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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軍 中將(한국군 少將)洪 思翊 장군

한문역사 2026. 1. 5. 17:54
홍사익
洪思翊こう しよく[1] | Hong Sa-ik

1941년 보병제108여단장 시절
출생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
(現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
사망
1946년 9월 26일 (향년 57세)
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2]
복무
 

1. 개요2. 생애
2.1. 출신2.2. 군인의 길2.3. 위관 시절2.4. 좌관 시절2.5. 장군 시절
2.5.1. 푸대접 논란2.5.2. 유일한 조선인 장성?
2.6. 전범재판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
3.1. 동기들과의 약속3.2. 3.1 운동3.3. 태평양 전쟁
4. 여담
4.1. 창씨개명 거부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4.3. 탈영병 사건4.4. 가족의 뒷이야기4.5. 기타
5. 대중매체에서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출신[편집]

1889년 3월 4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에서 자작농이던 아버지 홍명유(洪命裕, 1851.11.12~1895.3.5)와 어머니 진주 류씨(1852.5.19~1924.12.29)[9]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6살 되던 해인 1895년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많던 형 홍사용(洪思容, 1871.9.10~1940.11.3)의 손에서 컸다. 본래 집안은 문관을 다수 배출한 양반 출신으로 그 가풍은 남아 있었으나 이 시점에는 많이 쇠락한 상태였다. 어릴 때는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열심히 배워 후일에도 사서삼경을 다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형 역시 홍사익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2.2. 군인의 길[편집]

참조

당시 대한제국군 헌병 정위(正尉)로 있던 족숙(族叔) 홍중유(洪中裕, 1880.9.14~?)의 권유로 군인이 되려는 뜻을 품고 상경하여 1908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9년 7월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생도 중 선별된 우수 자원(2학년 15명, 1학년 29명)을 일본에 위탁교육을 보냈고, 이때 무관학교 2학년 생도였던 홍사익 또한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9년 8월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敎)[10] 예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11]

1910년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본과로 진학하였다. 동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이 병합되면서, 당시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생도 전원은 일본인이 되어 표장이 대한제국을 상징하던 분홍색에서 일본제국의 붉은색으로 바뀌고, 유학생반도 해체되어 일반 일본인 생도들과 동일한 조직에 똑같이 섞여서 교육받게 되었다. 동기생 중 일부는 이때 퇴교하였다.

1912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성적순으로 각 연대에 배치되어 대부근무를 시작했다. 독일식 사관후보생 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는 입교 전 각 연대에서 사병 근무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심상중학교 출신은 전년도 12월부터 1년간, 육군유년학교 출신은 6월부터 6개월간 대부근무를 마치면서 12월에 육사에 입교하도록 되어있었다.[12] 홍사익은 육군중앙유년학교 성적 또한 우수했기 때문에 최고 엘리트 부대라 할 수 있는 아카사카의 보1 제1사단 보병제1연대로 배치받아 대부근무를 마치고 1912년 12월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14년 5월 육사를 졸업(제26기)하고 견습사관으로 6개월간 복무한 뒤 1914년 12월 소위로 임관했다. 홍사익의 육사 졸업성적은 전체 742명 중 31등(보병과 471명 중 22등)으로 같은 26기 동기인 조선인 13명 중에서는 수석이었다.

2.3. 위관 시절[편집]

홍사익이 육사를 졸업한 직후인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제국도 참전하면서, 그의 육사 동기생들도 대거 출전하게 되었다. 조선인으로 한정해보더라도 지청천은 칭다오 공략에, 이응준과 염창섭은 시베리아 출병 등 전선에 나갔으나, 홍사익은 줄곧 도쿄에서 근무한다. 홍사익은 유년학교 졸업 후 사병복무, 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 시절부터 위관장교로 복무하던 내내 육군성, 참모본부를 제외하고는 줄곧 보병제1연대에서만 복무했다.

1918년 7월 동기들과 함께 중위로 진급했고, 1919년 6월에는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으로 전보되었다. 이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육대 입시에 단번에 합격하여 육군대학교 35기로 1920년 12월 7일 입교했다. 일본 육군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 것이다. 참고로 제109사단장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이 홍사익의 육사(26기), 육대(35기) 동기이다.


1920년 12월 16일자 매일신보
홍사익 중위가 육군대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1923년 11월 29일 육군대학교를 졸업(제35기)하고 원대인 보병제1연대로 복귀했다. 1924년 3월 대위로 진급해 보병제1연대 예하 중대장에 보임되었다. 중대장 보직 이수 후에는 1925년 5월 참모본부에 배속되어 제4부 내국전사과에서 러일전쟁 전사 연구 및 편찬에 종사했다.

자대부터 보병제1연대에 배치받아 육군성 근무, 육대 졸업 후 참모본부를 거친 홍사익의 미래는 탄탄대로였다.

2.4. 좌관 시절[편집]

참모본부 근무를 마친 홍사익은 1929년 8월 소좌로 진급하며 제1사단으로 복귀, 보병제3연대 3대대장에 보임되었다. 이때 그의 직속상관인 보병제3연대장이 바로 나가타 테츠잔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2년간 대대장 보직을 이수한 후 1931년 8월 치바현에 소재하고 있던 육군보병학교로 전보되어 교관으로 복무했다.

1933년 4월 관동군사령부에 배속되어 만주국군에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홍사익은 만주국 육군중앙훈련처(속칭 봉천군관학교)에서 고급 간부의 훈련을 지도 감독했으며, 창설 준비 작업 중이었던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창설 작업에 조력했다.

1934년 8월 중좌로 진급하여 관동군사령부 참모부 제3과(정무과)에서 근무하면서 만주국내에서 조선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1936년 8월 다시 육군보병학교로 전보되어 도쿄로 복귀하였고, 1937년 11월부터는 육군보병학교 군견훈련소장 직위를 겸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로 중지나방면군이 편성되자 1937년 12월 홍사익 또한 중지나방면군사령부에 배속되었고, 동월 관동군사령부 근무 시절 공로로 만주국으로부터 훈3위 경운장을 수훈했다.

1938년 2월 중지나방면군이 중지나파견군으로 확대 재편제되면서 홍사익은 중지나파견군사령부 특무부 소속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이어 3월에는 대좌로 진급했고, 흥아원 조사관 직위를 받아 흥아원 화중연락부에서 정보수집을 담당했다.

1940년 8월 유수(留守)[13]제1사단사령부로 배속되어 다시 원대인 제1사단으로 복귀하며 도쿄로 돌아왔다.

2.5. 장군 시절[편집]

1941년 3월 소장으로 승진하여 지나파견군에 배속, 북지나방면군 제110사단 예하의 보병제108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보병제108여단이 소속된 제110사단은 중국 하북성에 주둔하며 베이징 일대의 경비와 경한선(京漢線)[14] 연선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중국공산당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에 소속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1941년 12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湖北省) 타이항(太行)산맥의 '후자좡(胡家庄) 전투'와 인근의 '싱타이(邢台) 전투'에서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김학철 2명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이들이 상대한 일본육군 병력이 보병제108여단 예하였다면 홍사익 부대와 전투를 벌인 것이 된다.[15]

1942년 4월 교육총감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육군공주령학교 간사에 보임되었다. 1944년 3월 모리모토 이치로(森本伊市郎)[16] 소장의 후임으로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전임되었다.

1944년 10월 중장으로 승진했고, 12월에는 남방총군 병참감(남방총군이 사이공으로 이동하면서 병참감부가 제14방면군에 배속)에 보임되었다. 그렇게 일본육군 남방총군 병참감 직위에 있는 상태에서 1945년 8월 종전을 맞이했다.

2.5.1. 푸대접 논란[편집]

전통적인 유럽의 군제를 받아들여 19세기 후반 건군된 일본 제국 육군은 창군기에 각 지방을 책임지는 연대를 근간으로 하여 편성되었던 관계로, 천황으로부터 하사되는 각 연대기를 받는 연대장을 육군 보직의 꽃이라고 여겼는데 홍사익은 대좌 재임시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홍사익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일본제국 육군에서는 육사, 육대 등 교육 성적이 뛰어난 우수자원은 야전 제대장에 거의 보직시키지 않았다.[17] 예컨대, 육사 36기 수석이자 육대 43기 우등(3위) 졸업자인 츠지 마사노부는 대위 시절 중대장을 역임한 후 대좌로 종전을 맞을 때까지 대대장, 연대장 보직을 맡지 않고 참모 직위만 돌았다. 좀 더 근기수를 보더라도 홍사익의 육사 1년 후배(27기)이자 육대 동기(35기)인 후지무로 료스케는 육군 대좌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본과,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모두 최연소, 수석으로 졸업하여 초엘리트 코스만 밟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원대인 보병제1연대의 대대장을 역임했을 뿐 줄곧 참모본부와 학교 등에서 교관으로 근무했고, 연대장 보직도 보병제77연대에서 8개월만 있었을 뿐이며, 이후 여단장 직위를 거치지 않고도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반면 후지무로 료스케와 육사 동기인 김석원은 각 계급마다 거의 내내 일선 제대장으로 복무하며 전선에서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또한 홍사익은 군정을 다루는 육군성이나 군령권을 행사하는 참모본부가 아니라 교육총감부 라인이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18] 일본제국 육군에서 교육총감은 육군대신(육군성), 참모총장(참모본부)과 함께 육군3장관으로서 육군 최고위직이었고, 그 교육총감부 라인도 상당한 요직이었다. 홍사익의 이력을 보더라도 그는 육사 졸업 직후 전선에 파병된 동기들과 달리 도쿄의 아카사카의 보1(보병제1연대)에서 위관 시절을 보내며 육군성 인사국 및 참모본부 제4부 등 도쿄의 최고기관에서 근무했고, 좌관 시절에도 소좌 때 육군보병학교 교관과 만주국 육군중앙훈련처 담당 고문을 거쳐 중좌 때 육군보병학교에 재차 보임되는 등 교육 계통에서 엘리트 보직들을 역임했다.[19] 소장으로 진급하여 여단장을 지내고 나서 받은 보직인 육군공주령학교 간사 직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홍사익은 교육총감부 라인에서 핵심 보직만을 거쳤다. 그리고 지휘관 보직도 연대장만 역임하지 않았을 뿐 그 이전에 중대장, 대대장 그리고 이후에도 여단장을 모두 거쳤다.

또 홍사익은 그의 육사 동기들 중에서 선두권으로 중장까지 진급했다. 육사 26기 742명 중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반참모에 진입한 사람이 총 67명이고[20] 그 중 대장 계급은 제109사단장으로 이오지마 전투에서 당시 중장으로 전사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사후 추서) 단 1명에 불과하고, 44명은 중장 그리고 13명은 소장이 최종 계급이었다. 홍사익의 육대 35기 동기이기도 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육대 차석 졸업자이었음에도 소좌 진급을 홍사익보다 반 년 늦은 1930년 3월에 했고, 중좌는 1933년 8월로 1년 먼저, 대좌는 1937년 8월로 반 년 먼저, 소장은 1940년 3월로 1년 먼저 진급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종전시 기준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서 육사 20기 이후 기수 중에서는 홍사익과 같은 중장이 최고 계급이었다. 21기(도미나가 노부마사), 23기(오바타 히데요시), 24기(스즈키 소사쿠), 26기(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출신 대장이 1명씩 있는데 이들은 모두 중장 계급에서 전사/순직하고 사후 대장 계급으로 추서된 케이스들이다. 22기, 25기에는 대장으로 사후추서된 케이스도 없었고, 당연하게도 26기 이후의 후배 기수에서도 대장 진급자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홍사익은 5기수 위까지 통틀어 최고 계급인 중장까지 기수 선두권으로 고속진급하였으며, 육대 출신 육사 동기나 근기수 선배 중에서도 홍사익보다 진급이 느린 케이스는 부지기수였다.

결론적으로 경력으로 보든, 계급으로 보든 홍사익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2.5.2. 유일한 조선인 장성?[편집]

왕족 아닌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장성이 된 경우는 홍사익을 제외하고 7명이 더 있다. 중장까지 진급한 이병무, 조동윤, 어담 3명과 소장까지 진급한 이희두, 조성근, 왕유식, 김응선 4명이 이에 해당한다. 전원 육군 장군이며, 해군 제독은 일본해군병학교에서 조선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무하다.

그러나 이들은 전원 대한제국군에서 참령 이상 계급에 있었던 고위 간부였고, 대한제국이 망하자 동급 일본군 장교로 일본군에 편입되는 예우를 받았다. 이들은 "조선군인"이라는 특별 코스로 분류되었으며, 처음부터 고위 장교로 시작하여 장군까지 진급했을 뿐이다. 결국 조선인으로서 일본군에서 정식 진급 과정을 밟고 장군이 된 사람은 왕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홍사익이 유일하다.

2.6. 전범재판[편집]

야마시타 도모유키 제14방면군사령관과 무토 아키라[21] 참모장이 9월 3일 바기오에서 연합국 남서태평양사령부 참모장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체포 구속되어 마닐라로 압송되었고, 제14방면군도 순차적으로 항복을 위해 이동하여 병참감부는 9월 13일 이동을 시작해 9월 16일 키얀간에 도착했다. 이후 그를 수행해온 부관 사이토 중위와 떨어져 장군들이 격리된 장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마닐라로 이송되어 B급 전범(전통 전쟁법 위반 범죄)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부관이었던 사이토 중위가 회고한 바에 의하면, 전쟁 종결 직후 아직 미군의 포로가 되기 전, 홍사익 장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중학교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일본제국 육군 근무 중 주로 교육계통에서 활동한 그는 야전 군인보다는 오히려 교육자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추측한다. 하지만 그의 육사 동기와 후배들은 죄다 국군에 들어가서 고관대작이 되었는데 특히 이응준 대좌는 일본군 최선임자로 미군에게 지목되어[22] 국군 창설 작업을 맡았다. 홍사익 역시 살아 있었다면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연합국 포로의 수용 책임을 맡고 있던 병참감이었던 홍사익은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그 자신의 재판에서는 피고인으로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는 일절 증언을 하지 않은 홍사익이지만,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을 때는 야마시타를 변호하기 위해서, 포로 대우는 홍사익 자신의 결단에 근거한 조치라고 증언하였다.

전범재판을 받고 있을 때는 국내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올려 구명을 요청한 사람들도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있었다. 미군정기 신문사 자료들 면밀히 보면 '홍사익 중장 구명하자!' 이런 기사 제목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46년 2월~4월 사이가 눈에 띄게 많다. 대표적으로 홍사익의 부인과 아들 부부가 당시 군정장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를 찾아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실 일본군의 포로관리가 막장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반드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전범으로 처벌받는 건 필연적이었다.

관련 링크 - 전봉관의 인생백경, 이규태 에세이

수많은 일본군 출신들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흡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비롯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사들은 홍사익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구명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 국군 창군과정의 기틀확립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홍사익 중장의 구명에 힘을 쏟았다는 설도 존재한다(이재전장군 溫故知新). 그러나 이쪽에는 동조하는 증언이 아예 없으며, 링크된 글이 사실상 유일한 주장이다.

결국 1946년 4월 8일 오후 4시 20분 판사 5인 중 3:2로 유죄를 선고하고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홍사익은 사형 판결을 받고도 태연하게 돌아와 "갑종합격이다!"[23] 라고 외쳐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이는 일본어로 "갑종합격"과 "교수합격"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갑종(甲種), 교수(絞首) 모두 일본식 독음이 'こうしゅ'로 같은 데서 나온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인데, 자기 목숨을 가지고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어지간히도 대담했던 모양이다.

처형을 기다리며 갇혀있는 동안에도 목사가 넣어 준 신약성서와 구약의 시편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1946년 9월 26일 밤, 사형 당일 군복 착용을 허락받았기에 군복을 입고 처형장으로 나가면서 수용소의 담당 감시병인 미 해군 군사경찰 이반 케이에게 그 성경을 주었지만 딱히 친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자신이 곧 사망하면 갖고 있을 사람이 없으니 주었을 따름이다. 이반 케이는 홍사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나중에 만난 일본인에게 이 성경을 주인의 가족에게 보내주라 했다. 이 성경은 뒤에 '제네럴 홍'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단서가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교수대에 올라 자신의 사형 집행에 참여한 입회 목사 대행에게 구약성경의 시편 51편을 읽어 달라고 청했다. 목사 대행이었던 이 인물은 일본군 포로였다. 성경을 목숨처럼 아끼는 특이한 일본군 포로가 있다는 것을 미군 군목이 알고 자신의 보조로 썼다. 이 포로는 홍사익에게 자기는 목사가 아니라서 해줄 말이 없다고 했는데 이에 홍사익이 그러면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읽어달라고 한 것이다. 이 포로는 훗날 진짜 목사가 되었다.

시편 낭송 이후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집행시 복장은 계급장과 서훈 등을 떼어낸 군복을 입고 집행되었으며, 군인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교수형이 집행된 유일한 일본 군인이다. 일본군 군복을 입고 사형을 받은 장성 사형수는 민간인 신분으로 사형이 집행된 혼마 마사하루 모리 쿠니조, 군인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서 사형이 집행된 홍사익 단 3명이다. 홍사익과 모리 구니조는 교수형, 마사하루는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반면, 야마시타 도모유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집행된 주요 전범들은 수형자 복장으로 교수형 사형이 집행되었다.
예로부터 원통히 죽는 이는 많으니,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리.(昔より冤死せしものあまたあり われもまたこれに加わらんのみ)
끙끙 앓으며 생각해도 푸념만 될 뿐, 패전의 죄로서 포기하는 것이 옳으리.(くよくよと思ってみても愚痴となり 敗戦罪とあきらむがよし)

홍사익의 사세구

사형 집행 이후 홍사익의 시신은 홍사익 본인의 부탁에 따라 화장이 되었다. 보통 전범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화장이 되었지만 홍사익은 직접 사형 집행 이후에 화장을 미 해군 측에 부탁을 했다고 하며, 당시 집행을 담당하던 미 해군 측에서는 그 부탁은 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미 해군 측은 홍사익의 부탁대로 화장을 진행했으며, 다만 그 재를 어디에 뿌려달라는 의사는 남기지 않아, 미 해군에 의해 바다에 바다장으로 산골했다.

