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김성달 ․ 이옥재 부부 수창한시의 특징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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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 학문후속세대양성_시간강사&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 | ||
연구과제번호 | 2011-35C-A00546 | ||
선정년도 | 2011 년 | ||
연구기간 | 1 년 (2011년 09월 01일 ~ 2012년 08월 31일) | ||
연구책임자 | 문희순 [ NRF 인문사회 연구책임 11회 수행 / 공동연구 2회 수행 / 학술논문 21편 게재 / 저역서 1권 저술 / 총 피인용 82회 ] | ||
연구수행기관 | 배재대학교 | ||
과제진행현황 | 종료 |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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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 연구는 17세기 김성달(1642-1696, 자 伯謙, 호 靑洲)과 이옥재(1643-1691) 부부가 혼인 생활을 통하여 생산해 낸 부부수창 한시작품 248수의 내용을 분석하여,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서 이 부부가 이루어낸 부부수창시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김성달 부부와 자녀는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이른바 ‘전 가족이 문인’이었던 ‘가족문학사’를 선구적으로 이끌어 낸 집안이다. 안동세고 소재 한시는 모두 부부가 수창하거나 동일 주제를 놓고 함께 읊은 시, 그리고 아내 사후 김성달이 아내를 그리며 읊은 시들이다. 전통시대 한 남성이 아내에게 주거나 아내를 대상으로 읊은 시로는 명실 공히 최대의 작품량이고,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옥재라는 여성문인의 전모도 이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자는 안동세고를 발굴 ․ 번역(2006년)하여 세상에 보고한 바 있으나, 김성달 부부의 부부수창한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지는 못하였었다.
둘째, 17세기 김성달 ․ 이옥재 부부의 수창한시 연구를 통하여, 16세기 유희춘(1513-1577) ․ 송덕봉(1521-1578) 부부, 18~9세기 김삼의당(1769-1823) ․ 하립(1769-1830) 부부 등 부부수창시를 사적으로 살펴, 우리나라 한시문학사에서 흔하지 않은 부부수창 한시의 통시적 맥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간 학계의 연구 정황으로 볼 때, 전통시대 양반 남성들이 여성들과 문학적으로 교감할 때, 주로 기녀와 같은 특수 계층 여성들과 소통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양반여성의 문집과 새롭게 발굴되는 자료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었던 사실이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이었음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16세기 유희춘 부부와 17세기 김성달 부부, 18~9세기 하립 부부, 윤광연 부부의 사례가 대표적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양은 많지 않더라도 단편으로 전해지는 부부수창 한시 사례를 조사 ․ 발굴하여 부부수창한시의 계통을 체계적으로 세우는 작업을 시도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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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나라 한시문학사 연구에서 ‘부부수창한시’라는 외연을 확장해 줄 것이다. 우리나라 고전한시문학사에서 남녀가 주고받은 한시는 적지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여성들이 처했던 문학적 환경이 녹록하지 않았던 것처럼 문학적 재주가 탁월한 여성이라 하더라도 문학작품을 많이 내놓지 못하였다. 특히 18~9세기로 넘어 가기 시작하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고착화되어 가는 듯하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부인이 아닌 제3의 여성이라 할 수 있는 기생과의 사랑과 그 사랑을 통해 표현된 문학작품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정작 문재가 출중하였던 부인과는 문학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문학적 역량을 침묵으로 일관해야했던 많은 여성지성인들은 속으로 울부짖어야했다. 김성달 부부의 딸 김호연재는 자신의 문학행위를 “세상이 미치광이라 일컬어도 혐의하지 않겠다”며 몸부림치기도하였다. 그런 면에서 17세기 김성달과 이옥재 부부의 많은 수창시는 특별하고, 참신하며, 소중한 문학유산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부부수창시라는 영역 안에서 한시 연구의 한 방향이 발전적 모습으로 연구되길 기대해본다.
