었다. 망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옮기는 모습을 나타낸 듯하다.

이 교수는 만의총 1호분을 '국제 교역에 종사한 백제인의 무덤을 정유 재란 때 다시 활용한 복합 유적'이라 평가했다.


어찌 보면 남의 무덤을 파 다시 무덤을 쓴 것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둘 사이에는 900여 년이란 시차가 있다. 봉분이 무너져 무덤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재차 무덤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그 후 주민들의 정성스러운 관리 덕분에 백제 무덤은 도굴당하지 않은 채 원래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7. 덕천리 16호묘의 동검 -  겉흙 아래 숨어 있던 '초대형 묘역' 






동검, 덕천리 1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1992년 10월 20일, 유장근 경남대박물관장을 비롯한 조사단은 경남 창원 동면 덕천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그곳에 건설 예정이던 육군종합정비창 터에서 지석묘(支石墓)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추수를 끝낸 논밭엔 지석묘로 추정되는 큼지막한 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5기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1호묘라 이름 붙인 것만 홀로 떨어져 있었다.

11월 1일, 이상길 연구원이 책임 조사원으로 부임하면서 발굴에 속도가 붙었다. 1호묘에 대한 본격적 조사에 앞서 주변을 정리하던 조사원들이 석렬(石列)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예상과 달리 남북으로 62.3m, 동서로 21m나 이어진 정연한 석축이었다.

이어 큼지막한 상석(上石)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뒤 내부 조사를 진행했다. 주검이 안치되었을 석곽의 바닥은 지하 4m 지점에 있었다. 국내 선사시대 무덤 가운데 가장 깊은 것으로 기록됐다. 중요 유물 발견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이미 도굴된 뒤라 돌화살촉과 대롱옥[管玉] 일부만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연구원은 토층 및 유물 출토 양상 등을 근거로 석축이 1호묘의 묘역 시설이라 주장했지만 학계에선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문화재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한 위원이 '조선시대 건물지와 중복된 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며 핀잔을 준 일은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고심 끝에 이 연구원은 발굴 구역 전체의 겉흙을 제거하기로 했다. 지석묘를 발굴할 때 상석 주변만 조사하고 마무리하는 종전 방식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1호묘의 거대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무덤들이 속속 확인돼 23기로 늘어났다. 16호묘에서는 석검과 함께 동검이 출토됐다.

덕천리에서 이룬 새로운 발견이 기폭제가 되어 그 후 영남 곳곳에서 초대형 묘역을 갖춘 지석묘 발굴이 이어졌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 지석묘란 세상을 뜬 권력자의 무덤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의(祭儀) 공간이자 기념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8] 길두리 안동고분의 금동관 - 상자에 담긴 백제 금동관
 
2006년 2월 14일, 임영진 관장이 이끄는 전남대박물관 조사단은 전남 고흥 길두리에서 시굴 조사를 시작했다. 임 관장은 오래전부터 길두리 안동고분(雁洞古墳)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분구(墳丘) 정상에 드러난 덮개돌로 보아 전남 지역 다른 석실분과는 구조가 다를 것이라 추정했다.
 




금동관, 길두리 안동고분, 전남대박물관



직경 36m, 높이 3m에 달하는 분구의 정상부를 정리하니 도굴로 교란된 것 이외에도 2개의 덮개돌이 더 있었다. 그것을 제거하자 동서로 길쭉하게 배치된 석곽이 드러났다. 동쪽이 넓고 서쪽이 좁은 형태였고 흙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널길을 갖춘 석실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내부에 대한 본격 조사에 앞서 도굴 구덩이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부슬부슬한 흙이 채워진 도굴 구덩이가 바닥을 향해 계속 이어지자 '혹시나?' 했던 일말의 기대마저 여지없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런데 1.2m가량 하강한 지점에서 교란된 흙이 사라지고 조금 단단한 흙이 나타났다.

조사원들은 잔뜩 긴장한 채 노출을 계속했다. 도굴 구덩이가 끝난 곳 조금 아래에서 짙은 갈색으로 변한 흙이 보였다. 철기에 녹이 나면서 철기를 감싸고 있던 흙 색깔마저 바뀐 것이다. 곧 조사원들은 연이어 탄성을 터트렸다. 동벽 아래에서 갑옷과 투구, 중앙에서 청동거울과 칼, 서벽 쪽에선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백제 양식 금동관이었다. 백제 왕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흥반도에서 당대 최고급 물품이 출토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라움은 컸다. 게다가 다른 금동관과 달리 망자의 머리에 씌워준 것이 아니라 상 자에 담아 부장한 점이 특이했다.

3월 25일 임 관장이 '5세기 초 고흥반도 일대에 대규모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라며 발굴 현장을 공개하자 학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임 관장의 주장을 수용하는 연구가 많았지만 그와 달리 고흥반도가 근초고왕 대 이래 백제의 지방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해석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무덤 주인공을 왜에서 망명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9] 인안리 2호 집터의 『토기호 - 삼국시대 초기의 '투룸'
 




토기호, 안인리 2호 집터, 강릉원주대박물관



1989년 강원도 명주군 안인리 일대에 영동화력발전소 회(灰) 처리장이 설치될 예정이었다. 학계에선 인접한 하시동 신라 고분군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우려했다. 현장을 찾은 강릉대박물관(현 강릉원주대 박물관) 지현병 학예사가 공사 부지에서 여러 점의 토기 조각을 발견하면서 관심은 안인리 쪽으로 옮겨졌다.

강릉대·강원대·관동대 등 3개 대학 박물관이 연합팀을 구성해 조사를 시작한 것은 그해 12월 21일이었다. 강풍과 폭설 속에서 조사를 이어가던 지 학예사와 고동순 조교는 모래흙 아래에 묻혀 있던 집터 윤곽을 확인했다. 남북으로 배치된 크고 작은 집터 2기가 중복된 것처럼 보였다. 북쪽이 25.9㎡로 10.52㎡인 남쪽보다 넓었다.

둘 사이의 선후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좁은 도랑을 파기로 했다. 곧 점토를 다져 만든 작은 집터의 바닥이 드러났고 그것은 비스듬한 경사로를 따라 더 낮은 곳에 위치한 큰 집터의 바닥으로 이어졌다. 원래 2기가 아니라 하나였던 것이다. 남쪽에 작은 방, 북쪽에 큰 방을 갖춘 구조였다.

불탄 집터 안에서는 갑작스러운 화재에 살림살이를 그대로 놓아둔 채 피신한 듯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입구 쪽 작은 방에서는 숫돌과 철기가, 큰 방에서는 저장 및 취사용 토기류가 다량 출토됐다. 2호 집터에서는 서북한 지역 토기가 출토되어 눈길을 끌었다.

조사원들은 처음 발굴된 특이한 이 집터에 '여(呂)자형 주거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출입 시설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그것은 '철(凸)자형 주거지'라 부르기로 했다. 발굴은 1991년까지 이어졌고 발굴된 집터 는 40기로 늘었다. 동해안에서 처음 발굴된 철기시대 마을로 기록됐다.

이 유적 발굴을 신호탄으로 '여자형 집터'는 강원 영서뿐만 아니라 경기, 충청 일부 지역에서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처럼 특이한 구조를 갖춘 집터에 살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학계에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됐다. 마한, 백제, 그리고 예(濊)의 주민들로 보는 견해가 중심을 이룬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0]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의 『동식리 - 한 무덤에 묻힌 韓·中·日 유품
 




금동식리,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도르래를 설치하고 조심스레 체인을 당기자 덮개돌이 조금 들리며 컴컴한 석실 내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최 소장은 반짝이는 유물 실루엣을 확인하곤 덮개돌을 원위치에 내려놓으라고 다급하게 지시했다. 오랜 세월 고분 발굴을 주도한 베테랑의 '감(感)'이었다. 그 감은 적중했다.

급격한 환경 변화로 유물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 전문가들과 함께 조사를 이어간 것은 9월 초의 일이다. 덮개돌을 제거하고 내려다보니 석실 안은 1500년 전 무덤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고 바닥 전면에 유물이 쫙 깔려 있었다.

유해에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대도, 동제잔과 받침, 중국 남조에서 들여온 청자, 왜에서 만든 제의용 토기, 야장의 심벌 단야구(鍛冶具)가 포함되어 있었다. 압권은 주인공의 발에 신겼던 금동식리였다. 보존 상태가 완벽 해 육안으로도 인면조, 봉황 등 화려한 무늬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사단은 이 석실이 5세기 후반에 축조되었으며 마한 전통을 계승한 백제 지방사회의 유력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했다. 한·중·일 세 나라 유물이 한곳에서 발견된 점도 이채로울 뿐만 아니라 출토 맥락이나 보존 상태까지 완벽해 이 무덤은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의 기준 자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1.양산 금조총(金鳥塚) 금제조족(鳥足) - 황금으로 만든 鳥足 






금제 조족, 보물 1921호, 양산 금조총, 동아대박물관 




1990년 4월 13일, 심봉근 교수가 이끄는 부산 동아대박물관 조사단은 경남 양산 북정리와 신기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양산 부부총을 다시 발굴하고 그 주변 택지 개발 예정지에 유적이 있는지를 확인해볼 참이었다.

