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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만에 밝혀진 백제국 의자왕 항복의 비밀

한문역사 2026. 3. 24. 15:25
1300년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 백제 장군 예식진]
 누런콩  2023. 8. 25. 6:51
 
 
photos @ kbs 영상 캡처

얼마 전 우연히 찾아보게 된
백제 멸망과 의자왕에 관련된
영상들이 여태까지 우리가
배우고 알아왔던 것과 사뭇
달라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의자왕 (599년~660년),
삼천궁녀로 대변되는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문란하고 부패하여
백제를 망하게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왕의 시호는 그가 죽고 난 뒤
사가들에 의해 붙여진다.
그런데, 그의 시호를 다시 보자.
의자왕(義慈王), 의로울 '의' 자에
자애로울 '자'가 붙여져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주색에 빠진 방탕한 생활로
백제를 망하게 한 왕이란 이미지에
전혀 맞지 않는 호칭이다.
그런데 왜 사가들은 이런 왕에게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란
좋은 호칭을 붙여 주었을까?

그리고 당의 군대가 백제 땅을
밟은지 열흘 남짓 되고,
의자왕이 웅진성에 들어간 지
5일 만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도
없었는데 갑자기 백제가 항복을
하게 되었으니 이 5일 동안
웅진성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럼,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어느 날 중국 당나라의 부수도 역할을 했던 낙양에서 무덤 하나가 발굴됐고 그 무덤의 묘지명이 낙양의 고문물거리에 나왔다. 백제국 유물이었다.
 
 
제작진은 수소문 끝에 중국의 고고문물 학자인 조우쩐화가 이 묘지명의 탁본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탁본을 확인하고 그에게 유물도 볼 수 있도록 부탁을 하고 돌아온다.
 
며칠 후 그를 통해 유물이 있는 낙양 2이공 대학을 방문하여 유물을 확인하고 탁본을 뜨고 그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묘지명에 '대당좌위위대장군'이라고 적혀는데
좌위위는 우위위와 더불어 당왕조의 16위 중 하나다. 16위란 조정의 금위군으로 황제와 조정을 지키는 군대를 말한다. 우리의 수도방위 사령관 역할이다. 황제가 측근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묘지명에는 614년에 태어나서 672년에 사망한 백제 웅천인 이라고도 적혀 있다. 백제 웅천은 백제의 웅진을 말하며 오늘날의 충남 공주 출신을 뜻한다.
 
또 '예식진, 조부 좌평 예다, 부 좌평 사선'이란 글도 적혀 있다. 좌평은 당시 백제의 최고 직위였다. 조부와 부즉 예식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백제의 고위 관료였던 좌평이었다는 말이다.

백제 멸망이 660년인데 백제 고위 관료 집안 출신으로 예식진은 672년까지 살았으니 백제 멸망에 대한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예식진은 백제 출신임에도 어떻게 당나라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을까?
 
 
하남성 도서관에 보관된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 수도 사비가 아닌 웅진성에서 항복한다. 그런데 왜 '의자왕'과 '예식'이 함께 항복했다고 적혀 있을까?
그리고 백제 멸망 당시 장군이었던 예식과 당나라 대당좌위위대장군 예식진은 무슨 관계일까?
 
백제 멸망 당시 장군인 '예식'은 당나라 고위 관료인 '예식진'과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자에 차이가 있는 건 백제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한자가 변경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항복한 장수가 당나라의 고위직이 될 수 있었을까?
 
 
 
660년 11월 1일 소정방이 압송해온 백제 의자왕을 비롯한 88명의 고위 관료가 포함된 만 이천 명의 포로가 당 고종 앞에 서게 된다. 이 광경을 왜의 사신으로 와 있다가 이날 참석한 하카도코의 목격담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좌평을 지낸 예식진 집안도 여기에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다시 백제 멸망 직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의자왕은 660년 7월 14일 웅진성에서 예식 장군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전을 하기 위해 수도인 사비성이 아닌 웅진성을 택한 이유는, 사비는 평지이고 웅진은 산에 있어 방어하기가 보다 쉽고, 웅진성을 맡고 있는 예씨 가문은 무왕 시절부터 함께 했기에 믿음이 갔고, 웅진성 주변에는 흑치상지 가문이 있는 임존성이 있어 의자왕을 도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백제는 이렇게 수성전을 하면서 오방으로 나누어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면서 지방군을 활용해 사비를 포위하여 나당연합군을 섬멸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일 나당 연합군이 의자왕이 있는 웅진성을 공격하면 임존성에 있는 흑치상지가 웅진성을 도울 수 있었다.

그때 나당 연합군에게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18만 연합군의 식량이 문제였다. 사비에 있던 식량은 전투 중에 불에 타버렸고, 벼는 수확하려면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방법은 신라로부터의 조달이었다. 신라에서 오는 식량은 백제의 진현성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신라의 식량은 진현성에 주둔해 있던 백제군 때문에 차단당했다. 이 때문에 당나라 군사들은 식량을 보급 받지 못해 지친 상태였다.
당나라는 식량 보급을 위해 길을 뚫으려고 했으나 백제군에게 모두 몰살당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전세가 나당연합에서 백제로 움직이고 있을 무렵 웅진성에서는 큰일이 발생한다.
 
