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막기 위해 이런 일까지... 고종 특사의 눈물겨운 사투


1905년 11월 17일에 강제된 을사늑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헤이그 밀사가 된 이상설·이준·이위종과 호머 헐버트 선교사의 공로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늑약을 사전에 막고자 분투했던 이용익(1854~1907)의 역사는 덜 알려져 있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할 당시에도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킬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고종황제가 외교무대에 투입된 인물 중 하나가 이용익이다.
목숨 걸고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지만...
지난 5월 발행된
제88집 논문 중 하나인 이항준 서울여대 교수의 '을사늑약과 헤이그평화회의 전후 고종의 외교적 대응'은
알렉산드르 파블로프 주한러시아공사 등이 등장하는 1905년 하반기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고종은 전 탁지부대신 이용익을 통해 대한제국의 정치 상황을 러시아에 알리면서
러시아의 대한제국 독립 지지를 호소했다. 1905년 9월 17일 파블로프는
이용익이 상해에서 전달한 고종의 명령을 러시아 정부에 보고했다."
을사늑약 직전의 외교무대에 투입된 이용익은 외교뿐 아니라 육상 경기에서도 통할 만한 인물이었다. 역사학자 이은식의
은 "덕수궁 남서쪽 일대를 이르던 소정동에는 금송아지 대감댁으로 부르던 큰 기와집이 있었다"라며 집주인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집에는 함경도 명천의 상민 출신으로 물지게를 나르던 물장수에서 고종 때 대신으로 비약적인 승격을 했던 이용익이 살았다. 이용익은 발이 매우 빨랐기에 임오군란 당시 장호원에 숨었던 명성황후와 고종의 연락을 담당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명성황후가 환궁하자 그는 단천부사에 발탁된 뒤 병사(兵使)로 승진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생수 택배원이었던 이용익은 출중한 달리기 실력의 보유자였다. 이것이 그의 정치적 비중을 높여줬다. 이뿐 아니라 돈줄을 찾아내는 수완도 대단했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있었던 일을 위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단천에는 금광이 있었는데 이용익은 금맥을 찾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채취된 금은 왕실의 재정 확장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이용익은 한 금광에서 비둘기 모양의 금괴가 나오자 진상하였는데, 고종이 다른 모양도 나오느냐고 묻자 그는 '금송아지가 나오면 반드시 바치겠습니다'라고 약속하였다. 이때부터 고종은 이용익을 가리켜 금독(金犢)이라고 부르며 더욱 총애하였다. 또한 그는 외국인의 광산 채굴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등 권한을 발휘했기에, 외국인들은 이용익을 당돌하다고 생각하며 미스터 돈키(Mr. Donkey)라고 불렀다."
고종이 금송아지라고 부른 이용익은 서구식 산업개편(이른바 개화)도 주도했다. 중앙에서 근무할 때는 새로운 양잠 기술을 확산시키고, 염직·제지업·금은세공업·목공업 등의 기술자 양성도 추진했다. 고종이 그를 내장원경(황실재정 담당), 탁지부대신(기획재정부장관), 중앙은행 총재 등에 임명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그처럼 다재다능했던 그가 일제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전에도 뛰어들었다. 이는 목숨을 건 일이었다. 파블로프 공사가 등장하는 위의 1905년 9월 사건은 한 편의 영화 같은 일이었다. 위의 이항준 논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한다.
"이용익은 7월 12일 비서관과 통역관을 동행하고,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제물포에서 극비리에 범선을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범선은 도중에 태풍을 만나 요동 근처에서 전복되었다. 한동안 이용익은 자신의 몸을 추스렸고 간신히 청국인의 도움으로 위해위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출발한 지 한 달이 넘어 상해에 도착했다."
평안도 서북쪽의 랴오둥반도 인근에서 죽을 뻔했다가 인천 건너편의 산둥반도에 간신히 도착했다. 이 때문에 인천에서 상하이까지 가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일본을 막으러 떠났다가 태풍을 만나 생사를 넘나들었으니, 그야말로 목숨을 건 외교 활동이었다.
그가 상하이에서 파블로프에게 전달한 고종의 친서에는 "러시아는 항상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지지했습니다", "짐은 이 고난의 순간에 니콜라이 2세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등등의 간청이 적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고종의 두려움이 묻어나는 친서를 들고 그 험한 여정을 떠났던 것이다.
주한러시아공사 파블로프가 한성이 아닌 상하이에서 고종의 친서를 받았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을 일으킨 다음 날인 1904년 2월 9일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인천을 장악했다. 그날 한성에서는 러시아인과 러시아 외교관들이 추방됐다. 그래서 고종 특사와 주한러시아공사가 상하이에서 극적 만남을 갖는 것은 한러 양측 모두에게 서글픈 일이었다.
일본의 침략을 차단하기 위한 이용익의 활동은 상하이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외교적 부담을 느끼는 파블로프의 만류를 뿌리치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위 논문은 "파블로프는 유럽 방문을 취소하고 고종의 새로운 명령을 기다리라고 이용익에게 강력히 조언했지만, 페테르부르크로 갈 것을 확고하게 결심한 이용익은 9월 30일 프랑스 우편선을 타고 마르세이유로 출발했다"고 한 뒤 을사늑약의 달인 그해 11월에 이용익이 러시아 수도에 도착해 외무대신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를 면담했다고 알려준다.
항일 독립을 위한 그의 공적, 왜 인정받지 못하나

러시아 외교관들이 추방된 지 13일 뒤인 1904년 2월 22일에 일본이 이용익을 자국으로 강제연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용익은 러일전쟁 직전에 대한제국이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를 압송한 일은 한국 땅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인물을 묶어두는 조치였다. 압송 다음날 일본은 한일 군사협력을 강요하는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행했다.
10개월 뒤 풀려난 이용익은 보성전문학교·보성중학·보성소학교와 보성소(인쇄소) 등을 설립했다. 보성(普成)이라는 명칭은 고종이 하사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이용익의 비밀외교가 개시됐다. 이때 수행한 임무에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것 외에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특사를 파견하는 일 등도 있었다.
이용익은 을사늑약 후에도 고종의 밀명을 받고 프랑스로 떠났다가 산둥성 옌타이항에서 일본 관헌에 발각됐다. 이를 계기로 공직에서 파면돼 해외를 유랑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53세 나이로 객사했다.
이용익의 유업 중 하나인 보성사는 그 뒤 항일운동사의 금자탑과 관련된 기능을 수행했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는 1910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해 연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 경영권 일체를 인수함에 따라 동교에 속해 있던 보성사 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대로 보성사라 칭했다"고 한 뒤 1919년 3·1운동 때의 일을 이렇게 기술한다.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당시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 인쇄소에서 결행키로 하였으나, 보성사의 기술이 부족하다 하여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 인쇄소에서 조판하여 보성사로 보내왔다. 이 극비문서를 인쇄해야 할 이종일 보성사 사장은 가장 신임하는 공장감독 김홍규에게 명하여 동사(同社) 직공 신영규로 하여금 27일 퇴근 뒤부터 10시가 넘도록 비밀리에 2만 1천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던 것이다."
이용익은 훗날 을사늑약으로 기억될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건 여정을 감내했다. 이상설·이준·이위종·헐버트가 을사늑약을 취소시키기 위한 특사였다면, 이용익은 이를 예방하기 위한 특사였다.
그는 훗날 3·1운동 독립선언문이 은밀히 인쇄될 보성사도 만들었다.
항일 독립을 위한 그의 공로는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지정한 독립유공자 1만 8664분의 명단에는 이용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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