둘째,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서 ‘가족문학사’라는 연구의 틀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충청도 홍성 갈산의 한적한 어촌 오두리! 가난하지만 화목한 김성달 가족은 문학과 사랑으로 일깨워가며 전가족 문인이라는 쾌거를 일구어 내었다. 조선 후기 문단계에 이미 소문이 나 있었던 가문이었으나, 점차 기울어진 가세와 문집자료의 미발굴로 학계의 연구대상에서 멀어져 있었다. 김성달 부부는 아들 딸 구별 없는 평등한 자녀교육을 통해 아들은 물론 딸들도 문집을 출간하였다. 김성달 부부의 시집 『안동세고』, 김성달과 첩 울산이씨, 서녀의 시집 『우진』, 딸 김호연재의 시집 『호연재유고』, 아홉 남매와 서모 울산이씨의 시집 『연주록』, 아들 김시제의 문집 『도옹유고』, 존재가 확인된 김성달의 『청주유고』와 실전된 아들의 문집, 편린으로 전해지는 딸들의 시까지 포함하면 부모와 서모, 형제, 서형제 까지 김성달 부부 당대 전 가족이 문인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딸 들이 문집을 출판한 사례가 없지 않은데 이러한 가문의 사례까지 종합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가족문학사 연구에 김성달가가 규모나 질량면에서 선구적이다.
셋째, 17세기 김성달 부부의 부부문화와 인문학적 소통은, 오늘날 무너져 가고 있는 가족 문화에 하나의 대안을 줄 것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자본주의 속에서 점차 이기적이고 극단적으로 흐르는 부부관계와 가족문화 속에서, 김성달과 이옥재 부부의 일상은 상호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평등적 삶의 모습이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었고, 꽃을 완상하며 산책을 즐겼다. 부부는 시 내기 바둑을 둘 정도로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진 사람은 벌칙으로 시를 썼고, 상대방은 그 시에 화답하였다. 김성달이 벼슬로 집을 떠나 있을 때에는 서로 편지와 시를 보내 각자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교류하였다. 남편 김성달은 아내에게 바람이 불거나, 천둥이 칠 때, 풀벌레가 울 때, 새들의 지저귐, 비를 맞으며, 아내와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접할 때, 달빛을 보며, 꽃그늘 아래에서, 길을 가다가, 꿈속에서, 심지어는 아무 일이 없을 때조차도 시를 지어 보냈다. 모든 일상사가 거의 시적 제재로 활용된 셈이다. 이런 면에서 이 두 사람의 부부문화는 평등이고, 조선이라는 사회적 환경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대안을 제시해 준다. 인문학적으로 충만한 삶이 현실을 승화시켜낼 수 있다.
- 연구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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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김성달이 부인에게 준 177수라는 적지 않은 양의 한시를 분석, 부부사랑 한시의 미적 특질을 연구하고자 한다. 김성달은 <寄內> ․ <次內> ․ <示內> ․ <寄李君>등등의 시제로 부인 이옥재에게 시를 주었다. 부부가 함께 읊은 경우에는 <與內共吟> ․ <內外共賦>, 부부 중 먼저 시를 지어 건넨 사람은 <元韻> ․ <元詩> ․ <元作>, 원시에 차운한 사람은 <次韻>이라는 시제로 실려 있다. 김성달은 벼슬살이나 기타 여러 사연으로 홍성 갈산에 있는 가족을 떠나 있을 때, 늘 가족을 그리워하며 잠못 이루고, 그 정감을 한시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표출하였다. 섬세하고, 인자하며, 시를 사랑한 문학인이었다. 한 번은 부부가 ‘시 내기 바둑’을 두었다. 바둑에서 진 이옥재는 약속에 따라 35 수의 시를 지어야만 했다. 물론 김성달이 지은 원작 시에 차운하는 형식이었다. 안동세고에는 이 일에 대한 김성달의 메모가 기록되어 있다.
“옥재가 당시에 바둑을 두었는데 나에게 졌다. 시 내기의 약속에 따라서, 권 가운데 차운하지 않은 35수의 절구 시는 원작의 차례에 따라 읊어 차운하였다.”