항전 5일째인 7월 18일 의자왕이 갑자기 항복을 해버린 것이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도 없는 상태였다. 당시 웅진성의 실질적인 군 지휘관이었던 예식 장군과 함께 항복했다.
도대체 의자왕은 이런 유리하다고 판단한 전황에서 왜 갑자기 항복한 것일까?
 
중국의 역사책 후당서에 보니 이상한 점이 있다
당시 의자왕의 항복을 서술하고 있는데 모두 의자왕이 주체가 아닌 장군 예식이 주체로 되어있다.
즉, 백제 항복 당시에는 의자왕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게 맞는데 예식이 주체가 되어 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어떤 사건을 놓고 서술할 때는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주체로 쓰게 된 것 같은데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일까?

그다음에 나오는 백제 태자 융의 항복 부분을 보면 그렇지 않다. 당시 태자 융은 의자왕의 아들이었기에 태자 융이 주체로 나온다
 
중국 역사에는 김일제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중국 역사에선 이민족이 공을 세우면 항상 김일제에 비유한다. 김일제는 항상 중국 역사에서 이민족의 모범이자 비유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식진의 묘지에는 '무릇 김일제의 무리와도 업적을 논하고 우열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높다'라고 적혀 있다. 예식진은 이민족의 모범인 김일제보다 더 극찬 받는다.

또한 당시 당나라는 개방적인 국가로 이민족이라도 공을 세우면 대우해 주고, 공을 자세히 적는다. 백제 항복 후에 당나라로 건너가 큰 공을 세웠던 흑치상지의 묘지명을 보면 그가 공을 세울 때마다 어느 직위에 올랐는지 자세히 적혀있다.
그런데 예식진은 이상하게도 공적에 대한 부분이 하나도 적혀있지 않고 오직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 묘지명'이라고만 적혀있다

그의 정 3품에 오른 공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민족 사학자 신채호는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독특하게 서술했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당의 포로가 되어...'
여기서 '웅진의 수성대장'이란 예식을 말한다.
'동맥을 끊었다'라는 자살을 의미한다

신채호의 서술을 해석하자면 '예식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의자왕은 자살하려고 했다'
가 된다.
예식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항복하라고 했다고?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역사서를 보았다.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 글자 중 명확하게 해석이 된 '기대장예식과 의자'를 제외하면 총 4글자 '우장래항' 만 남게 된다.
여기서의 '래'는 오다, '우'는 또, '항'은 항복하다로 해석이 된다.

나머지 글자는 명확하게 해석이 됐는데 딱 1개의 글자만이 해석이 안된다.
 
 
'장'
도대체 이 장은 무엇일까? '장'은 명사로는 '장수'라는 의미가 있고 동사로는 '거느린다, 데리고 간다'라는 의미가 있다. 저기서의 장은 '동사'로 해석된다.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을 해석하면,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을 했다'가 된다.

왕을 데리고 가다?
그렇게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의자왕이 갑자기 항복을 했고, 예식이 항복한 의자왕을 데리고 당나라에게 갔다고?
뭔가 이상하다
해석이 안된 '장'이라는 글자에는 아직 의문이 남아있다.

'장',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인가?
'데리고 가다?' 아니면 '체포해 가다?'
이 '장'에는 의문이 있었고 중국 현지의 역사 전문가의 도움을 받게 됐다.

한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국 역사학자의 의견을 들어봤다.
 
이 중국 역사학자는 '장'의 의미를 '왕을 사로잡아서'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배신이다. 자신의 군주인 왕을 배반한 것이다.

그렇다 백제 출신의 항복 장수였던 예식진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의 공적은 '주군을 배신하고 항복시킨 것'이었다.

모든 비밀이 풀렸다.
예식진의 묘지명에 공적이 적혀있지 않았던 이유, 공적 없이 한 번에 황제를 보좌했던 대당좌위위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던 이유, 유리한 상황의 의자왕이 갑작스럽게 항복한 이유 모든 것이.
 
660년 7월 18일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주군을 배신한 예식진에 의해 항복하게 된다.
그렇게 678년간 이어져 온 찬란한 백제는 한 장수의 배신에 의해 멸망했다.
백제의 의자왕은 항전 중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한 장수에 의해 사로잡혀 강제로 항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의자왕은 자신이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1300여 년이 넘도록 후대의 사람들에게 조롱당해 왔다.

배신자 예식진의 묘비명에는 당나라 황제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잘 나타나 있다.
 
바야흐로 아름다운 총애를 입고...
천자의 은혜로운 빛이 흡족히 내려지고...
 
이후 예식진은 백제와 의자왕을 배신한 후
잘 살다가 58세의 나이에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당의 고위 관료들이 묻히던 무덤인 고엔위안에 안장됐다.
 
