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국토기행(38)|시인 이근배
중앙일보
입력 1991.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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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국토기행(38)|시인 이근배
중앙일보
입력 1991.12.01 00:00
학문의 끝은 어디에 있고 사람의 공부는 어디까지 다다를수 있는가. 우리의 역사는 너무 깊어서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고 많은 고학거유들이 자리잡고 있으나 그 가운데도 가장 높은 차제(학문의 단계)에서 빛을 뿜는 이가 귀봉 송익필이다. 송익필은 이황·이이·정고용 같은 이들처럼 귀에 익은 이름도 아니요, 그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문학작품들이 널리 소개돼 있지도 않다.
그러나 송익필의 삶과 학문, 그리고 문학세계를 겉으로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면 우리의 역사가 만든 빛과 그늘을 깨닫게 될 것이며 빛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늘의 역사에도 큰 빛을 지닌 위인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삼국시대 당나라의 문물이 들고나던 당진은 아산만을 끌어안고 있어 지금 서해안 개뻘에 한창 꿈을 부풀리고 있다.
당진읍에서 동북쪽으로 5리쯤 가면 원당골이 나오고 원당골에 들어서면 늙은 소나무들이 둘러선 야산에 문관석을 앞세운 송익필의 묘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 대숲을 끼고 「입한재」가 지키고 있다.
대문에 「귀봉선생제각」 이라는 현판이 붙은 이 집은 글자그대로 구봉 송익필의 위패를 모시고 유림들과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지만 지은 연대도 확실치 않거니와 그 흔한 지방기념물로도 지정받지 못한채 초췌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 궁벽진 산골짜기,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입한재(당진읍원당리144)가 그동안 역사가 송익필에 대해 어떤 예우를 해왔는가를 말하는 듯하지만 눈을 씻고 다시 보면 이 나라 예학을 바로 세운 위대한 도학자요, 탁월한 시재로 위항문학을 꽃피운 대시인 송익필의 드높은 혼이 서려있다.
송익필의 본관은 여산이며 중종29년(1534년) 아버지 송사련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의 4남1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 출생에서부터 하나의 숙명적 비극을 짊어져야 했으니 첫째는 그의 조부 송린이 천민 신분을 가진 노비였던 여자 안감정을 아내로 맞아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을 낳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송사련이 신사무옥을 일으켜 외삼초걸 안당, 외사초걸 안처겸등을 賜死케하고 당상관 벼슬을 얻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응시도 못해>
안청은 기묘사화때 좌의정으로 조광조등읕 구하고자 애를 쓴 일이 있었는데 송익필의 할머니는 바로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가 노비의 몸에서 낳은 딸이기 때문에 안당의 누이가 된다. 「안처겸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실권을 잡은 남곤·심정등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일러바친 것이 신사무옥이고, 의가를 감문시키면서 출세한 종사련이었기에 그 죄업은 송익필에게까기 돌아오게된다..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저 엄격한 조선조의 신분사회에서 송익필의 출생배경이 이렇듯 험난한 것이 아니고 명문거족의 가문에서 순탄하게 태어났더라면 오늘날 우리 역사에 그의 위치가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다.
송익필이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 송사련이 정삼품벼슬자리에 올라 세도를 누릴 때라 남부럽지않은 교육환경에서 글을 배웠고 그의 탁월한 문재는 8세에 「산골 띳집에 달이 이그러져뜬다(산가아옥월삼차)」는 시구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나이가 들자 아우 한필과함께 초시에 합격하여 문명을 드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장안의 같은 또래의 글 잘하는 이산해·최경창·백광궤·최토·순인·윤탁폐·하응림등과 친구로 가깝게 어울렸는데 그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팔문장으로 일컬었을 정도다.
어느 누구도 송익필의 입신출세릍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마른 하늘에 벼락이라도 치듯 엄청난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과거에 응시를 하자 사관 이해수등이 나서서 얼손(서출)은 법을 어기고 과거를 치를수는 없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론에 모두 승복
친구 이산해등이 그의 금고(벼슬을 막는일)를 풀어주기위해 힘썼으나 허사였다.