현재 그의 무덤은 경기도 안성시 안성시청 뒤편의 남양 홍씨 토홍계 종중 산에 있지만 유골이 바다로 산골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품을 묻은 가묘라고 한다.

1966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편집]

홍사익은 일본군을 떠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일본군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홍사익은 대영제국의 예를 들어 '조선인이 일본을 위해 충실히 봉사한다면, (대영제국의 아일랜드인처럼)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자기 아들 홍국선에게도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해서는 안된다."

홍사익이 아들 홍국선에게 한 말

사실 이게 자기정당화적 변명이 아니라 진중한 신념이었다 하더라도 굉장한 역사적 오독이란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아일랜드는 역사 내내 엄청난 탄압과 인격적인 모독을 국가적 행사를 통해서까지 받으며 지냈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일부러 영국계와 영국계 종교신앙자들을 몰아서 배치한 북아일랜드 지역을 빼고는 기어이 독립을 성취해서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곳이다. 아일랜드인들이 떳떳하게 숨기지 않고 행동한 것이 영국으로부터 인정받거나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아일랜드 자체가 아예 민족과 언어도 다르고 역사 내내 영국에서 핍박받으며 간섭받은 역사 때문에 민족의식이 더더욱 고취되어서인 것이다. 실제로 철의 여인 대처가 아일랜드 투쟁가들이 단식투쟁을 할 때 정말로 영양실조로 피와 가죽 밖에 안남을 정도의 상태까지 가서 아사를 해버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둬서 엄청난 반감을 얻었고 이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상식밖의 대우 때문에 영국내에서조차 반감으로 인해 대처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질 정도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를 유화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일제 시기 조선인의 복잡한 정체성과 선택이 드러난다. 사실 당시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 3.1 운동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며, 1930년대 이후 숨쉬는거 말곤 전부 일본 허가를 받아야 했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선 즉각적인 독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3.1 운동 직후 일제의 집요한 독립운동 탄압으로 국내의 독립 주도세력이 약화되었는데 동시기 1차대전 특수 등으로 일본의 경제가 발전함과 동시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풀리게 된다. 즉 일제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향상으로 점차 독립 같은 것 생각 안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자치령 정도로 시작해서 아주 느긋하게 독립하는 것이 한계라는 게 그나마 독립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이었으니, 이는 당시 아일랜드가 기나긴 투쟁 끝에 이런 방법으로 독립한 것처럼 보였던 예가 있어 아주 헛된 꿈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건 영국-아일랜드 관계사의 디테일을 모르는 외부인의 오독에 불과하다. 가톨릭 해방운동의 대부 대니얼 오코넬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중후반쯤 되면 찰스 스튜어트 파넬을 필두로 한 영국 의회 내에서 비폭력 정치적 투쟁으로 인해 1차 세계 대전 직전쯤 가면 아일랜드 자치법이 영국 정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만큼 성장하긴 했으나, 가장 결정적으로 1차 대전 발발로 인해 아일랜드 자치법 관련 논의 자체가 무산되고, 세계 대전과 무관하게 이미 이 시절부터 현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되는 얼스터 친영주의자들 중심으로 적극적인 자치반대운동, 친영 운동 또한 들끓어서 1910년대쯤 되면 점진적 투쟁론은 이미 좌초되고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적 고착 상태를 결정적으로 깨트리고 당시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들 모두 서서히 말라죽는거 아닌가 걱정하던 아일랜드 자치, 독립 의제 자체에 다시 불을 댕긴건 레드먼드 같은 영국 원내 아일랜드 의회당의 점진론적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뿌리깊은 과격 급진 아일랜드 무장 봉기 전통을 부활시킨 1916년 부활절 봉기였다. 결국 아일랜드 독립 또한 결정적인 급진 무력 투쟁이 수반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한일관계에 대입해도 외부적으론 악독한 제국주의를 폈어도 어쨌든 국내 정치에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 국회 의석까지 내줄 자유주의적 입헌정치 전통이 강력했던 영국과 일제를 비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몰랐던 타협주의자들은 영국의 스코틀랜드인을 롤모델로, 일본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한 채, 출신지역 등으로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고 조선 출신도 내지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을 제1의 목표로 하게된다. 이들이 내선일체를 적극 환영한 이유도 이것인데, 그들은 정말로 내선일체가 모든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대우를 해주려는 정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출신은커녕 일본 본토인들끼리도 지역, 출신 등으로 차별이 이루어지는 판국이다 보니 현실적으론 허황된 꿈이었다. 이들 타협주의자에 대한 시각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하나'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게 아닌 민족의 동등한 대우를 위한 목적이라서 정상참작은 해줄만 함'의 두 가지인데 대체로 전자의 시각이 강하다. 사실 그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구 일본군에 지원입대하는 조선인, 특히 장교로 지원하는 인원 중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강제로 끌려온 병 출신들보다도 민족의식이나 사명감을 더 갖춘 케이스가 생긴다. 대표적인 예가 이종찬이나 채병덕, 김정렬. "우리가 열심히 해서 조선인들의 위치를 끌어올려 독립에 기여하고 언젠가 조선이 독립되면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은 실제 그랬듯이 스스로 독립할 수는 없고 일본이 시켜주어야 하는 거니까 지금은 일본과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의식이 있기에 소극적 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일본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조선인 출신 일본군만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병사들에서도 보이는 현상이다.

그래서 홍사익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군에 몸담아 아예 한국이란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났던 젊은 장교들과 세대 차이가 있으나 인식 자체는 비슷하게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3.1. 동기들과의 약속[편집]

홍사익과 같은 육군무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혼란에 빠졌다. 비록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대한제국군이 대부분 사라지기는 했으나, 군 조직의 근간은 남아있었고 언젠가 재건되리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사라짐으로써 그 희망 자체가 무너졌고, 분격한 생도 상당수는 전원 일본 육사를 자퇴하고 귀국하자고 나서기도 했다.

이때 유학생들은 토론 끝에 "기왕 들어온 육사이니 중위가 될 때까지만 복무하고, 바로 예편하자"고 약속한다. 동기생들 중 조철호 중위[24]는 이 약속을 지켜 1918년에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곧바로 예편, 조선 오산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다가 3.1 운동에 참가하도록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구속되기도 했다. 지청천 김경천은 소위 때 일본군 교범을 가지고 탈영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홍사익은 군복무를 계속한다.
3.1 운동으로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동포들의 움직임을 보고, 아직 일본군에 남아 있던 김광서(1년 선배), 지청천(동기), 이종혁(1년 후배) 등이 잇달아 탈영하여 독립군에 합류한다. 하지만 홍사익은 여전히 일본군에 남아 있었는데, 훗날 홍사익 본인이 육사 후배인 이형석[25]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걸려서 군인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걸렸는지, 대신 조선인 출신 장교들의 친목모임을 통해 일본군을 탈영한 동료 조선인 장교들이 두고 간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홍사익은 수 년간 이 모임에서 간사(총무)를 맡았다.

일본군 내 조선인의 입지가 약화된다고 해서 탈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모양인데, 이는 후술할 태평양전쟁 시기에 한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경에 일본군에 속한 조선인은 황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말기에 유학한 사관생도 출신 장교 30여 명에 지나지 않아 입지가 약화되고 자시고 할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군에서는 조국을 위해 행동하는 조선인 장교들을 일종의 지사로 보는 분위기가 있어서 몇몇 장교들이 탈영했다고 나머지 잔류파인 조선인 장교들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지청천이 탈영했을 때 동기인 홍사익이나 이응준은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고 1기수 아래 김석원은 예편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잡혀 형을 살고, 심지어 늑막염으로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자신의 동기 이종혁을 자주 찾아보고 돈까지 구해주며 적극적으로 건네주기까지 했는데도 연대장이 "그러다 앞길 막힐 수도 있다"고 가볍게 타이르는 게 전부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으로 일본군에 편입되었다가 일본군을 그만두고 독립투쟁에 나선 이갑이 아직 일본군에 있던 사위 이응준에게 권총을 구해달라고 연락해 이응준이 자신의 권총을 보내주었다가 들켰는데, 이때는 상부에서 단순 도난으로 무마시켜 주었다. 일본군에서 권총은 군에서 지급하는 게 아니라 필요하면 사비로 사서 쓰는 개인 재산이었기 때문에 들킬 경우 도난으로 무마시키기에 용이했다. 고급 장교들이야 권총 사는 게 큰 무리가 아니었지만 월급이 박봉인 하급 장교들은 권총 값도 부담이라 싼 모델은 결함투성이인 줄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들고 다녀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막 임관한 소위들의 권총을 보면 집안 사정을 대강 알 수 있었다고...

이에 대해 큰 뜻을 품은 지사들을 보면 일단 한 수 접고 존중해 주던 메이지 시대의 풍습이 당시 일본 사회에 아직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상급자들이 조선인 장교들의 이런 소소한 군기 문란 행위를 알고도 덮어주지 않았겠냐는 시각도 있다. 메이지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앙 정계에 안착하지 못한 유신지사들은[26] 몰락한 구 막부 사족들과 함께 민간으로 파고들어가 좌익과 극우를 막론하고 근대 일본 비주류 정치세력의 시조가 되었는데, 비록 사회주의, 파시즘 같은 근대 사상의 대두와 함께 방향은 갈라졌지만 메이지 시절만 하더라도 극우 사상가가 정치범으로 쫒기는 좌익 운동가의 가족을 돌보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념을 초월하는 지사 문화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고, 지사 문화라는 것도 근본은 동아시아권 모두가 공유하는 성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보니 일본 군인들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았을 때도 어느 정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한국에도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나 제1공화국 시대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우익으로 분류되는 장택상이 좌파정치인 조봉암의 유가족을 돌봐주었던 일처럼 당대 유명인들 사이에는 이념을 넘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 대한 경애심, 존중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방으로 발령받을 당시에 경성부에 들렀을 때 아들 홍국선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몇 차례나 옛 친구인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연락이 있었고, 도쿄에 들렀을 때 매일신보 동경지사에 있던 김을한 기자도 그에게 광복군에 가담하기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이탈로 인한 후폭풍이 일본군에 남아있는 조선인(군인 및 노무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홍사익과 비슷하게 일본군 고관이었던 영친왕 역시, 자신이 광복군에 합류하면 조선에 있는 전 동포가 그 보복의 대상이 되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 사령부에서 병참감으로 근무하였다. 제해권의 상실로 본국으로부터 물자가 조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홍사익은 나름 자력갱생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편 병참감으로서 홍사익은 포로들에 대한 최고관리책임자 자격이기도 했는데 이는 결국 필리핀 지역에서 자행된 포로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의 책임을 지고 홍사익이 사형 판결을 받는 원인이 된다.

4. 여담[편집]

4.1. 창씨개명 거부[편집]

홍사익은 현역 일본 육군 중장임에도 창씨개명을 안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게다가 휘하 장병들 중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패전 시까지 그가 조선어를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으며, 패전 후에야 비로소 몇 마디 조선말을 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상용(常用)했으나 일본어 억양은 조선식이어서 듣기만 하면 저 사람이 조선인이구나 하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홍 중장 본인도 "난 원래 조선인이니까"라면서 발음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유카타를 입었으며 아들 홍국선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도 한자와 일본어로 썼고, 자신의 이름을 "홍사익"이 아니라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 시요꾸(こう しよく)"로 칭했다. 당시의 담배인 "호우요꾸"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인지 부하들 중에는 "고 시호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만주에 있을 때는 만주군에 속한 조선인 장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근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부사관들이 설날 인사를 오면 한복을 입고 맞이했다고 한다.

사실 홍사익의 앞선 행적들을 보면 이해하기 크게 곤란한 부분도 아니다. 홍사익은 골수친일파에 전범으로 처형당한 사람이지만, 앞선 다른 문단의 서술에서처럼 조선인으로서의 복잡한 정체성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료나 군인 등의 공무원은 소속 정부에 대한 충성이 곧 직업윤리와도 직결되므로, 일제에 충성하기 싫으면 그냥 때려치고 나오든가, 그렇지 못하고 그 업을 지속하고 싶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규복이나 손영목처럼 "관료로서 종사하되 조선인을 계몽하고 차별에 맞선다"와 같은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영국-아일랜드의 사례를 끌어다오기도 했는데, 홍사익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이는 아들인 홍국선에게 했던 말에서도 드러나는데, (오늘날 우리식으로 쉽게 해석하자면) "우리가 정복당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독립이 쉽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인종차별에 맞서는 느낌 정도였던 것 같다.

김석원 등이 보여주듯, 일본군에 복무하던 조선인들의 심경이 어느 정도 복잡했던 것도 사실이며, 특히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좋은 군인이었는가"와 "좋은 조선인이었는가"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는 2차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식민제국의 군대에 복무하던 피식민지 군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양차대전에서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을 도운 인도군만 해도 인도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친영 부역자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건 한국인들의 생각이고, 인도 내에서 양차대전의 인도군을 부역자로 평가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당장 영국의 전몰자 추도일에 인도 대표들이 다른 영연방 대표들과 함께 참석해서 양차대전에서 싸운 인도군 병사들을 기리는 모습을 매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선전했던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은 위선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독립 역시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이뤄졌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독립이 인도의 사례처럼 2차대전에서 일제의 승전 혹은 소모전에 이은 휴전 이후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이뤄졌다면, 이들도 달리 평가받았을 수 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본토 취급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2차대전 이후로도 프랑스와 수십만 사상자를 내며 20년 가까이 싸웠는데, 이때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프랑스군 출신들이었다. 본진 털린 자유프랑스는 알제를 임시 수도로 삼고 알제인을 40만명 가까이 징집했으면서, 막상 전쟁이 끝나자 입 싹 닦고 승전기념일날 독립 시위대를 학살한다. 또 베트남이 독립을 요구하자 진압을 위해 10만 이상을 징집해 가서 수만의 사상자를 낸다.

프랑스의 약속을 믿고 열심히 싸운 참전용사들은 배신당했다. 핏값에 대한 보상은커녕 탄압과 학살로 일관하는 프랑스에 맞서 일어났고, 알제리인 수십만이 죽었지만 프랑스군도 수만명을 죽여 1960년대 독립을 쟁취한다. 알제리 초대 대통령도 프랑스군 부사관 출신에 2차대전때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던 사람이다.

일제가 생산력으로 상대가 안 되는 미국을 친 시점에서 승전은커녕 "소모전 끝의 휴전"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약에 우연에 우연이 겹쳐 한반도 해방 없이 종전이 일어났다면, 알제리와 비슷한 전개가 펼쳐졌을 것이다. 참정권을 주지 않으려고 조선인[27]은 징병조차 안 하던 일제가 막판엔 참정권 약속과 함께 조선인들을 징집했는데, 이 약속이 지켜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제는 입 싹 닦고 이전처럼 조선인을 탄압했을 것이며, 홍사익이 그럴지 아닐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전 경험이 있는 일본군 복무자들이 무장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를 알고 있는 미래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상해보일 수 있지만, 체제에는 순응하면서도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당대 기준으로는 멍청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홍사익은 분명 일제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체성이고 뭐고 다 내던진 일반적인 친일파와는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홍사익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일본 당국이 "창씨는 강요가 아니다"라고 홍보하기 위해 내버려 두었다는 시각이 강하다.

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편집]

장군으로서 유능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챙기기도 잘 했으므로 일본군 장교 시절에는 부하와 상관을 막론하고 평이 대부분 좋은 편이었다. 여기에다 출신부터가 일반 사병들에게는 대단한 존재였는데, 창씨도 하지 않은 조선인이 초급장교도 아닌 장군이 된다는 것이 당시 일본의 하급장교나 사병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장교 순혈주의가 유독 심한 군대였다. 병이나 부사관이 아무리 전공을 세워도 전시 임관으로 소위가 되는 것조차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본군의 전투기 에이스들조차 대부분이 엄청난 무공을 세우고도 고급 장교는커녕 대부분이 초급 장교도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니 일본인으로 대좌까지 진급하여 연대장만 하고 나와도 사회에서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 큰 어른 대접 받는 군국주의 시기였다. 그런데 2등 국민 취급받던 조선인이 일본 육군 중장이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당시로선 상상도 어려운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 인한 아래와 같은 일화도 존재한다.
하급자 : 조선인 장군이 새로 왔답니다.
상급자 :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선인이 장군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하급자 : 아닙니다. 분명히 조선인이랍니다. 이름이 '고 시요쿠'라고 하던데요.
상급자 : 흠, 그렇다면 아마도 이왕가의 일족인 황족이겠지. 황실의 외가 쪽 사람일 거야.
하급자 : 아닙니다. 양주라던가, 조선의 시골 출신 평민이랍니다.
상급자 : 허,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로군. 아니 정말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어.[28]

초급장교 시절 비슷한 계급을 가진 이들에게는 질시를 받기도 했던 듯하다.
만주에 있던 홍사익은 새로 필리핀으로 발령을 받게 되자,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잠깐 시간을 내어 경기도 경성부 돈암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 들린 적이 있었다. 때마침 자신의 집에는 학병으로 끌려갔던 친척[29] 심모 씨[30]가 탈영하고 찾아와, 홍사익의 장남 홍국선(洪國善, 1919.8.6~1984.9.25)의 비호 아래 숨어지내고 있었다.

심씨는 경성에 별다른 지인이 없는 자였고, 심씨가 훈련소에서 부친 편지의 수신자가 전부 홍국선으로 되어 있으니 일본군 당국에서는 "홍국선이란 자가 탈영병을 숨겨주고 있다"라는 식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홍국선은 자기 집에 숨겨주면 들킬 게 뻔하다고 생각하여 이웃집에 부탁해 심씨를 그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집에 막 도착한 홍사익과 홍국선이 술 한 잔 기울이고 있을 때 한 육군 헌병 소위가 찾아와 탈영병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웠다. 밖이 소란스럽자 홍사익이 "무슨 일이냐"며 현관으로 나왔고, 홍사익의 군복에 달린 계급장을 본 소위는 기겁하며 경례를 붙인 후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장남 홍국선이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남긴 증언이다.