7월 말이 되어 부부총이 있는 북정리 쪽 조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조사원 사이에선 부부총 서남쪽 20m 지점에 있는 돌무지가 적석총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했다. 심 교수는 나동욱 조교를 지목해 발굴을 지시했다.

나 조교는 잡목과 근·현대 무덤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홀로 남아 발굴을 이어갔다. 며칠 만에 돌무지가 근래 쌓인 것임을 확인했고 길이 2.8m, 너비 1m 규모의 석실을 찾아냈다. 무덤 속엔 흙이 반쯤 채워져 있었고 교란된 것처럼 보였다.


흙을 제거하다가 토기 한 점을 발견한 나 조교는 작업을 계속해 잠시 후 은제 허리띠와 자그마한 금구슬 여러 개를 찾아냈다. 이어서 그가 발견한 금귀걸이 한 쌍은 신라 귀걸이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품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금동관과 금팔찌, 청동 다리미가 차례로 출토됐다. 작업에 몰입하던 나 조교는 처음 보는 유물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길이 2.8cm 금제 조족(鳥足)이었는데, 발가락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봉근 교수는 조사 결과를 종합해 무덤 주인공을 6세기 초 신라 귀족 여성으로 추 정하는 한편, 문화재위원들과 협의해 '금조총(金鳥塚)'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부부총이 발굴된 후 그 주변이 도굴의 표적이 되었고 근·현대 무덤이 많이 들어서는 와중에도 이토록 온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은 천운(天運)이라 하겠다.


 양산 부부총 발굴 유물이 모두 일본으로 반출된 현 상황에서 금조총 출토품은 오늘도 고대 양산 지역의 문화를 홀로 묵묵히 보여준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2. 지산동 44호분의 『장경호(長頸壺)』 - 왕릉에 함께 묻힌 사람들






장경호(長頸壺), 지산동 44호분, 경북대 박물관 




1977년 12월 1일, 윤용진 경북대 교수와 김종철 계명대 교수는 학생들과 함께 경북 고령 지산동 산 위에서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정부가 추진하던 가야 문화권 유적 정화 사업에 지산동 고분군 봉분 보수 건이 포함되었기에 훼손이 극심한 고분 2기의 내부 구조를 확인해 봉분 보수 작업에 참고할 예정이었다.

윤 교수팀이 44호분을, 김 교수팀이 45호분을 맡아 조사에 들어갔다. 토층 확인용 둑을 남기고 파 들어가니 무덤 한가운데에 예상대로 주인공의 유해와 부장품을 안치하려고 만든 큰 석실이 있었다. 그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 들어가자 자그마한 석곽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4호분에서 석곽 32기, 45호분에서 11기가 확인됐다. 토층 조사에서 석실과 석곽이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밝혔고, 이어진 조사에서 소형 석곽에 묻힌 인물들이 순장자라는 증거를 보강해 나갔다.

석실과 석곽 내부는 도굴당했는데도 다량의 토기와 함께 철제 무기와 마구가 쏟아졌다. 석실과 석곽에서 출토된 토기는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흡사했다. 44호분 출토품에는 백제에서 들여온 청동 그릇, 오키나와산 야광패(夜光貝)로 만든 국자 조각이 포함돼 있었다. 



윤 교수는 소형 석곽에서 출토된 인골에 대한 감정을 경북대 의대 해부학교실에 의뢰했다. 44호분에서 수습한 인골 22구를 감정한 결과는 놀라웠다. 대부분 20~30대 남녀였지만 50대 남녀와 10대 이하 여아도 포함돼 있었다. 한 석곽에 남녀가 포개어 묻히기도 했고 여아 2인이 합장된 사례도 있었다.

조사단은 발굴 결과를 종합해 44 호분이 대가야 왕릉이자 순장묘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발굴된 무덤이 바로 왕릉이었고 그 속엔 사후에도 왕을 모시기 위해 함께 묻힌 시종 수십 명의 유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가야 사회의 순장 풍습은 이처럼 우연한 계기에 확인됐다. 최근 발굴 성과를 통해서 순장은 대가야뿐만 아니라 금관가야와 아라가야에도 존재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3. 경기 용인 언남리 유적의 『철제 보습과  -  '祭物'로 쓰인 통일신라 쟁기 


1999년 6월 12일, 한신대박물관 이남규 관장과 권오영 교수, 조대연 학예사 등은 경기 용인 언남리의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그곳에 신축 예정이던 아파트 부지에서 다량의 유물이 채집되었기에 유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볼 참이었다.

겉흙을 제거하자 조선시대 백자 조각들과 함께 곳곳에서 시커먼 흙이 채워진 구덩이(竪穴) 윤곽이 드러났다. 몇 기를 파보았으나 특별한 유물이 나오지 않아 통상의 조선시대 유적이라 추정했다. 구덩이 지름은 2m 내외였고 깊이도 얕은 편이었다.








철제 보습과 볏, 언남리 유적, 한신대박물관 




며칠 후 구덩이 하나에서 예상치 못한 유물이 쏟아졌다. 보습(犁), 괭이, 낫, 도끼, 자물쇠와 자물통, 재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주변의 다른 구덩이에서도 철기가 출토됐다. 바닥면의 한쪽 벽에 치우쳐 우경(牛耕)에 사용하는 보습과 그것의 부품인 볏 여섯 세트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인위적으로 매납한 양상이었다. 보습 가운데엔 길이가 50cm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연이어 출토되는 철기 때문에 당초 7월까지였던 발굴 기간도 8월로 넘어갔다. 발굴이 끝날 무렵 철기를 헤아려보니 300여 점이나 됐고 보습은 15점이었다. 그때까지 국내에서 발굴된 통일신라 보습 전체보다 많은 숫자였다.

함께 나온 토기와 기와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묻힌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조사단은 이 유적이 철기를 만들던 곳이 아닐까 추정했지만 끝내 제철 관련 용해로나 단야로가 확인되지 않아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기로 했다.

농사에 써야 할 귀중한 농기구, 특히 잘 만든 보습과 볏 여러 세트를 땅속에 묻은 이유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나는 풍년을 기원하며 제물로 묻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의 와중에 중요한 철제 농기구들을 땅속에 묻고 피신했을 가능성이었다.


최근 통일신라 제사 유적에서 보습을 비롯한 농기구를 묻은 사례가 속속 확인되고 있어 언남리 유적의 성격 해명을 위한 실마리가 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4. 김포 운양동 유적의 『금 귀거리』 - 김포까지 내려온 夫餘의 금 귀걸이
 





금 귀걸이, 김포 운양동 유적, 국립중앙박물관
 

 
2009년 8월 13일, 한강문화재연구원 김기옥 선임연구원은 이성진·민경산 연구원 등과 함께 경기 김포 운양동의 야트막한 산 위에서 며칠 전 윤곽을 확인한 무덤의 내부 조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무덤구덩이와 둘레를 따라가며 판 도랑이 남아 있었다.

무덤구덩이 중심부에 토층 확인용 둑을 남기고 내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서북쪽 모서리를 조금 파들어 가자 창·괭이·낫·끌 등 철기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어 무덤 한가운데 바닥 가까이에서는 목관 안에 묻었던 길쭉한 철검과 화살촉이 가지런한 모습을 드러냈다.

둑을 제거하고 무덤 바닥면 전체를 드러내자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구슬이 쏟아졌다. 투명한 수정, 붉은색 마노, 푸른색 유리 등 1000점이 넘었다. 조사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구슬 무더기 속에 끼어 있는 금제품이었다. 서로 10㎝가량 떨어진 채 출토된 2점의 금제품은 마치 손톱처럼 생겼고 길이는 2.8㎝였다.
 

김 연구원은 '마한 사람들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좋아한다'는 역사 기록을 떠올리며 고민에 빠졌다. 발굴된 위치로 보면 귀걸이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발굴된 귀걸이와는 형태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9월 16일 발굴 성과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최병현 숭실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이 금제품이 만주에 분포하는 부여 귀걸이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송화강 중류에 위치한 부여의 귀걸이가 멀리 한강 하류로 전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 달 후 또 다른 무덤에서 같은 모양의 금 귀걸이 1짝이 추가로 발굴 됐다.