두 부부는 한가로울 때 바둑 두기를 즐겨하였고, 더러는 술병 들고 강 누각에 올라 고기잡이 배 강 머리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취흥이 일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를 짓고 운자를 내 주었다. 그리고 서로의 시에 대해 평가를 해 주기도 하였다. 특히 김성달은 이옥재의 시를 ‘아름답다(佳․佳甚․絶佳)’고 평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본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쳐(語勢不成處。以其本意點改)’ 주기도 하였다. 부인 이옥재에게 시를 써서 “다시 세세토록 부부되어 저승에서도 복록 누리며 절로 편안하게 살자”고 맹서하였다.(<次內喜吟詩>)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공경하며, 사랑하는 정경이 이 시집에는 그대로 녹아져 있다.
둘째, 이옥재가 남편에게 먼저 주거나 화답한 71수의 한시를 분석, 17세기 품격 높은 여성한시와 가족내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옥재는 조선 중기 명문장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적지 많은 양의 작품을 남겼음에도 학계에 언급이 되지 않았던 여성문인이다. 이옥재의 할아버지는 현주 이소한이고, 증조는 조선 중기 문장 사대가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귀, 월당 강석기가 외조이다. 이 들은 모두 문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들이다. 이옥재는 이러한 친정 가문의 문학 환경 속에서 문인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타고나 자연스럽게 시 창작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성달과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는데 이들 9남매 가운데 22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 김시흡을 제외한 여덟 자녀의 시가 연주록에 실려 있고, 김시제는 문집 도옹유고, 김호연재는 『호연재유고』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자녀들 모두가 문학적 재주와 학문적 자질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버지 김성달 ․ 어머니 이옥재의 문학교육과 사랑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우리나라 한시사에서 김성달 부부와 가족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연구하고자 한다. 조선후기 문학평론가 이규경(1788-?)은 시가점등에서 김성달과 부인 연안이씨, 부실 울산이씨 및 자녀 13인이 다 시를 잘 한다고 논평하였다. 그리고 <내가수증시>에서는 김성달과 연안 이씨 부부시를, <연주록>에서는 이들의 자녀 시 가운데 몇 편을 뽑아 이들을 ‘淸新’한 시라고 평가하면서, 이 집안의 문학적 역량을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없었던(鴨東古今未曾有)’ 고무적인 사실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 문학평론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김성달가의 문학이 그동안 묻혀 있다가, 뒤늦은 자료발굴로 이제야 시작단계에 있다. 이 집안의 가족문학사를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하여 우리나라 문학사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자는 최근 김성달의 문집 가운데 완전하지 않은 낙질본의 존재와 소재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 문집이 확인된다면 김성달의 문학세계도 좀 더 온전해지리라 여겨진다.
- 한글키워드
- 17세기,김성달,이옥재,부부,고전문학사.,부부사랑,부부수창한시,가족문학사
- 영문키워드
- 17th century,couple's exchange poetry. the history of classical literature,couple's llove.,couple,Kim Sung-Dal,Lee Ok-Jae,the history of family literature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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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남편 김성달이 부인에게 준 177수라는 적지 않은 양의 한시를 분석, 부부사랑 한시의 미적 특질을 연구하고자 하였다. 김성달은 <寄內> ․ <次內> ․ <示內> ․ <寄李君>등등의 시제로 부인 이옥재에게 시를 주었다. 부부가 함께 읊은 경우에는 <與內共吟> ․ <內外共賦>, 부부 중 먼저 시를 지어 건넨 사람은 <元韻> ․ <元詩> ․ <元作>, 원시에 차운한 사람은 <次韻>이라는 시제로 실려 있다. 김성달은 벼슬살이나 기타 여러 사연으로 홍성 갈산에 있는 가족을 떠나 있을 때, 늘 가족을 그리워하며 잠못 이루고, 그 정감을 한시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표출하였다. 섬세하고, 인자하며, 시를 사랑한 문학인이었다. 한 번은 부부가 ‘시 내기 바둑’을 두었다. 바둑에서 진 이옥재는 약속에 따라 35 수의 시를 지어야만 했다. 물론 김성달이 지은 원작 시에 차운하는 형식이었다.