 
한편, 의자왕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삼천궁녀에 관해서다.

1145년 완성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면 삼천궁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삼천궁녀는 후대의 문인들이 지어낸 허구인 것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백제가 사비도성을 만들 때 외침이 있을 경우 앞에 있는 백마강을 1차 방어선으로 잡았고 밀릴 경우에는 궁궐 뒤 부소산에 있는 부소산성을 2차 방어선으로 삼았다. 여기서 쫓기면 바로 낙화암이다.
 
 
660년 7월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부소산성으로 쫓겨 온 궁녀를 포함한 백성들은 낙화암이란 막다른 곳까지 밀리게 된다. 특히 점령군에게 당할 치욕을 염려한 아녀자들이 낙화암에서 뛰어내렸을 것이고 이것이 삼천궁녀의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온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사비도성에 삼천의 궁녀가 살 장소도 없으며 조선시대에도 궁녀가 400~600명 정도였으니 모든 것을 비교해도 조선보다 작은 백제 때는 당연히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게 합리적이겠다.
 
 
 
문서상 삼천궁녀란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의 빼어난 문장가 민재인 선생의 문집 판각에서다.
'구름 같은 삼천 궁녀 바라보며..'

이 이후로 망국의 한을 노래하는 문객들에게 삼천궁녀 이야기는 좋은 소재가 되어 계속 음유 되어 왔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삼천궁녀를 각인시킨 것은 이를 소재로 한 많은 대중가요다. 웬만한 가수는 모두 삼천궁녀를 불렀으니 삼천궁녀는 대중들에게 그렇게 사실처럼 스며들게 된다.
 

삼천궁녀 이야기는 그렇고, 의자왕은 도대체 어떤 군주였을까?
 
660년 8월 17일 의자왕과 일만 이천여 명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당의 장안으로 압송된다.
 
구드레 나루를 떠난 배가 금강을 따라 흐르는 동안 많은 백성들이 따라오며 슬퍼했다.
 
금강의 폭이 넓어지는 곳에 자리한 유왕산에는 유왕정이란 정자가 있다. 머물 '유' 임금 '왕', 임금이 머문 곳이란 이름이다. 수많은 백성들이 잡혀가는 임금과 통곡으로 마지막 이별을 한 장소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의자왕은 시호의 뜻 그대로 백성들이 따르고 받들었던 인자한 군주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또한 용감하고, 결단력 있고, 우애 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러운 군주였다.
 
 
한편, 의자왕은 전투적인 군주이기도 했다. 원래 백제 영토였으나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신라와 합세하여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다시 빼앗긴다. 의자왕은 이를 되찾는 것을 염원하여 활발한 전쟁을 벌였다.
 
 
재위 20년 동안 2년에 한 번꼴로 10차례의 전쟁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합천 취적산에 있는 대야성을 공격하여 신라를 몰아내면서 옛 땅을 상당 부분 되찾는다.

결국, 이 때문에 잘 지내던 당과의 외교관계가 틀어지면서 당이 신라를 돕게 되고 8만 대군의 나당 연합군에 의해 도리 없이 멸망하게 되었지만..
 

외교를 잘못하여 나라를 잃은 것도 임금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의자왕 개인의 인간된됨의 잘못으로 그 책임을 돌려서는 곤란할 것이다.
삼천 궁녀란 전설로 인한 그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이제 풀어놓아야겠다.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백성에게 존경받던 용감하고 자애로운 의자왕을 다시 한번 떠오른다.
 
지난 2000년 9월 충남 부여에서는 한 봉토식이 있었다. 그것은 의자왕이 병사하여 묻힌 중국 낙양 북망산의 흙을 가져와서 한 백제 의자왕의 봉토식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1340년 만에 전쟁 포로로서의 일을 끝내고 백제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의자왕과 백제의 충직한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이 새로운 사료는 지속적으로 연구가 이어질 것인데 결과가 위의 내용과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백제는 태자를 몇 번이나 당의 원정군에게 보내어 군대를 물려줄 것을 간청하는 등 객관적인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백제는 8만 나당 연합군을 상대하여 싸울 힘을 많이 잃었으며 오로지 계백과 같이 죽을 때까지 싸워 본다는 명분만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예식진 같은 자가 없었더라도 백제의 멸망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나라가 망할 때는 늘 이런 나라 팔아먹는 배신자와 매국노가 있게 마련이다. 역사에는 If(만약)이란 게 없다지만 백제의 입장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 하겠다.
 
이쯤에서 계백 장군이 떠오른다. 황산벌에서 오천 결사대로 오만의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백제의 계백 장군과 백제와 왕을 배신한 예식진이 더욱 크게 대비되어 다가오는 것은 인지상정 때문일까!
(네이버 자료 및 영상 참조)
 
* KBS 역사추적 - 의자왕 항복의 비밀과 백제 장군 예식진
 
 
 
 
*예식진 (나무위키) - 백제의 의문스러운 항복. 반록과 재반론, 그리고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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