김 연구원은 발굴 성과를 종합해 운양동 주구묘(周溝墓·주변에 도랑을 두른 묘)가 '3세기경 만들어진 마한 유력자들의 무덤이고 금 귀걸이는 마한과 부여 사이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라 해석했다. 근래 한반도 중부 지역 여러 곳에서 부여계 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마한과 부여 사이의 교류를 해명할 단서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5. 울산 중산리 ID-15호묘 『오리모양 토기』- 철광산을 운영한 신라 사람들

1991년 7월 17일 이성주·김형곤 학예사와 박문수 연구원 등 창원대박물관 조사단은 울산 중산리(현 중산동)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아파트 터파기 공사 중 고분군(古墳群)이 훼손됐기에 긴급 발굴에 나선 것이다. 


현장은 참혹했다. 터파기를 하면서 잘려나간 무덤 잔해가 수두룩했다. 조사원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남아 있는 무덤이라도 조사하기로 했다.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겉흙을 제거하자 훼손되지 않은 무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났다. 어떤 무덤에선 쇠로 만든 갑옷과 투구가, 또 어떤 무덤에선 길쭉한 쇠창이 마치 철도 레일처럼 바닥에 쫙 깔려 출토됐다.

 

 


오리모양토기, 중산리ID-15호묘, 창원대박물관 
 
발굴 기한 연장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발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변에서 또 다른 공사가 벌어지면서 그곳까지 발굴하게 되었다. 차수를 달리하며 이어진 발굴이 모두 끝난 것은 1993년 5월의 일이다. 그 사이 조사된 무덤은 970여기에 달했고 출토 유물은 1만점을 넘어섰다. 
  
경주 시내에 주로 분포해 신라 왕경인(王京人)의 묘로 알려진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뿐만 아니라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 등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망라됐다. 출토된 유물은 경주 시내에서 발굴된 것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처럼 닮았다. 
 
토기 중에서는 장송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오리 모양 토기가 3점이나 출토돼 눈길을 끌었다. 중산리 고분군은 일약 '신라 고분 연구의 보고(寶庫)'로 떠올랐다.

출토 유물을 모두 정리하기까지 20여년이 걸렸다. 그 작업을 주도한 김학예사는 중산고분군의  규모가 이토록 큰 이유를 신라의 철광산 운영에서 찾았다. 중산리에 살던 사람들이 오랫동안 인근 달천광산(達川鑛山)의 철을 캐내고 제련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실제 중산리 고분군 인근에서 제련용 숯을 굽던 가마, 제련 관련 시설이 근래 속속 발굴되고 있어 중산리 고분군을 둘러싼 베일이 조금씩 걷히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6. 영천 용전리 목관묘 『청동제 꺾창집』 - 산골짜기의 '辰韓 우두머리' 무덤






청동제 꺾창집, 용전리 목관묘, 국립경주박물관



 
2004년 3월 10일, 정성희 학예관과 이재열 학예사 등 국립경주박물관 조사단은 경북 영천 용전리에서 열흘간의 일정으로 긴급 발굴에 들어갔다. 넉 달 전 중장비로 자신의 비탈진 밭을 파던 주민이 유물 15점을 발견해 신고했다. 현지답사에 나선 이 학예사 등은 유물을 추가로 확인했다.

중요 유적이 훼손되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이 학예사는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난 유물들부터 차례로 확인했다. 낫·도끼·재갈 등 철기와 함께 한(漢)에서 들여온 오수전, 금동제 쇠뇌[弩] 방아쇠틀 등 수십 점이 드러났다.

포클레인 이빨 자국이 선명한 생토면(生土面) 한복판에 길이 3.25m, 너비 1.66m 크기의 무덤구덩이 윤곽이 확인됐다. 이미 많은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깊이가 얕을 것으로 예상하고 파들어 갔다. 흙과 함께 구덩이를 굴착할 때 나온 크고 작은 돌들이 채워져 있었다.

좁은 구덩이 아래로 1m 이상 파내려 갔지만 바닥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50㎝가량 더 내려갔을 때 정교한 무늬가 조각된 청동제 꺾창집 하나가 벽에 붙은 채 발견됐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희귀한 유물이었다. 그 속엔 물체를 찍어 끌어당기는 데 사용하는 전투용 무기인 철제 꺾창이 끼워진 채 남아 있었다.

발굴 기간을 연장하고 조사를 이어갔다. 목관 내부, 무덤 바닥의 요갱(腰坑·부장품을 묻기 위해 파낸 구덩이) 등 곳곳에서 청동거울 조각, 유리구슬, 은제 칼집 부속구 등 100여 점의 유물이 더 쏟아졌다. 삼한에서 화폐처럼 쓰였다고 전해지는 주조철부(鑄造鐵斧·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든 도끼)가 25점이나 포함돼 있었다. 무덤의 깊이는 2.75m에 달했다.

조사단은 무덤 주인공을 기원전 1세기 무렵 철을 매개로 주변 지역과 교류하던 인물로 추정했고, 학계 일각에선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산골짜기에 나뉘어 살며 6개의 촌을 이루다가 마침내 신라를 세웠다는 고조선의 유민(遺民)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견해를 따르더라도 당시 영남 각지에 웅거하던 진한 '우두머리'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7. 암사동 집자리 「빗살무늬토기」 - 5500년 前 한강변 신석기 마을


1971년 11월 12일, 국립박물관 한병삼 고고과장은 김종철 학예사 등과 함께 서울 암사동 한강변에서 신석기문화 해명을 위한 연차 발굴에 나섰다. 암사동 유적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의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 다량의 빗살무늬토기와 석기가 노출되며 발견되었고, 광복 후 여러 조사팀이 간헐적으로 발굴하였으나 정확한 양상은 오리무중이었다.
 





빗살무늬토기, 암사동 집자리, 국립중앙박물관
 

 
조사원들은 추수를 끝낸 밭에 한강과 나란한 방향으로 길이 33m, 너비 12m의 발굴 구역을 설정한 다음 토층(土層) 확인용 도랑을 좁고 깊게 팠다. 강변에 형성된 자연제방이었기에 여러 색조의 모래층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맨 위엔 밭으로 경작되던 겉흙이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며 백제층, 신석기층 등 여러 층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었다.

삽과 호미로 흙을 걷어내며 조사를 이어가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신석기층에 도달했을 땐 3주일의 조사 기간 가운데 절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평면을 깨끗하게 정리하자 집자리 윤곽이 열(列)을 이루며 확인됐다. 집자리는 네모난 것과 둥근 것이 있었고 서로 겹쳐 있는 것까지 합쳐 8기나 됐다.

집자리에 번호를 붙인 다음 내부 흙을 제거해 나갔다. 약 30cm 아래에서 기둥자리, 화덕자리가 확인됐고 곳곳에서 다량의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석기가 출토됐다. 빗살무늬토기는 대부분 아가리 쪽이 넓고 바닥이 뾰족한 포탄 모양이었고 석기 가운데는 그물추도 포함되어 있었다. '5500년 전 신석기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발굴은 1975년까지 세 차례 더 진행됐다 
 
첫해 발굴한 곳 주변에서 18기의 집자리를 더 찾아냈고 다량의 유물을 수습했다. 특히 불탄 집자리가 발굴되면서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움집 구조를 복원해낼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였다. 움집을 짓고 빗살무늬토기를 쓰며 마을을 이룬 채 사는 모습 등 현재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신석기문화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 유적 발굴 조사의 성과에서 말미암은 것들이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8. 달성 37호분 『금동관』 - 흔적 없이 사라진 고분군





금동관, 달성 37호분 1곽, 국립대구박물관 




1923년 10월 23일 조선총독부 촉탁 노모리 켄(野守健) 일행은 대구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달성 남서쪽 여러 능선에 분포된 87기의 고분 중 6기가 대상이었다. 몇 달 전 땅 주인이 토사 채취를 목적으로 고분을 파괴하자 경찰서장은 토사 채취 중지를 명했고, 총독부 직원들이 고분 1기를 수습했다. 이어 땅 주인이 거듭 자신의 땅에 남아 있는 고분 발굴을 요청해 응한 것이다.

노모리 켄은 10월 27일부터 인부를 동원해 37호분 봉분을 파들어 갔다. 1주일 만에 석곽 윤곽을 확인하곤 서남쪽에 비스듬히 뉘어 있던 큼지막한 돌을 제거했다. 무덤 속은 어두컴컴했지만 도굴되지 않은 무덤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석곽 안으로 들어가 유물을 확인해보려다 일몰 시각이 가까워져 철수했다.