이 부부는 한가로울 때 바둑 두기를 즐겨하였고, 더러는 술병 들고 강 누각에 올라 고기잡이 배 강 머리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취흥이 일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를 짓고 운자를 내 주었다. 그리고 서로의 시에 대해 평가를 해 주기도 하였다. 특히 김성달은 이옥재의 시를 ‘아름답다(佳․佳甚․絶佳)’고 평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본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쳐(語勢不成處。以其本意點改)’ 주기도 하였다. 부인 이옥재에게 시를 써서 “다시 세세토록 부부되어 저승에서도 복록 누리며 절로 편안하게 살자”고 맹서하였다.(<次內喜吟詩>)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공경하며, 사랑하는 정경이 이 시집에는 그대로 녹아져 있다.
둘째, 이옥재가 남편에게 먼저 주거나 화답한 71수의 한시를 분석, 17세기 품격 높은 여성한시와 가족내 위상을 살펴보았다. 이옥재는 조선 중기 명문장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적지 많은 양의 작품을 남겼음에도 학계에 언급이 되지 않았던 여성문인이다. 이옥재의 할아버지는 현주 이소한이고, 증조는 조선 중기 문장 사대가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귀, 월당 강석기가 외조이다. 이 들은 모두 문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들이다. 이옥재는 이러한 친정 가문의 문학 환경 속에서 문인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타고나 자연스럽게 시 창작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성달과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는데 이들 9남매 가운데 22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 김시흡을 제외한 여덟 자녀의 시가 연주록에 실려 있고, 김시제는 문집 도옹유고, 김호연재는 『호연재유고』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자녀들 모두가 문학적 재주와 학문적 자질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버지 김성달 ․ 어머니 이옥재의 문학교육과 사랑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우리나라 한시사에서 김성달 부부와 가족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연구하고자 하였다 조선후기 문학평론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김성달가의 문학이 그동안 묻혀 있다가, 필자에 의해서 뒤늦은 자료발굴로 이제야 시작단계에 있다. 이 집안의 가족문학사를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하여 우리나라 문학사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자는 최근 김성달의 문집 가운데 완전하지 않은 낙질본의 존재와 소재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 문집이 확인된다면 김성달의 문학세계도 좀 더 온전해지리라 여겨진다.
-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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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ae Lee (李玉齋1643-1690) was an intellectual who heard, saw, and knew lots of things. She was a granddaughter of Jeong-Gu Lee, Weolsa, and inherited the literary environment of her family, so she had the makings of a writer. In addition, her husband, Seong-Dal Kim, was also a literary enthusiast who loved writing poems.
The poems of Ok-Je Lee and Seong-Dal Kim are in 『Ahndongsego』, the collection of poems of them. The collection has 249 poems; 71 poems of Ok-Je Lee, 177 poems of Seong-Dal Kim, and 1 poem of Hong-Sang Kim, Ok-Jae Lee’s father. Most of her poems in the collection were written with the same subject that her husband took to write his poems, and some of them were written right after her husband finished his writing and vice versa. Therefore, many of the poems have the first word or second word in their name. This study analyzed the literary world of Ok-Jae Lee by classifying it into the following five parts.
First, happy daily life : the overall life of Ok-Jae Lee shown in the collection seemed to be happy. In her poems, we can read that her husband was attentive and her siblings were lovely.
Second, the tasteful appearance of fishing village : Ohdu-li was a fishing village on a island 40 years ago, but it became a farming village after filling out the sea. Many of the 71 poems of Ok-Jae Lee depicted the tasteful appearance of the village.
Third, farewell and attachment : In the poems, a woman’s feeling that wished his husband who were away due to government service would back home is shown well. Unchanged trust and her love for her husband are full of her love poems.
Forth, sad thoughts during her illness : Ok-Jae Lee died untimely at 48 although she lived relatively peaceful life. As her husband was away from home due to his government service when she was ill, she had to take care of many things by herself.
Fifth, a pledge of love : Ok-Jae Lee made a vow to the sea and mountains that she would not break her love to her husband and her love to her husband was new everyday, and she included this vow in the poems, and sent them to her husband. The vow for her eternal love is very touched.
