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진주의 진주성에 들러, 1780년(다산선생 19세) 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계시는 장인을 만나러 진주로 오신 다산선생이, 임진왜란때 당파싸움으로 주위의 지원도 받지못하고 패하자 항복대신 촉석루에서 자살을 택한 3장군 이야기에 비분강개하셨던 촉석루와, 장인의 명으로 쓰신 논개사당의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등을 둘러보고, 1778년(17세) 겨울에 형 손암 정약전선생과 40여일을 공부하며 밤마다 요순시대의 이상사회를 이룩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잠을 설치셨다는 전남 화순의 동림사 터, 강진에 유배와 살았던 주막 사의재 터와 고성사 보은산방, 다산초당, 백련사와, 보은산 우두봉에 올랐다가 흑산도 우두봉과 형제봉이라는 말에 흑산도에 유배가있는 손암 형님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셨다는 보은산, 1801년(40세) 신유사화때 2차 유배지로 가기위해 같이 내려왔다가 다산은 강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유배길이 나뉘어 눈물의 이별을 하고는 결국 손암형님과 죽을때까지 다시 못만난 다산선생의 한이 서린 나주의 율정점 삼거리, 1795년(34세) 10월 평소 존경하던 성호 이익 선생의 저술들을 교정하기 위해 성호선생의 종손 목재 이삼환 선생을 만나 '가례질서'를 정서하였던 아산군 송악면의 봉곡사, 다산선생의 생가이자 묘소가있는 남양주 능내리 여유당에 들러 참배하고, 다산선생이 '나의 정원'이라 칭하실 정도로 자주 들르셨다는 수종산의 수종사에서 차한잔하고, 내려오는 길에 1801년 신유사화때 1차 유배지였던 포항 영일군 마현리를 둘러보는, 5박6일 정도의 휴가 계획을 세웠었는데, 아쉽게도 휴가를 못가게되어 다음으로 미뤄졌습니다.
다산선생과 관련된 자료로, '다산초당사경첩(茶山草堂四景帖)'을 소개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까 합니다.
사경첩(四景帖), 茶山草堂四景帖, 저자 丁茶山,
편집인 윤재은(尹在殷), 발행인 정다산유적보존회, 단기4291년 1월(1958년) 발행, 가로*세로=154mm*245mm, 비매품,
'사경첩'은 1958년 1월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정다산유적보존회(현 (사)다산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병풍처럼 펼쳐지는 절첩장(折帖裝) 형식으로 책으로, 내용은 다산초당 사진과, 다산선생이 다산초당에서의 4가지 경치라고 칭하신 다조,약천,정석,연지석가산의 '다산사경(茶山四景)', 1823년 2월에 다신계 계원이었던 윤종익과 종진이 다산선생을 찾아왔을때 나눈 대화를 다산선생이 기록한 '다산제생문답(茶山諸生問答)', 그리고 다산사경 번역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다산초당은 다산선생이 유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신 이후 호랑이가 출몰하고,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허로 변해버렸는데, 1958년 1월이면 송령 윤재은(松嶺 尹在殷)선생, 낙천 윤재찬(樂泉 尹在瓚, 1902~1991)선생 등이 다산초당을 다시 복원하기 위하여, 1956년 '다산초당복원위원회'를 구성하고 성금을 모아, 1957년 3월 7일 착공하여 1958년 5월 5일 준공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인데, 다산초당을 복원하던 무렵에 다산사경첩도 엮으신것 같습니다. 특히 다산초당과 다신계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문답한 '다산제생문답(茶山諸生問答)'을 같이 엮은 것은, 1818년 8월 그믐날 만들어진 다신계가 140여년이 지나서도 그 뜻이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책인 것 같습니다.
또다른 다산사경첩으로 1996년에 나온것도 있는데(다산사경첩, 지은이 다산 정약용, 펴낸이 강진군수, 1996년 6월, 가로*세로=153mm*255mm), 다산사경이 컬러 사진으로 나와있고, 내용도 두배 가까이 많지만, 1958년판에 비해 멋이나 정성이 많이 못미치는 것같습니다.
다산초당을 가보거나 '다산제생문답(茶山諸生問答)'등을 보노라면, 다산초당을 복원하고 관리하는데 한평생을 바치신 윤재찬 선생을 늘 떠올리게 됩니다. 윤재찬 노인은 별세하시기 1년전인 1990년에 다담지 기자가 밤 9시에 불쑥 찾아가, 다산선생을 거명하자 매무새를 고쳐앉으셨다는 기사도 가슴 찡하거니와, 추사선생의 글을 집자한 '다산초당茶山艸堂', 다산선생 글을 집자한 '다산동암茶山東菴', 추사선생 글씨의 '보정산방寶丁山房' 등 현재 다산초당에 걸려있는 현판들은 모두 윤재찬선생이 각을 하신 것인데, 혹시 다산초당에 가시면 현판들도 다시한번 보시고, 윤재찬선생이 '다산동암'이란 글짜를 '다산제생문답(茶山諸生問答)' 어디서 집자하셨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다산선생은 '다산사경(茶山四景)' 4수의 시 외에도,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 8수 등, 다산초당에 대한 애정을 시로 많이 남기셨는데, 그 시들로 상상해 보면 다산초당은 다산선생이 손수 심고 가꾼 꽃과 나무들로 가득한 대단히 아름다운 풍경이었겠으나, 지금은 숲이 너무 울창해져서, 숲속에 집들만 몇채 있는 조금은 삭막한 곳이 되어버린 것이 아쉽습니다.
다산초당의 원형에 대한 논의가 일어, 기와지붕을 그대로 둘지 초가지붕으로 얹힐지, 또 차부뚜막인 다조의 원형은 어떤 모양일지 논의를 통해 추측가능한 모형으로라도 몇가지 만들어 놓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 소나무를 좀 베어내고, 주변에 다산선생의 시나 글에 언급된 나무와 풀들을 심고, 다산선생이 미나리를 심어 반찬 걱정을 더셨다는 집 아래 밭에 미나리도 심으면, 다산초당의 모습이 어떠할지, 초의스님이 그리신 다산초당도를 보며 상상해 봅니다.
참고자료 :
* 차문화유적답사기(중권), 김대성, 불교춘추사, 2000년2판 287~
* 다산 정약용, 윤동환, 다산기념사업회, 1998
* 월간 다담 1990년 7월호, 권두대담. 한길 애오라지 다산(茶山)을 바라보며, -한학자 윤재찬(尹在瓚) 옹-
* 다산 기행, 박석무, 한길사, 198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