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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정신 전하는 密陽 嶺南樓

한문역사 2026. 6. 28. 16:54

땅의 정신 전하는 밀양 영남루

[아무튼, 주말]
[김두규의 國運風水]
文人들 칭송 이어진 명당
여름 피서지로 어떠한가

김두규 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입력 2026.06.27. 00:30업데이트 2026.06.27.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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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화백이 그린 밀양 영남루. 영남루와 그 땅의 본질을 잘 그려냈다.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김두규 제공

시골집 한쪽 구들장에 토종벌이 산다. 두 해를 머물다 작년 가을 훌쩍 떠나버렸다. 그 이전처럼 서운하지 않았다. 또 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말에 벌들이 돌아왔다. 떠난 벌들이 돌아오는 때를 헤아려 보니 아카시아와 밤꽃 필 무렵이다. 밀원(蜜源)이 풍성해질 때 분봉(分蜂)하면서 옛집을 찾아오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벌들에게도 때와 장소가 있다. 터도 때를 탄다. 동네 입구 모정(정자)은 여름 한철 농한기에만 마을 남정네들이 찾는다. 터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벌과 사람을 부르는 것은 결국 때다.

이름난 누정도 다르지 않다. 무더위가 본격화하는 7~8월이면 강바람 시원한 누각은 사람들에게 인기다. 누마루 맨바닥에 누워서 낮잠을 자기에 제격이다. 옛사람도 같은 생각이었다. “(음력) 유월의 서늘함, 여기가 별천지네. 밀양강 한 줄기가 누각 앞을 감돌아 흐르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정언각(1498~1556)이 영남루를 두고 읊은 시 한 구절이다. 무더위 속에서도 영남루에서만큼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서늘했다는 내용이다.

 

조선의 3대 누각으로 흔히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를 꼽는다. 이 가운데 영남루를 읊은 시는 1000편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채록된 ‘영남루시운’에만 570편이 수록돼 있다(남권희 외 옮김, ‘영남루시운’ 참고). 땅과 그 위에 세워진 건물 하나로 고려와 조선의 지식인과 관료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음을 보면 예삿일은 아니다.

영남루의 생명력은 조선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도 영남루는 중고등학생 백일장의 무대로 활용됐다. 진보 지식인 안경환과 보수의 대표적 문인 이문열은 어린 시절 영남루를 바라보며 밀양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인연을 공유한다. 그 인연은 훗날 조선일보 2007년 1월 22일자 ‘이문열씨와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대담’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니, 영남루는 시대와 진영을 넘어 문재(文才)를 키우는 터로서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문은 많은데, 정작 그 땅과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을 제대로 그린 그림은 드물다. 옛 화가들에게 산수화는 단순히 풍경을 베끼는 일이 아니었다. 중국 고대 화가 종병(宗炳·375~443)은 “산수는 그 형체로 정신을 드러내고, 어진 이는 그것을 즐긴다”고 했고, 그림을 그리고 보는 일의 궁극은 “그 땅의 정신을 펼치는 것[창신(暢神)]”이라 했다. 후배인 왕미(王微·415~453)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이란 산수의 정신을 전하는 것, 즉 ‘전신(傳神)’론을 주장했다. 산수화의 목적은 산과 물을 똑같이 베끼는 데 있지 않고, 그 땅과 땅이 이고 있는 건물의 보이지 않는 정신을 화폭 위에 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1936년 강연을 토대로 한 ‘예술 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es)’에서 그리스 신전을 이야기한다. 신전이 들판에 세워지기 전에는 그 땅은 그저 평범한 바위와 흙에 지나지 않는다. 신전이 그 자리에 섬으로써, 비로소 그 땅은 신이 깃든 ‘대지(Erde)’로 드러나고, 그 위로 하나의 ‘세계(Welt)’가 열려 선다. 좋은 건축과 좋은 그림은 땅에 본래 숨어 있던 무언가를 비로소 보이게 만드는 일이라는 데 동서양의 생각이 같다.

영남루가 앉은 자리는 예사 자리가 아니다. 주산 지맥이 기복(起伏)을 거듭해 내려오다가 밀양강을 만나 멈추면서 지기(地氣)를 응축한다. 이른바 풍수가 말하는 혈(穴)이다. 누군가 그 터를 알아보고 그 위에 누각 하나를 세우기 전까지 ‘혈’은 본디 은폐돼 쉽게 보이지 않는다. 영남루란 누각이 조선의 3대 누각으로 명성을 잃지 않는 이유다. 하이데거가 말한 그리스 신전이 그러했듯, 누각이 터를 낳은 것이 아니라 누각이 터를 비로소 ‘드러낸’ 셈이다.

 

그러한 영남루와 그 땅의 본질을 그려낸 그림이 있을까. 무던히 찾은 끝에 마침내 한 폭의 펜화를 찾아냈다. 화가(안충기 화백)는 우측 상단의 주산에서 지맥이 기복해 내려오다가 밀양강을 만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영남루 자리에서 똬리를 트는 지세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산이 움직이며, 영남루가 돌연 우뚝 솟았다. 그런데 정작 화가는 영남루 아래 흘러야 할 밀양강은 백지로 비웠다. 본디 산은 가만히 있고 물은 흐르는 법[산정수동(山靜水動)]인데, 이 그림은 산이 움직이고 물은 고요히 침묵한다. 텅 빈 여백에서 강물의 들리지 않는 도도(滔滔)함을 본다.

펜화 한 폭이 영남루를 이고 있는 산과 물의 정신을 정확하게 구현했다. 영남루를 찾을 최적의 때는 아마도 삼복더위가 아닌가 한다. 독자들께 좋은 관광과 피서의 장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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