4.4. 가족의 뒷이야기[편집]

홍사익과 결혼한 첫 번째 아내 한양 조씨 조숙원(1887.4.7~1942.9.11)[31]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중풍을 앓다가 1942년에 사망했다. 결혼 당시 나이가 홍사익은 14세, 조숙원은 16세로 전형적인 조혼이다.

본처와의 사이에 낳은 장남 홍국선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근무했는데, 이승만의 직접 명령으로 사직해야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별다른 압박이 없었는지, 1962년 8월 1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후 군대에 들어가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고, 기사가 써진 시점에는 한국광업공사 이사로 재직중이었다고 한다. 1984년에 경기도 안성에서 사망했다.

본처가 사망한 이후 재혼한 두 번째 아내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청영(1908.11.18~1978.5.16)[32]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33] 출신으로 일본에서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압박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일본 재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다. 참고로 이들의 주선으로 당시 총리대신로 재임했던 사토 에이사쿠과 만날 수 있었는데, 사토 에이사쿠는 과거 철도성 관료시절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홍사익과 알고 지냈던 인연이 있어 이청영을 환대했다. 이때 자신의 사재를 털어 당시 돈으로 100만엔을 이청영에게 지원해 주었다. 이후 이청영은 일본에서 6년을 살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아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1978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청영과의 사이에 낳은 차남 홍현선(洪顯善, 1944.3.9~)[34]은 1962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고 하며, 나중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어머니와 같이 미국에서 살았다.

일본어 및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이청영, 홍국선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만 이름은 적지 않고 기술하고 조숙원, 홍달선에 대한 부분은 적지 않으면서 홍사익의 아내와 아들이 "압박 때문에 전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자료부족 및 혼동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4.5. 기타[편집]

홍사익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전면에는 남양홍공사익 배한양조씨지묘(南陽洪公思翊 配漢陽趙氏之墓), 후면에는 이력이 적혀 있다.# # 비석은 세워진 지 20년 가량 되었는데, 바로 건너편에 있는 남파 홍우원의 묘소를 후손들이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같은 남양 홍씨 출신인 홍사익의 묘도 보수한 뒤 비석을 세운 것이다. 그 전에는 묘소가 비봉산 등산로 바로 옆에 있음에도 누군가에 의해 묘 일부가 파헤쳐져 있었을 정도로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있었다. 당시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대체 이 묘지에 묻힌 사람은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후손들이 저리 신경을 안쓸까?' 같은 얘기도 많이 할 정도였다. 2021년 남파 홍우원의 묘를 후손들이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홍사익의 묘는 수풀이 우거진 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다.

본 항목에서도 인용된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홍사익 중장의 처형>은 저자가 12년 동안 홍사익의 재판기록과 친지의 인터뷰를 추적하여 펴낸 책이다. 홍사익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홍사익이 사형을 선고받은 원인인 전범 혐의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태평양 전쟁> 5권 말기에서 조선 출신 홍(洪) 장군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목받지 않는 편이었다. 주로 활동했던 시기부터 인기가 별로 없는 일제강점기 후기에서 말기이며, 2차대전 배경에서도 이시와라 간지 츠지 마사노부 같은 인물들에 비하면 캐릭터성이 워낙 진중해 라이트한 전개를 추구하게 된 2010년대 이후 대체역사물에서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체역사물의 범위가 2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고, 홍사익의 삶이 조명되면서 대체역사물에서 군인 조연으로 자주 등장한다. 몇안되는 조선인 장성 출신이라는점과 딱히 이념에 충성하기보다는 군인이니까 충성한다는점, 정치적 야심이 거의 없기에 어느 세력이든 가용가능한 유능한 군인으로 자주 등장한다.

카이저리덕스에서는 한국이 친일파들에 의해서 독립할 경우 대한국민공화국을 선포, 공화국 지도자가 된다. 물론 민주주의 따위 없고, 홍사익을 필두로 일본군 장교 출신들로 구성된 군사정부가 다스린다. 일본 아래에서 계속 숙이는것도 가능하지만 일본을 배신하고 역으로 일본을 공격할수도 있다.

라스트 엠파이어에서는 대한제국의 무난한 장군중 하나로 등장한다.

Hearts of Korea에서는 조선이 망하고 공화국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아비규환 상태이던 서울에서 리볼버와 나폴레옹 위인전만 가진채로 발견되었다고한다. 이후 지청천과 준장진급을 두고 경쟁했지만, 일본육사시절에 일본인 친구를 너무 많이 사겼다는 이유로 밀려서 게임 시작시점에는 45세 나이로 준장이다. 그래도 스펙자체는 한국장군중에서 꽤나 좋은편이다.#

대체역사 웹소설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1933년 기준 일본 육군 소좌로 나온다. 쿠데타군을 가로막고 레이와 덴노를 수호했으며, 쿠데타 진압 후 덴노의 최측근으로서 근위사단장이 되어 군내 사조직들을 단속한다. 나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심리 묘사는 부재하며, 그의 충성심을 신뢰하는 덴노조차 왜 충성하는지는, 조선 출신이어서 성리학적 이유로 군주에 충성하는 것인지 일본국의 사무라이로서인지 그저 출세를 원했던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야전군인으로 등장하며 세계관 내에 한국군의 시각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인물. 참전용사 구호부터, 군사연구소 연구원, 기계화부대 지휘관, 몽골전선 장군, 중국전선 사령관등 다양한 요직을 거친 유능한 인물로 등장. 학살 같은 것을 꺼리는 인간적인 면모도 있지만 중국 내전에서 중국인들이 서로 학살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거나 몽골의 데므치그돈로브에게 호통을 치는 등 전형적인 제국주의 장군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주인공 아들인 태시제의 친구이자 촉망받는 참모형 군인으로 등장했지만, 이후 군사 쿠데타 수괴가 된다. 쿠데타 인사중에는 그나마 온건해보였지만, 오히려 군인이라는 이유로 움직이는 인물이라 오히려 시키면 시키는 대로하는 가장많은 패악질을 부렸기에 쿠데타 진압후 종신노역형에 처한다.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731부대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도움을 주며 이우의 부하로 나온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엑스트라로서 지나가듯이 서술되었다.

반면 일본 가공전기에서는 간혹 등장하는데, 주로 일본 제국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개방적이었지만 어리석은 조선인들이 반항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용도로 등장한다. 물론 제국주의 국가가 프로파간다로 식민지 출신 장성하나 배출하는건 흔한 일이라는 사실은 은폐한다.

6. 같이보기[편집]

[1] 아래의 창씨개명 거부 문단 참고[2] 참의공파(參議公派) 26세 사(思) 수(秀) 항렬.[3] 1887.4.7~1942.9.11. 한양 조씨 조종수(趙鍾守)의 딸이다.[4] 1908.11.18~1978.5.16. 영천 이씨(永川 李氏)로 이지송(李之松)의 딸이며, 초명은 이보비(李寶妣)이다.[5] 洪思容. 1871.9.10~1940.11.3.[6] 洪國善. 1919.8.6~1984.9.25.[7] 洪顯善. 초명은 홍달선(洪達善). 1944년 3월 9일생.[8] 조선인으로 육군대학교를 입학한 사람은 4명뿐인데 영친왕 이건(의친왕의 서장자), 이우(의친왕의 차남) 등 홍사익을 제외한 3명은 모두 왕공족(조선왕족)이었다. 김정렬은 1944년에 육대에 응시하였으나 전쟁 말기라 워낙 혼란스러워서 합격 발표고 뭐고 없이 그냥 흐지부지 되었다고 회고록에 썼고, 유재흥도 1945년 5월 육대에 응시하고 8월에 있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9] 류원후(柳遠厚)의 딸이다.[10] 예과 3년, 본과 2년 도합 5년제로 구성된 심상중학교 상당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육군유년학교, 그 중에서도 지방유년학교가 아니라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에서 예과부터 밟아온 성골 출신이 가장 핵심으로 대접받았다.[11] 조선인 생도들의 복장 및 교육 과정은 일본인 생도들과 같았으며, 일본인 생도들이 붉은색 표장을 달고 있는데 반해 분홍색 표장을 달고 있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12] 심상중학교 출신은 이등병으로 시작해서 육군유년학교 출신들이 들어오는 6월에 맞춰 상등병으로 진급하고, 유년학교 출신은 상등병으로 시작하는데, 이들은 2개월 후인 8월에 오장(하사)으로 진급, 4개월 후인 12월에 군조(상사)로 진급하고, 육군사관학교 과정을 밟은 후 견습사관으로 자대에 배치된다.[13] 중일전쟁으로 일본 국내에 주둔해있던 상설사단들이 대거 중국으로 파병되고 나서, 일본육군은 기존 사단의 소수 잔류 병력을 근간으로 보충대에 재소집된 예비역과 신규 징병 자원을 충원하여 유수사단을 편성하였다.[14] 베이징에서 우한을 잇는 철도[15] 이전 판 서술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이끌던 윤세주가 1942년 6월 태항산 전투에서 홍사익이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전사하였다고 되어있었으나, 전투가 발생하기도 전인 1942년 4월에 이미 홍사익은 만주의 육군공주령학교 부교장으로 전임해있던 상태로, 잘못된 서술이다.[16] 육군사관학교 24기, 육군대학교 32기 출신으로 조선군에서 보병제79연대장(1937.8~1939.3), 제37보병여단장(1939.3~1941.3)을 역임하고 관동군 제5독립수비대장(1941.7~1942.8)을 거쳐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하였다.[17] 대한민국 육군에서도 과거에는 육사 졸업성적이 가장 성적이 생도를 서울대학교 위탁교육 등을 거쳐 교수요원으로 육성하고, 야전부대 지휘관은 대부분의 평범한 장교들을 보임했었고, 이는 성적우수자 출신 교수요원 위조로 구성된 청죽회와 야전부대 출신 하나회라는 대조적 집단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18] 참고로 홍사익이 대대장을 역임할 당시 연대장으로 모셨던 나가타 테츠잔이 이 교육총감부 라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홍사익이 해당 계통으로 진출한 것도 그의 영향이라는 추측이 있다.[19]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쓴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홍사익 중장은 전쟁사의 전문가로서 전술 교관이었으므로, 1차 대전 후의 여러 병법서를 연구하는 것이 본연의 직무였다."고 썼다.[20] 육대 32기 2명, 33기 5명, 34기 13명, 35기 12명(홍사익 포함), 36기 9명, 37기 11명, 38기 13명, 39기 2명[21] 육사 25기, 육대 35기로 홍사익의 육군사관학교 1년 선배이자 육군대학교 동기생이다.[22] 만주군 최선임자는 원용덕 중교이고, 중국군에선 조개옥 중교가 선택되어 이들 셋이 합작으로 국군을 만든다. 좌익과 상당수 광복군계는 참여를 거부하였는데, 초기에는 송호성이 광복군계 최선임자로 참여하였으나 이후 얼마 안가 힘을 잃었다.[23] 일본제국의 징병검사에서 받는 최고등급으로 현대 한국으로 치면 1등급이다. 전시체제 특성상 선망받았다. 한국에서도 1983년까지 갑을병정 등급으로 병역판정검사를 했다.[24] 한국스카우트연맹의 기원인 조선소년군의 아버지다.[25] 육사 44기로, 홍사익보다 육사 16년 후배이다. 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인 이우와 함께 졸업했다.[26] 토막 전열에 합류한 타이밍도 어정쩡했고 사쓰마, 조슈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이타가키 다이스케 같은 소수를 제외하곤 혁명의 과실도 별로 누리지 못한 도사 번 출신 지사들이 대표적인 예이다.[27] 정확히는 조선 땅[28] 출처 :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홍사익 장군>[29] 홍국선의 친구라고도 한다.[30] 1943년부터 시작된 징병령으로 징집된 사람이었다는 말도 있다.[31] 조종수(趙鍾守)의 딸이다.[32] 초명 이보비(李寶妣). 이지송(李之松)의 딸이다.[33]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의 전신이다.[34] 위 경향신문 기사에는 홍달선(洪達善)으로 나와 있지만 서울대학교 졸업명부(총동창회 발간)에는 홍달선은 없고 홍현선이 경제학과에 1962년 입학하여 1966년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문기사에서는 2남 홍현선을 3남 홍달선으로 착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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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익
    洪思翊こう しよく[1] | Hong Sa-ik

    1941년 보병제108여단장 시절
    출생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
    (現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
    사망
    1946년 9월 26일 (향년 57세)
    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2]
    복무
     

    1. 개요2. 생애
    2.1. 출신2.2. 군인의 길2.3. 위관 시절2.4. 좌관 시절2.5. 장군 시절
    2.5.1. 푸대접 논란2.5.2. 유일한 조선인 장성?
    2.6. 전범재판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
    3.1. 동기들과의 약속3.2. 3.1 운동3.3. 태평양 전쟁
    4. 여담
    4.1. 창씨개명 거부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4.3. 탈영병 사건4.4. 가족의 뒷이야기4.5. 기타
    5. 대중매체에서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출신[편집]

    1889년 3월 4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에서 자작농이던 아버지 홍명유(洪命裕, 1851.11.12~1895.3.5)와 어머니 진주 류씨(1852.5.19~1924.12.29)[9]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6살 되던 해인 1895년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많던 형 홍사용(洪思容, 1871.9.10~1940.11.3)의 손에서 컸다. 본래 집안은 문관을 다수 배출한 양반 출신으로 그 가풍은 남아 있었으나 이 시점에는 많이 쇠락한 상태였다. 어릴 때는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열심히 배워 후일에도 사서삼경을 다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형 역시 홍사익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2.2. 군인의 길[편집]

    참조

    당시 대한제국군 헌병 정위(正尉)로 있던 족숙(族叔) 홍중유(洪中裕, 1880.9.14~?)의 권유로 군인이 되려는 뜻을 품고 상경하여 1908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9년 7월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생도 중 선별된 우수 자원(2학년 15명, 1학년 29명)을 일본에 위탁교육을 보냈고, 이때 무관학교 2학년 생도였던 홍사익 또한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9년 8월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敎)[10] 예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11]

    1910년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본과로 진학하였다. 동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이 병합되면서, 당시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생도 전원은 일본인이 되어 표장이 대한제국을 상징하던 분홍색에서 일본제국의 붉은색으로 바뀌고, 유학생반도 해체되어 일반 일본인 생도들과 동일한 조직에 똑같이 섞여서 교육받게 되었다. 동기생 중 일부는 이때 퇴교하였다.

    1912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성적순으로 각 연대에 배치되어 대부근무를 시작했다. 독일식 사관후보생 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는 입교 전 각 연대에서 사병 근무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심상중학교 출신은 전년도 12월부터 1년간, 육군유년학교 출신은 6월부터 6개월간 대부근무를 마치면서 12월에 육사에 입교하도록 되어있었다.[12] 홍사익은 육군중앙유년학교 성적 또한 우수했기 때문에 최고 엘리트 부대라 할 수 있는 아카사카의 보1 제1사단 보병제1연대로 배치받아 대부근무를 마치고 1912년 12월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14년 5월 육사를 졸업(제26기)하고 견습사관으로 6개월간 복무한 뒤 1914년 12월 소위로 임관했다. 홍사익의 육사 졸업성적은 전체 742명 중 31등(보병과 471명 중 22등)으로 같은 26기 동기인 조선인 13명 중에서는 수석이었다.

    2.3. 위관 시절[편집]

    홍사익이 육사를 졸업한 직후인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제국도 참전하면서, 그의 육사 동기생들도 대거 출전하게 되었다. 조선인으로 한정해보더라도 지청천은 칭다오 공략에, 이응준과 염창섭은 시베리아 출병 등 전선에 나갔으나, 홍사익은 줄곧 도쿄에서 근무한다. 홍사익은 유년학교 졸업 후 사병복무, 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 시절부터 위관장교로 복무하던 내내 육군성, 참모본부를 제외하고는 줄곧 보병제1연대에서만 복무했다.

    1918년 7월 동기들과 함께 중위로 진급했고, 1919년 6월에는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으로 전보되었다. 이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육대 입시에 단번에 합격하여 육군대학교 35기로 1920년 12월 7일 입교했다. 일본 육군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 것이다. 참고로 제109사단장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이 홍사익의 육사(26기), 육대(35기) 동기이다.


    1920년 12월 16일자 매일신보
    홍사익 중위가 육군대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1923년 11월 29일 육군대학교를 졸업(제35기)하고 원대인 보병제1연대로 복귀했다. 1924년 3월 대위로 진급해 보병제1연대 예하 중대장에 보임되었다. 중대장 보직 이수 후에는 1925년 5월 참모본부에 배속되어 제4부 내국전사과에서 러일전쟁 전사 연구 및 편찬에 종사했다.

    자대부터 보병제1연대에 배치받아 육군성 근무, 육대 졸업 후 참모본부를 거친 홍사익의 미래는 탄탄대로였다.

    2.4. 좌관 시절[편집]

    참모본부 근무를 마친 홍사익은 1929년 8월 소좌로 진급하며 제1사단으로 복귀, 보병제3연대 3대대장에 보임되었다. 이때 그의 직속상관인 보병제3연대장이 바로 나가타 테츠잔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2년간 대대장 보직을 이수한 후 1931년 8월 치바현에 소재하고 있던 육군보병학교로 전보되어 교관으로 복무했다.

    1933년 4월 관동군사령부에 배속되어 만주국군에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홍사익은 만주국 육군중앙훈련처(속칭 봉천군관학교)에서 고급 간부의 훈련을 지도 감독했으며, 창설 준비 작업 중이었던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창설 작업에 조력했다.

    1934년 8월 중좌로 진급하여 관동군사령부 참모부 제3과(정무과)에서 근무하면서 만주국내에서 조선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1936년 8월 다시 육군보병학교로 전보되어 도쿄로 복귀하였고, 1937년 11월부터는 육군보병학교 군견훈련소장 직위를 겸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로 중지나방면군이 편성되자 1937년 12월 홍사익 또한 중지나방면군사령부에 배속되었고, 동월 관동군사령부 근무 시절 공로로 만주국으로부터 훈3위 경운장을 수훈했다.

    1938년 2월 중지나방면군이 중지나파견군으로 확대 재편제되면서 홍사익은 중지나파견군사령부 특무부 소속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이어 3월에는 대좌로 진급했고, 흥아원 조사관 직위를 받아 흥아원 화중연락부에서 정보수집을 담당했다.