33세때에는 안당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조정의 공론이 일어서 송익필 일가는 몰리게되고 송익필은 자신이 힘써 닦은 학문을 후진을 가르치는데 쏟을 것을 작정하고 고양군 귀봉산 기슭에 터를 잡아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하기 시작한다.
이미 송익필의 고학은 당대제일임이 인정된 터라 김장생·서소·강찬·심종직·유순익·김단·김집·정엽·김반·정홍명등 당대의 이름높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었다.
당시 그의 학문이 얼마나 높은데 이르렀는가는 장원급제를 아홉번이나 했고 해동공자라는칭호를 얻은 율곡 이이가 송익필을 가리켜 『스승은 될지언정 친구는 당치않은 말이다(가사부가지)』라고 한 말에서 쉽게 알수 있다.
율곡이 23세때 과거에 장원한 「천도책」 을 물으러 오는 이에게 『송익필이 고명하고 박학하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돌려보낼 정도로 그의 학문은 우뚝했었다.
서슬이 퍼렇던 신분사회에서 벼슬에도 못나가는 신분을 가지고 이이·성혼·정철등 당대거유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고있었으며 특히 이이·성혼등은 이론상의 시비가 일어나면 그의 이론에 승복했다고 한다.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도 『구봉같은 이를 스승으로 삼으면 성현에 가까울 것이다』고 높이면서 시를 써주기도 하였다.
조선조에서 예학을 정립시켜 예학의 대종을 이룬 사계 김외생도 송익필에게서 전수한 것이니 후임 천민신분이 된 송익필이 이 나라 예학을 일으켰다는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선조8년 (1575년) 김효원과 심의겸등에 의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당쟁이 시작되면서 송익필은 위기를 맞게 된다.
동인이었던 이발은 안당의 서손인 안정난으로 하여금 송익필의 할머니가 안씨집안의 여종이었다고 일러바쳐 송익필 가문을 천민으로 돌려놓고 멸문케하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익필은 자신에 대한 위험이 차츰 가까워오자 문하생들을 모두 돌려보낸다. 장차 벼슬길에 나가는데 지장이 있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가 이 나라 산과물을 헤집으며 많은 시를 남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뒷날 후학들이 생육신이었던 김시습·남효온과 함께 산림삼걸로 일컬어진 것도 그에게는 탁월한 시재와 더불어 낙백의 세월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선경에 드니 티끌세상의 자취없도록 먼 곳에서 빗장을 잠갔구나 노래에 빠지노라니 가을은 깊어지고 취해서 높은데 누워있다 소슬히 깨어난다. 물은 흘러도 소리가 없고 한가로운 구름은 제 모양이 없느니 깨우침의 마음은 학을 따라서 하늘 먼 곳으로 사라지는구나.
오운산사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쓴 이 시에는 그가 스스로 세상의 영욕을 훌훌 벗고 도인이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아니 그는 젊어서부터도 도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삼의를 하던 홍경신은 형 홍가신이 지체가 낮은 송익필과 만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고 봉변을 주겠다고 벼르던중 찾아온 송익필을 문간에 나가 보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하고 만다.『내가 절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무릎이 끓어졌다』고 했다니 그의 내면의 수양이 어떠했으면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허리를 굽히게 했겠는가.
선조19년(1586년) 그는 53세의 나이로 유천(천민의 신분)이 되고만다. 이산해는 『그대가 화를 당하는 것은 이이와 같은 서인들과 가깝기 때문인즉 이이를 비난하면 멸문의 화를 면케해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는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내 어찌 그같은 일을 할까보냐』고 거절하고 특별히 우정을 나눈 이산해였지만 그가 권모술수를 쓰는 것을 비방하는 시를 써 그 시가 선조의 귀에까지 들리게 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 정월 그는 59세로 마침내 평안도 명천땅으로 유배를 간다.
「형은 동녘 산으로/아우는 서쪽바다로/갈림길에서 차마 울지도 못한다」고 유배길에서 시를 남기고 「어버이 제사를 지내려해도 고향은 만리밖」이라고 사람노릇 못함을 애태우는 시도 썼다.
