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늘 시 품고 다녔다" 詩 좋아하는 총리의 한 수는
[아무튼, 주말]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1946년 31세의 나이로 요절한 함형수 시인의 시 ‘해바라기의 비명’입니다.
1936년 동인지 ‘시인부락’ 창립 멤버로 예술가로서의 꿈과 열정을 품었으나
해방 후 북한에서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다 사망하여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한 유언(遺言)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운명에 맞서는 시인의
강인함과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노란 해바라기, 푸른 보리밭이 보여주는 원색의 색깔은
마치 고흐나 고갱의 작품을 보는 듯 강렬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뒤에 숨은
시인의 힘든 현실과 연약함이 함께 느껴져 안쓰러운 생각이 듭니다.
노란 해바라기와 푸른 보리밭 그리고 이글거리는 태양과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종달새는 우리의 정다운 옛 풍경이기도 합니다.
시 전문 계간지 ‘유심’ 발행인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 ‘내 마음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뷰를 하자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제 경력과 관련된 인터뷰는 가끔 했지만 다른 유형의 인터뷰는 한 적이 없고,
특히 문예지와의 인터뷰는 낯설어서 망설였지만 인터뷰를 위해 찾아오실
권 교수님과 편집 주간 신달자 시인이 비슷한 연배인지라 사양하지 못하고 응낙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제가 소개한 시가 ‘해바라기의 비명’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시가 어찌 한두 편이겠습니까만 문예지와의 인터뷰인 만큼
사람들에게 조금은 낯선 시를 일부러 골랐습니다. 또한, 잊힌 함형수 시인을 알리고도 싶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인터뷰를 이끌고 그 내용을 정리한
신달자 시인은 이 시는 완전 프로 문인이 아니면 잘 모르는 시라며 놀랐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쓴 시 ‘제주’까지 찾아 소개하고는 인터뷰 제목을
‘시 쓰는 총리,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이라고 달았습니다.
학창 시절 시 몇 편을 써본 이래 시를 쓴 적이 없고
‘제주’도 시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것이니 ‘시 쓰는 총리’는 가당치 않습니다.
2011년 4월, 총리로서 제주를 방문하여 도민 대표들과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및 제주 4·3 사건과 관련하여 논란이 심했으므로
제주 도민의 의견을 듣고,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각별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부랴부랴 시 한 수를 썼습니다.
“웅혼한 대륙을 달려온 반도의 끝자락/
푸른 바다를 넘어 우뚝 솟은 한라의 영봉/
그 아래 펼쳐진 우리의 삶이/
낙원의 삶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로 시작하는
제주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시답지 않은 시였습니다.
간담회를 시작하면서 먼저 시를 쓴 경위와 취지를 설명하고 낭독을 했습니다.
참석자들도 상궤를 벗어난 저의 엉뚱함에도 제가 의도한 대로
저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좋은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2013년 2월, 총리 퇴임을 앞두고 여러 신문과 퇴임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 말미에 기자가
“가슴에 늘 시 한 수를 품고 다닌다 들었습니다.
퇴임을 목전에 둔 요즘 어떤 시를 새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엉겁결에 내놓은 시가 유치환의 ‘바위’였습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하는 시를 읊조렸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시 전문이 막힘이 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젊은 시절 좌우명처럼 읽고 외웠던 까닭일 것입니다.
기자는 이례적으로 그 시 전문을 따로 구획을 지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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