11월 5일부터 내부 조사를 시작했다. 처음 진입한 서남쪽에는 토기, 마구와 함께 등불을 밝힐 때 쓴 철제 등울(등잔을 받치기 위해 만든 물건)이 놓여 있었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2년 전 출토된 경주 금관총 금관과 비슷한 형태의 금동관 2점이었다. 무덤 주인공의 생전 지위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5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도 함께 진행하였는데 발굴하는 고분마다 유물이 쏟아졌다. 경주에서나 나올 법한 화려한 귀금속 장신구와 각종 마구, 무기가 쏟아졌다. 발굴 결과 달성 고분군에 묻힌 사람들이 서기 5~6세기 무렵 대구 일원을 장악한 세력이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발굴은 달성 고분군에는 또 다른 상처가 됐다. 무덤에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도굴범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신라 신문왕이 천도를 계획할 만큼 지리적 조건이 좋아 강력한 세력들이 웅거했던 대구. 5~6세기 무렵 대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던 핵심 고분군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근래 시가지 아래에 고분군 일부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견해가 제기됐다. 향후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9. 밀양 사촌 제철 유적 『송풍관』 - 낙동강변의 신라 제련소






송풍관, 사촌 제철 유적, 국립김해박물관
 
 
1998년 12월 7일 국립김해박물관 손명조 실장과 윤태영 학예사는 제철 유적을 찾으러 밀양으로 향했다. 경주 황성동 제철 유적 발굴에 참여하였던 손 실장은 조선시대 이래 철광산이 운영된 밀양에도 삼국시대 제철 유적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열흘이 다 되도록 밀양강 지류와 산골짜기 곳곳을 세밀하게 살폈으나 제철 유적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11일째 되던 날에는 밀양시 중심부를 온종일 조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조사를 마무리하기로 하는 순간 수석 하나가 손 실장의 눈에 스치듯 들어왔다. 다가서서 자세히 보니 제철 과정에서 나온 쇠찌끼(쇠똥·鐵滓)로 만든 것이었다. 주인에게 어디서 구했는지 물으니 '사촌마을 똥뫼'라 일러줬다.

'똥뫼'라 불리는 곳에 다다랐을 때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려 있었다. 마을 어귀의 감나무 밭인 그곳엔 쇠찌끼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가마에 산소를 공급할 때 쓰인 송풍관(送風管) 조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두 사람은 감격했다. 왜 동네 사람들이 그곳을 '똥뫼'라 불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1999년 겨울과 그 이듬해 봄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 전체를 조사할 수 없었기에 좁고 긴 도랑을 파 제철 시설을 확인하기로 했다. 쇠찌끼가 대부분인 겉흙을 제거하자 높은 열로 광석에 함유된 철을 뽑아내던 제련로(製鍊爐) 7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련로 가운데 일부는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주변에선 6~7세기 신라 토기와 함께 쇠집게, 제사에 쓰인 소형 토기 등이 나왔다.
 
이어진 지표조사에서 여러 곳의 제철 유적을 더 찾아냈다. 손 실장은 '낙동강변의 제철 단지는 6세기 이후 신라 중앙이 직접 운영한 것으로, 그곳에서 산출된 다량의 철은 낙동강의 수운을 통해 각지로 공급되었을 것'이라 밝혔다. 사촌마을 '똥뫼'에 자리한 제철 유적은 바로 '덕업일신(德業一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포부를 실현하던 신라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60. 천안 화정리 A-1호묘 『완두대도』 - 칠지도 만든 백제의 기술력
 
 
 
환두대도(세부), 화성리A-1호묘, 국립공주박물관
 
1991년 5월 2일 국립공주박물관 김길식 학예사와 남궁승·이호형 연구원은 충남 천안 화성리 일대에 대한 지표 조사에 나섰다. 1969년 그곳에서 중국 동진 청자와 백제 유물이 다수 발견된 적이 있어 관련 유적이 분포할 것이라 예상했다. 승합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포클레인으로 땅을 판 흔적이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절반가량 깨진 토기 한 점이 나뒹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백제 토기였다. 깊게 파인 구덩이 벽면에서 길이가 2.7m인 목관묘 윤곽과 그 속에 묻힌 철기를 확인했다. 공사가 재개되거나 큰비라도 오면 유적이 멸실될 것은 자명했기에 긴급 조사에 들어갔다. 남아 있는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니 바닥에 환두대도와 쇠창이 한 점씩 남아 있었다.

박물관으로 복귀해 유물을 정리하던 김 학예사는 대도의 둥근 고리 쪽 색깔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곤 곧바로 공주 시내 한 내과를 찾았다. 어디가 아픈지를 묻는 원장에게 "실은 이 칼이 아파요"라며 X-선 촬영을 부탁했다. 원장은 갑작스러운 부탁에 놀라면서도 촬영을 허락했다. 곧이어 필름을 확인하는 순간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났다. 둥근 고리 전면에 유려한 당초 무늬가 상감(象嵌)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감이란 쇠에 좁은 홈을 파고 그 속에 다른 금속을 끼워 무늬를 표현하는 고급 기술이다. 이 대도는 백제 유적에서 발굴된 최초의 상감 유물로 기록됐다. 공주박물관 관계자들은 이 대도를 서둘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로 옮겼고, 이상수 담당관은 정밀한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은선으로 표현된 당초문을 드러냈다
 
김 학예사가 이 대도를 일본으로 전해진 칠지도(七支刀)와 마찬가지로 4세기 무렵 백제 왕실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 발표하자 한·일 양국 학계 반응은 뜨거웠다. 가까스로 멸실의 위기를 넘긴 화성리 대도에는 글로벌을 지향하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기화한 다음 그것을 이웃 나라로 전해주던 백제 문화의 한 단면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 2019. 2.13.
 
 
61. 광주 신창동 유적  『현악기』 - '타임캡슐'이 된 저습지
 
 
 
현악기, 신창동 유적, 국립광주박물관
 
1992년 6월 26일 국립광주박물관 조현종 학예사와 장제근·은화수 연구원은 광주 신창동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1963년 발굴된 '신창동 옹관묘' 주변에 문화재 조사 없이 도로가 난다는 사실을 인지한 조 학예사는 관계 기관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미 중장비로 공사를 하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공사를 중지시킬 수 있었다.

길이가 250m에 달하는 도로 부지 전체를 발굴할 수 없었기에 몇 지점을 선정해 파보기로 했다. 구릉 사이에 자리한 골짜기의 경우 일부분을 바둑판처럼 구획한 다음 한곳 한곳 조심스레 파 들어갔다. 교란된 겉흙을 먼저 제거하고 1m가량 파 들어가니 밝은 색조의 단단한 흙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멈출까 잠시 고민했지만 조금 더 파보기로 했다. 단단한 층을 걷어내자 암반층이 나오리란 예상과 달리 펄이 있었다.

꽃삽으로 펄을 조금씩 걷어내자 빗, 칼자루, 괭이, 싸리비 등 목제품과 함께 불탄 쌀과 벼 껍질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목제품은 방금 공방에서 만든 것처럼 보존상태가 완벽했다. 조사원들은 귀중한 유적을 찾았음에 환호했지만 막대한 양의 목제품을 제대로 수습해 보존 처리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발굴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유적은 곧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도로는 우회하기로 했다.

차근차근 준비한 끝에 1995년부터 연차 발굴을 시작했다. 옻칠한 칼집, 부채자루, 신골, 수레 부품, 활, 발화구(發火具), 문짝, 비단 조각 등 미지의 세계를 알려주듯 새로운 유물들이 쏟아졌다. 특히 1997년에 발굴된 현악기는 가야금의 원형을 추정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였다. 또한 토양 샘플에선 기생충 알이 퇴적층에[서 여러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신창동에 자리한 작은 연못은 마치 '타임캡슐'처럼 수많은 유기물을 2000년 이상 안전하게 품고 있다가 고스란히 토해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야트막한 언덕에 모여 살며 벼농사를 지었음을, 그들 가운데 일부는 비단옷을 입고 수레를 타거나 현악기를 연주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2019. 2.20.
 
 
62. 경주 보문동 합장분 『금 귀골리』 - 가장 아름다운 금 귀걸이
 
 
 
귀걸이, 국보 90호, 보문동 합장분, 국립중앙박물관


 
1915년 7월 6일 도쿄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일행은 경주 보문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발굴 대상은 명활산성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자리한 고분 가운데 하나였다. 그곳은 키 작은 소나무 몇 그루만 자라는 민둥산이었고 산자락 곳곳엔 마을 사람들이 쓴 오래지 않은 무덤들이 들어차 있었다.
 
측량을 마친 다음 봉분 서쪽부터 파 들어갔다. 흙을 조금 걷어내자 무덤 천장을 덮었던 돌들이 동서로 열을 이루며 드러났다. 세키노 일행은 동쪽 끝이 석실 입구일 것으로 여겨 그곳을 통해 안으로 진입하기로 했다. 겹겹이 쌓인 돌을 하나둘 제거하자 조금씩 빛이 스며들며 석실은 1400여 년 만에 속살을 드러냈다.