    1940년 8월 유수(留守)[13]제1사단사령부로 배속되어 다시 원대인 제1사단으로 복귀하며 도쿄로 돌아왔다.

    2.5. 장군 시절[편집]

    1941년 3월 소장으로 승진하여 지나파견군에 배속, 북지나방면군 제110사단 예하의 보병제108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보병제108여단이 소속된 제110사단은 중국 하북성에 주둔하며 베이징 일대의 경비와 경한선(京漢線)[14] 연선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중국공산당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에 소속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1941년 12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湖北省) 타이항(太行)산맥의 '후자좡(胡家庄) 전투'와 인근의 '싱타이(邢台) 전투'에서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김학철 2명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이들이 상대한 일본육군 병력이 보병제108여단 예하였다면 홍사익 부대와 전투를 벌인 것이 된다.[15]

    1942년 4월 교육총감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육군공주령학교 간사에 보임되었다. 1944년 3월 모리모토 이치로(森本伊市郎)[16] 소장의 후임으로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전임되었다.

    1944년 10월 중장으로 승진했고, 12월에는 남방총군 병참감(남방총군이 사이공으로 이동하면서 병참감부가 제14방면군에 배속)에 보임되었다. 그렇게 일본육군 남방총군 병참감 직위에 있는 상태에서 1945년 8월 종전을 맞이했다.

    2.5.1. 푸대접 논란[편집]

    전통적인 유럽의 군제를 받아들여 19세기 후반 건군된 일본 제국 육군은 창군기에 각 지방을 책임지는 연대를 근간으로 하여 편성되었던 관계로, 천황으로부터 하사되는 각 연대기를 받는 연대장을 육군 보직의 꽃이라고 여겼는데 홍사익은 대좌 재임시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홍사익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일본제국 육군에서는 육사, 육대 등 교육 성적이 뛰어난 우수자원은 야전 제대장에 거의 보직시키지 않았다.[17] 예컨대, 육사 36기 수석이자 육대 43기 우등(3위) 졸업자인 츠지 마사노부는 대위 시절 중대장을 역임한 후 대좌로 종전을 맞을 때까지 대대장, 연대장 보직을 맡지 않고 참모 직위만 돌았다. 좀 더 근기수를 보더라도 홍사익의 육사 1년 후배(27기)이자 육대 동기(35기)인 후지무로 료스케는 육군 대좌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본과,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모두 최연소, 수석으로 졸업하여 초엘리트 코스만 밟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원대인 보병제1연대의 대대장을 역임했을 뿐 줄곧 참모본부와 학교 등에서 교관으로 근무했고, 연대장 보직도 보병제77연대에서 8개월만 있었을 뿐이며, 이후 여단장 직위를 거치지 않고도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반면 후지무로 료스케와 육사 동기인 김석원은 각 계급마다 거의 내내 일선 제대장으로 복무하며 전선에서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또한 홍사익은 군정을 다루는 육군성이나 군령권을 행사하는 참모본부가 아니라 교육총감부 라인이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18] 일본제국 육군에서 교육총감은 육군대신(육군성), 참모총장(참모본부)과 함께 육군3장관으로서 육군 최고위직이었고, 그 교육총감부 라인도 상당한 요직이었다. 홍사익의 이력을 보더라도 그는 육사 졸업 직후 전선에 파병된 동기들과 달리 도쿄의 아카사카의 보1(보병제1연대)에서 위관 시절을 보내며 육군성 인사국 및 참모본부 제4부 등 도쿄의 최고기관에서 근무했고, 좌관 시절에도 소좌 때 육군보병학교 교관과 만주국 육군중앙훈련처 담당 고문을 거쳐 중좌 때 육군보병학교에 재차 보임되는 등 교육 계통에서 엘리트 보직들을 역임했다.[19] 소장으로 진급하여 여단장을 지내고 나서 받은 보직인 육군공주령학교 간사 직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홍사익은 교육총감부 라인에서 핵심 보직만을 거쳤다. 그리고 지휘관 보직도 연대장만 역임하지 않았을 뿐 그 이전에 중대장, 대대장 그리고 이후에도 여단장을 모두 거쳤다.

    또 홍사익은 그의 육사 동기들 중에서 선두권으로 중장까지 진급했다. 육사 26기 742명 중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반참모에 진입한 사람이 총 67명이고[20] 그 중 대장 계급은 제109사단장으로 이오지마 전투에서 당시 중장으로 전사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사후 추서) 단 1명에 불과하고, 44명은 중장 그리고 13명은 소장이 최종 계급이었다. 홍사익의 육대 35기 동기이기도 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육대 차석 졸업자이었음에도 소좌 진급을 홍사익보다 반 년 늦은 1930년 3월에 했고, 중좌는 1933년 8월로 1년 먼저, 대좌는 1937년 8월로 반 년 먼저, 소장은 1940년 3월로 1년 먼저 진급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종전시 기준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서 육사 20기 이후 기수 중에서는 홍사익과 같은 중장이 최고 계급이었다. 21기(도미나가 노부마사), 23기(오바타 히데요시), 24기(스즈키 소사쿠), 26기(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출신 대장이 1명씩 있는데 이들은 모두 중장 계급에서 전사/순직하고 사후 대장 계급으로 추서된 케이스들이다. 22기, 25기에는 대장으로 사후추서된 케이스도 없었고, 당연하게도 26기 이후의 후배 기수에서도 대장 진급자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홍사익은 5기수 위까지 통틀어 최고 계급인 중장까지 기수 선두권으로 고속진급하였으며, 육대 출신 육사 동기나 근기수 선배 중에서도 홍사익보다 진급이 느린 케이스는 부지기수였다.

    결론적으로 경력으로 보든, 계급으로 보든 홍사익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2.5.2. 유일한 조선인 장성?[편집]

    왕족 아닌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장성이 된 경우는 홍사익을 제외하고 7명이 더 있다. 중장까지 진급한 이병무, 조동윤, 어담 3명과 소장까지 진급한 이희두, 조성근, 왕유식, 김응선 4명이 이에 해당한다. 전원 육군 장군이며, 해군 제독은 일본해군병학교에서 조선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무하다.

    그러나 이들은 전원 대한제국군에서 참령 이상 계급에 있었던 고위 간부였고, 대한제국이 망하자 동급 일본군 장교로 일본군에 편입되는 예우를 받았다. 이들은 "조선군인"이라는 특별 코스로 분류되었으며, 처음부터 고위 장교로 시작하여 장군까지 진급했을 뿐이다. 결국 조선인으로서 일본군에서 정식 진급 과정을 밟고 장군이 된 사람은 왕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홍사익이 유일하다.

    2.6. 전범재판[편집]

    야마시타 도모유키 제14방면군사령관과 무토 아키라[21] 참모장이 9월 3일 바기오에서 연합국 남서태평양사령부 참모장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체포 구속되어 마닐라로 압송되었고, 제14방면군도 순차적으로 항복을 위해 이동하여 병참감부는 9월 13일 이동을 시작해 9월 16일 키얀간에 도착했다. 이후 그를 수행해온 부관 사이토 중위와 떨어져 장군들이 격리된 장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마닐라로 이송되어 B급 전범(전통 전쟁법 위반 범죄)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부관이었던 사이토 중위가 회고한 바에 의하면, 전쟁 종결 직후 아직 미군의 포로가 되기 전, 홍사익 장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중학교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일본제국 육군 근무 중 주로 교육계통에서 활동한 그는 야전 군인보다는 오히려 교육자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추측한다. 하지만 그의 육사 동기와 후배들은 죄다 국군에 들어가서 고관대작이 되었는데 특히 이응준 대좌는 일본군 최선임자로 미군에게 지목되어[22] 국군 창설 작업을 맡았다. 홍사익 역시 살아 있었다면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연합국 포로의 수용 책임을 맡고 있던 병참감이었던 홍사익은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그 자신의 재판에서는 피고인으로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는 일절 증언을 하지 않은 홍사익이지만,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을 때는 야마시타를 변호하기 위해서, 포로 대우는 홍사익 자신의 결단에 근거한 조치라고 증언하였다.

    전범재판을 받고 있을 때는 국내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올려 구명을 요청한 사람들도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있었다. 미군정기 신문사 자료들 면밀히 보면 '홍사익 중장 구명하자!' 이런 기사 제목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46년 2월~4월 사이가 눈에 띄게 많다. 대표적으로 홍사익의 부인과 아들 부부가 당시 군정장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를 찾아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실 일본군의 포로관리가 막장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반드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전범으로 처벌받는 건 필연적이었다.

    관련 링크 - 전봉관의 인생백경, 이규태 에세이

    수많은 일본군 출신들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흡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비롯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사들은 홍사익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구명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 국군 창군과정의 기틀확립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홍사익 중장의 구명에 힘을 쏟았다는 설도 존재한다(이재전장군 溫故知新). 그러나 이쪽에는 동조하는 증언이 아예 없으며, 링크된 글이 사실상 유일한 주장이다.

    결국 1946년 4월 8일 오후 4시 20분 판사 5인 중 3:2로 유죄를 선고하고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홍사익은 사형 판결을 받고도 태연하게 돌아와 "갑종합격이다!"[23] 라고 외쳐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이는 일본어로 "갑종합격"과 "교수합격"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갑종(甲種), 교수(絞首) 모두 일본식 독음이 'こうしゅ'로 같은 데서 나온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인데, 자기 목숨을 가지고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어지간히도 대담했던 모양이다.

    처형을 기다리며 갇혀있는 동안에도 목사가 넣어 준 신약성서와 구약의 시편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1946년 9월 26일 밤, 사형 당일 군복 착용을 허락받았기에 군복을 입고 처형장으로 나가면서 수용소의 담당 감시병인 미 해군 군사경찰 이반 케이에게 그 성경을 주었지만 딱히 친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자신이 곧 사망하면 갖고 있을 사람이 없으니 주었을 따름이다. 이반 케이는 홍사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나중에 만난 일본인에게 이 성경을 주인의 가족에게 보내주라 했다. 이 성경은 뒤에 '제네럴 홍'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단서가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교수대에 올라 자신의 사형 집행에 참여한 입회 목사 대행에게 구약성경의 시편 51편을 읽어 달라고 청했다. 목사 대행이었던 이 인물은 일본군 포로였다. 성경을 목숨처럼 아끼는 특이한 일본군 포로가 있다는 것을 미군 군목이 알고 자신의 보조로 썼다. 이 포로는 홍사익에게 자기는 목사가 아니라서 해줄 말이 없다고 했는데 이에 홍사익이 그러면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읽어달라고 한 것이다. 이 포로는 훗날 진짜 목사가 되었다.

    시편 낭송 이후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집행시 복장은 계급장과 서훈 등을 떼어낸 군복을 입고 집행되었으며, 군인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교수형이 집행된 유일한 일본 군인이다. 일본군 군복을 입고 사형을 받은 장성 사형수는 민간인 신분으로 사형이 집행된 혼마 마사하루 모리 쿠니조, 군인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서 사형이 집행된 홍사익 단 3명이다. 홍사익과 모리 구니조는 교수형, 마사하루는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반면, 야마시타 도모유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집행된 주요 전범들은 수형자 복장으로 교수형 사형이 집행되었다.
    예로부터 원통히 죽는 이는 많으니,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리.(昔より冤死せしものあまたあり われもまたこれに加わらんのみ)
    끙끙 앓으며 생각해도 푸념만 될 뿐, 패전의 죄로서 포기하는 것이 옳으리.(くよくよと思ってみても愚痴となり 敗戦罪とあきらむがよし)

    홍사익의 사세구

    사형 집행 이후 홍사익의 시신은 홍사익 본인의 부탁에 따라 화장이 되었다. 보통 전범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화장이 되었지만 홍사익은 직접 사형 집행 이후에 화장을 미 해군 측에 부탁을 했다고 하며, 당시 집행을 담당하던 미 해군 측에서는 그 부탁은 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미 해군 측은 홍사익의 부탁대로 화장을 진행했으며, 다만 그 재를 어디에 뿌려달라는 의사는 남기지 않아, 미 해군에 의해 바다에 바다장으로 산골했다.

    현재 그의 무덤은 경기도 안성시 안성시청 뒤편의 남양 홍씨 토홍계 종중 산에 있지만 유골이 바다로 산골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품을 묻은 가묘라고 한다.

    1966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편집]

    홍사익은 일본군을 떠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일본군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홍사익은 대영제국의 예를 들어 '조선인이 일본을 위해 충실히 봉사한다면, (대영제국의 아일랜드인처럼)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자기 아들 홍국선에게도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해서는 안된다."

    홍사익이 아들 홍국선에게 한 말

    사실 이게 자기정당화적 변명이 아니라 진중한 신념이었다 하더라도 굉장한 역사적 오독이란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아일랜드는 역사 내내 엄청난 탄압과 인격적인 모독을 국가적 행사를 통해서까지 받으며 지냈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일부러 영국계와 영국계 종교신앙자들을 몰아서 배치한 북아일랜드 지역을 빼고는 기어이 독립을 성취해서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곳이다. 아일랜드인들이 떳떳하게 숨기지 않고 행동한 것이 영국으로부터 인정받거나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아일랜드 자체가 아예 민족과 언어도 다르고 역사 내내 영국에서 핍박받으며 간섭받은 역사 때문에 민족의식이 더더욱 고취되어서인 것이다. 실제로 철의 여인 대처가 아일랜드 투쟁가들이 단식투쟁을 할 때 정말로 영양실조로 피와 가죽 밖에 안남을 정도의 상태까지 가서 아사를 해버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둬서 엄청난 반감을 얻었고 이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상식밖의 대우 때문에 영국내에서조차 반감으로 인해 대처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질 정도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를 유화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일제 시기 조선인의 복잡한 정체성과 선택이 드러난다. 사실 당시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 3.1 운동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며, 1930년대 이후 숨쉬는거 말곤 전부 일본 허가를 받아야 했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선 즉각적인 독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3.1 운동 직후 일제의 집요한 독립운동 탄압으로 국내의 독립 주도세력이 약화되었는데 동시기 1차대전 특수 등으로 일본의 경제가 발전함과 동시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풀리게 된다. 즉 일제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향상으로 점차 독립 같은 것 생각 안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자치령 정도로 시작해서 아주 느긋하게 독립하는 것이 한계라는 게 그나마 독립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이었으니, 이는 당시 아일랜드가 기나긴 투쟁 끝에 이런 방법으로 독립한 것처럼 보였던 예가 있어 아주 헛된 꿈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건 영국-아일랜드 관계사의 디테일을 모르는 외부인의 오독에 불과하다. 가톨릭 해방운동의 대부 대니얼 오코넬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중후반쯤 되면 찰스 스튜어트 파넬을 필두로 한 영국 의회 내에서 비폭력 정치적 투쟁으로 인해 1차 세계 대전 직전쯤 가면 아일랜드 자치법이 영국 정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만큼 성장하긴 했으나, 가장 결정적으로 1차 대전 발발로 인해 아일랜드 자치법 관련 논의 자체가 무산되고, 세계 대전과 무관하게 이미 이 시절부터 현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되는 얼스터 친영주의자들 중심으로 적극적인 자치반대운동, 친영 운동 또한 들끓어서 1910년대쯤 되면 점진적 투쟁론은 이미 좌초되고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적 고착 상태를 결정적으로 깨트리고 당시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들 모두 서서히 말라죽는거 아닌가 걱정하던 아일랜드 자치, 독립 의제 자체에 다시 불을 댕긴건 레드먼드 같은 영국 원내 아일랜드 의회당의 점진론적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뿌리깊은 과격 급진 아일랜드 무장 봉기 전통을 부활시킨 1916년 부활절 봉기였다. 결국 아일랜드 독립 또한 결정적인 급진 무력 투쟁이 수반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한일관계에 대입해도 외부적으론 악독한 제국주의를 폈어도 어쨌든 국내 정치에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 국회 의석까지 내줄 자유주의적 입헌정치 전통이 강력했던 영국과 일제를 비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몰랐던 타협주의자들은 영국의 스코틀랜드인을 롤모델로, 일본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한 채, 출신지역 등으로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고 조선 출신도 내지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을 제1의 목표로 하게된다. 이들이 내선일체를 적극 환영한 이유도 이것인데, 그들은 정말로 내선일체가 모든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대우를 해주려는 정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출신은커녕 일본 본토인들끼리도 지역, 출신 등으로 차별이 이루어지는 판국이다 보니 현실적으론 허황된 꿈이었다. 이들 타협주의자에 대한 시각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하나'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게 아닌 민족의 동등한 대우를 위한 목적이라서 정상참작은 해줄만 함'의 두 가지인데 대체로 전자의 시각이 강하다. 사실 그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구 일본군에 지원입대하는 조선인, 특히 장교로 지원하는 인원 중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강제로 끌려온 병 출신들보다도 민족의식이나 사명감을 더 갖춘 케이스가 생긴다. 대표적인 예가 이종찬이나 채병덕, 김정렬. "우리가 열심히 해서 조선인들의 위치를 끌어올려 독립에 기여하고 언젠가 조선이 독립되면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은 실제 그랬듯이 스스로 독립할 수는 없고 일본이 시켜주어야 하는 거니까 지금은 일본과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의식이 있기에 소극적 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일본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조선인 출신 일본군만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병사들에서도 보이는 현상이다.

    그래서 홍사익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군에 몸담아 아예 한국이란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났던 젊은 장교들과 세대 차이가 있으나 인식 자체는 비슷하게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3.1. 동기들과의 약속[편집]

    홍사익과 같은 육군무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혼란에 빠졌다. 비록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대한제국군이 대부분 사라지기는 했으나, 군 조직의 근간은 남아있었고 언젠가 재건되리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사라짐으로써 그 희망 자체가 무너졌고, 분격한 생도 상당수는 전원 일본 육사를 자퇴하고 귀국하자고 나서기도 했다.