<시 4백50수 남겨>
그를 특히 보살펴준 송강 정철에게는 「송강을 그리며」 라는 시에서 찬서리 높은 절개 푸른 솔로 서있고 나라 근심 외로운 충성 하늘의 해처럼 밝구나고 칭송하고 우계 성혼에게는「우계를 그리며」에서 한통 편지를 눈물로 적십니다. 범중에 정겨운 말씀 돌아가신 후에야 전해졌에요 평생의 넓은 기상 밝은 해와 다투셨는지 이글 이저녁에 황천길처럼 애 닮습니다.
율곡 이이에게도 「유회」라는 시를 남긴다.
율곡은 내게 말했네 우리도 성현이 될수 있다고 성현이 될 사람은 바로 그사람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는 것. 송익필의 학문적 체계는 그가 성리학의 기초가 되는 태극에 대한 문제를 문답으로 푼 「대극문」과 이이·성혼과 경학을 편지로 논한 「현승편」, 그리고「예문답」「가례주세」등이었다.
제자 심종직이 1622년에 편찬한 「비선귀봉선생시집」5권1책이 있고 그가 남긴시는 4백50수가 전한다.
그는 63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 당진땅에 와서 금진려집에서 그의 학문을 가다듬는다. 66세되던 1599년8월8일 여기 당률에서 때와 신분을 잘못타고난 도학의 거유는 생애를 마친다.
가장 크게 그의 학문적 영향을 입은 김장생은 1625년 신원소를 올려 스승이 천민이 아님을 변호했고 영조26년 (1750) 홍계희가 증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1752년 송익필은 지평으로 추증된다.
비로소 贖良(속량: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에서 양인으로 신분을 바꿈)한 것이다.
그의 학문과 더불어 신흥·홍고종등 많은 시논가들이 그의 시의 우수성을 상찬하고 있고 후세 학자들은 위항문학의 개척자로도 그의 시사적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그의 「족부족」등의 시는 훗날 삿갓시인 김병연에게서 다시 위항시로 꽃을 피웠음이 분명하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64741
학문의 끝은 어디에 있고 사람의 공부는 어디까지 다다를수 있는가. 우리의 역사는 너무 깊어서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고 많은 고학거유들이 자리잡고 있으나 그 가운데도 가장 높은 차제(학문의 단계)에서 빛을 뿜는 이가 귀봉 송익필이다. 송익필은 이황·이이·정고용 같은 이들처럼 귀에 익은 이름도 아니요, 그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문학작품들이 널리 소개돼 있지도 않다.
그러나 송익필의 삶과 학문, 그리고 문학세계를 겉으로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면 우리의 역사가 만든 빛과 그늘을 깨닫게 될 것이며 빛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늘의 역사에도 큰 빛을 지닌 위인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삼국시대 당나라의 문물이 들고나던 당진은 아산만을 끌어안고 있어 지금 서해안 개뻘에 한창 꿈을 부풀리고 있다.
당진읍에서 동북쪽으로 5리쯤 가면 원당골이 나오고 원당골에 들어서면 늙은 소나무들이 둘러선 야산에 문관석을 앞세운 송익필의 묘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 대숲을 끼고 「입한재」가 지키고 있다.
대문에 「귀봉선생제각」 이라는 현판이 붙은 이 집은 글자그대로 구봉 송익필의 위패를 모시고 유림들과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지만 지은 연대도 확실치 않거니와 그 흔한 지방기념물로도 지정받지 못한채 초췌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 궁벽진 산골짜기,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입한재(당진읍원당리144)가 그동안 역사가 송익필에 대해 어떤 예우를 해왔는가를 말하는 듯하지만 눈을 씻고 다시 보면 이 나라 예학을 바로 세운 위대한 도학자요, 탁월한 시재로 위항문학을 꽃피운 대시인 송익필의 드높은 혼이 서려있다.