석실 안을 살피니 관대(棺臺)와 석실 입구가 보였다. 파 들어간 곳이 석실 입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관대 위엔 무덤 주인공의 뼛조각들과 함께 관 손잡이, 금동 및 은팔찌가 있었고 석실로 진입할 때 무너져 내린 흙무더기 아래에서 금 귀걸이 한 쌍이 발견됐다. 귀걸이 표면에 금실과 금 알갱이를 가득 붙여 화려하게 꾸민 것이었다.

이어 봉분 중앙을 파 들어가니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1기가 있었고 그 속에서 금동관, 금 귀걸이, 장식 대도 등 수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세키노 일행은 부장품을 기준으로 석실을 아내 무덤, 적석목곽을 남편 무덤으로 추정하며 이 무덤을 '보문리 부부총'이라 부르기로 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011년에 이 무덤 발굴 보고서를 간행하며 무덤 주인공이 부부라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학계의 견해를 수용, '보문동 합장분'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보문동 합장분은 6세기 중엽 경주에 살던 신라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써온 무덤 양식을 버리고 석실묘를 새롭게 수용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리고 석실 출토 금 귀걸이는 일찍이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 귀걸이'라 찬탄한 이래 줄곧 신라 황금 문화를 상징하는 명품으로 주목받았고 1962년 귀걸이 가운데 처음으로 국보 반열에 오르게 됐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 2019.3.6.
 
 
 
63. 늑도유적, 점토대토기 - '국제무역항' 늑도

 
 
점토대토기, 늑도유적, 부산대박물관




1985년 10월 1일 부산대박물관 신경철 연구원은 안재호·전옥년 등 후배들과 함께 경남 삼천포(현 사천)의 작은 섬, 늑도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1979년 유적의 존재를 처음 인지한 후 여러 차례의 지표조사를 통해 다량의 유물을 수습하였기에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밝혀볼 셈이었다.


배를 타고 늑도로 이동한 다음 조개무지와 토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한 몇 곳을 선정해 차례로 파 들어갔다. 첫 지점에선 겉흙을 조금 걷어내자 조개무지가 나타났고 그 아래에서 둥글거나 네모난 집자리 여러 기가 드러났다. 


토기 가운데는 입술 부위에 점토 띠를 덧붙여 만든 것이 많았고 철기도 몇 점 출토됐다. 다른 지점에선 어린아이를 묻은 옹관묘, 성인이 묻힌 토광묘가 여러 겹으로 겹친 채 발견됐다.

1986년 가을 신 연구원이 한국고고학 전국대회 석상에서 '늑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적이며 기원전 1세기 무렵의 국제 교역 중심지였을 것'이라 설명하자 학회에 참석한 학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학계에선 한반도 남부 지역이 언제쯤 철기시대로 진입했는지, 일본 열도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에 관한 후속 연구가 이어졌다.



1998년 이 유적이 도로공사 부지에 포함되자 여러 기관이 나누어 발굴했다. 지금까지 이 유적에서는 건물지 289기, 무덤 174기, 구덩이 397기와 함께 제철 관련 시설이 확인됐으며 출토된 유물은 수만 점을 헤아린다. 현지에서 만든 토기가 주종을 이루지만 중국 한(漢)나라 양식의 토기와 청동 유물, 일본 야요이(彌生) 시대 토기가 다량 포함되어 있어 글로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간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 남해안의 작은 섬 늑도가 고대 동아시아 교역의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늑도에 자리한 항구의 경우 지금은 물고기잡이 배들이 드나드는 곳이지만 그 옛날엔 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여러 나라 선박들이 기항하던 곳이었고 동아시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어울리며 자신들이 가져온 물품을 사고팔던 무역항이었던 것이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 2019, 3. 13.
 
 
 
64.국립광주박물관 청동방울(팔주령), 국보 143호, -祭政一致' 사회의 족장묘
 
 
 
청동방울(팔주령), 국보 143호, 국립광주박물관.

 
1971년 12월 24일 국립박물관 윤무병 학예관과 문화재연구소 조유전 학예사는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임에도 전남 화순 대곡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나흘 전 출장길에 전남도청을 찾았던 조 학예사가 그곳에서 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깜짝 놀랄 만한 유물 11점을 확인하곤 윤 학예관과 함께 긴급 발굴에 나선 것이다.

자초지종을 확인하던 조 학예사는 하마터면 '국보급 유물'이 영영 사라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일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해 여름 동네 주민이 집 둘레에 배수로를 파던 중 땅속에서 여러 점의 유물을 발견해 보관하다가 엿장수에게 넘겼으나 다행히도 엿장수가 그것이 유물임을 알아보고 신고했던 것이다.

유물이 발견된 곳은 영산강 상류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였다. 윤 학예관과 조 학예사가 교란된 흙을 제거하자 곧이어 무덤구덩이의 윤곽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큼지막한 목관 조각이 발견됐지만 기대했던 유물은 더 이상 출토되지 않았다. 엿장수가 신고한 청동기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 유물로 인정받아 이듬해 3월 국보로 지정됐다.

2008년 2월 국립광주박물관 연구원들은 대곡리 무덤에 대한 재발굴에 나섰다. 좋은 사진을 촬영해 활용하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세운 다음 폐가로 변한 민가의 일부를 헐어내고 발굴을 시작한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민가 아래에 묻혀 있어 조사하지 못했던 곳을 발굴할수 있었고,남아 있던 흙속에서 동검 2점을새로이 찾아냈다. 학계에선 이 무덤 주인공이 기원전 4~3세기 무렵 청동제 무기를 기반으로 위세를 떨치던 족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동거울이나 청동방울 등을 이용해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주며 제사장 역할을 함께 수행한 인물이라 추정했다. 
 
마을 주민과 엿장수의 손을 거쳐 가까스로 국민 모두의 국보로 거듭난 대곡리 청동기는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한 페이지를 채워주며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 2019. 3.20.
 
 
65.추암동 B지구 고분군의 『대가야 양식 토기』 -'강제 이주'된 가야 유민들
 
1992년 6월 1일 관동대박물관 이상수 연구원은 이용관 조교 등 조사원들과 함께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북평공단 조성 부지에서 확인된 여러 유적 가운데 신라 고분이 분포하는 'B지구'를 선정해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밝혀 볼 참이었다.

조사 대상지는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산 위였다. 산 정상부의 겉흙을 걷어내자 곳곳에서 석실묘와 석곽묘가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은 작은 편이었고 길이가 2m 내외인 것이 많았다. 유물 가운데 다수는 6~7세기 신라 토기였다.

 
 
 


출대가야 양식 토기, 추암동 B지구 고분군, 국립춘천박물관
 
 
10월 초에 이르러 길이가 1.98m에 불과한 '가-21호묘'에서 특별한 유물이 출토됐다. 신라 금관의 모티브를 계승한 동관(銅冠)이 그것이다. 신라 금관에 비해 문양은 현저히 퇴화된 것이며 성년 여성의 인골이 함께 출토됐다. 이 연구원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후대의 무녀에 비교할 수 있는 '종교적 특수 신분자'로 추정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무덤은 55기나 됐다. 발굴을 끝내고 유물을 정리하던 이 연구원은 신라 토기와 사뭇 다른 일군의 토기가 섞여 있음을 인지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이나 합천 삼가고분군에서 출토된 바 있는 대가야 양식 토기였다.

'대가야 토기가 왜 이토록 먼 곳에서 무더기로 나온 걸까?' 이 연구원은 고민에 빠졌다. 처음엔 교류의 산물일 가능성도 고려했지만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점, 대가야 멸망기의 토기에 한정되는 점, 일부는 추암동 일원에서 제작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사민(徙民)의 결과뮬알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562년 나라가 패망하자 망국의 유민으로 살아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을 대가야 사람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는 정든 고향에서도 쫓겨나 먼 타지로 '강제 이주'된 것 같다. 추암동고분군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며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갔을 대가야 유민들의 삶을 오늘날까지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65. / 조선일보, 2019. 3.27. 






66. 흥덕사지의 『청동 금구』 - 직지심체요절의 산실


유네스코가 1972년을 '세계 도서의 해'로 지정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동양의 보물, 책'이란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그곳에 근무하던 박병선 사서는 특별전의 한국 코너에 전시할 고서를 찾으려 서고 곳곳을 뒤졌다. 이윽고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 한 권을 발견했다.