Her poems have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Chinese poems in Korea because ① hers is one and only case of the collection of poems of married couple, ②she made a breakthrough by making the family literature by raising her children by herself, and ③she inherited the trend of the 17th century in the female literary history of the school of Kiho.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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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달이 부인에게 준 177수라는 적지 않은 양의 한시를 분석, 부부사랑 한시의 미적 특질을 연구하고자 한다. 김성달은 <寄內> ․ <次內> ․ <示內> ․ <寄李君>등등의 시제로 부인 이옥재에게 시를 주었다. 부부가 함께 읊은 경우에는 <與內共吟> ․ <內外共賦>, 부부 중 먼저 시를 지어 건넨 사람은 <元韻> ․ <元詩> ․ <元作>, 원시에 차운한 사람은 <次韻>이라는 시제로 실려 있다. 김성달은 벼슬살이나 기타 여러 사연으로 홍성 갈산에 있는 가족을 떠나 있을 때, 늘 가족을 그리워하며 잠못 이루고, 그 정감을 한시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표출하였다. 섬세하고, 인자하며, 시를 사랑한 문학인이었다. 한 번은 부부가 ‘시 내기 바둑’을 두었다. 바둑에서 진 이옥재는 약속에 따라 35 수의 시를 지어야만 했다. 물론 김성달이 지은 원작 시에 차운하는 형식이었다. 안동세고에는 이 일에 대한 김성달의 메모가 기록되어 있다.
“옥재가 당시에 바둑을 두었는데 나에게 졌다. 시 내기의 약속에 따라서, 권 가운데 차운하지 않은 35수의 절구 시는 원작의 차례에 따라 읊어 차운하였다.”
이 부부는 한가로울 때 바둑 두기를 즐겨하였고, 더러는 술병 들고 강 누각에 올라 고기잡이 배 강 머리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취흥이 일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를 짓고 운자를 내 주었다. 그리고 서로의 시에 대해 평가를 해 주기도 하였다. 특히 김성달은 이옥재의 시를 ‘아름답다(佳․佳甚․絶佳)’고 평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본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쳐(語勢不成處。以其本意點改)’ 주기도 하였다. 부인 이옥재에게 시를 써서 “다시 세세토록 부부되어 저승에서도 복록 누리며 절로 편안하게 살자”고 맹서하였다.(<次內喜吟詩>)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공경하며, 사랑하는 정경이 이 시집에는 그대로 녹아져 있다.
둘째, 이옥재가 남편에게 먼저 주거나 화답한 71수의 한시를 분석, 17세기 품격 높은 여성한시와 가족내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옥재는 조선 중기 명문장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적지 많은 양의 작품을 남겼음에도 학계에 언급이 되지 않았던 여성문인이다. 이옥재의 할아버지는 현주 이소한이고, 증조는 조선 중기 문장 사대가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귀, 월당 강석기가 외조이다. 이 들은 모두 문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들이다. 이옥재는 이러한 친정 가문의 문학 환경 속에서 문인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타고나 자연스럽게 시 창작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성달과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는데 이들 9남매 가운데 22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 김시흡을 제외한 여덟 자녀의 시가 연주록에 실려 있고, 김시제는 문집 도옹유고, 김호연재는 『호연재유고』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자녀들 모두가 문학적 재주와 학문적 자질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버지 김성달 ․ 어머니 이옥재의 문학교육과 사랑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우리나라 한시사에서 김성달 부부와 가족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연구하고자 한다. 조선후기 문학평론가 이규경(1788-?)은 시가점등에서 김성달과 부인 연안이씨, 부실 울산이씨 및 자녀 13인이 다 시를 잘 한다고 논평하였다. 그리고 <내가수증시>에서는 김성달과 연안 이씨 부부시를, <연주록>에서는 이들의 자녀 시 가운데 몇 편을 뽑아 이들을 ‘淸新’한 시라고 평가하면서, 이 집안의 문학적 역량을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없었던(鴨東古今未曾有)’ 고무적인 사실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 문학평론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김성달가의 문학이 그동안 묻혀 있다가, 뒤늦은 자료발굴로 이제야 시작단계에 있다. 