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러너의 '눈' 되어보니… 내 '길'이 보였다
'가이드 러너' 직장인 김민정씨
지난 6일 오전 8시 서울 남산 북측 순환로. 마라톤 동호인 김민정(45)씨가 주황색 조끼를 입고 시각장애인 러너 옆에 섰다.
두 사람의 손목은 약 70㎝ 길이의 가이드 로프 ‘테더’로 연결돼 있었다.
김씨는 로프를 고쳐 잡고 옆 사람 보폭을 살폈다. 달리기가 시작되자 앞에 방지턱이 있는지, 길이 좁아지는지, 바닥이 패였는지, 사람이 많은지를 시각장애인 러너에게 계속 말로 알려줬다. 가이드 러너로 나선 김씨는 시각장애인 러너에게 눈이자 내비게이션이고 안전벨트였다.

직장인 김민정씨는 이렇게 주말마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회(VMK) 회원들과 함께 달린다. 자신과 시각장애인 러너를 잇는 70㎝ 끈을 그는 “믿음과 신뢰”라고 표현했다. “한번은 제가 직접 안대를 쓰고 달려보니, 분명히 잘 아는 길인데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시각장애인 러너들이 얼마나 용기 있는 분들인지 그때 알게 됐습니다.”
2017년 달리기를 시작한 김씨는 이듬해 여름 남산에서 주황색 조끼를 입은 가이드 러너들이 시각장애인 러너와 끈을 잡고 뛰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됐다. 2024년 1월 가이드 러너를 모집한다는 글을 소셜미디어에서 보고 지원했다. 이후 매주 토요일 남산 훈련과 주중 훈련에 나가 시각장애인 러너들과 호흡을 맞췄다.
그는 “노면 상태부터 방향, 주로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등 모든 상황을 시각장애인 러너에게 말로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대회장은 주로가 갑자기 좁아지기도 하고 앞사람이 급정거하거나 바닥에 맨홀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도 가이드 러너로 처음 대회에 나섰을 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말이 나오지 않아 “조심하세요”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을 향해 “시각장애인 러너입니다, 지나가겠습니다”라고 크게 외치는 것도 어색했다.
김씨는 “출발 직전, 급수대 앞, 병목 구간 등 모든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라고 했다. 그래도 두 사람의 팔이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고 보폭과 발소리가 맞춰질 때 “어느 순간 서로의 달리기가 닮아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김씨는 함께 달리는 장애인 러너에게 “여기 꽃이 피었어요”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라고 풍경도 전한다. 날씨나 요즘 보는 드라마 얘기도 한다. 침묵 속에 뛰는 것보다 달리기가 더 풍성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제가 ‘남산에 아카시아꽃이 피었어요’라고 이야기하면, 그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어제 달릴 때 아카시아가 예쁘게 피었더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완주는 올해 초 고양 하프마라톤이다. 함께 뛴 시각장애인 이기호(73)씨의 목표는 하프코스 2시간15분이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이씨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김씨는 “1분만 더요” “두 발짝만 더 가볼게요”라며 계속 격려했다. 결국 이씨는 2시간15분02초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김씨는 “(이씨가) ‘아직 이 정도는 할 수 있구나’라며 좋아하셔서 저도 신이 났다”고 했다.
김씨의 활동은 그의 일터인 파리크라상에 알려졌다. 파리크라상은 사내 채널을 통해 가이드 러너 활동을 소개하며 그를 우수 봉사자로 선정했다. 회사 측은 또 중증 장애인 직업 재활 시설 ‘소울베이커리’에서 발달 장애인 제빵사들이 만든 간식과 점자 엽서를 시각장애인 러너들에게 지원했다. 김씨는 “함께 달리는 시간은 저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선물해줬다”며 “곁에서 함께 달릴 뿐인데 큰 위로와 에너지를 받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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