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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종가 안내

한문역사 2025. 4. 18. 07:21

안동 학봉 김성일 종택(安東 鶴峰 金誠一 宗宅)-(附) 학봉기념관,서지재사,소계서당- 의성 김씨 종택 Ⅲ[한국의 명가 명택]

2018. 7. 1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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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의성 김씨 종택 -안동 학봉 김성일 종택( 鶴峰 金誠一 宗宅)

 

(附) 학봉기념관,서지재사(西枝齋舍),소계서당(邵溪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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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의성 김씨 내앞종가(金氏 川前) https://blog.naver.com/ohyh45/221308197683

 

『해위 윤보선 고택 (海葦 尹潽善 古宅』                       https://blog.naver.com/ohyh45/221308355586

『해남 고산 윤선도 고택,녹우당(綠雨堂)』                   https://blog.naver.com/ohyh45/221310115955

 

『예산 추사 고택( 秋史 金正喜 古宅)』                  https://blog.naver.com/ohyh45/221310692315

『경주 교동 최씨 고택(州 (慶州 校洞 崔氏 古宅』      https://blog.naver.com/ohyh45/221311848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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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학봉 김성일 종택-(附) 학봉기념관,서지재사   https://blog.naver.com/ohyh45/221316992817

『의성 김씨(義城金氏)-안동 운암종택. 예천 남학종택https://blog.naver.com/ohyh45/221319088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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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청각(東 臨淸閣)과  이상룡-固城 李氏』 https://blog.naver.com/ohyh45/221321665600

 

 

1. 안동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峰宗宅)

경상북도 기념물 제 112호,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걔리

 

 

안동 서후면 금계리 검제마을 의성 김씨 입향조 학봉 김성일

 

청환(淸宦), 충의(忠義), 석학(碩學)들이 줄을 이어 무수히 배출된 조선조(朝鮮朝)의 대표적인 유가(儒家)의 터전이 검제이다. 다섯집, 많아야 10여집이 옹기종기 늘어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소지명(小地名)도 많다.

만운(晩雲), 경광(鏡光), 어뜰(於坪), 효자문(孝子門), 금장골(金莊谷), 작장골(勺將谷), 미산(眉山), 텃골(基谷), 동무지(東

地), 부루골(扶老谷), 복당(福堂), 번구(樊口), 뒷골(後谷), 단정(丹鄭), 사망(仕望), 알실(知谷), 가음(佳陰), 봄파리(春坡), 능골(陵谷), 조부실(造火谷), 덕거리(德巨里), 대골(大也谷), 재일(在日), 독실(瓮谷), 봉림(鳳林) 등 20여개 소촌이 모인 곳이다.

 

흔히 한 곳에 모여 있는 마을과는 색다른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장이다. 이에 따라 예부터 "열두 검제는 들을 검제이지 눈으로 볼 검제는 아니다."라고 했듯이 한눈에 마을 전체를 보고 감상할 수는 없다. 이렇게 늘어선 마을 앞을 가로질러 비단폭을 펼쳐놓은 듯 수정같이 맑은 금계천(金溪川)이 흘러 풍수지리의 대지의 수리를 완벽하게 갖춰 놓은 뒤 멀리서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洛東江 : 潢水)과 서쪽의 청성산(靑城山) 아래에서 만나 합수하면서 절경을 창조해 놓았다.

지방지(地方誌)로 가장 오래된 영가지(永嘉誌)는 이렇게 적고 있다. "속명을 (今音地), 또는 금계(金溪)라 한다. 안동부 서쪽 20리허에 있다. 옛부터 천년을 두고도 무너지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 불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 임하(臨河)로부터 와서 살게 되면서 마을이 풍요로와 졌다.

뒷날 의성김씨(義城金氏)가 번성하게 살게되니 금계(金溪)라 고쳤다.이곳에 의성 김씨가 터를 잡은 입향조는 학봉(鶴鳳) 김성일이다

 

 

의성 김씨가 처음 안동부에 터를 잡게 된 것은 김거두(金居斗)와 아들 김천(金洊) 부자가 지금의 동시 율세동, 일명 방적동(邦適洞)에 자리잡으며 부터이다. 김거두의 증손인 김만근(金萬謹)이 임하현의 해주 오씨(海州吳氏)와 혼인하여 처가 고장인 내앞(川前)으로 옮겨 새 터전을 마련하였다. 김만근의 손자 청계 김진(靑溪 金璡)은 이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광범위한 지역에 자손만대의 큰 계획(爲子孫萬年大計)을 확립한 분이다.

..
공은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약봉공(藥峯公 : 金克一)은 문과에 급제하여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역임하고 내앞에 터를 잡았으며,

차남 귀봉공(龜峯公 : 金守一)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을 지내고 일직현(一

       直懸) 구미(龜尾 : 뒤에 내앞으로 歸鄕)에 터를 잡고,

삼남 운암공(雲巖公 : 金明一)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하현 신덕(新德)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남이 바로 학봉공으로 이곳 검제에 터전을 마련하였고,

오남 남악공(南嶽公 : 金復一)은 문과에 급제하고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하고 예천현(醴泉懸)의 용문면

      (龍門面) 구계리(九溪里)에 터를 잡아 각각 분가하였다.

