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 인용문 2집

호연재 김씨

한문역사 2024. 8. 4. 10:33

조선을 빛낸 여류시인, 호연재김씨

조선을 빛낸 여류 시인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신사임당(사임당신씨), 허난설헌(난설헌허씨) 등...

오늘은 그들보다 낯설지만 시를 품으며 여성의 삶을 개척한 호연재 김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호연재(浩然齋) 김씨는 (신)안동김씨로  고조부는 병자호란때 강화성에서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고 증조부는 이조참판 수북 김광현(金光炫,1584~1647)으로 충청도 홍주(홍성) 갈산면 오두리(갈뫼)에서 고성군수 김성달(호조참판 고균 김옥균의7대조)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배움 아래 소학 등 여러가지 학문을 익혔습니다.

김성달(金盛達,1642~1696)은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 좌의정 월사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증손녀인  부인 이옥재(李玉齋,1643~1690)과 함께 서로 술을 즐기며 바둑과 시문을 주고받았다고 하는데요,   안동세고(安東世稿)라는 시문집을 남길정도로 부부시인으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김호연재는 20살 차이가 나는 여러 형제들을 가르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김호연재가 19살 되던 해,  병조판서 이조판서 증영의정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증손자 소대헌 송요화(宋堯和,1682~1764)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데요,  송씨가 가장으로서 매우 무책임해 호연재가 남편 대신 집안살림을 책임지며 모든 일을 도맡아 진행했다고 합니다.

맹자의 '호연지기'를 자신의 호로 삼을 만큼 당찬 김씨는 남편 송요화의 지나친 방탕 생활로 인해 당당히 홀로서기를 시도했습니다.  (호연지기 : 맹자 공손추편에 나오는 말로, 천지간에 가득하고 넓은 기운을 말함)

시댁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김호연재의 학문을 알아본 시댁 조카들이 찾아와 호연재에게 시와 학문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하는데요, 호연재는 그들의 스승이 되어 학문을 전수하고, 시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출가한 뒤 순탄치 않은 부부생활 속에 많은 시간을 홀로 지내면서 호연재는 늘 친정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시에는 멀리 떨어진 친정과 혈육을 그리는 정을 곡진(曲盡)하게 표출한 작품이 많습니다.

 

김호연재의 삶과 시를 돌아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대전에 있는 소대헌·호연재 고택입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90호)

호연재가 남긴 시와 당시 대전 지역 사대부의 가택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전 소대헌(송요화)·호연재 고택으로

현재는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는 등의 활용사업을 통해 문화재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17~18세기 여류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240여수의 한시를 남긴 김호연재(金浩然齋) 그의 당당하고 호연했던 삶과 뛰어난 문장의 시를    남겨진 고택을 통해 찾아보세요.

 

夜吟(야음)  밤에 읊다 / 金浩然齋(김호연재)       

月沈千嶂靜(월침천장정)  달빛 잠긴 천개의 봉우리 고요하고

泉影數星澄(천영수성징)  샘물은 촘촘히 별빛에 맑구나

 

竹葉風煙拂(죽엽풍연불)  대나무 잎엔 안개 바람이 스치고

梅花雨露凝(매화우로응)  매화 꽃엔 비 이슬이 엉기었네

 

生涯三尺劍(생애삼척검)  삶이란 석자 시린 칼이요

心事一懸燈(심사일현등)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惆悵年光暮(추창연광모)  서럽게도 해는 또 저물어 가고

衰毛歲又增(쇠모세우증)  시든 백발이 나이를 더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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