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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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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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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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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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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오다 단조노추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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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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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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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大名), 오와리국 오다 단주노초 가문의 당주, 우대신 겸 우근위대장, 천하인(天下人). 무로마치 막부를 종결시키고 센고쿠 시대의 양상을 완전히 변화시켰기에 이 인물을 빼고 센고쿠 시대의 역사를 논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한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이며 당대에 많은 파격을 불러왔지만 일본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죽은 점 등으로 인해 후대의 작가들에게 매우 사랑받고 있으며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가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기도 했다. 한국식 독음은 직전신장으로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라는 게임이 신장의 야망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졌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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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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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및 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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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자녀이름생년월일사망일비고서장자오다 노부마사(織田信正)
(무라이 시게카츠, 村井重勝)1554년 6월 4일1647년 12월 21일장남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1557년차남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1558년1630년 6월 10일3남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간베 노부타카, 神戸信孝)1558년 4월 22일1583년4남오다 히데카츠(織田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羽柴秀勝)1568년1586년 1월 29일하시바 집안에 양자로 보내짐5남오다 카츠나가(織田勝長)1569년혼노지의 변에서 전사6남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12]불명불명7남오다 노부요시(織田信吉)1573년1615년 5월 15일8남오다 노부사다(織田信貞)1574년1624년 7월 21일9남오다 노부타카(織田信高)[13]1576년1603년 1월 23일10남오다 노부요시(織田信好)불명1609년 8월 13일11남오다 나가츠구(織田長次)불명1600년 10월 21일장녀도쿠히메(徳姫)1559년 11월 11일1636년 2월 16일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정실차녀소우오인(相応院)1561년1641년 6월 17일가모 우지사토의 정실3녀히데코(秀子)불명1632년 5월 30일츠츠이 사다츠구의 정실4녀에이히메(永姫)1574년1623년 3월 24일마에다 토시나가의 정실5녀호우온인(報恩院)1574년1653년 9월 6일니와 나가시게의 정실6녀오후리(於振)불명1643년 5월 26일7녀겐코인(源光院)불명1600년 11월 13일마데노코지 아츠후사의 계실8녀산노마루도노(三の丸殿)불명1603년 3월 17일9녀게츠묘인(月明院)불명1608년 9월 15일도쿠다이지 사네히사의 정실 -
형제자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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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 오다 나가마스
센고쿠 시대의 맹활약으로 일본사의 큰 전환점이 된 인물이며, 이에 걸맞게 현대까지도 현대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위인 중 1명으로, 드라마나 게임 등 일본사를 다루는 여러 매체에서 빼놓을 수 없이 나온다.
그가 센고쿠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던 이유는 그 누구보다도 센고쿠 다이묘로서 실력과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의 시작점은 비슷한 유명세를 지닌 타 다이묘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노부나가 물려받은 '오와리'는 땅이 비옥해 쌀 산출량이 많았고[17] 당시 수도였던 교토와도 매우 가깝다는 분명한 이점은 있었지만 그만큼 수도를 노리는 다른 제후들에게 그대로 짓밟힐 수 있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노부나가의 선조부터가 방계 출신인데, 명분을 가지고 가문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하극상을 일으켜 기존의 다이묘 가문을 숙청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신하 가문 출신, 심지어 그런 역적 가문에서도 방계였기에 노부나가의 정치적 정통성과 외교 관계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노부나가는 형제끼리 계승권을 두고 내분까지 일으켰을 정도이니 오와리가 가지는 몇몇 장점은 노부나가의 초기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18]
