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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부군 中將(한국군 少將계급)李 相定 將軍

한문역사 2026. 1. 5. 17:30
 
본명
이상우(李相旴)[1] → 이상정(李相定)
청남(晴南), 산은(汕隱)
출생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서내동[3]
사망
1947년 10월 27일 (향년 51세)
국적
부모
아버지 이시우(李時雨),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형제자매
남동생 이상화, 이상백, 이상오
배우자
초혼 한문이(韓文伊)[5]
재혼 권기옥(權基玉)[6]
자녀
3남 2녀
친인척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
초혼 장인 한정원
초혼 장모 박학남
재혼 장인 권돈각
재혼 장모 장문명
본관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대구2.2.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서의 삶2.3. 예술가로서의 삶2.4. 사망
3. 저서4. 가족 관계
아름다운 삼천리 정든 내 고향
예로부터 내려온 조선의 터를
속절없이 바리고 떠나 왔노니
몽매에도 잊으랴 그리웁구나.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백두 금강 태백에 슬픔을 끼고
두만 압록 양 강 물결에 눈물뿌리며
남부여대 쫓겨 온 백의동포를
북간도 눈보라야 울리지 마라.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시베리아 가을 달 만주 벌판에
몇 번이나 고향을 꿈에 갔더뇨
항주 쑤저우의 봄날과 긴 모래사장의 비에
우리 님을 생각함이 몇 번이런가.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상하이 거리 등불에 안개 둘리고
황푸강에 밀물은 부닥쳐올 때
만리장 떠나는 기적소리는
잠든 나를 깨워서 고향 가자네.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일크스크 찬바람 살을 예이고
바이칼 호수에 달이 비칠 때
묵묵히 앉아잇는 나의 심사를
날아가는 기럭아 너는 알니라.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부모님의 생각과 나라 생각에
더운 눈물 여침을 적실뿐이네
와신상담 십년을 헤매어도
아ㅡ 나의 타는 속을 뉘라 아리요.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 이상정, 망향곡

1. 개요[편집]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자 예술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최종 계급은 중국 국민혁명군 중장이다.

항일 저항시인 이상화와 교수 겸 체육행정가 이상백의 형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의 배우자.[8]

2. 생애[편집]

2.1. 대구[편집]

 
젊은 시절의 이상정.

1896년 조선 대구부 서문로1가 12번지에서 아버지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 세는나이 11살에 한문이와 결혼했다.

2.2.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서의 삶[편집]

큰 남동생 이상화가 문학을 통해 항일 투쟁을 했다면, 이상정은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다.

1923년 만주로 망명했으며 북만주에서 약 2년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원래 군벌 펑위샹 서북군벌 군대에서 복무하였으나 장제스의 북벌 이후 국민혁명군 소속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초청으로 충칭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상도 대표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관여했다. 광복군에 대한 국민혁명군의 통제 조항인 9개 준승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한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였고, 1944년에는 권기옥과 정식으로 재혼했다.

국민혁명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중장(한국군 계급으로 少將)이다. 8.15 광복이 되자 일본군 북지나방면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해산하는 업무에 종사했다가 도쿄의 중국 점령군 사령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제안을 거절하고 전역하였으며, 한국 동포 교민 보호를 위해 잠시 상하이에 머무르다 1946년에 모친상으로 귀국했고, 미군정 시대의 수도 서울에 머물렀으며, 1947년에 경북 대구로 귀거했다.

2.3. 예술가로서의 삶[편집]

동생 이상화처럼 그 역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대표적인 현대 시조 작가 중 하나로 꼽히며 최초의 국내 서양화가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미술 연구회인 벽동사(碧瞳社)를 설립하여 대구 지역에 서양미술을 전파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1921년에는 개인전을, 1923년에는 단체전에 참가해 명성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미술작품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2.4. 사망[편집]

1946년 귀국한 후 한동안은 미군정 시대의 수도 서울에 있다가, 이듬해 1947년에 경북 대구 향리로 귀거한지 40여 일만인 그 해 10월 27일에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3. 저서[편집]

  • 표박기(飄迫記)
    유고집으로, 청구출판사에서 <중국유기(中國遊記)>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중국에서 망명하던 33년간 지은 시조들과 산문들을 한데 엮었다. 비단 독립운동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20세기 초반 군벌 시대 중국의 모습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도 꼽힌다.

    1936년 동생인 민족시인 이상화가 중국에 방문하여 받아왔으며, 이후 김봉기가 넘겨받아 가지고 있다가 이상정 사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50년에 출판했다. 1936년까지의 기록이므로 중일전쟁 동안 이상정 본인이 남긴 기록은 안타깝게도 남아있지 않다. 이 시기 그의 행적은 지인들의 추도사와 추도문을 통해서만 단편적으로 파악 가능하다.

