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사랑] 국새(國璽)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을 때 예방(禮房)승지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붙들고
통곡하자 왕위를 사양하는 척하던 수양이 고개를 들고 노려보았다고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은 전한다. 인조반정 와중에 국새가 사라져 소동이 일었는데
새벽녘에 한 군인이 후원에서 주워 바친 사건도 있었다.
국새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 주석은 진(秦)나라
이전에는 민간에서도 금옥(金玉)으로 인장을 만들어 사용했으나 진(秦) 통일 이후에는
천자만 새(璽)라고 쓰고 신하들은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진시황의 국새에 대해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최호(崔浩)의 말을 빌려 "이사(李斯)가 화벽(和璧)을 갈아서 국새를
만들었는데 한(漢)나라의 여러 황제들도 대대로 전했기 때문에 전국새(傳國璽)라 한다"고
설명했다. 진의 승상 이사가 만든 국새의 재료였던 화벽(和璧)이 화씨벽(和氏璧)이다.
춘추 시대 변화(卞和)는 초나라 여왕·무왕(武王)에게 옥돌을 바쳤는데 가짜라는 이유로 두 발이 잘렸다.
'한비자(韓非子)'는 화씨벽은 문왕(文王) 때 비로소 보옥(寶玉)으로 인정받았다고 전한다.
훗날 진(秦) 소왕(昭王)이 화벽을 가진 조왕(趙王)에게 15성(城)과 바꾸자고 제안했으나 거절해서
연성벽(連城璧)이라고도 불린다. 진시황이 통일 후 화벽으로 국새를 만들었으니
한(漢)의 황제들도 세전(世傳)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국새를 사용했을까? '삼국사기'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즉위년(165년)조는
연나부(椽那部)의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차대왕을 죽이고 그 동생 백고(伯固:신대왕)를 추대할 때
재상인 좌보(左輔) 어지류가 무릎 꿇고 국새를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역시 고구려 개국 초부터 전하던 전국새(傳國璽)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고조선 황실의 후계자를 태자(太子)라고 썼으니 고조선도 국새가 있었을 것이다.
진시황은 국새에 "하늘의 명을 받았으니 수(壽:장수)하고 영창하리라(受命于天, 壽永昌)"라고 새겼으나
死後 4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황실 흥성의 비결은 화벽(和璧)으로 만든 국새가 아니라
선정(善政)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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