..
학봉공은 검제로 이거(移居)한 시기는 선조(宣祖) 15년(1582, 壬午) 7월이다. 공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 원년(1568)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홍문관 (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모친 3년상후에 처가(妻家)가 있는 검제로 옮겼던 것이다. 5년 뒤 공이 50살이 되던 해인 선조 20년(1587, 丁亥)에 마을의 서쪽 끝 청성산(靑城山, 일명 星山) 절경의 중허리에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의  땅을 기증받아 석문정사(石門精舍)를 건립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조 22년(1589, 己丑) 12월에 조정에서 일본의 보빙(報聘 : 友好로 他國이 訪問하였을 때의 答禮使節)을 논하자 적정(賊情)을 측량키 어려워 모두들 기피하였을 때 공에게 일본(日本)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차배(差配)하여 일본을 다녀왔었다.

..
그 다음해인 선조(1590, 庚寅) 3월에 잠시 낙향하였다가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는 초유문을 지어 각 고을에 보내 의병의 궐기와 지원을 극력 종용하였다.

특히 관병과 의병을 잘 조화하여 임진왜란의 삼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거두었다. 아듬해 왜적을 맞아 사력을 다하여 전투를 독려하던 중 병을 얻어 진주공관에서 순국하니 향년이 56세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고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공이 검제로 이거(移居)한 지 사백이십여년, 그동안 많은 명현(名賢), 석학(碩學)들을 배출하여 대과(大科=文科) 출신자가 10명, 소과(小科=司馬試) 출신자가 25명, 은일(隱逸) 또는 음직(蔭職)이 25명, 항일(抗日)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가 12명에 이르고 있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마을에 위치한 학봉종택.

 

퇴계 이황의 제자로 류성룡과 함께 영남지역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던 학봉 김성일이 살았던 집이다.

 

 

안동 의성 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이 집은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이 살았던 곳이다. 학봉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성리학에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선 선조 1년(1568)에 문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계승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조자 영조 38년(1762)에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그후 1964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에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邵溪書堂)으로 쓰도록 하였다.

안채는 오른쪽 3칸이 대청이고, 왼쪽 2칸이 안방이며 그 끝이 부엌이다. 이 건물은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종택으로서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출처:문화채청>

 

 

학봉 종택 전경 

 

 

 

학봉고택 건물 배치도​

 

의성 김(義城金)씨의 종가인 학봉종택은 되돌아 온 집이다. 처음 지어질 때는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낮은 지대로 인해 침수가 잦아 김성일(金誠一: 1538~1593,호 : 학봉(鶴峰)의 8대손 김광찬(金光燦)이 1762년 이곳에서 100m 정도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邵溪書堂) 자리에 옮겨지었고,

현재 학봉종택이 있는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다 1964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으로 쓰도록 하였고, 기존의 소계서당을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하게 되었다.

“ 현재의 집터인 금계(金溪)는 이곳 사람들이 ‘검제(黔提)’라 부르는 곳인데, 조선 전기부터 천년 동안 결코 그릇된 일이 없을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히던 곳입니다. 김성일 할아버지께서는 마흔다섯이 되시던 해에 지금의 터에 집을 지으셨던 것이지요.”


국내 굴지의 정보통신기업에서 경영자로 활동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문중을 돌보고 있는 종손 김종길(金鍾吉) 씨는 “잔디와 수목은 새로 집을 옮기며 심게 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조선 시대 대표 학자인 이황(李滉, 호 : 퇴계(退溪))의 적통을 이어받은 김성일 이후로 집안에서는 국가시험인 과거(科擧)에 합격한 사람이 셀 수도없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그 흔적을 되짚어봐야 할 대상은 바로 김성일.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정에 잘못된 보고를 올린 우매한 신하로만 알려져 있다. 그의 통신사 동료였던 황윤길(黃允吉)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지나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민심이 동요될 것을 우려한 김성일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반대 입장을 피력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진주대첩을 지휘한 학봉 김성일

 

실제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류성용(柳成龍) 등은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 위해 그를 천거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황의 적통을 잇는 수제자이자 왕실이나 권력,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백성을 위해 직언(直言)을 하는 인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리가 일어나면 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는 임시 벼슬인 경상도초유사(慶尙道招諭使)로 임명된 후 학봉이 진주성에 오자 산속에 피신했던 판관 김시민도 성으로 돌아와 수성태세를 갖췄고, 관군은 성 밖의 최경희 등 호남 의병과 곽재우, 김준민 등 경상 각지의 의병과 협력체제를 갖췄다.

 

학봉은 진주대첩(晉州大捷)을 총지휘하고 관군(館軍)과 의병을 함께 통솔하며 3만여 왜군에 맞서 거둔 진주대첩은 학봉이 주도한 이런 민관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임진년 당시 전국 의병 반수 이상이 학봉의 휘사에 있었다(선조실록).