박 사서는 그 책 말미에서 '1377년 청주목 외곽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찍어냈다'는 내용을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아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음을 보여주는 실물 자료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노력으로 직지는 유명해졌지만 그것을 찍어낸 흥덕사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청동 금구, 흥덕사지, 국립청주박물관
 


1984년에 문제 해결의 단서가 나왔다. 그해 11월 청주대박물관 박상일 연구원이 청주시 운천동에서 절터 하나를 새로이 찾아냈지만 택지 공사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는 일이 벌어졌다. 남아 있는 부분에 대한 긴급 발굴 조사가 이듬해 여름 시작됐고, 10월 8일에 이르러 박 연구원이 청동 금구(禁口·쇠북)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중장비 삽날에 찍혀 원상을 잃었지만 측면에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가운데 '흥덕사'란 표현이 있었다.

조사단은 발굴 성과를 종합해 이 '흥덕사'가 직지를 찍어낸 흥덕사와 같은 곳임을 밝혔다.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의 산실이 비로소 확인된 것이었다. 발굴 결과는 곧 외부로 공개돼 국내외 수많은 언론에 대서특필됐고 정부는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해 흥덕사지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다.

 
우리문화 유산 가운데 '세계 최초'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문 현실에서 직지에 대한 관심은 정부·학계뿐만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서도 뜨거웠다. 특히 청주시의 경우 직지를 도시의 대표 브랜드로 만들었고 국내에도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직지 찾기 운동에 적극 나섰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2001년 그간의 노력이 일부 결실을 맺어 직지는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66. / 조선일보, 2019. 4.10. 

 
 
67. 청해진 유적, 큰항아리 - 장보고의 청해진
 
 
 
장보고의 청해진 큰항아리
 
 
우리 역사에서 장보고만큼 글로벌한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에 관한 '영웅적 스토리'가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다. 그는 낮은 신분이란 한계에서 벗어나려고 당(唐)으로 건너가 출중한 무예로 성공했다. 신라인들이 당으로 잡혀와 노예로 팔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귀국 후 흥덕왕에게 해적 소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청해진 설치를 건의했다.

청해진 대사로 임명받은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해상 교역로를 장악해 당·신라·일본 사이의 교역에 관여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왕위 쟁탈전이 한창이던 신라 정치 무대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결국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서라벌에서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청해진에 다시금 조명이 가해진 것은 1982년의 일이다. 그해 가을 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은 전남 완도군 장좌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에 나섰다. 완도 본섬에서 동쪽으로 180m가량 떨어진 작은 섬 장도(將島)는 섬 전체가 하나의 방어 시설로 조성되어 있어 특이했다. 조사단은 그곳이 청해진의 옛터일 가능성을 확인했고 1991년부터 2001년까지 곳곳을 발굴해 유적의 실체를 밝혔다.

섬을 에워싼 토축 성벽은 견고했고 길이가 890m에 달했다. 해변을 따라가며 조밀하게 시설된 목책(木柵)은 펄에 잠겨 있었기에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다. 성안에서는 정연한 구조를 갖춘 건물지가 여러 채 드러났고 중국 청자와 당나라 동전을 비롯한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구덩이 하나에는 큼지막한 항아리와 함께 토기, 쇠솥, 청동그릇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장보고가 활약했던 9세기의 물품이다

청해진 유적 발굴 후 장보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높아졌다. 그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영웅인지 혹은 반란의 우두머리인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됐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청해진이 오랫동안 번성했다면 9세기의 신라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67. / 조선일보, 2019. 4.17. 
 
 
68. 동래읍성 해자의 『투구』(부산박물관) - 동래읍성 해자 속 백성들의 주검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만8700명은 700여척의 배로 부산포를 침략했다. 이튿날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장졸들과 함께 분전했지만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순절했다.

이틀 후 왜군은 동래성 공략에 나섰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는 왜군의 최후통첩에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줄 수는 없다(戰死易假道難)'며 대적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고 송 부사를 비롯한 장졸과 백성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400년이 더 지난 시점에 그들 중 일부의 유해가 비참한 모습을 간직한 채 발굴됐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이 2005년 7월부터 부산 도시철도공사 수안역사 건설 부지에서 발굴을 진행하던 중 정연한 형태의 석축열 두 줄을 찾아냈다. 조사가 진전되면서 동래읍성 해자(垓字)의 가장자리 석축임이 밝혀졌다.
 
해자에 매몰된 흙을 걷어내고 바닥 쪽으로 내려가니 방어용으로 박아 놓았던 나무 말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노출하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펄 속에 묻혀 있던 다양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활, 화살촉, 창, 갑옷과 투구 등 전장에서 쓰인 것이 많았고 투구 1점에는 동래진상(東萊鎭上)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선군의 유품임을 알 수 있었다.

이어 조사원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인골들이었다. 남성 59개체, 여성 21개체, 소아 1개체 이상이라는 인골 전문가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예리한 칼날에 베이거나 혹은 화살의 관통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일부에서는 처형의 흔적도 확인됐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래부 백성들은 무참히 학살되었고 그들의 주검조차 거둘 사람들이 없었기에 차디찬 해자 속에 내버려졌던 것이다. 조선 전역을 유린하며 살상을 자행한 왜군의 잔학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조선 조정도 학살의 방조자에 다름 아니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68. / 조선일보, 2019. 4.24. 
 
 
 
69.송학동 1호분의 『말띠드리개』 - 소가야의 왕족 무덤
 
1983년 6월 경남 고성 송학동 1호분이 일본 고훈(古墳) 시대 특유의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한·일 두 나라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한반도에 정말 일본 특유의 무덤이 분포하는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보아야 할지가 주요 논점이었다.

근래까지 해남, 광주, 함평, 고창 등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방후원분 14기가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9기를 발굴한 결과 대부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학계에선 매우 가까이 지낸 백제와 왜(倭)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라 해석하고 있다.
 
 



말띠드리개, 송학동 1호분, 동아대 박물관.
 
 
전방후원분 논쟁을 불러온 송학동 1호분이 다시금 조명받은 것은 1999년 일이다. 그해 11월 15일 동아대박물관 조사단은 이 무덤에 대한 시굴 조사에 나섰다. 송학동 고분군 정비 공사에 앞서 정확한 무덤 구조를 확인해볼 셈이었다. 
 
조사 결과는 애초 예상과 달랐다. 길이가 62.3m에 이르는 송학동 1호분은 한 무덤이 아니라 여러 무덤이 연접된 것이었다.

조사단은 유적 성격을 밝히기 위해 전면 발굴로 전환했다. 발굴을 모두 끝내고 보니 송학동 1호분 속에는 크고 작은 무덤이 17기나 들어 있었고 전방후원분은 아니었다. 가장 큰 석곽은 길이가 8.25m나 돼 소가야의 왕묘로 보아 무리가 없다. 도굴당했는데도 무덤 곳곳에서는 유물이 수백 점 쏟아졌다. 
 
소가야 토기가 가장 많았지만 대가야 토기, 백제 청동 그릇, 신라 말띠드리개(杏葉)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왜에서 들여온 토기도 다수 섞여 있었다.

남해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송학동 1호분은 고성에 자리 잡은 소가야(小伽倻) 왕과 그 일족의 무덤이었다. 고령의 대가야보다 작았기에 소가야라 하던 나라. 그 나라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덤 속 다양한 국적의 유물이 보여주듯 바닷길을 장악하고 국제적 교역을 주도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69. / 조선일보, 2019. 5.8. 
 
 
70.충북 청원군(현 세종시) 남성골산성의『금 귀걸이』
-백제 숨통 조였던 고구려 전초기지
 
 
 
금귀걸이, 남성골산성, 국립청주박물관


서기 475년 9월 고구려의 장수왕은 정예 군사 3만명을 이끌고 백제의 왕도 한성을 포위했다. 이어 네 방면으로 협공하며 성문을 불태우자 다급해진 백제 개로왕은 기병 수십 명과 함께 성문을 열고 달아나다 잡혀 목숨을 잃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이때 백제가 패한 것은 왕이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국력을 낭비하고 고구려의 위협을 간과했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왕의 동생 문주(文周)가 신라로 가서 군사를 빌려 오는 사이 이미 백제의 왕도는 폐허로 변했고 남녀 8000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고구려와 쟁패하며 강국이라 자부했던 백제가 패망의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그는 남은 백성을 이끌고 황급히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다. 오랜 숙적 백제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에서 고구려가 그대로 회군했을 리 없지만 그다음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 없어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 궁금증은 2001년에 우연히 풀렸다. 충북 청원군(현 세종시) 부강리에 있는 남성골산성이 도로 공사 부지에 포함되자 충북대박물관 조사단은 6월부터 시굴 조사를 시작했다. 이 산성은 지표조사 단계에서 확인되었으나 시대나 구조는 알 수 없었다. 조사원들이 겉흙의 일부를 제거하자 여기저기서 목책(木柵)을 세웠던 큼지막한 기둥 구멍이 확인됐다.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해 9월부터 발굴로 전환했다. 조사 대상지 전면을 노출하니 산 위를 감싸 도는 두 겹의 목책이 전모를 드러냈다. 성 안에서는 온돌을 갖춘 집터, 저장 구덩이, 식수 저장용 목곽고(木槨庫)와 함께 고구려토기,철기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퇴적토 속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귀걸이였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경기 남부와 충북 지역 여러 곳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남긴 성책과 무덤이 차례로 발굴됐다. 고구려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해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한강 이남 지역 곳곳을 손아귀에 넣었음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그 가운데 남성골산성은 백제의 숨통을 조이던 고구려의 최전선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0. / 조선일보, 2019. 5.15. 
 