    중국유기는 이상정 사후 76년이 지난 2023년에 원제 그대로 민속원 출판사에서 재간되었다.

4. 가족 관계[편집]

조선 시대 말기 경북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시인 이상화(李相和), 사학자 겸 저술가 및 대학 교수 이상백(李相佰), 수렵가 겸 저술가 및 바둑 애호가 이상오(李相旿)의 형이다. 이렇게 각자각자로 결혼할때까지 장성한 아우 3명이 있었으며, 호적상에 등재된 부인은 1906년 1월 31일, 대한제국 경상북도 대구 향리 친가에서, 당시 10세(만8세)로 첫 결혼한 6년 연상의 한문이(韓文伊, 1891년 5월 7일 탄생 ~ 1941년 2월 23일(49세) 서거) 여사인데, 그러나 나중에 그로부터 22년 후, 결국 이상정 그는, 우리나라 여성 비행사 1세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독립운동가 겸 항공 비행사 출신이기도 하였던 5년 연하의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탄생 ~ 1988년 4월 19일(87세) 서거) 여사와 1928년 2월 29일,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네이멍구 자치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33세(만31세)로 다시 결혼하였다. 결국, 1944년 2월 29일까지의 16년 동안의 권기옥과의 재혼은 사실상 중혼이었지만, 1941년 2월 23일(45세(만43세))에, 향년 51세(만49세)의 한문이 여사(초배)와 사별 이후 한문이 여사의 3년상(三年喪)을 모두 마친 뒤, 1944년 2월 29일, 44세(만43세)의 권기옥 여사(계배)와 중혼 16년여만에 48세(만46세)로 정식 재혼하였다.
  • 아버지: 이시우(李時雨, 1907년 6월 8일 하세.)
  •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1946년 10월 8일 하세.) - 김해 김씨 부인.
  • 여동생: 이상준(李相晙, 1899년 11월 12일 대한제국 경북 대구 출생 ~ 1903년 3월 21일(3세) 병사): 어린 시절 병사.
  • 남동생: 이상화(1901~1943): 이상정의 둘째 아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등 여러 편의 시를 집필한 시인.
  • 남동생: 이상백(1904~1966): 이상정의 셋째 아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체육인, 사학자, 사회학자, 대학 교수.
  • 남동생: 이상오(李相旿, 1905~1969): 이상정의 넷째 아우. 수렵가이자 저술가 겸 아마추어 바둑인.
  • 초혼 부인: 한문이(韓文伊, 1891~1941): 이상정의 첫째 부인.[9]
  • 재혼 부인: 권기옥(1901~1988): 이상정의 둘째 부인.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독립운동가.[10]
  • 장녀: 이숙희(李淑熙, 1914.1.5 ~1914.12.16): 이상정과 한문이의 첫째 딸. - 어린 시절 병사.
  • 차녀: 이선희(李善熙. 1916~?): 이상정과 한문이의 둘째 딸. 경북 포항 지역에서 간장 제조업과 양조장을 하는 사업가인 배씨 집안으로 시집갔다고 한다.
  • 장남: 이중희(李重熙, 1918~1995): 이상정과 한문이의 맏아들. 생전에 1968년 2월부터 1971년 8월까지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재직.
  • 차남: 이풍희(李豊熙, 1920년 1월 1일 일본 도쿄 출생 ~ 1923년 4월 30일(3세) 병사) - 어린 시절 병사.
  • 삼녀: 이교희(李敎熙, 1922년 2월 3일 일본 도쿄 출생 ~ 1924년 5월 26일(2세) 병사) - 어린 시절 병사.

[1] 이상우 → 이상완(李相完) → 이직문(李直文) → 이연호(李然晧 → 李然浩) → 이상협(李祥俠 → 李相俠)[2] 1896년생인 이상정의 생년에 대해 1894년#, 1896년, 1897년, 1898년 등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대체로 경주 이씨 족보에 기재된, 호적상의 생년이기도 한 1897년 생을 정설로 보기도 한다.[3]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1가[4]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5] 1941년 사별.[6] 1928년 중혼한 이후로, 1944년에 정식 재혼.[7] 39세 상(相) 항렬.[8] 둘은 1928년에 결혼했는데 이상정에게는 이미 1906년에 조혼한 첫 부인 한문이가 따로 있었다. 1941년에 한문이와 사별 후, 1944년에 정식 재혼할때까지 권기옥과는 사실상 중혼.[9] 한정원(빙부)과 박학남(빙모)의 딸(초배 청주 한씨 부인). - 1906년 1월 31일 결혼 후 한문이 여사와 사이에 자녀 2남 3녀 얻음.[10] 1944년 2월 29일 재혼 후 권기옥 여사와 사이에 소생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