엄청난 카리스마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엄밀히 말해 현장 지휘관으로서 노부나가의 용병술은 용병술 하나로 상황을 극복할 정도로 뛰어나진 못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일선에 서며 사기를 돋구고 직접 적을 참살하며 승리를 거두는등 확실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긴 했으나, 현대 역사학자들 입장에선 동세대에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던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에 비하면 확실히 몇 수 아래로 평가된다. 실제로 오다군은 지리적, 정치적 입장상 전반적인 병사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면도 있었지만 그대신 병졸 숫자가 많았고 부유했기에 장비의 수준도 좋았으나[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 공기>나 <갑양군감> 같이 노부나가에 우호적인 사료 중 신뢰도가 있는 역사적 사료의 경우, 노부나가 본인이 직접 친정한 전투에서마저 (주로 다케다군에게) 수차례 패퇴한 적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렇듯 하나의 전장에서 벌어지는 전술의 관점에서 보면 당대 최고라 말하기 힘들었지만, 전국적인 판도를 읽어내는 전략적 안목과 정치력 면에서는 가히 당대 최고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21] 노부나가는 도쿠가와를 우방으로 두고도[22][23] 수차례의 전쟁 끝에 다케다 신겐이 직접 이끄는 본대를 상대로 전면전에서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최대한 신겐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외교적 방책으로 시간을 끌었다. 이후 신겐이 죽고 그 후계자인 다케다 카츠요리가 가문을 이어받자 오다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해 나가시노 전투를 일으켰고 대승을 거두어 설욕을 이뤄냈다. 그러고도 다케다 가문이 자체적으로 재흥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보고 일부러 다케다 가문을 방치해[24] 그들이 제 꾀에 넘어지도록 만들었고,[25] 그 사이 주변 세력들을 차분히 공략하며[26] 나가시노 전투 종전 후 7년 만에 다케다를 완벽히 공략할 수 있는 완벽한 판도를 짜내는데 성공했다.[27][28]
또한 다이묘들 간의 외교 외에도 노부나가의 정치력은 다방면으로 빼어났으며, 이 중 대표적인 일화가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a style="color: #0275d8;" href="https://namu.wiki/w/%EC%98%A4%EB
그가 센고쿠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던 이유는 그 누구보다도 센고쿠 다이묘로서 실력과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의 시작점은 비슷한 유명세를 지닌 타 다이묘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노부나가 물려받은 '오와리'는 땅이 비옥해 쌀 산출량이 많았고[17] 당시 수도였던 교토와도 매우 가깝다는 분명한 이점은 있었지만 그만큼 수도를 노리는 다른 제후들에게 그대로 짓밟힐 수 있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노부나가의 선조부터가 방계 출신인데, 명분을 가지고 가문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하극상을 일으켜 기존의 다이묘 가문을 숙청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신하 가문 출신, 심지어 그런 역적 가문에서도 방계였기에 노부나가의 정치적 정통성과 외교 관계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노부나가는 형제끼리 계승권을 두고 내분까지 일으켰을 정도이니 오와리가 가지는 몇몇 장점은 노부나가의 초기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18]
엄청난 카리스마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엄밀히 말해 현장 지휘관으로서 노부나가의 용병술은 용병술 하나로 상황을 극복할 정도로 뛰어나진 못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일선에 서며 사기를 돋구고 직접 적을 참살하며 승리를 거두는등 확실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긴 했으나, 현대 역사학자들 입장에선 동세대에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던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에 비하면 확실히 몇 수 아래로 평가된다. 실제로 오다군은 지리적, 정치적 입장상 전반적인 병사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면도 있었지만 그대신 병졸 숫자가 많았고 부유했기에 장비의 수준도 좋았으나[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 공기>나 <갑양군감> 같이 노부나가에 우호적인 사료 중 신뢰도가 있는 역사적 사료의 경우, 노부나가 본인이 직접 친정한 전투에서마저 (주로 다케다군에게) 수차례 패퇴한 적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렇듯 하나의 전장에서 벌어지는 전술의 관점에서 보면 당대 최고라 말하기 힘들었지만, 전국적인 판도를 읽어내는 전략적 안목과 정치력 면에서는 가히 당대 최고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21] 노부나가는 도쿠가와를 우방으로 두고도[22][23] 수차례의 전쟁 끝에 다케다 신겐이 직접 이끄는 본대를 상대로 전면전에서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최대한 신겐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외교적 방책으로 시간을 끌었다. 이후 신겐이 죽고 그 후계자인 다케다 카츠요리가 가문을 이어받자 오다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해 나가시노 전투를 일으켰고 대승을 거두어 설욕을 이뤄냈다. 그러고도 다케다 가문이 자체적으로 재흥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보고 일부러 다케다 가문을 방치해[24] 그들이 제 꾀에 넘어지도록 만들었고,[25] 그 사이 주변 세력들을 차분히 공략하며[26] 나가시노 전투 종전 후 7년 만에 다케다를 완벽히 공략할 수 있는 완벽한 판도를 짜내는데 성공했다.[27][28]
또한 다이묘들 간의 외교 외에도 노부나가의 정치력은 다방면으로 빼어났으며, 이 중 대표적인 일화가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a style="color: #0275d8;" href="https://namu.wiki/w/%EC%98%A4%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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