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과거에서 보내는 엽서] [69] 덩샤오핑의 두 얼굴


1989년 6월 4일 나는 천안문 광장, 총성에 흩어지는 시위대 속에 있다.
탱크가 밀고들어오는, 인민해방군대의 무력진압이다.
1980년대 후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도 불구하고 부패와 물가 상승,
실업 문제 등이 심각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자유를 누리게 된 인민들,
특히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정치의 민주화(‘인민’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에 가까운)와
전폭적인 부패 척결 등을 요구했다. 이건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설령 그것까지는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시위대 안에는 여러 가지 분파가 뒤섞여 있었기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흘러갈 공산이 컸다.
이게 덩샤오핑이 대참극을 무릅쓰고 진압을 선택한 간명한 이유다.
“20만명이 죽는다 해도 국면을 통제하고 20년의 안녕을 쟁취할 것”과
같은 덩샤오핑의 말들 속에는 공산주의자의 냉혹함과 정치가의 고뇌가 뒤엉켜 있다.
1989년 천안문 시위의 발단은 4월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 전 총서기 사망의 추모 인파였다.
5월이 되자 그 인파는 100만명에 육박해 베이징을 메웠다.
6월의 대비극을 ‘제2차 천안문 사태’라고 부르는 것은,
1976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그것을 ‘제1차 천안문 사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온건파인 주은래 사망 추모 인파가 모여들어 마오쩌둥의 심복 4인방의 전횡을
규탄하기 시작했고, 4인방은 이들을 민병대와 경찰을 동원해 진압, 체포했다.
물론 제2차 천안문 사태의 희생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조차도 아니었다.
덩샤오핑은 이 사태를 조종한 배후로 지목돼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실각하면서 1976년의 시위는
‘인민의 정당한 요구’로 재평가받아 덩샤오핑이 화려하게 복귀하는 발판이 돼주었다.
이런 덩샤오핑이 13년 후 탱크를 앞세워 인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상황과 등장인물은 비슷한데, 클라이막스와 결과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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