    이때 유학생들은 토론 끝에 "기왕 들어온 육사이니 중위가 될 때까지만 복무하고, 바로 예편하자"고 약속한다. 동기생들 중 조철호 중위[24]는 이 약속을 지켜 1918년에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곧바로 예편, 조선 오산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다가 3.1 운동에 참가하도록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구속되기도 했다. 지청천 김경천은 소위 때 일본군 교범을 가지고 탈영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홍사익은 군복무를 계속한다.
    3.1 운동으로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동포들의 움직임을 보고, 아직 일본군에 남아 있던 김광서(1년 선배), 지청천(동기), 이종혁(1년 후배) 등이 잇달아 탈영하여 독립군에 합류한다. 하지만 홍사익은 여전히 일본군에 남아 있었는데, 훗날 홍사익 본인이 육사 후배인 이형석[25]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걸려서 군인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걸렸는지, 대신 조선인 출신 장교들의 친목모임을 통해 일본군을 탈영한 동료 조선인 장교들이 두고 간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홍사익은 수 년간 이 모임에서 간사(총무)를 맡았다.

    일본군 내 조선인의 입지가 약화된다고 해서 탈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모양인데, 이는 후술할 태평양전쟁 시기에 한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경에 일본군에 속한 조선인은 황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말기에 유학한 사관생도 출신 장교 30여 명에 지나지 않아 입지가 약화되고 자시고 할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군에서는 조국을 위해 행동하는 조선인 장교들을 일종의 지사로 보는 분위기가 있어서 몇몇 장교들이 탈영했다고 나머지 잔류파인 조선인 장교들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지청천이 탈영했을 때 동기인 홍사익이나 이응준은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고 1기수 아래 김석원은 예편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잡혀 형을 살고, 심지어 늑막염으로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자신의 동기 이종혁을 자주 찾아보고 돈까지 구해주며 적극적으로 건네주기까지 했는데도 연대장이 "그러다 앞길 막힐 수도 있다"고 가볍게 타이르는 게 전부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으로 일본군에 편입되었다가 일본군을 그만두고 독립투쟁에 나선 이갑이 아직 일본군에 있던 사위 이응준에게 권총을 구해달라고 연락해 이응준이 자신의 권총을 보내주었다가 들켰는데, 이때는 상부에서 단순 도난으로 무마시켜 주었다. 일본군에서 권총은 군에서 지급하는 게 아니라 필요하면 사비로 사서 쓰는 개인 재산이었기 때문에 들킬 경우 도난으로 무마시키기에 용이했다. 고급 장교들이야 권총 사는 게 큰 무리가 아니었지만 월급이 박봉인 하급 장교들은 권총 값도 부담이라 싼 모델은 결함투성이인 줄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들고 다녀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막 임관한 소위들의 권총을 보면 집안 사정을 대강 알 수 있었다고...

    이에 대해 큰 뜻을 품은 지사들을 보면 일단 한 수 접고 존중해 주던 메이지 시대의 풍습이 당시 일본 사회에 아직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상급자들이 조선인 장교들의 이런 소소한 군기 문란 행위를 알고도 덮어주지 않았겠냐는 시각도 있다. 메이지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앙 정계에 안착하지 못한 유신지사들은[26] 몰락한 구 막부 사족들과 함께 민간으로 파고들어가 좌익과 극우를 막론하고 근대 일본 비주류 정치세력의 시조가 되었는데, 비록 사회주의, 파시즘 같은 근대 사상의 대두와 함께 방향은 갈라졌지만 메이지 시절만 하더라도 극우 사상가가 정치범으로 쫒기는 좌익 운동가의 가족을 돌보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념을 초월하는 지사 문화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고, 지사 문화라는 것도 근본은 동아시아권 모두가 공유하는 성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보니 일본 군인들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았을 때도 어느 정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한국에도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나 제1공화국 시대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우익으로 분류되는 장택상이 좌파정치인 조봉암의 유가족을 돌봐주었던 일처럼 당대 유명인들 사이에는 이념을 넘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 대한 경애심, 존중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방으로 발령받을 당시에 경성부에 들렀을 때 아들 홍국선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몇 차례나 옛 친구인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연락이 있었고, 도쿄에 들렀을 때 매일신보 동경지사에 있던 김을한 기자도 그에게 광복군에 가담하기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이탈로 인한 후폭풍이 일본군에 남아있는 조선인(군인 및 노무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홍사익과 비슷하게 일본군 고관이었던 영친왕 역시, 자신이 광복군에 합류하면 조선에 있는 전 동포가 그 보복의 대상이 되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 사령부에서 병참감으로 근무하였다. 제해권의 상실로 본국으로부터 물자가 조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홍사익은 나름 자력갱생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편 병참감으로서 홍사익은 포로들에 대한 최고관리책임자 자격이기도 했는데 이는 결국 필리핀 지역에서 자행된 포로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의 책임을 지고 홍사익이 사형 판결을 받는 원인이 된다.

    4. 여담[편집]

    4.1. 창씨개명 거부[편집]

    홍사익은 현역 일본 육군 중장임에도 창씨개명을 안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게다가 휘하 장병들 중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패전 시까지 그가 조선어를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으며, 패전 후에야 비로소 몇 마디 조선말을 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상용(常用)했으나 일본어 억양은 조선식이어서 듣기만 하면 저 사람이 조선인이구나 하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홍 중장 본인도 "난 원래 조선인이니까"라면서 발음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유카타를 입었으며 아들 홍국선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도 한자와 일본어로 썼고, 자신의 이름을 "홍사익"이 아니라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 시요꾸(こう しよく)"로 칭했다. 당시의 담배인 "호우요꾸"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인지 부하들 중에는 "고 시호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만주에 있을 때는 만주군에 속한 조선인 장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근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부사관들이 설날 인사를 오면 한복을 입고 맞이했다고 한다.

    사실 홍사익의 앞선 행적들을 보면 이해하기 크게 곤란한 부분도 아니다. 홍사익은 골수친일파에 전범으로 처형당한 사람이지만, 앞선 다른 문단의 서술에서처럼 조선인으로서의 복잡한 정체성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료나 군인 등의 공무원은 소속 정부에 대한 충성이 곧 직업윤리와도 직결되므로, 일제에 충성하기 싫으면 그냥 때려치고 나오든가, 그렇지 못하고 그 업을 지속하고 싶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규복이나 손영목처럼 "관료로서 종사하되 조선인을 계몽하고 차별에 맞선다"와 같은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영국-아일랜드의 사례를 끌어다오기도 했는데, 홍사익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이는 아들인 홍국선에게 했던 말에서도 드러나는데, (오늘날 우리식으로 쉽게 해석하자면) "우리가 정복당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독립이 쉽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인종차별에 맞서는 느낌 정도였던 것 같다.

    김석원 등이 보여주듯, 일본군에 복무하던 조선인들의 심경이 어느 정도 복잡했던 것도 사실이며, 특히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좋은 군인이었는가"와 "좋은 조선인이었는가"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는 2차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식민제국의 군대에 복무하던 피식민지 군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양차대전에서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을 도운 인도군만 해도 인도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친영 부역자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건 한국인들의 생각이고, 인도 내에서 양차대전의 인도군을 부역자로 평가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당장 영국의 전몰자 추도일에 인도 대표들이 다른 영연방 대표들과 함께 참석해서 양차대전에서 싸운 인도군 병사들을 기리는 모습을 매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선전했던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은 위선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독립 역시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이뤄졌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독립이 인도의 사례처럼 2차대전에서 일제의 승전 혹은 소모전에 이은 휴전 이후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이뤄졌다면, 이들도 달리 평가받았을 수 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본토 취급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2차대전 이후로도 프랑스와 수십만 사상자를 내며 20년 가까이 싸웠는데, 이때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프랑스군 출신들이었다. 본진 털린 자유프랑스는 알제를 임시 수도로 삼고 알제인을 40만명 가까이 징집했으면서, 막상 전쟁이 끝나자 입 싹 닦고 승전기념일날 독립 시위대를 학살한다. 또 베트남이 독립을 요구하자 진압을 위해 10만 이상을 징집해 가서 수만의 사상자를 낸다.

    프랑스의 약속을 믿고 열심히 싸운 참전용사들은 배신당했다. 핏값에 대한 보상은커녕 탄압과 학살로 일관하는 프랑스에 맞서 일어났고, 알제리인 수십만이 죽었지만 프랑스군도 수만명을 죽여 1960년대 독립을 쟁취한다. 알제리 초대 대통령도 프랑스군 부사관 출신에 2차대전때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던 사람이다.

    일제가 생산력으로 상대가 안 되는 미국을 친 시점에서 승전은커녕 "소모전 끝의 휴전"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약에 우연에 우연이 겹쳐 한반도 해방 없이 종전이 일어났다면, 알제리와 비슷한 전개가 펼쳐졌을 것이다. 참정권을 주지 않으려고 조선인[27]은 징병조차 안 하던 일제가 막판엔 참정권 약속과 함께 조선인들을 징집했는데, 이 약속이 지켜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제는 입 싹 닦고 이전처럼 조선인을 탄압했을 것이며, 홍사익이 그럴지 아닐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전 경험이 있는 일본군 복무자들이 무장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를 알고 있는 미래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상해보일 수 있지만, 체제에는 순응하면서도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당대 기준으로는 멍청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홍사익은 분명 일제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체성이고 뭐고 다 내던진 일반적인 친일파와는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홍사익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일본 당국이 "창씨는 강요가 아니다"라고 홍보하기 위해 내버려 두었다는 시각이 강하다.

    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편집]

    장군으로서 유능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챙기기도 잘 했으므로 일본군 장교 시절에는 부하와 상관을 막론하고 평이 대부분 좋은 편이었다. 여기에다 출신부터가 일반 사병들에게는 대단한 존재였는데, 창씨도 하지 않은 조선인이 초급장교도 아닌 장군이 된다는 것이 당시 일본의 하급장교나 사병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장교 순혈주의가 유독 심한 군대였다. 병이나 부사관이 아무리 전공을 세워도 전시 임관으로 소위가 되는 것조차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본군의 전투기 에이스들조차 대부분이 엄청난 무공을 세우고도 고급 장교는커녕 대부분이 초급 장교도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니 일본인으로 대좌까지 진급하여 연대장만 하고 나와도 사회에서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 큰 어른 대접 받는 군국주의 시기였다. 그런데 2등 국민 취급받던 조선인이 일본 육군 중장이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당시로선 상상도 어려운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 인한 아래와 같은 일화도 존재한다.
    하급자 : 조선인 장군이 새로 왔답니다.
    상급자 :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선인이 장군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하급자 : 아닙니다. 분명히 조선인이랍니다. 이름이 '고 시요쿠'라고 하던데요.
    상급자 : 흠, 그렇다면 아마도 이왕가의 일족인 황족이겠지. 황실의 외가 쪽 사람일 거야.
    하급자 : 아닙니다. 양주라던가, 조선의 시골 출신 평민이랍니다.
    상급자 : 허,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로군. 아니 정말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어.[28]

    초급장교 시절 비슷한 계급을 가진 이들에게는 질시를 받기도 했던 듯하다.
    만주에 있던 홍사익은 새로 필리핀으로 발령을 받게 되자,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잠깐 시간을 내어 경기도 경성부 돈암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 들린 적이 있었다. 때마침 자신의 집에는 학병으로 끌려갔던 친척[29] 심모 씨[30]가 탈영하고 찾아와, 홍사익의 장남 홍국선(洪國善, 1919.8.6~1984.9.25)의 비호 아래 숨어지내고 있었다.

    심씨는 경성에 별다른 지인이 없는 자였고, 심씨가 훈련소에서 부친 편지의 수신자가 전부 홍국선으로 되어 있으니 일본군 당국에서는 "홍국선이란 자가 탈영병을 숨겨주고 있다"라는 식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홍국선은 자기 집에 숨겨주면 들킬 게 뻔하다고 생각하여 이웃집에 부탁해 심씨를 그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집에 막 도착한 홍사익과 홍국선이 술 한 잔 기울이고 있을 때 한 육군 헌병 소위가 찾아와 탈영병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웠다. 밖이 소란스럽자 홍사익이 "무슨 일이냐"며 현관으로 나왔고, 홍사익의 군복에 달린 계급장을 본 소위는 기겁하며 경례를 붙인 후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장남 홍국선이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남긴 증언이다.

    4.4. 가족의 뒷이야기[편집]

    홍사익과 결혼한 첫 번째 아내 한양 조씨 조숙원(1887.4.7~1942.9.11)[31]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중풍을 앓다가 1942년에 사망했다. 결혼 당시 나이가 홍사익은 14세, 조숙원은 16세로 전형적인 조혼이다.

    본처와의 사이에 낳은 장남 홍국선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근무했는데, 이승만의 직접 명령으로 사직해야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별다른 압박이 없었는지, 1962년 8월 1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후 군대에 들어가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고, 기사가 써진 시점에는 한국광업공사 이사로 재직중이었다고 한다. 1984년에 경기도 안성에서 사망했다.

    본처가 사망한 이후 재혼한 두 번째 아내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청영(1908.11.18~1978.5.16)[32]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33] 출신으로 일본에서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압박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일본 재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다. 참고로 이들의 주선으로 당시 총리대신로 재임했던 사토 에이사쿠과 만날 수 있었는데, 사토 에이사쿠는 과거 철도성 관료시절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홍사익과 알고 지냈던 인연이 있어 이청영을 환대했다. 이때 자신의 사재를 털어 당시 돈으로 100만엔을 이청영에게 지원해 주었다. 이후 이청영은 일본에서 6년을 살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아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1978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청영과의 사이에 낳은 차남 홍현선(洪顯善, 1944.3.9~)[34]은 1962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고 하며, 나중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어머니와 같이 미국에서 살았다.

    일본어 및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이청영, 홍국선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만 이름은 적지 않고 기술하고 조숙원, 홍달선에 대한 부분은 적지 않으면서 홍사익의 아내와 아들이 "압박 때문에 전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자료부족 및 혼동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4.5. 기타[편집]

    홍사익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전면에는 남양홍공사익 배한양조씨지묘(南陽洪公思翊 配漢陽趙氏之墓), 후면에는 이력이 적혀 있다.# # 비석은 세워진 지 20년 가량 되었는데, 바로 건너편에 있는 남파 홍우원의 묘소를 후손들이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같은 남양 홍씨 출신인 홍사익의 묘도 보수한 뒤 비석을 세운 것이다. 그 전에는 묘소가 비봉산 등산로 바로 옆에 있음에도 누군가에 의해 묘 일부가 파헤쳐져 있었을 정도로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있었다. 당시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대체 이 묘지에 묻힌 사람은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후손들이 저리 신경을 안쓸까?' 같은 얘기도 많이 할 정도였다. 2021년 남파 홍우원의 묘를 후손들이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홍사익의 묘는 수풀이 우거진 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다.

    본 항목에서도 인용된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홍사익 중장의 처형>은 저자가 12년 동안 홍사익의 재판기록과 친지의 인터뷰를 추적하여 펴낸 책이다. 홍사익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홍사익이 사형을 선고받은 원인인 전범 혐의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태평양 전쟁> 5권 말기에서 조선 출신 홍(洪) 장군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목받지 않는 편이었다. 주로 활동했던 시기부터 인기가 별로 없는 일제강점기 후기에서 말기이며, 2차대전 배경에서도 이시와라 간지 츠지 마사노부 같은 인물들에 비하면 캐릭터성이 워낙 진중해 라이트한 전개를 추구하게 된 2010년대 이후 대체역사물에서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체역사물의 범위가 2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고, 홍사익의 삶이 조명되면서 대체역사물에서 군인 조연으로 자주 등장한다. 몇안되는 조선인 장성 출신이라는점과 딱히 이념에 충성하기보다는 군인이니까 충성한다는점, 정치적 야심이 거의 없기에 어느 세력이든 가용가능한 유능한 군인으로 자주 등장한다.

    카이저리덕스에서는 한국이 친일파들에 의해서 독립할 경우 대한국민공화국을 선포, 공화국 지도자가 된다. 물론 민주주의 따위 없고, 홍사익을 필두로 일본군 장교 출신들로 구성된 군사정부가 다스린다. 일본 아래에서 계속 숙이는것도 가능하지만 일본을 배신하고 역으로 일본을 공격할수도 있다.

    라스트 엠파이어에서는 대한제국의 무난한 장군중 하나로 등장한다.

    Hearts of Korea에서는 조선이 망하고 공화국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아비규환 상태이던 서울에서 리볼버와 나폴레옹 위인전만 가진채로 발견되었다고한다. 이후 지청천과 준장진급을 두고 경쟁했지만, 일본육사시절에 일본인 친구를 너무 많이 사겼다는 이유로 밀려서 게임 시작시점에는 45세 나이로 준장이다. 그래도 스펙자체는 한국장군중에서 꽤나 좋은편이다.#

    대체역사 웹소설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1933년 기준 일본 육군 소좌로 나온다. 쿠데타군을 가로막고 레이와 덴노를 수호했으며, 쿠데타 진압 후 덴노의 최측근으로서 근위사단장이 되어 군내 사조직들을 단속한다. 나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심리 묘사는 부재하며, 그의 충성심을 신뢰하는 덴노조차 왜 충성하는지는, 조선 출신이어서 성리학적 이유로 군주에 충성하는 것인지 일본국의 사무라이로서인지 그저 출세를 원했던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야전군인으로 등장하며 세계관 내에 한국군의 시각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인물. 참전용사 구호부터, 군사연구소 연구원, 기계화부대 지휘관, 몽골전선 장군, 중국전선 사령관등 다양한 요직을 거친 유능한 인물로 등장. 학살 같은 것을 꺼리는 인간적인 면모도 있지만 중국 내전에서 중국인들이 서로 학살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거나 몽골의 데므치그돈로브에게 호통을 치는 등 전형적인 제국주의 장군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주인공 아들인 태시제의 친구이자 촉망받는 참모형 군인으로 등장했지만, 이후 군사 쿠데타 수괴가 된다. 쿠데타 인사중에는 그나마 온건해보였지만, 오히려 군인이라는 이유로 움직이는 인물이라 오히려 시키면 시키는 대로하는 가장많은 패악질을 부렸기에 쿠데타 진압후 종신노역형에 처한다.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731부대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도움을 주며 이우의 부하로 나온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엑스트라로서 지나가듯이 서술되었다.