그러나 학봉은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분투하던 중 병사한다. 그가 죽고 2개월 뒤 진주성은 왜군에 함락됐다그는 수많은 전공(戰功)을 남긴 그는 진주성(晉州城)에서 순국하였다. 관군보다 민중을 믿고 그 힘을 모으는데 주력했다. 그가 민중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까닭이다.

 

훗날 광해군은 제문과 제수를 내려 흠향을 빌었다.

“하늘이 뽑은 호걸, 신이 내린 신령스러운 사람/

덕을 갖추고 문장까지 뛰어난 우뚝한 명신/

왕명을 받들어 사신을 가니 섬 오랑캐 혼이 빠지고/

…몸을 달려 전장을 누비기를 목숨이 다해서야 그만두었네.” 

 

1592년 임진전쟁 때 전장으로 떠나면서, 의병장 제봉 고경명 선생은 식솔을 학봉 종가에 맡겼다. 그해 제봉은 금산전투에서 둘째 아들과 함께 전사했고, 학봉 역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성을 지키다 병사했다. 제봉의 뜻을 따라 넷째 아들 용후가 이끌고 간 식솔은 50여명. 학봉의 부인과 자식들은 이들을 식구로 받아들였고, 잠잘 곳과 양식과 땅을 마련해주었다. 제봉 일가는 그곳에서 수년간 지내다가 귀향했다.

 

 

용후는 학봉의 손자 김시권과 연배가 비슷했다. 둘은 1605년 나란히 식년시에 합격했고, 용후는 1617년 안동부사로 부임해 인연을 이어갔다. 13대손 고재오 전 충효부대장은 10여년 전 종택 입구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 한 그루 심었다. 영호남의 기개 높은 두 선비 집안의 정리는 그렇게 굳고 깊었다.

 

 

 

 

학봉종택 대문. 문간채를 두고 있는 솟을대문을 하고 있다

 

 

문간채 밖에 학봉 기념관이 있다

 

 

문간채 솟을 대문 안쪽

 

 

 

문간채는 솟을대문 양쪽에 2칸씩 방을 두고 있다. 외양간이나 창고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1960년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문간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학봉 종택 담장

 

 

학봉종택 앞 마당

 

전통 한옥의 경우 마당이 개방되고 수목이 심어져 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은 담장을 두르고 다양한 수목을 정원수로 심어놓고 있다. 학봉종택은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고급스러운 한옥이다


 

안동 학봉고택 마당 

 

 

이 집의 특징 중 하나는 전통적인 주택과 현대적인 정원의 공존이다. 전통 조경에서는 마당에 잔디나 나무를 많이 심는 것을 꺼려했다. 이런 이유로 별원(別園) 혹은 후원(後園)이 발달하게 되었으나, 학봉종택은 1964년에 위치를 이전하여 다시 건축하는 과정에서 매우 현대적인 모습의 정원을 도입했다. 덕분에 잘 가꾸어진 나무와 기암괴석을 넉넉한 풍경과 함께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정원에서는 정기적으로 고택음악회도 개최하고 있다

 

 

 

작은 사랑이 있는 중문채와 사랑채가 있는 앞마당

 

 

학봉 종택 앞마당 -원래와 달리 잔디를 심어 놓았다

 

 

학봉종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경북 북부지방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다.소계서당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곳에 지었던 소계서당 건물을 개조하여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다.

 

 

안동 학봉고택 사랑채

 

본채의 동편에는 사랑채가 있는데 마루만 돌출형으로 누마루 처럼 튀어 나와 있다. 사랑채는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두고 앞면에 길게 툇마루가 있던 소계서당이었던 건물을 개조했다. 그 결과 왼쪽은 사랑방으로 꾸미고, 오른쪽은 사랑 마루방으로 만들었다.

사랑방 왼쪽에 작은 사랑방, 뒤쪽에 책방을 두었고 사랑채를 안채와 연결하였다. 사랑채와 풍뢰헌의 문창살 위에는 통풍을 위한 작은 창이 나 있는데, 본격적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 통풍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짐작된다. 연기가 위로 올라가면 방안의 온기를 유지하면서 환기를 시킬 수 있도록 한 선조들의 지혜를 볼 수 있다.

 

난간을 두룬 위엄있는 사랑채.

 

앞면 4칸 옆면 3칸아며  2칸은 온돌을 넣은 방이며 2칸 마루인  팔작 지붕의 건물이다. 4칸 전면부에 갈개 계자난간을 돌린 누마루가 달려 누각을 겸한 건물고 칸마다 가각의 현판이 걸렸고, 1963년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은 원래 위치에 두고 소계서당 건물을 개조하여 사랑채로 지은 까닭인지 원래 건물보다 크고 화려하여 위엄이 있다

 

 

 

사랑채의 동쪽 측면

 

오른쪽 2칸은 대청마루로 보이며, 분합문을 달아 놓고 있다. 앞면 4칸에 칸마다 현판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