 
71. 전남 강진 사당리 가마터의 『청자 참외 모양 병 조각』 - '천하제일 고려 청자'

자기(瓷器)는 중국 문화의 상징이라 일컫는다. 그 시작은 강남 지방 월주요(越州窯)에서 탄생한 청자로, 이후 오랜 세월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그런데 남송 때에 이르러 예상치 못한 적수가 나타났으니 바로 고려 청자였다. '비색(翡色) 청자가 날로 정교해진다'거나 '고려 청자는 천하제일로 다른 곳에서 모방할 수 없다'는 남송 사람들의 찬탄이 나오기도 했다.

고려 왕실이나 귀족 저택에서는 일상용 그릇뿐만 아니라 촛대나 베개도 청자로 만들어 썼다. 심지어 '고려사'에는 의종 때에 궁원(宮苑)에 '양이정'이라는 건물을 지으면서 지붕을 청자로 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고려 사람들의 청자 사랑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청자 참외 모양 병 조각, 사당리 가마터, 국립중앙박물관
 

최고급 고려 청자의 제작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됐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64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러한 궁금증이 한꺼번에 풀렸다. 그해 5월 국립박물관 조사팀은 전남 강진군 사당리에서 청자 가마터를 찾아냈고 9월 22일 발굴을 시작해 궁궐에 쓰인 청자 기와를 비롯한 최고급 고려 청자를 다수 수습하였던 것이다.

발굴은 1977년까지 9차에 걸쳐 진행됐다. 그 사이 출토된 유물은 병, 주자, 촛대, 벼루, 향로, 베개, 바둑돌 등 10만점이 넘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청자 병이었다. 비록 파편일지라도 활짝 핀 참외꽃 모양 입술, 잘 익은 참외처럼 팽팽한 양감을 지닌 몸체에 주름치마 모양 받침을 갖추었다. 최고의 비색 청자로 이름 높은 국보 94호 참외 모양 병을 빼닮은 것이었다.

이 발굴을 통해 고려 왕실에서 쓴 청자를 강진 사당리 일대에서 구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개경에서 사용할 청자를 왜 이토록 먼 바닷가에서 구웠을까. 그것은 사당리 일대가 청자 생산에 필요한 좋은 흙, 풍부한 연료를 갖추었기 때문이며 그에 더해 청자를 수송하기 편리한 해상 교통 요지라는 점도 고려됐다. 그런 천혜의 자연 조건에 장인들의 노력이 더해져 '천하제일 고려 청자'를 만들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1. / 조선일보, 2019. 6. 5. 
 
 
 
72. 사천왕사 터 『녹유신장상 조각』 - 사천왕寺, 신라 문무왕의 승부수

 
 


녹유신장상 조각, 사천왕사 터, 국립경주박물관.
 
 
통일의 대업을 이뤘으나 전쟁의 상처는 너무나도 컸다.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고 곳간은 텅텅 비었다. 그런 현실에서 당나라의 대군이 신라 바닷가에 출몰하자 문무왕은 낭산 자락에 비단으로 절을 짓고 다급히 밀교(密敎) 의식을 거행하게 했다.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니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신라는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고 곧이어 이곳에 사천왕사(寺)를 세웠다.

사천왕이란 수미산 중턱 사방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신라에선 호국의 신으로 각광받았다. 사천왕사의 창건은 결국 불력을 이용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려 한 문무왕의 승부수였던 셈이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화장한 뼛가루를 동해에 뿌려라. 바다의 용이 되어 외적을 물리치려 한다'고 유언했다. 그를 추념하는 비석이 사천왕사에 세워졌다.

잡풀만 무성했던 낭산 자락이 다시금 주목받은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다량의 기와 조각과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이 발견되면서 사천왕사 터가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절터를 가로질러 철도가 부설되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2006년 이래 진행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정밀 발굴로 문무왕의 호국염원이 서린 사천왕사가 전모를 드러냈다. 특히 신라 최고의 소조(塑造) 공예품으로 지목되는 녹유신장상이 탑 기단부 장식품이었음이 밝혀졌다.

동해남부선 복선화 사업의 완공이 가시권에 들면서 지난 100년 이상 사천왕사 터를 가로질렀던 철길이 머지않아 걷힐 예정이다. 하루라도 빨리 사천왕사 터에 남겨진 상처를 걷어내고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2. / 조선일보, 2019. 6. 19. 
 
 
73.  경주 나정의 귀면와(鬼面瓦) - 혁거세 왕이 태어난 우물가

 
 
 
귀면와(鬼面瓦), 나정, 중앙문화재연구원
 
 
고려 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신라의 건국신화를 실었다. "고허촌장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다가가자 말은 사라졌고 큰 알이 있었다. 그 안에서 사내아이, 즉 박혁거세가 태어났다. 그가 자라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사람들이 그를 추대해 신라를 세웠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 신화를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의 왕계(王系)가 확립된 이후 왕실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박혁거세를 가공의 인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현재까지의 발굴 및 연구 성과로 본다면 신라의 성립 과정에서 혁거세 왕과 같은 유력한 인물이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 경북 경주 시내에 있는 오릉(五陵) 남쪽에 나정이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초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나정 터에 박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유허비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을 세웠다. 2002년 경주시가 이 비각의 담장을 정비하기로 계획하면서 발굴을 진행했다. 
 
땅속엔 신라 건물지가 숨어 있었다. 평면 형태가 팔각형이란 점이 특이했다. 한가운데에 네모난 돌판이 놓여 있어 우물의 뚜껑이라 여겼는데 그 밑에선 우물 대신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됐다. 이 건물지 아래에 더 이른 시기의 시설물 흔적이 드러났다. 유적 곳곳에서 귀면와(鬼面瓦), 당삼채 등 유물 1400여 점이 쏟아졌다.

 
 
 
발굴 성과가 공개된 후 이곳이 나정 터인지, 혹은 시조의 제사를 거행하던 신궁(神宮) 터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발굴이 끝난 지 15년이 흘렀지만 유적의 성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신화의 숲'은 크게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다.


발굴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밝히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개인적 호기심이나 사회적 관심 때문에 그 오랜 세월 잘 보존돼 왔던 신화의 공간을 파괴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3. / 조선일보, 2019. 7. 10. 






73.익산 소왕묘의 금동제 목관 장식 - 선화공주 흔적 찾기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훗날 백제 무왕이 되었다는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마를 캐 생계를 유지하던 서동이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풍문을 듣고 서라벌로 가서 '공주가 서동을 몰래 숨겨두고 정을 통한다'는 내용의 노래를 퍼뜨린다. 급기야 그 말이 왕의 귀에 들어가자 공주는 궁에서 쫓겨나고 서동이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






금동제 목관 장식, 소왕묘, 국립중앙박물관




서동요는 몇 안 되는 신라 향가이기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배경이 신분과 국경을 넘는 '러브 스토리'라는 점에서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2009년 선화공주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 '사건'이 생겼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에 '백제 왕후께서는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이다. 


사택씨는 백제의 유력한 귀족이므로 신라 공주가 사택 왕후일 수는 없다. 이 발굴로 선화공주가 가공인물이라는 주장이 유력해졌지만 무왕에게 여러 부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그 후에도 선화공주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지속되어 일제강점기에 발굴한 익산 쌍릉(대왕묘·소왕묘) 중 하나를 선화공주 무덤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2018년 대왕묘에서 수습한 인골이 641년 세상을 뜬 무왕의 유해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됨에 따라 이 무덤은 선화공주 무덤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올해 4월부터는 또 다른 후보인 소왕묘를 발굴하고 있다. 1917년 발굴 때 무덤 안에서 백제 왕릉 출토품에 준하는 금동제 식수습된 점을 고려하면 무덤 주인공은 왕족일 가능성이 있다. 


많은 사람은 소왕묘에서 선화공주의 실체를 밝힐 결정적 단서가 확인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미 발굴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 발굴 작업에서 새롭게 선화공주 관련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낮다. 어쩌면 고고학 발굴로는 영원히 밝혀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이야기에 살아 숨 쉬는 선화공주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4. 선화공주 흔적 찾기/ 조선일보, 2019. 7. 31. 
 