    반면 일본 가공전기에서는 간혹 등장하는데, 주로 일본 제국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개방적이었지만 어리석은 조선인들이 반항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용도로 등장한다. 물론 제국주의 국가가 프로파간다로 식민지 출신 장성하나 배출하는건 흔한 일이라는 사실은 은폐한다.

    6. 같이보기[편집]

    [1] 아래의 창씨개명 거부 문단 참고[2] 참의공파(參議公派) 26세 사(思) 수(秀) 항렬.[3] 1887.4.7~1942.9.11. 한양 조씨 조종수(趙鍾守)의 딸이다.[4] 1908.11.18~1978.5.16. 영천 이씨(永川 李氏)로 이지송(李之松)의 딸이며, 초명은 이보비(李寶妣)이다.[5] 洪思容. 1871.9.10~1940.11.3.[6] 洪國善. 1919.8.6~1984.9.25.[7] 洪顯善. 초명은 홍달선(洪達善). 1944년 3월 9일생.[8] 조선인으로 육군대학교를 입학한 사람은 4명뿐인데 영친왕 이건(의친왕의 서장자), 이우(의친왕의 차남) 등 홍사익을 제외한 3명은 모두 왕공족(조선왕족)이었다. 김정렬은 1944년에 육대에 응시하였으나 전쟁 말기라 워낙 혼란스러워서 합격 발표고 뭐고 없이 그냥 흐지부지 되었다고 회고록에 썼고, 유재흥도 1945년 5월 육대에 응시하고 8월에 있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9] 류원후(柳遠厚)의 딸이다.[10] 예과 3년, 본과 2년 도합 5년제로 구성된 심상중학교 상당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육군유년학교, 그 중에서도 지방유년학교가 아니라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에서 예과부터 밟아온 성골 출신이 가장 핵심으로 대접받았다.[11] 조선인 생도들의 복장 및 교육 과정은 일본인 생도들과 같았으며, 일본인 생도들이 붉은색 표장을 달고 있는데 반해 분홍색 표장을 달고 있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12] 심상중학교 출신은 이등병으로 시작해서 육군유년학교 출신들이 들어오는 6월에 맞춰 상등병으로 진급하고, 유년학교 출신은 상등병으로 시작하는데, 이들은 2개월 후인 8월에 오장(하사)으로 진급, 4개월 후인 12월에 군조(상사)로 진급하고, 육군사관학교 과정을 밟은 후 견습사관으로 자대에 배치된다.[13] 중일전쟁으로 일본 국내에 주둔해있던 상설사단들이 대거 중국으로 파병되고 나서, 일본육군은 기존 사단의 소수 잔류 병력을 근간으로 보충대에 재소집된 예비역과 신규 징병 자원을 충원하여 유수사단을 편성하였다.[14] 베이징에서 우한을 잇는 철도[15] 이전 판 서술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이끌던 윤세주가 1942년 6월 태항산 전투에서 홍사익이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전사하였다고 되어있었으나, 전투가 발생하기도 전인 1942년 4월에 이미 홍사익은 만주의 육군공주령학교 부교장으로 전임해있던 상태로, 잘못된 서술이다.[16] 육군사관학교 24기, 육군대학교 32기 출신으로 조선군에서 보병제79연대장(1937.8~1939.3), 제37보병여단장(1939.3~1941.3)을 역임하고 관동군 제5독립수비대장(1941.7~1942.8)을 거쳐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하였다.[17] 대한민국 육군에서도 과거에는 육사 졸업성적이 가장 성적이 생도를 서울대학교 위탁교육 등을 거쳐 교수요원으로 육성하고, 야전부대 지휘관은 대부분의 평범한 장교들을 보임했었고, 이는 성적우수자 출신 교수요원 위조로 구성된 청죽회와 야전부대 출신 하나회라는 대조적 집단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18] 참고로 홍사익이 대대장을 역임할 당시 연대장으로 모셨던 나가타 테츠잔이 이 교육총감부 라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홍사익이 해당 계통으로 진출한 것도 그의 영향이라는 추측이 있다.[19]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쓴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홍사익 중장은 전쟁사의 전문가로서 전술 교관이었으므로, 1차 대전 후의 여러 병법서를 연구하는 것이 본연의 직무였다."고 썼다.[20] 육대 32기 2명, 33기 5명, 34기 13명, 35기 12명(홍사익 포함), 36기 9명, 37기 11명, 38기 13명, 39기 2명[21] 육사 25기, 육대 35기로 홍사익의 육군사관학교 1년 선배이자 육군대학교 동기생이다.[22] 만주군 최선임자는 원용덕 중교이고, 중국군에선 조개옥 중교가 선택되어 이들 셋이 합작으로 국군을 만든다. 좌익과 상당수 광복군계는 참여를 거부하였는데, 초기에는 송호성이 광복군계 최선임자로 참여하였으나 이후 얼마 안가 힘을 잃었다.[23] 일본제국의 징병검사에서 받는 최고등급으로 현대 한국으로 치면 1등급이다. 전시체제 특성상 선망받았다. 한국에서도 1983년까지 갑을병정 등급으로 병역판정검사를 했다.[24] 한국스카우트연맹의 기원인 조선소년군의 아버지다.[25] 육사 44기로, 홍사익보다 육사 16년 후배이다. 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인 이우와 함께 졸업했다.[26] 토막 전열에 합류한 타이밍도 어정쩡했고 사쓰마, 조슈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이타가키 다이스케 같은 소수를 제외하곤 혁명의 과실도 별로 누리지 못한 도사 번 출신 지사들이 대표적인 예이다.[27] 정확히는 조선 땅[28] 출처 :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홍사익 장군>[29] 홍국선의 친구라고도 한다.[30] 1943년부터 시작된 징병령으로 징집된 사람이었다는 말도 있다.[31] 조종수(趙鍾守)의 딸이다.[32] 초명 이보비(李寶妣). 이지송(李之松)의 딸이다.[33]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의 전신이다.[34] 위 경향신문 기사에는 홍달선(洪達善)으로 나와 있지만 서울대학교 졸업명부(총동창회 발간)에는 홍달선은 없고 홍현선이 경제학과에 1962년 입학하여 1966년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문기사에서는 2남 홍현선을 3남 홍달선으로 착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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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익
      洪思翊こう しよく[1] | Hong Sa-ik

      1941년 보병제108여단장 시절
      출생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
      (現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
      사망
      1946년 9월 26일 (향년 57세)
      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2]
      복무
       

      1. 개요2. 생애
      2.1. 출신2.2. 군인의 길2.3. 위관 시절2.4. 좌관 시절2.5. 장군 시절
      2.5.1. 푸대접 논란2.5.2. 유일한 조선인 장성?
      2.6. 전범재판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
      3.1. 동기들과의 약속3.2. 3.1 운동3.3. 태평양 전쟁
      4. 여담
      4.1. 창씨개명 거부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4.3. 탈영병 사건4.4. 가족의 뒷이야기4.5. 기타
      5. 대중매체에서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출신[편집]

      1889년 3월 4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에서 자작농이던 아버지 홍명유(洪命裕, 1851.11.12~1895.3.5)와 어머니 진주 류씨(1852.5.19~1924.12.29)[9]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6살 되던 해인 1895년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많던 형 홍사용(洪思容, 1871.9.10~1940.11.3)의 손에서 컸다. 본래 집안은 문관을 다수 배출한 양반 출신으로 그 가풍은 남아 있었으나 이 시점에는 많이 쇠락한 상태였다. 어릴 때는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열심히 배워 후일에도 사서삼경을 다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형 역시 홍사익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2.2. 군인의 길[편집]

      참조

      당시 대한제국군 헌병 정위(正尉)로 있던 족숙(族叔) 홍중유(洪中裕, 1880.9.14~?)의 권유로 군인이 되려는 뜻을 품고 상경하여 1908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9년 7월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생도 중 선별된 우수 자원(2학년 15명, 1학년 29명)을 일본에 위탁교육을 보냈고, 이때 무관학교 2학년 생도였던 홍사익 또한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9년 8월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敎)[10] 예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11]

      1910년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본과로 진학하였다. 동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이 병합되면서, 당시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생도 전원은 일본인이 되어 표장이 대한제국을 상징하던 분홍색에서 일본제국의 붉은색으로 바뀌고, 유학생반도 해체되어 일반 일본인 생도들과 동일한 조직에 똑같이 섞여서 교육받게 되었다. 동기생 중 일부는 이때 퇴교하였다.

      1912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성적순으로 각 연대에 배치되어 대부근무를 시작했다. 독일식 사관후보생 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는 입교 전 각 연대에서 사병 근무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심상중학교 출신은 전년도 12월부터 1년간, 육군유년학교 출신은 6월부터 6개월간 대부근무를 마치면서 12월에 육사에 입교하도록 되어있었다.[12] 홍사익은 육군중앙유년학교 성적 또한 우수했기 때문에 최고 엘리트 부대라 할 수 있는 아카사카의 보1 제1사단 보병제1연대로 배치받아 대부근무를 마치고 1912년 12월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14년 5월 육사를 졸업(제26기)하고 견습사관으로 6개월간 복무한 뒤 1914년 12월 소위로 임관했다. 홍사익의 육사 졸업성적은 전체 742명 중 31등(보병과 471명 중 22등)으로 같은 26기 동기인 조선인 13명 중에서는 수석이었다.

      2.3. 위관 시절[편집]

      홍사익이 육사를 졸업한 직후인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제국도 참전하면서, 그의 육사 동기생들도 대거 출전하게 되었다. 조선인으로 한정해보더라도 지청천은 칭다오 공략에, 이응준과 염창섭은 시베리아 출병 등 전선에 나갔으나, 홍사익은 줄곧 도쿄에서 근무한다. 홍사익은 유년학교 졸업 후 사병복무, 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 시절부터 위관장교로 복무하던 내내 육군성, 참모본부를 제외하고는 줄곧 보병제1연대에서만 복무했다.

      1918년 7월 동기들과 함께 중위로 진급했고, 1919년 6월에는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으로 전보되었다. 이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육대 입시에 단번에 합격하여 육군대학교 35기로 1920년 12월 7일 입교했다. 일본 육군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 것이다. 참고로 제109사단장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이 홍사익의 육사(26기), 육대(35기) 동기이다.


      1920년 12월 16일자 매일신보
      홍사익 중위가 육군대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1923년 11월 29일 육군대학교를 졸업(제35기)하고 원대인 보병제1연대로 복귀했다. 1924년 3월 대위로 진급해 보병제1연대 예하 중대장에 보임되었다. 중대장 보직 이수 후에는 1925년 5월 참모본부에 배속되어 제4부 내국전사과에서 러일전쟁 전사 연구 및 편찬에 종사했다.

      자대부터 보병제1연대에 배치받아 육군성 근무, 육대 졸업 후 참모본부를 거친 홍사익의 미래는 탄탄대로였다.

      2.4. 좌관 시절[편집]

      참모본부 근무를 마친 홍사익은 1929년 8월 소좌로 진급하며 제1사단으로 복귀, 보병제3연대 3대대장에 보임되었다. 이때 그의 직속상관인 보병제3연대장이 바로 나가타 테츠잔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2년간 대대장 보직을 이수한 후 1931년 8월 치바현에 소재하고 있던 육군보병학교로 전보되어 교관으로 복무했다.

      1933년 4월 관동군사령부에 배속되어 만주국군에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홍사익은 만주국 육군중앙훈련처(속칭 봉천군관학교)에서 고급 간부의 훈련을 지도 감독했으며, 창설 준비 작업 중이었던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창설 작업에 조력했다.

      1934년 8월 중좌로 진급하여 관동군사령부 참모부 제3과(정무과)에서 근무하면서 만주국내에서 조선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1936년 8월 다시 육군보병학교로 전보되어 도쿄로 복귀하였고, 1937년 11월부터는 육군보병학교 군견훈련소장 직위를 겸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로 중지나방면군이 편성되자 1937년 12월 홍사익 또한 중지나방면군사령부에 배속되었고, 동월 관동군사령부 근무 시절 공로로 만주국으로부터 훈3위 경운장을 수훈했다.

      1938년 2월 중지나방면군이 중지나파견군으로 확대 재편제되면서 홍사익은 중지나파견군사령부 특무부 소속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이어 3월에는 대좌로 진급했고, 흥아원 조사관 직위를 받아 흥아원 화중연락부에서 정보수집을 담당했다.

      1940년 8월 유수(留守)[13]제1사단사령부로 배속되어 다시 원대인 제1사단으로 복귀하며 도쿄로 돌아왔다.

      2.5. 장군 시절[편집]

      1941년 3월 소장으로 승진하여 지나파견군에 배속, 북지나방면군 제110사단 예하의 보병제108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보병제108여단이 소속된 제110사단은 중국 하북성에 주둔하며 베이징 일대의 경비와 경한선(京漢線)[14] 연선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중국공산당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에 소속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1941년 12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湖北省) 타이항(太行)산맥의 '후자좡(胡家庄) 전투'와 인근의 '싱타이(邢台) 전투'에서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김학철 2명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이들이 상대한 일본육군 병력이 보병제108여단 예하였다면 홍사익 부대와 전투를 벌인 것이 된다.[15]

      1942년 4월 교육총감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육군공주령학교 간사에 보임되었다. 1944년 3월 모리모토 이치로(森本伊市郎)[16] 소장의 후임으로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전임되었다.

      1944년 10월 중장으로 승진했고, 12월에는 남방총군 병참감(남방총군이 사이공으로 이동하면서 병참감부가 제14방면군에 배속)에 보임되었다. 그렇게 일본육군 남방총군 병참감 직위에 있는 상태에서 1945년 8월 종전을 맞이했다.

      2.5.1. 푸대접 논란[편집]

      전통적인 유럽의 군제를 받아들여 19세기 후반 건군된 일본 제국 육군은 창군기에 각 지방을 책임지는 연대를 근간으로 하여 편성되었던 관계로, 천황으로부터 하사되는 각 연대기를 받는 연대장을 육군 보직의 꽃이라고 여겼는데 홍사익은 대좌 재임시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홍사익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일본제국 육군에서는 육사, 육대 등 교육 성적이 뛰어난 우수자원은 야전 제대장에 거의 보직시키지 않았다.[17] 예컨대, 육사 36기 수석이자 육대 43기 우등(3위) 졸업자인 츠지 마사노부는 대위 시절 중대장을 역임한 후 대좌로 종전을 맞을 때까지 대대장, 연대장 보직을 맡지 않고 참모 직위만 돌았다. 좀 더 근기수를 보더라도 홍사익의 육사 1년 후배(27기)이자 육대 동기(35기)인 후지무로 료스케는 육군 대좌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본과,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모두 최연소, 수석으로 졸업하여 초엘리트 코스만 밟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원대인 보병제1연대의 대대장을 역임했을 뿐 줄곧 참모본부와 학교 등에서 교관으로 근무했고, 연대장 보직도 보병제77연대에서 8개월만 있었을 뿐이며, 이후 여단장 직위를 거치지 않고도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반면 후지무로 료스케와 육사 동기인 김석원은 각 계급마다 거의 내내 일선 제대장으로 복무하며 전선에서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또한 홍사익은 군정을 다루는 육군성이나 군령권을 행사하는 참모본부가 아니라 교육총감부 라인이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18] 일본제국 육군에서 교육총감은 육군대신(육군성), 참모총장(참모본부)과 함께 육군3장관으로서 육군 최고위직이었고, 그 교육총감부 라인도 상당한 요직이었다. 홍사익의 이력을 보더라도 그는 육사 졸업 직후 전선에 파병된 동기들과 달리 도쿄의 아카사카의 보1(보병제1연대)에서 위관 시절을 보내며 육군성 인사국 및 참모본부 제4부 등 도쿄의 최고기관에서 근무했고, 좌관 시절에도 소좌 때 육군보병학교 교관과 만주국 육군중앙훈련처 담당 고문을 거쳐 중좌 때 육군보병학교에 재차 보임되는 등 교육 계통에서 엘리트 보직들을 역임했다.[19] 소장으로 진급하여 여단장을 지내고 나서 받은 보직인 육군공주령학교 간사 직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홍사익은 교육총감부 라인에서 핵심 보직만을 거쳤다. 그리고 지휘관 보직도 연대장만 역임하지 않았을 뿐 그 이전에 중대장, 대대장 그리고 이후에도 여단장을 모두 거쳤다.

      또 홍사익은 그의 육사 동기들 중에서 선두권으로 중장까지 진급했다. 육사 26기 742명 중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반참모에 진입한 사람이 총 67명이고[20] 그 중 대장 계급은 제109사단장으로 이오지마 전투에서 당시 중장으로 전사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사후 추서) 단 1명에 불과하고, 44명은 중장 그리고 13명은 소장이 최종 계급이었다. 홍사익의 육대 35기 동기이기도 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육대 차석 졸업자이었음에도 소좌 진급을 홍사익보다 반 년 늦은 1930년 3월에 했고, 중좌는 1933년 8월로 1년 먼저, 대좌는 1937년 8월로 반 년 먼저, 소장은 1940년 3월로 1년 먼저 진급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종전시 기준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서 육사 20기 이후 기수 중에서는 홍사익과 같은 중장이 최고 계급이었다. 21기(도미나가 노부마사), 23기(오바타 히데요시), 24기(스즈키 소사쿠), 26기(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출신 대장이 1명씩 있는데 이들은 모두 중장 계급에서 전사/순직하고 사후 대장 계급으로 추서된 케이스들이다. 22기, 25기에는 대장으로 사후추서된 케이스도 없었고, 당연하게도 26기 이후의 후배 기수에서도 대장 진급자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홍사익은 5기수 위까지 통틀어 최고 계급인 중장까지 기수 선두권으로 고속진급하였으며, 육대 출신 육사 동기나 근기수 선배 중에서도 홍사익보다 진급이 느린 케이스는 부지기수였다.

      결론적으로 경력으로 보든, 계급으로 보든 홍사익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2.5.2. 유일한 조선인 장성?[편집]

      왕족 아닌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장성이 된 경우는 홍사익을 제외하고 7명이 더 있다. 중장까지 진급한 이병무, 조동윤, 어담 3명과 소장까지 진급한 이희두, 조성근, 왕유식, 김응선 4명이 이에 해당한다. 전원 육군 장군이며, 해군 제독은 일본해군병학교에서 조선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무하다.