이 집안의 가족문학사를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하여 우리나라 문학사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자는 최근 김성달의 문집 가운데 완전하지 않은 낙질본의 존재와 소재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 문집이 확인된다면 김성달의 문학세계도 좀 더 온전해지리라 여겨진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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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나라 한시문학사 연구에서 ‘부부수창한시’라는 외연을 확장해 줄 것이다. 우리나라 고전한시문학사에서 남녀가 주고받은 한시는 적지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여성들이 처했던 문학적 환경이 녹록하지 않았던 것처럼 문학적 재주가 탁월한 여성이라 하더라도 문학작품을 많이 내놓지 못하였다. 특히 18~9세기로 넘어 가기 시작하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고착화되어 가는 듯하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부인이 아닌 제3의 여성이라 할 수 있는 기생과의 사랑과 그 사랑을 통해 표현된 문학작품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정작 문재가 출중하였던 부인과는 문학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문학적 역량을 침묵으로 일관해야했던 많은 여성지성인들은 속으로 울부짖어야했다. 김성달 부부의 딸 김호연재는 자신의 문학행위를 “세상이 미치광이라 일컬어도 혐의하지 않겠다”며 몸부림치기도하였다. 그런 면에서 17세기 김성달과 이옥재 부부의 많은 수창시는 특별하고, 참신하며, 소중한 문학유산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부부수창시라는 영역 안에서 한시 연구의 한 방향이 발전적 모습으로 연구되길 기대해본다.
둘째,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서 ‘가족문학사’라는 연구의 틀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충청도 홍성 갈산의 한적한 어촌 오두리! 가난하지만 화목한 김성달 가족은 문학과 사랑으로 일깨워가며 전가족 문인이라는 쾌거를 일구어 내었다. 조선 후기 문단계에 이미 소문이 나 있었던 가문이었으나, 점차 기울어진 가세와 문집자료의 미발굴로 학계의 연구대상에서 멀어져 있었다. 김성달 부부는 아들 딸 구별 없는 평등한 자녀교육을 통해 아들은 물론 딸들도 문집을 출간하였다. 김성달 부부의 시집 『안동세고』, 김성달과 첩 울산이씨, 서녀의 시집 『우진』, 딸 김호연재의 시집 『호연재유고』, 아홉 남매와 서모 울산이씨의 시집 『연주록』, 아들 김시제의 문집 『도옹유고』, 존재가 확인된 김성달의 『청주유고』와 실전된 아들의 문집, 편린으로 전해지는 딸들의 시까지 포함하면 부모와 서모, 형제, 서형제 까지 김성달 부부 당대 전 가족이 문인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딸 들이 문집을 출판한 사례가 없지 않은데 이러한 가문의 사례까지 종합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가족문학사 연구에 김성달가가 규모나 질량면에서 선구적이다.
셋째, 17세기 김성달 부부의 부부문화와 인문학적 소통은, 오늘날 무너져 가고 있는 가족 문화에 하나의 대안을 줄 것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자본주의 속에서 점차 이기적이고 극단적으로 흐르는 부부관계와 가족문화 속에서, 김성달과 이옥재 부부의 일상은 상호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평등적 삶의 모습이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었고, 꽃을 완상하며 산책을 즐겼다. 부부는 시 내기 바둑을 둘 정도로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진 사람은 벌칙으로 시를 썼고, 상대방은 그 시에 화답하였다. 김성달이 벼슬로 집을 떠나 있을 때에는 서로 편지와 시를 보내 각자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교류하였다. 남편 김성달은 아내에게 바람이 불거나, 천둥이 칠 때, 풀벌레가 울 때, 새들의 지저귐, 비를 맞으며, 아내와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접할 때, 달빛을 보며, 꽃그늘 아래에서, 길을 가다가, 꿈속에서, 심지어는 아무 일이 없을 때조차도 시를 지어 보냈다. 모든 일상사가 거의 시적 제재로 활용된 셈이다. 이런 면에서 이 두 사람의 부부문화는 평등이고, 조선이라는 사회적 환경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대안을 제시해 준다. 인문학적으로 충만한 삶이 현실을 승화시켜낼 수 있다.
- 색인어
- 김성달, 이옥재, 17세기, 부부수창시, 고전문학, 부부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