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등은 거짓말할 줄 모른다
오래 품어온 문장이 하나 있다. “등은 거짓말할 줄 모른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사진 에세이 ‘뒷모습’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사진가 에두아르 부바가 찍은 수많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앞모습은 표정과 제스처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지만, 뒷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진실한 모습은 정면이 아니라 무심히 돌아선 모습에서 더 정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국립발레단의 사진전 ‘스틸 인 모션(Still in Motion)’에 전시된
사진 중 한 사진 앞에서, 나는 그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단정히 돌아앉아 있는 발레리나의 가냘픈 뒷모습. 사진 속 발레리나의 모습에는
과장된 포즈도, 화려한 조명도 없다. 긴 머리는 등을 가리지 않게 젖혀 있고,
옷자락은 허리 아래 느슨하게 묶여 있다.
은은한 빛 아래 양 날개뼈와 척추뼈 하나하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군더더기 없는 뒷모습 앞에서 저 문장이 떠올랐다.
그 사진 앞에서 압도된 건,
아마도 그 안에 ‘버틴 사람’만이 갖는 조용한 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꾸밀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오직 삶과 훈련이 새긴 선들.
무대 위에서 날아오른 셀 수 없는 도약의 순간들,
발끝으로 균형을 세우기 위해 버텨 낸 수많은 시간이 고스란히 등에 각인된 듯했다.
그래서 말없이 돌아앉아 있으면서도, 오히려 정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사진 속 발레리나의 등은 결국 하나의 질문처럼 다가왔다.
‘당신의 뒷모습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앞모습으로 하루를 버티지만,
진심은 자신도 모르는 뒷모습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뒷모습으로 우리는 기억되곤 한다
. 사람을 떠올릴 때 마지막 순간의 분위기가 오래 남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어쩌면 첫인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인상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호기롭게 계획한 일들 중 올 한 해 무엇을 이루었을까? 무엇을 놓쳤을까?
무엇보다 올 한 해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을까?
내 뒷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 해가 기울어가는 계절, 조용히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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