      그러나 이들은 전원 대한제국군에서 참령 이상 계급에 있었던 고위 간부였고, 대한제국이 망하자 동급 일본군 장교로 일본군에 편입되는 예우를 받았다. 이들은 "조선군인"이라는 특별 코스로 분류되었으며, 처음부터 고위 장교로 시작하여 장군까지 진급했을 뿐이다. 결국 조선인으로서 일본군에서 정식 진급 과정을 밟고 장군이 된 사람은 왕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홍사익이 유일하다.

      2.6. 전범재판[편집]

      야마시타 도모유키 제14방면군사령관과 무토 아키라[21] 참모장이 9월 3일 바기오에서 연합국 남서태평양사령부 참모장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체포 구속되어 마닐라로 압송되었고, 제14방면군도 순차적으로 항복을 위해 이동하여 병참감부는 9월 13일 이동을 시작해 9월 16일 키얀간에 도착했다. 이후 그를 수행해온 부관 사이토 중위와 떨어져 장군들이 격리된 장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마닐라로 이송되어 B급 전범(전통 전쟁법 위반 범죄)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부관이었던 사이토 중위가 회고한 바에 의하면, 전쟁 종결 직후 아직 미군의 포로가 되기 전, 홍사익 장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중학교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일본제국 육군 근무 중 주로 교육계통에서 활동한 그는 야전 군인보다는 오히려 교육자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추측한다. 하지만 그의 육사 동기와 후배들은 죄다 국군에 들어가서 고관대작이 되었는데 특히 이응준 대좌는 일본군 최선임자로 미군에게 지목되어[22] 국군 창설 작업을 맡았다. 홍사익 역시 살아 있었다면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연합국 포로의 수용 책임을 맡고 있던 병참감이었던 홍사익은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그 자신의 재판에서는 피고인으로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는 일절 증언을 하지 않은 홍사익이지만,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을 때는 야마시타를 변호하기 위해서, 포로 대우는 홍사익 자신의 결단에 근거한 조치라고 증언하였다.

      전범재판을 받고 있을 때는 국내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올려 구명을 요청한 사람들도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있었다. 미군정기 신문사 자료들 면밀히 보면 '홍사익 중장 구명하자!' 이런 기사 제목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46년 2월~4월 사이가 눈에 띄게 많다. 대표적으로 홍사익의 부인과 아들 부부가 당시 군정장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를 찾아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실 일본군의 포로관리가 막장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반드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전범으로 처벌받는 건 필연적이었다.

      관련 링크 - 전봉관의 인생백경, 이규태 에세이

      수많은 일본군 출신들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흡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비롯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사들은 홍사익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구명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 국군 창군과정의 기틀확립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홍사익 중장의 구명에 힘을 쏟았다는 설도 존재한다(이재전장군 溫故知新). 그러나 이쪽에는 동조하는 증언이 아예 없으며, 링크된 글이 사실상 유일한 주장이다.

      결국 1946년 4월 8일 오후 4시 20분 판사 5인 중 3:2로 유죄를 선고하고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홍사익은 사형 판결을 받고도 태연하게 돌아와 "갑종합격이다!"[23] 라고 외쳐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이는 일본어로 "갑종합격"과 "교수합격"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갑종(甲種), 교수(絞首) 모두 일본식 독음이 'こうしゅ'로 같은 데서 나온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인데, 자기 목숨을 가지고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어지간히도 대담했던 모양이다.

      처형을 기다리며 갇혀있는 동안에도 목사가 넣어 준 신약성서와 구약의 시편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1946년 9월 26일 밤, 사형 당일 군복 착용을 허락받았기에 군복을 입고 처형장으로 나가면서 수용소의 담당 감시병인 미 해군 군사경찰 이반 케이에게 그 성경을 주었지만 딱히 친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자신이 곧 사망하면 갖고 있을 사람이 없으니 주었을 따름이다. 이반 케이는 홍사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나중에 만난 일본인에게 이 성경을 주인의 가족에게 보내주라 했다. 이 성경은 뒤에 '제네럴 홍'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단서가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교수대에 올라 자신의 사형 집행에 참여한 입회 목사 대행에게 구약성경의 시편 51편을 읽어 달라고 청했다. 목사 대행이었던 이 인물은 일본군 포로였다. 성경을 목숨처럼 아끼는 특이한 일본군 포로가 있다는 것을 미군 군목이 알고 자신의 보조로 썼다. 이 포로는 홍사익에게 자기는 목사가 아니라서 해줄 말이 없다고 했는데 이에 홍사익이 그러면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읽어달라고 한 것이다. 이 포로는 훗날 진짜 목사가 되었다.

      시편 낭송 이후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집행시 복장은 계급장과 서훈 등을 떼어낸 군복을 입고 집행되었으며, 군인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교수형이 집행된 유일한 일본 군인이다. 일본군 군복을 입고 사형을 받은 장성 사형수는 민간인 신분으로 사형이 집행된 혼마 마사하루 모리 쿠니조, 군인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서 사형이 집행된 홍사익 단 3명이다. 홍사익과 모리 구니조는 교수형, 마사하루는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반면, 야마시타 도모유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집행된 주요 전범들은 수형자 복장으로 교수형 사형이 집행되었다.
      예로부터 원통히 죽는 이는 많으니,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리.(昔より冤死せしものあまたあり われもまたこれに加わらんのみ)
      끙끙 앓으며 생각해도 푸념만 될 뿐, 패전의 죄로서 포기하는 것이 옳으리.(くよくよと思ってみても愚痴となり 敗戦罪とあきらむがよし)

      홍사익의 사세구

      사형 집행 이후 홍사익의 시신은 홍사익 본인의 부탁에 따라 화장이 되었다. 보통 전범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화장이 되었지만 홍사익은 직접 사형 집행 이후에 화장을 미 해군 측에 부탁을 했다고 하며, 당시 집행을 담당하던 미 해군 측에서는 그 부탁은 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미 해군 측은 홍사익의 부탁대로 화장을 진행했으며, 다만 그 재를 어디에 뿌려달라는 의사는 남기지 않아, 미 해군에 의해 바다에 바다장으로 산골했다.

      현재 그의 무덤은 경기도 안성시 안성시청 뒤편의 남양 홍씨 토홍계 종중 산에 있지만 유골이 바다로 산골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품을 묻은 가묘라고 한다.

      1966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편집]

      홍사익은 일본군을 떠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일본군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홍사익은 대영제국의 예를 들어 '조선인이 일본을 위해 충실히 봉사한다면, (대영제국의 아일랜드인처럼)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자기 아들 홍국선에게도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해서는 안된다."

      홍사익이 아들 홍국선에게 한 말

      사실 이게 자기정당화적 변명이 아니라 진중한 신념이었다 하더라도 굉장한 역사적 오독이란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아일랜드는 역사 내내 엄청난 탄압과 인격적인 모독을 국가적 행사를 통해서까지 받으며 지냈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일부러 영국계와 영국계 종교신앙자들을 몰아서 배치한 북아일랜드 지역을 빼고는 기어이 독립을 성취해서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곳이다. 아일랜드인들이 떳떳하게 숨기지 않고 행동한 것이 영국으로부터 인정받거나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아일랜드 자체가 아예 민족과 언어도 다르고 역사 내내 영국에서 핍박받으며 간섭받은 역사 때문에 민족의식이 더더욱 고취되어서인 것이다. 실제로 철의 여인 대처가 아일랜드 투쟁가들이 단식투쟁을 할 때 정말로 영양실조로 피와 가죽 밖에 안남을 정도의 상태까지 가서 아사를 해버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둬서 엄청난 반감을 얻었고 이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상식밖의 대우 때문에 영국내에서조차 반감으로 인해 대처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질 정도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를 유화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일제 시기 조선인의 복잡한 정체성과 선택이 드러난다. 사실 당시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 3.1 운동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며, 1930년대 이후 숨쉬는거 말곤 전부 일본 허가를 받아야 했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선 즉각적인 독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3.1 운동 직후 일제의 집요한 독립운동 탄압으로 국내의 독립 주도세력이 약화되었는데 동시기 1차대전 특수 등으로 일본의 경제가 발전함과 동시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풀리게 된다. 즉 일제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향상으로 점차 독립 같은 것 생각 안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자치령 정도로 시작해서 아주 느긋하게 독립하는 것이 한계라는 게 그나마 독립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이었으니, 이는 당시 아일랜드가 기나긴 투쟁 끝에 이런 방법으로 독립한 것처럼 보였던 예가 있어 아주 헛된 꿈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건 영국-아일랜드 관계사의 디테일을 모르는 외부인의 오독에 불과하다. 가톨릭 해방운동의 대부 대니얼 오코넬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중후반쯤 되면 찰스 스튜어트 파넬을 필두로 한 영국 의회 내에서 비폭력 정치적 투쟁으로 인해 1차 세계 대전 직전쯤 가면 아일랜드 자치법이 영국 정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만큼 성장하긴 했으나, 가장 결정적으로 1차 대전 발발로 인해 아일랜드 자치법 관련 논의 자체가 무산되고, 세계 대전과 무관하게 이미 이 시절부터 현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되는 얼스터 친영주의자들 중심으로 적극적인 자치반대운동, 친영 운동 또한 들끓어서 1910년대쯤 되면 점진적 투쟁론은 이미 좌초되고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적 고착 상태를 결정적으로 깨트리고 당시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들 모두 서서히 말라죽는거 아닌가 걱정하던 아일랜드 자치, 독립 의제 자체에 다시 불을 댕긴건 레드먼드 같은 영국 원내 아일랜드 의회당의 점진론적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뿌리깊은 과격 급진 아일랜드 무장 봉기 전통을 부활시킨 1916년 부활절 봉기였다. 결국 아일랜드 독립 또한 결정적인 급진 무력 투쟁이 수반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한일관계에 대입해도 외부적으론 악독한 제국주의를 폈어도 어쨌든 국내 정치에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 국회 의석까지 내줄 자유주의적 입헌정치 전통이 강력했던 영국과 일제를 비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몰랐던 타협주의자들은 영국의 스코틀랜드인을 롤모델로, 일본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한 채, 출신지역 등으로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고 조선 출신도 내지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을 제1의 목표로 하게된다. 이들이 내선일체를 적극 환영한 이유도 이것인데, 그들은 정말로 내선일체가 모든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대우를 해주려는 정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출신은커녕 일본 본토인들끼리도 지역, 출신 등으로 차별이 이루어지는 판국이다 보니 현실적으론 허황된 꿈이었다. 이들 타협주의자에 대한 시각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하나'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게 아닌 민족의 동등한 대우를 위한 목적이라서 정상참작은 해줄만 함'의 두 가지인데 대체로 전자의 시각이 강하다. 사실 그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구 일본군에 지원입대하는 조선인, 특히 장교로 지원하는 인원 중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강제로 끌려온 병 출신들보다도 민족의식이나 사명감을 더 갖춘 케이스가 생긴다. 대표적인 예가 이종찬이나 채병덕, 김정렬. "우리가 열심히 해서 조선인들의 위치를 끌어올려 독립에 기여하고 언젠가 조선이 독립되면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은 실제 그랬듯이 스스로 독립할 수는 없고 일본이 시켜주어야 하는 거니까 지금은 일본과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의식이 있기에 소극적 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일본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조선인 출신 일본군만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병사들에서도 보이는 현상이다.

      그래서 홍사익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군에 몸담아 아예 한국이란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났던 젊은 장교들과 세대 차이가 있으나 인식 자체는 비슷하게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3.1. 동기들과의 약속[편집]

      홍사익과 같은 육군무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혼란에 빠졌다. 비록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대한제국군이 대부분 사라지기는 했으나, 군 조직의 근간은 남아있었고 언젠가 재건되리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사라짐으로써 그 희망 자체가 무너졌고, 분격한 생도 상당수는 전원 일본 육사를 자퇴하고 귀국하자고 나서기도 했다.

      이때 유학생들은 토론 끝에 "기왕 들어온 육사이니 중위가 될 때까지만 복무하고, 바로 예편하자"고 약속한다. 동기생들 중 조철호 중위[24]는 이 약속을 지켜 1918년에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곧바로 예편, 조선 오산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다가 3.1 운동에 참가하도록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구속되기도 했다. 지청천 김경천은 소위 때 일본군 교범을 가지고 탈영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홍사익은 군복무를 계속한다.
      3.1 운동으로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동포들의 움직임을 보고, 아직 일본군에 남아 있던 김광서(1년 선배), 지청천(동기), 이종혁(1년 후배) 등이 잇달아 탈영하여 독립군에 합류한다. 하지만 홍사익은 여전히 일본군에 남아 있었는데, 훗날 홍사익 본인이 육사 후배인 이형석[25]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걸려서 군인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걸렸는지, 대신 조선인 출신 장교들의 친목모임을 통해 일본군을 탈영한 동료 조선인 장교들이 두고 간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홍사익은 수 년간 이 모임에서 간사(총무)를 맡았다.

      일본군 내 조선인의 입지가 약화된다고 해서 탈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모양인데, 이는 후술할 태평양전쟁 시기에 한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경에 일본군에 속한 조선인은 황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말기에 유학한 사관생도 출신 장교 30여 명에 지나지 않아 입지가 약화되고 자시고 할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군에서는 조국을 위해 행동하는 조선인 장교들을 일종의 지사로 보는 분위기가 있어서 몇몇 장교들이 탈영했다고 나머지 잔류파인 조선인 장교들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지청천이 탈영했을 때 동기인 홍사익이나 이응준은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고 1기수 아래 김석원은 예편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잡혀 형을 살고, 심지어 늑막염으로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자신의 동기 이종혁을 자주 찾아보고 돈까지 구해주며 적극적으로 건네주기까지 했는데도 연대장이 "그러다 앞길 막힐 수도 있다"고 가볍게 타이르는 게 전부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으로 일본군에 편입되었다가 일본군을 그만두고 독립투쟁에 나선 이갑이 아직 일본군에 있던 사위 이응준에게 권총을 구해달라고 연락해 이응준이 자신의 권총을 보내주었다가 들켰는데, 이때는 상부에서 단순 도난으로 무마시켜 주었다. 일본군에서 권총은 군에서 지급하는 게 아니라 필요하면 사비로 사서 쓰는 개인 재산이었기 때문에 들킬 경우 도난으로 무마시키기에 용이했다. 고급 장교들이야 권총 사는 게 큰 무리가 아니었지만 월급이 박봉인 하급 장교들은 권총 값도 부담이라 싼 모델은 결함투성이인 줄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들고 다녀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막 임관한 소위들의 권총을 보면 집안 사정을 대강 알 수 있었다고...

      이에 대해 큰 뜻을 품은 지사들을 보면 일단 한 수 접고 존중해 주던 메이지 시대의 풍습이 당시 일본 사회에 아직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상급자들이 조선인 장교들의 이런 소소한 군기 문란 행위를 알고도 덮어주지 않았겠냐는 시각도 있다. 메이지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앙 정계에 안착하지 못한 유신지사들은[26] 몰락한 구 막부 사족들과 함께 민간으로 파고들어가 좌익과 극우를 막론하고 근대 일본 비주류 정치세력의 시조가 되었는데, 비록 사회주의, 파시즘 같은 근대 사상의 대두와 함께 방향은 갈라졌지만 메이지 시절만 하더라도 극우 사상가가 정치범으로 쫒기는 좌익 운동가의 가족을 돌보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념을 초월하는 지사 문화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고, 지사 문화라는 것도 근본은 동아시아권 모두가 공유하는 성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보니 일본 군인들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았을 때도 어느 정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한국에도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나 제1공화국 시대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우익으로 분류되는 장택상이 좌파정치인 조봉암의 유가족을 돌봐주었던 일처럼 당대 유명인들 사이에는 이념을 넘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 대한 경애심, 존중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방으로 발령받을 당시에 경성부에 들렀을 때 아들 홍국선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몇 차례나 옛 친구인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연락이 있었고, 도쿄에 들렀을 때 매일신보 동경지사에 있던 김을한 기자도 그에게 광복군에 가담하기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이탈로 인한 후폭풍이 일본군에 남아있는 조선인(군인 및 노무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홍사익과 비슷하게 일본군 고관이었던 영친왕 역시, 자신이 광복군에 합류하면 조선에 있는 전 동포가 그 보복의 대상이 되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 사령부에서 병참감으로 근무하였다. 제해권의 상실로 본국으로부터 물자가 조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홍사익은 나름 자력갱생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편 병참감으로서 홍사익은 포로들에 대한 최고관리책임자 자격이기도 했는데 이는 결국 필리핀 지역에서 자행된 포로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의 책임을 지고 홍사익이 사형 판결을 받는 원인이 된다.

      4. 여담[편집]

      4.1. 창씨개명 거부[편집]

      홍사익은 현역 일본 육군 중장임에도 창씨개명을 안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게다가 휘하 장병들 중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패전 시까지 그가 조선어를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으며, 패전 후에야 비로소 몇 마디 조선말을 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상용(常用)했으나 일본어 억양은 조선식이어서 듣기만 하면 저 사람이 조선인이구나 하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홍 중장 본인도 "난 원래 조선인이니까"라면서 발음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유카타를 입었으며 아들 홍국선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도 한자와 일본어로 썼고, 자신의 이름을 "홍사익"이 아니라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 시요꾸(こう しよく)"로 칭했다. 당시의 담배인 "호우요꾸"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인지 부하들 중에는 "고 시호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만주에 있을 때는 만주군에 속한 조선인 장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근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부사관들이 설날 인사를 오면 한복을 입고 맞이했다고 한다.

      사실 홍사익의 앞선 행적들을 보면 이해하기 크게 곤란한 부분도 아니다. 홍사익은 골수친일파에 전범으로 처형당한 사람이지만, 앞선 다른 문단의 서술에서처럼 조선인으로서의 복잡한 정체성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료나 군인 등의 공무원은 소속 정부에 대한 충성이 곧 직업윤리와도 직결되므로, 일제에 충성하기 싫으면 그냥 때려치고 나오든가, 그렇지 못하고 그 업을 지속하고 싶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규복이나 손영목처럼 "관료로서 종사하되 조선인을 계몽하고 차별에 맞선다"와 같은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영국-아일랜드의 사례를 끌어다오기도 했는데, 홍사익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이는 아들인 홍국선에게 했던 말에서도 드러나는데, (오늘날 우리식으로 쉽게 해석하자면) "우리가 정복당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독립이 쉽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인종차별에 맞서는 느낌 정도였던 것 같다.