송익필의 본관은 여산이며 중종29년(1534년) 아버지 송사련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의 4남1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 출생에서부터 하나의 숙명적 비극을 짊어져야 했으니 첫째는 그의 조부 송린이 천민 신분을 가진 노비였던 여자 안감정을 아내로 맞아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을 낳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송사련이 신사무옥을 일으켜 외삼초걸 안당, 외사초걸 안처겸등을 사사케하고 당상관 벼슬을 얻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응시도 못해>
안청은 기묘사화때 좌의정으로 조광조등읕 구하고자 애를 쓴 일이 있었는데 송익필의 할머니는 바로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가 노비의 몸에서 낳은 딸이기 때문에 안당의 누이가 된다. 「안처겸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실권을 잡은 남곤·심정등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일러바친 것이 신사무옥이고, 의가를 감문시키면서 출세한 종사련이었기에 그 죄업은 송익필에게까기 돌아오게된다..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저 엄격한 조선조의 신분사회에서 송익필의 출생배경이 이렇듯 험난한 것이 아니고 명문거족의 가문에서 순탄하게 태어났더라면 오늘날 우리 역사에 그의 위치가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다.
송익필이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 송사련이 정삼품벼슬자리에 올라 세도를 누릴 때라 남부럽지않은 교육환경에서 글을 배웠고 그의 탁월한 문재는 8세에 「산골 띳집에 달이 이그러져뜬다(산가아옥월삼차)」는 시구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나이가 들자 아우 한필과함께 초시에 합격하여 문명을 드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장안의 같은 또래의 글 잘하는 이산해·최경창·백광궤·최토·순인·윤탁폐·하응림등과 친구로 가깝게 어울렸는데 그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팔문장으로 일컬었을 정도다.
어느 누구도 송익필의 입신출세릍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마른 하늘에 벼락이라도 치듯 엄청난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과거에 응시를 하자 사관 이해수등이 나서서 얼손(서출)은 법을 어기고 과거를 치를수는 없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론에 모두 승복
친구 이산해등이 그의 금고(벼슬을 막는일)를 풀어주기위해 힘썼으나 허사였다.
33세때에는 안당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조정의 공론이 일어서 송익필 일가는 몰리게되고 송익필은 자신이 힘써 닦은 학문을 후진을 가르치는데 쏟을 것을 작정하고 고양군 귀봉산 기슭에 터를 잡아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하기 시작한다.
이미 송익필의 고학은 당대제일임이 인정된 터라 김장생·서소·강찬·심종직·유순익·김단·김집·정엽·김반·정홍명등 당대의 이름높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었다.
당시 그의 학문이 얼마나 높은데 이르렀는가는 장원급제를 아홉번이나 했고 해동공자라는칭호를 얻은 율곡 이이가 송익필을 가리켜 『스승은 될지언정 친구는 당치않은 말이다(가사부가지)』라고 한 말에서 쉽게 알수 있다.
율곡이 23세때 과거에 장원한 「천도책」 을 물으러 오는 이에게 『송익필이 고명하고 박학하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돌려보낼 정도로 그의 학문은 우뚝했었다.
서슬이 퍼렇던 신분사회에서 벼슬에도 못나가는 신분을 가지고 이이·성혼·정철등 당대거유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고있었으며 특히 이이·성혼등은 이론상의 시비가 일어나면 그의 이론에 승복했다고 한다.
토정비결을 쓴 이지묘도 『구봉같은 이를 스승으로 삼으면 성현에 가까울 것이다』고 높이면서 시를 써주기도 하였다.
조선조에서 예학을 정립시켜 예학의 대종을 이룬 사계 김외생도 송익필에게서 전수한 것이니 후임 천민신분이 된 송익필이 이 나라 예학을 일으켰다는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선조8년 (1575년) 김효원과 심의겸등에 의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당쟁이 시작되면서 송익필은 위기를 맞게 된다.