75. 복천동 고분의 금동관, - 가야사 쟁탈전
 
 
 
금동관, 복천동 고분군, 보물 1922호, 국립김해박물관

영호남 지자체 20곳 이상이 '가야사 연구'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 지자체가 특정 학문 분야 연구에 이토록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가야사 연구가 국정 과제에 포함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가야에 관한 전승이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곳은 앞다투어 '가야 문화권'에 속해 있음을 표방한다.

김해, 함안, 고령, 합천, 고성처럼 역사 기록과 발굴 자료가 부합하는 곳은 그리 보아도 문제가 없지만 그 밖의 여러 곳은 본디 가야였는지 알기 어렵다. 가야의 범위를 밝히기 위해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은 신라나 백제의 영역을 획정한 다음 그 사이에 끼인 곳을 가야로 보기도 한다. 특정 지역이 가야 문화권에 속하는지 아닌지는 지자체의 선언만으로는 결정될 수 없다.

가야와 신라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둘러싸고 학계는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논의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관학자들이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면서 가야의 범위를 넓게 보기 시작했다. 신라는 경주와 그 주변에 한정되고 가야가 신라보다 넓었을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에서 비롯했다.
 
1980년대 이후 영남 각지에서 발굴이 이어지면서 학계는 신라와 가야의 경계를 다시금 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늦어도 5세기 무렵부터는 김해에서 대구에 이르는 구간에선 두 나라의 경계가 낙동강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영남 지역 학자 가운데서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여전히 가야 고분군으로 보기도 하며, 그러한 시각이 가야 고분군 세계 유산 등재 대상을 선정하는 데 반영 되기도 했다 
 
우리 고대사를 제대로 쓰려면 가야사 연구의 진전이 절실하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정치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1990년대에 정치권이 '대선 전략'의 일환으로 가야사를 띄워 표를 얻은 적은 있으나 연구의 진전은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으로 가야사 연구를 생각한다면 정치 논리를 과감히 걷어내고 학술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5. 가야사 쟁탈전 / 조선일보, 2019. 8. 14. 
 
 
[76]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 사리감(국보 제288호) - 관산성의 비극
 
백제사에서 성왕의 업적은 뚜렷하다. 근초고왕이 4세기를 대표한다면 6세기를 상징하는 인물은 성왕이다. 사비로 왕도를 옮긴 후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한 뒤 눈길을 밖으로 돌렸다. 551년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신라·가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전쟁에서 이겨 숙원을 풀었으나 신라를 끌어들인 점이 불씨로 남았다.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 사리감, 국보 제288호, 국립부여박물관.


 
한강 상류 요충지를 장악한 신라는 2년 후 한강 하류의 백제 땅으로 진출했다. 믿었던 우방에 발등을 찍히자 성왕은 분노했다. 대신들의 반대를 뒤로한 채 태자 여창(餘昌)은 대군을 이끌고 충북 옥천으로 향했다. 한성 함락, 백제 멸망과 함께 백제의 3대 패전으로 손꼽을 수 있는 '관산성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신라의 지원군이 가세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여창이 고전한다는 급보에 성왕은 군사 50여 명을 대동한 채 전장으로 향하다 사로잡혀 죽었고, 시신 가운데 머리는 신라의 궁궐 계단 아래에 묻혀 뭇사람에게 밟히는 치욕을 당했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좌평 4명과 3만에 가까운 장졸을 잃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창은 부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즉위 후에도 오랫동안 은둔 세월을 보냈다. 그 무렵의 창왕에 관한 자료가 1995년에 공개됐다. 충남 부여 능산리의 한 절터에서 발굴된 사리감(舍利龕)에 '창왕의 누이가 부처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학계는 이곳을 성왕의 명복을 빌던 능사(陵寺) 터로 추정하고 있다.

관산성 패전은 백제에는 뼈아팠다. 패전 원인 중 왕의 '무모한 행차'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 도약하려던 백제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이 전투를 '관산성의 비극'이라 부를 수 있다. 신라와 백제 사이의 균형추는 급격히 신라로 기울었고, 백제는 끝내 주도권을 되찾지 못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6. 관산성의 비극 / 조선일보, 2019. 9. 04. 
 
 
77.금관총의 '이사지왕'명 칼집 - 금관총에서 이사지왕릉으로
 

 
'이사지왕'명 칼집, 금관총,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의 한 음식점 뒤뜰에서 화려한 금관이 출토됐다. 발굴은 아주 사소한 관심에서 시작됐다. 경주경찰서 순사가 흙더미 주변에서 아이들이 유물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 수소문 끝에 그 흙더미가 나온 공사 현장을 찾아냈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경주경찰서장이 주재한 긴급 회의에서 고고학자가 아닌 경주 거주 일본인들이 유물을 발굴하기로 결정했고 단 4일 만에 금관, 금 귀걸이 등 수많은 유물을 수습했다. 당시까지 동아시아에서 이토록 화려한 금관을 발굴한 일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다만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어 무덤 이름을 금관총이라 부르기로 했다.

2013년 금관총 유물을 소장하던 국립중앙박물관은 놀랄 만한 사실을 공개했다.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하던 금관총 장식 대도의 칼집에 '尒斯智王(이사지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사지왕이란 이름이 역사 기록에 없다는 점은 문제로 남았다. 학계에선 무덤 연대를 기준으로 자비왕 또는 소지왕으로 보기도 하고, 왕보다 지위가 낮은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어 2년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금관총을 다시 발굴하는 과정에서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진 칼집 조각과 일제강점기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물을 여러 점 더 찾아냈다. 이 발굴을 계기로 금관총에 묻힌 인물이 이사지왕이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다.'이사지왕'명 대도는 녹이 슬고 부서져 안타까움
을 자아낸다

아울러 발굴 이후오랜 세월이 흐른 시점에 명문을 확인한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뒤늦은 발견이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인물, 신라 이사지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역사를 만들었을까. 앞으로 연구가 진전되어 이사지왕과 그의 시대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고, 무덤 이름도 금관총에서 이사지왕릉으로 바뀔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7] 금관총에서 '이사지왕릉'으로
/ 조선일보, 2019. 9. 25. 
 
 
78. 연꽃무늬 수막새, 정지산 유적, - 3년 만에 능에 묻힌 무령왕
 
서기 501년 11월 백제에 위기가 찾아왔다. 사냥 나간 동성왕이 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머지않아 목숨을 잃었다.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백성들은 동요했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나 백가의 목을 베고 왕위를 이은 인물이 무령왕이다. 그는 추락한 왕권을 안정시켰고 고구려와 가야에 빼앗겼던 영토를 대부분 수복했다.

그러나 무령왕에 관한 역사서의 기록은 소략해 왕의 나이조차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준 것이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誌石)이다. 지석에는 왕이 62세 되던 523년 5월 7일 목숨이 다해 525년 8월 12일 능에 안장되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장례를 27개월 동안 치른 것이다. 왕보다 늦게 세상을 뜬 왕비의 장례 기간도 비슷하다.


 
 

연꽃무늬 수막새, 정지산 유적, 국립공주박물관.

입관 후 매장 이전까지를 일컫는 빈(殯)이 이토록 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계에선 백제가 여러 나라에 부고를 띄우고 조문 사절을 받기 위해 장례 기간을 늘렸을 것으로 보거나 혹은 성왕의 왕권이 미약했기에 선왕의 권위를 빌려 그 기간 동안 통치 기반을 다졌을 것으로 해석하는 등 설왕설래했다.


1996년 가을 무령왕 부부의 빈에 관한 새로운 견해가 제기됐다. 무령왕릉에 인접한 정지산에서 발굴된 기와건물지가 무령왕 부부의 빈전(殯殿)이라는 주장이었다. 해당 건물지에는 45개의 기둥 흔적이 있어 구조가 특이했고, 국가의 중요 시설에만 쓰인 연꽃무늬 수막새가 발견됐다. 
 
가야나 왜에서 가져온 토기, 무령왕릉 축조에 쓰인 전돌도 출토됐다.그 후 이 유적을 빈전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졌으나 근래 백 제의 방어 시설로 보거나 영빈관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됐다. 빈전이 궁 밖에 있을 수정하는 견해가 제기됐다. 빈전이 궁 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반론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백제는 외래문화를 받아들일 때 백제 사회에 맞게 변용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령왕의 삼년상도 중국 예서의 그것과는 내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향후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더 치열해져 웅진기 백제 문화의 실체가 해명되길 바란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78] 연꽃무늬 수막새, 정지산 유적/ 조선일보, 2019.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