      김석원 등이 보여주듯, 일본군에 복무하던 조선인들의 심경이 어느 정도 복잡했던 것도 사실이며, 특히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좋은 군인이었는가"와 "좋은 조선인이었는가"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는 2차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식민제국의 군대에 복무하던 피식민지 군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양차대전에서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을 도운 인도군만 해도 인도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친영 부역자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건 한국인들의 생각이고, 인도 내에서 양차대전의 인도군을 부역자로 평가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당장 영국의 전몰자 추도일에 인도 대표들이 다른 영연방 대표들과 함께 참석해서 양차대전에서 싸운 인도군 병사들을 기리는 모습을 매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선전했던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은 위선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독립 역시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이뤄졌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독립이 인도의 사례처럼 2차대전에서 일제의 승전 혹은 소모전에 이은 휴전 이후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이뤄졌다면, 이들도 달리 평가받았을 수 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본토 취급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2차대전 이후로도 프랑스와 수십만 사상자를 내며 20년 가까이 싸웠는데, 이때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프랑스군 출신들이었다. 본진 털린 자유프랑스는 알제를 임시 수도로 삼고 알제인을 40만명 가까이 징집했으면서, 막상 전쟁이 끝나자 입 싹 닦고 승전기념일날 독립 시위대를 학살한다. 또 베트남이 독립을 요구하자 진압을 위해 10만 이상을 징집해 가서 수만의 사상자를 낸다.

      프랑스의 약속을 믿고 열심히 싸운 참전용사들은 배신당했다. 핏값에 대한 보상은커녕 탄압과 학살로 일관하는 프랑스에 맞서 일어났고, 알제리인 수십만이 죽었지만 프랑스군도 수만명을 죽여 1960년대 독립을 쟁취한다. 알제리 초대 대통령도 프랑스군 부사관 출신에 2차대전때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던 사람이다.

      일제가 생산력으로 상대가 안 되는 미국을 친 시점에서 승전은커녕 "소모전 끝의 휴전"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약에 우연에 우연이 겹쳐 한반도 해방 없이 종전이 일어났다면, 알제리와 비슷한 전개가 펼쳐졌을 것이다. 참정권을 주지 않으려고 조선인[27]은 징병조차 안 하던 일제가 막판엔 참정권 약속과 함께 조선인들을 징집했는데, 이 약속이 지켜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제는 입 싹 닦고 이전처럼 조선인을 탄압했을 것이며, 홍사익이 그럴지 아닐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전 경험이 있는 일본군 복무자들이 무장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를 알고 있는 미래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상해보일 수 있지만, 체제에는 순응하면서도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당대 기준으로는 멍청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홍사익은 분명 일제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체성이고 뭐고 다 내던진 일반적인 친일파와는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홍사익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일본 당국이 "창씨는 강요가 아니다"라고 홍보하기 위해 내버려 두었다는 시각이 강하다.

      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편집]

      장군으로서 유능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챙기기도 잘 했으므로 일본군 장교 시절에는 부하와 상관을 막론하고 평이 대부분 좋은 편이었다. 여기에다 출신부터가 일반 사병들에게는 대단한 존재였는데, 창씨도 하지 않은 조선인이 초급장교도 아닌 장군이 된다는 것이 당시 일본의 하급장교나 사병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장교 순혈주의가 유독 심한 군대였다. 병이나 부사관이 아무리 전공을 세워도 전시 임관으로 소위가 되는 것조차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본군의 전투기 에이스들조차 대부분이 엄청난 무공을 세우고도 고급 장교는커녕 대부분이 초급 장교도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니 일본인으로 대좌까지 진급하여 연대장만 하고 나와도 사회에서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 큰 어른 대접 받는 군국주의 시기였다. 그런데 2등 국민 취급받던 조선인이 일본 육군 중장이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당시로선 상상도 어려운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 인한 아래와 같은 일화도 존재한다.
      하급자 : 조선인 장군이 새로 왔답니다.
      상급자 :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선인이 장군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하급자 : 아닙니다. 분명히 조선인이랍니다. 이름이 '고 시요쿠'라고 하던데요.
      상급자 : 흠, 그렇다면 아마도 이왕가의 일족인 황족이겠지. 황실의 외가 쪽 사람일 거야.
      하급자 : 아닙니다. 양주라던가, 조선의 시골 출신 평민이랍니다.
      상급자 : 허,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로군. 아니 정말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어.[28]

      초급장교 시절 비슷한 계급을 가진 이들에게는 질시를 받기도 했던 듯하다.
      만주에 있던 홍사익은 새로 필리핀으로 발령을 받게 되자,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잠깐 시간을 내어 경기도 경성부 돈암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 들린 적이 있었다. 때마침 자신의 집에는 학병으로 끌려갔던 친척[29] 심모 씨[30]가 탈영하고 찾아와, 홍사익의 장남 홍국선(洪國善, 1919.8.6~1984.9.25)의 비호 아래 숨어지내고 있었다.

      심씨는 경성에 별다른 지인이 없는 자였고, 심씨가 훈련소에서 부친 편지의 수신자가 전부 홍국선으로 되어 있으니 일본군 당국에서는 "홍국선이란 자가 탈영병을 숨겨주고 있다"라는 식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홍국선은 자기 집에 숨겨주면 들킬 게 뻔하다고 생각하여 이웃집에 부탁해 심씨를 그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집에 막 도착한 홍사익과 홍국선이 술 한 잔 기울이고 있을 때 한 육군 헌병 소위가 찾아와 탈영병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웠다. 밖이 소란스럽자 홍사익이 "무슨 일이냐"며 현관으로 나왔고, 홍사익의 군복에 달린 계급장을 본 소위는 기겁하며 경례를 붙인 후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장남 홍국선이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남긴 증언이다.

      4.4. 가족의 뒷이야기[편집]

      홍사익과 결혼한 첫 번째 아내 한양 조씨 조숙원(1887.4.7~1942.9.11)[31]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중풍을 앓다가 1942년에 사망했다. 결혼 당시 나이가 홍사익은 14세, 조숙원은 16세로 전형적인 조혼이다.

      본처와의 사이에 낳은 장남 홍국선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근무했는데, 이승만의 직접 명령으로 사직해야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별다른 압박이 없었는지, 1962년 8월 1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후 군대에 들어가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고, 기사가 써진 시점에는 한국광업공사 이사로 재직중이었다고 한다. 1984년에 경기도 안성에서 사망했다.

      본처가 사망한 이후 재혼한 두 번째 아내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청영(1908.11.18~1978.5.16)[32]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33] 출신으로 일본에서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압박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일본 재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다. 참고로 이들의 주선으로 당시 총리대신로 재임했던 사토 에이사쿠과 만날 수 있었는데, 사토 에이사쿠는 과거 철도성 관료시절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홍사익과 알고 지냈던 인연이 있어 이청영을 환대했다. 이때 자신의 사재를 털어 당시 돈으로 100만엔을 이청영에게 지원해 주었다. 이후 이청영은 일본에서 6년을 살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아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1978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청영과의 사이에 낳은 차남 홍현선(洪顯善, 1944.3.9~)[34]은 1962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고 하며, 나중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어머니와 같이 미국에서 살았다.

      일본어 및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이청영, 홍국선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만 이름은 적지 않고 기술하고 조숙원, 홍달선에 대한 부분은 적지 않으면서 홍사익의 아내와 아들이 "압박 때문에 전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자료부족 및 혼동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4.5. 기타[편집]

      홍사익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전면에는 남양홍공사익 배한양조씨지묘(南陽洪公思翊 配漢陽趙氏之墓), 후면에는 이력이 적혀 있다.# # 비석은 세워진 지 20년 가량 되었는데, 바로 건너편에 있는 남파 홍우원의 묘소를 후손들이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같은 남양 홍씨 출신인 홍사익의 묘도 보수한 뒤 비석을 세운 것이다. 그 전에는 묘소가 비봉산 등산로 바로 옆에 있음에도 누군가에 의해 묘 일부가 파헤쳐져 있었을 정도로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있었다. 당시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대체 이 묘지에 묻힌 사람은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후손들이 저리 신경을 안쓸까?' 같은 얘기도 많이 할 정도였다. 2021년 남파 홍우원의 묘를 후손들이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홍사익의 묘는 수풀이 우거진 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다.

      본 항목에서도 인용된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홍사익 중장의 처형>은 저자가 12년 동안 홍사익의 재판기록과 친지의 인터뷰를 추적하여 펴낸 책이다. 홍사익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홍사익이 사형을 선고받은 원인인 전범 혐의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태평양 전쟁> 5권 말기에서 조선 출신 홍(洪) 장군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목받지 않는 편이었다. 주로 활동했던 시기부터 인기가 별로 없는 일제강점기 후기에서 말기이며, 2차대전 배경에서도 이시와라 간지 츠지 마사노부 같은 인물들에 비하면 캐릭터성이 워낙 진중해 라이트한 전개를 추구하게 된 2010년대 이후 대체역사물에서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체역사물의 범위가 2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고, 홍사익의 삶이 조명되면서 대체역사물에서 군인 조연으로 자주 등장한다. 몇안되는 조선인 장성 출신이라는점과 딱히 이념에 충성하기보다는 군인이니까 충성한다는점, 정치적 야심이 거의 없기에 어느 세력이든 가용가능한 유능한 군인으로 자주 등장한다.

      카이저리덕스에서는 한국이 친일파들에 의해서 독립할 경우 대한국민공화국을 선포, 공화국 지도자가 된다. 물론 민주주의 따위 없고, 홍사익을 필두로 일본군 장교 출신들로 구성된 군사정부가 다스린다. 일본 아래에서 계속 숙이는것도 가능하지만 일본을 배신하고 역으로 일본을 공격할수도 있다.

      라스트 엠파이어에서는 대한제국의 무난한 장군중 하나로 등장한다.

      Hearts of Korea에서는 조선이 망하고 공화국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아비규환 상태이던 서울에서 리볼버와 나폴레옹 위인전만 가진채로 발견되었다고한다. 이후 지청천과 준장진급을 두고 경쟁했지만, 일본육사시절에 일본인 친구를 너무 많이 사겼다는 이유로 밀려서 게임 시작시점에는 45세 나이로 준장이다. 그래도 스펙자체는 한국장군중에서 꽤나 좋은편이다.#

      대체역사 웹소설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1933년 기준 일본 육군 소좌로 나온다. 쿠데타군을 가로막고 레이와 덴노를 수호했으며, 쿠데타 진압 후 덴노의 최측근으로서 근위사단장이 되어 군내 사조직들을 단속한다. 나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심리 묘사는 부재하며, 그의 충성심을 신뢰하는 덴노조차 왜 충성하는지는, 조선 출신이어서 성리학적 이유로 군주에 충성하는 것인지 일본국의 사무라이로서인지 그저 출세를 원했던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야전군인으로 등장하며 세계관 내에 한국군의 시각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인물. 참전용사 구호부터, 군사연구소 연구원, 기계화부대 지휘관, 몽골전선 장군, 중국전선 사령관등 다양한 요직을 거친 유능한 인물로 등장. 학살 같은 것을 꺼리는 인간적인 면모도 있지만 중국 내전에서 중국인들이 서로 학살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거나 몽골의 데므치그돈로브에게 호통을 치는 등 전형적인 제국주의 장군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주인공 아들인 태시제의 친구이자 촉망받는 참모형 군인으로 등장했지만, 이후 군사 쿠데타 수괴가 된다. 쿠데타 인사중에는 그나마 온건해보였지만, 오히려 군인이라는 이유로 움직이는 인물이라 오히려 시키면 시키는 대로하는 가장많은 패악질을 부렸기에 쿠데타 진압후 종신노역형에 처한다.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731부대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도움을 주며 이우의 부하로 나온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엑스트라로서 지나가듯이 서술되었다.

      반면 일본 가공전기에서는 간혹 등장하는데, 주로 일본 제국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개방적이었지만 어리석은 조선인들이 반항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용도로 등장한다. 물론 제국주의 국가가 프로파간다로 식민지 출신 장성하나 배출하는건 흔한 일이라는 사실은 은폐한다.

      6. 같이보기[편집]

      [1] 아래의 창씨개명 거부 문단 참고[2] 참의공파(參議公派) 26세 사(思) 수(秀) 항렬.[3] 1887.4.7~1942.9.11. 한양 조씨 조종수(趙鍾守)의 딸이다.[4] 1908.11.18~1978.5.16. 영천 이씨(永川 李氏)로 이지송(李之松)의 딸이며, 초명은 이보비(李寶妣)이다.[5] 洪思容. 1871.9.10~1940.11.3.[6] 洪國善. 1919.8.6~1984.9.25.[7] 洪顯善. 초명은 홍달선(洪達善). 1944년 3월 9일생.[8] 조선인으로 육군대학교를 입학한 사람은 4명뿐인데 영친왕 이건(의친왕의 서장자), 이우(의친왕의 차남) 등 홍사익을 제외한 3명은 모두 왕공족(조선왕족)이었다. 김정렬은 1944년에 육대에 응시하였으나 전쟁 말기라 워낙 혼란스러워서 합격 발표고 뭐고 없이 그냥 흐지부지 되었다고 회고록에 썼고, 유재흥도 1945년 5월 육대에 응시하고 8월에 있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9] 류원후(柳遠厚)의 딸이다.[10] 예과 3년, 본과 2년 도합 5년제로 구성된 심상중학교 상당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육군유년학교, 그 중에서도 지방유년학교가 아니라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에서 예과부터 밟아온 성골 출신이 가장 핵심으로 대접받았다.[11] 조선인 생도들의 복장 및 교육 과정은 일본인 생도들과 같았으며, 일본인 생도들이 붉은색 표장을 달고 있는데 반해 분홍색 표장을 달고 있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12] 심상중학교 출신은 이등병으로 시작해서 육군유년학교 출신들이 들어오는 6월에 맞춰 상등병으로 진급하고, 유년학교 출신은 상등병으로 시작하는데, 이들은 2개월 후인 8월에 오장(하사)으로 진급, 4개월 후인 12월에 군조(상사)로 진급하고, 육군사관학교 과정을 밟은 후 견습사관으로 자대에 배치된다.[13] 중일전쟁으로 일본 국내에 주둔해있던 상설사단들이 대거 중국으로 파병되고 나서, 일본육군은 기존 사단의 소수 잔류 병력을 근간으로 보충대에 재소집된 예비역과 신규 징병 자원을 충원하여 유수사단을 편성하였다.[14] 베이징에서 우한을 잇는 철도[15] 이전 판 서술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이끌던 윤세주가 1942년 6월 태항산 전투에서 홍사익이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전사하였다고 되어있었으나, 전투가 발생하기도 전인 1942년 4월에 이미 홍사익은 만주의 육군공주령학교 부교장으로 전임해있던 상태로, 잘못된 서술이다.[16] 육군사관학교 24기, 육군대학교 32기 출신으로 조선군에서 보병제79연대장(1937.8~1939.3), 제37보병여단장(1939.3~1941.3)을 역임하고 관동군 제5독립수비대장(1941.7~1942.8)을 거쳐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하였다.[17] 대한민국 육군에서도 과거에는 육사 졸업성적이 가장 성적이 생도를 서울대학교 위탁교육 등을 거쳐 교수요원으로 육성하고, 야전부대 지휘관은 대부분의 평범한 장교들을 보임했었고, 이는 성적우수자 출신 교수요원 위조로 구성된 청죽회와 야전부대 출신 하나회라는 대조적 집단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18] 참고로 홍사익이 대대장을 역임할 당시 연대장으로 모셨던 나가타 테츠잔이 이 교육총감부 라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홍사익이 해당 계통으로 진출한 것도 그의 영향이라는 추측이 있다.[19]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쓴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홍사익 중장은 전쟁사의 전문가로서 전술 교관이었으므로, 1차 대전 후의 여러 병법서를 연구하는 것이 본연의 직무였다."고 썼다.[20] 육대 32기 2명, 33기 5명, 34기 13명, 35기 12명(홍사익 포함), 36기 9명, 37기 11명, 38기 13명, 39기 2명[21] 육사 25기, 육대 35기로 홍사익의 육군사관학교 1년 선배이자 육군대학교 동기생이다.[22] 만주군 최선임자는 원용덕 중교이고, 중국군에선 조개옥 중교가 선택되어 이들 셋이 합작으로 국군을 만든다. 좌익과 상당수 광복군계는 참여를 거부하였는데, 초기에는 송호성이 광복군계 최선임자로 참여하였으나 이후 얼마 안가 힘을 잃었다.[23] 일본제국의 징병검사에서 받는 최고등급으로 현대 한국으로 치면 1등급이다. 전시체제 특성상 선망받았다. 한국에서도 1983년까지 갑을병정 등급으로 병역판정검사를 했다.[24] 한국스카우트연맹의 기원인 조선소년군의 아버지다.[25] 육사 44기로, 홍사익보다 육사 16년 후배이다. 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인 이우와 함께 졸업했다.[26] 토막 전열에 합류한 타이밍도 어정쩡했고 사쓰마, 조슈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이타가키 다이스케 같은 소수를 제외하곤 혁명의 과실도 별로 누리지 못한 도사 번 출신 지사들이 대표적인 예이다.[27] 정확히는 조선 땅[28] 출처 :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홍사익 장군>[29] 홍국선의 친구라고도 한다.[30] 1943년부터 시작된 징병령으로 징집된 사람이었다는 말도 있다.[31] 조종수(趙鍾守)의 딸이다.[32] 초명 이보비(李寶妣). 이지송(李之松)의 딸이다.[33]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의 전신이다.[34] 위 경향신문 기사에는 홍달선(洪達善)으로 나와 있지만 서울대학교 졸업명부(총동창회 발간)에는 홍달선은 없고 홍현선이 경제학과에 1962년 입학하여 1966년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문기사에서는 2남 홍현선을 3남 홍달선으로 착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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