동인이었던 이발은 안당의 서손인 안정난으로 하여금 송익필의 할머니가 안씨집안의 여종이었다고 일러바쳐 송익필 가문을 천민으로 돌려놓고 멸문케하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익필은 자신에 대한 위험이 차츰 가까워오자 문하생들을 모두 돌려보낸다. 장차 벼슬길에 나가는데 지장이 있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가 이 나라 산과물을 헤집으며 많은 시를 남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뒷날 후학들이 생육신이었던 김시습·남효온과 함께 산림삼걸로 일컬어진 것도 그에게는 탁월한 시재와 더불어 낙백의 세월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선경에 드니 티끌세상의 자취없도록 먼 곳에서 빗장을 잠갔구나 노래에 빠지노라니 가을은 깊어지고 취해서 높은데 누워있다 소슬히 깨어난다. 물은 흘러도 소리가 없고 한가로운 구름은 제 모양이 없느니 깨우침의 마음은 학을 따라서 하늘 먼 곳으로 사라지는구나.
오운산사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쓴 이 시에는 그가 스스로 세상의 영욕을 훌훌 벗고 도인이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아니 그는 젊어서부터도 도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삼의를 하던 홍경신은 형 홍가신이 지체가 낮은 송익필과 만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고 봉변을 주겠다고 벼르던중 찾아온 송익필을 문간에 나가 보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하고 만다.『내가 절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무릎이 끓어졌다』고 했다니 그의 내면의 수양이 어떠했으면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허리를 굽히게 했겠는가.
선조19년(1586년) 그는 53세의 나이로 유천(천민의 신분)이 되고만다. 이산해는 『그대가 화를 당하는 것은 이이와 같은 서인들과 가깝기 때문인즉 이이를 비난하면 멸문의 화를 면케해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는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내 어찌 그같은 일을 할까보냐』고 거절하고 특별히 우정을 나눈 이산해였지만 그가 권모술수를 쓰는 것을 비방하는 시를 써 그 시가 선조의 귀에까지 들리게 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 정월 그는 59세로 마침내 평안도 명천땅으로 유배를 간다.
「형은 동녘 산으로/아우는 서쪽바다로/갈림길에서 차마 울지도 못한다」고 유배길에서 시를 남기고 「어버이 제사를 지내려해도 고향은 만리밖」이라고 사람노릇 못함을 애태우는 시도 썼다.
<시 4백50수 남겨>
그를 특히 보살펴준 송강 정철에게는 「송강을 그리며」 라는 시에서 찬서리 높은 절개 푸른 솔로 서있고 나라 근심 외로운 충성 하늘의 해처럼 밝구나고 칭송하고 우계 성혼에게는「우계를 그리며」에서 한통 편지를 눈물로 적십니다. 범중에 정겨운 말씀 돌아가신 후에야 전해졌에요 평생의 넓은 기상 밝은 해와 다투셨는지 이글 이저녁에 황천길처럼 애 닮습니다.
율곡 이이에게도 「유회」라는 시를 남긴다.
율곡은 내게 말했네 우리도 성현이 될수 있다고 성현이 될 사람은 바로 그사람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는 것. 송익필의 학문적 체계는 그가 성리학의 기초가 되는 태극에 대한 문제를 문답으로 푼 「대극문」과 이이·성혼과 경학을 편지로 논한 「현승편」, 그리고「예문답」「가례주세」등이었다.
제자 심종직이 1622년에 편찬한 「비선귀봉선생시집」5권1책이 있고 그가 남긴시는 4백50수가 전한다.
그는 63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 당진땅에 와서 금진려집에서 그의 학문을 가다듬는다. 66세되던 1599년8월8일 여기 당률에서 때와 신분을 잘못타고난 도학의 거유는 생애를 마친다.
가장 크게 그의 학문적 영향을 입은 김장생은 1625년 신원소를 올려 스승이 천민이 아님을 변호했고 영조26년 (1750) 홍계희가 증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1752년 송익필은 지평으로 추증된다. 비로소 속량한 것이다.
그의 학문과 더불어 신흥·홍고종등 많은 시논가들이 그의 시의 우수성을 상찬하고 있고 후세 학자들은 위항문학의 개척자로도 그의 시사적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그의 「족부족」등의 시는 훗날 삿갓시인 김병연에게서 다시 위항시로 꽃을 피웠음이 분명하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64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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