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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생명 태실 星州)(1)세종, 성주를 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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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생명 胎室]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스토리(1) 세종, 성주를 택하다

  • 이창남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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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1-02   |  발행일 2012-11-02 제11면   |  수정 2012-12-27
 
꽃잎같은 산줄기가 혈을 싸안은 길지 … “아기씨는 별처럼 빛나시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 전경. 세종의 왕자 태 17기와 손자 단종의 태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한 곳에 군집을 이루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시리즈를 시작하며

성주는 ‘생명문화의 성지’로 불린다. 생명존중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태실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성주의 대표적인 태실은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이다. 세종의 왕자 태 17기와 손자 단종의 태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한 곳에 군집을 이루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로 문화재적 가치도 상당히 높다. 또 태종의 태실과 단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 법림산으로 이전해 조성한 태실 등 두 곳의 태실이 더 있어 생명문화의 성지로 불리고 있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스토리텔링 시리즈 ‘천년의 생명 태실-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스토리’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세종대왕자태실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드라마틱한 픽션을 가미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또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이끌어 갈 예정이다.

이번 시리즈는 생명존중의 공간인 태실의 보편적 의미를 되새기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원고 집필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의 초빙연구원인 조정일 작가가 맡았다. 시리즈 첫회는 세종이 어렵게 얻은 자신의 손자 단종의 태를 천하의 명당 성주 선석산 태실에 봉안하는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성스러운 시기가 제때에 응하여 큰 뜻을 펼칠 운수입니다. 종묘와 사직에 복이 더하였고, 기쁨이 만백성에 넘치고 있습니다. 자손이 대통대업(大統大業)을 계승함은 그 광채를 아름답게 나타내는 일입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마침 창성한 때를 만났으니 하루 속히 원손아기씨의 태(胎)를 길한 땅에 묻어 대통을 반석같이 굳힐 것을 원합니다.”

영의정 황희(黃喜)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세종은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1441년 7월. 왕세자 이향(李珦, 문종)이 어렵게 아들을 얻었으니, 훗날의 단종이다. 왕세자의 나이 서른이 되어가도록 후사(後嗣)가 없자 왕은 근심이 많았다. 그러한 가운데 손자를 보았을 때 그 기쁨은 왕위를 당장 내놓으라 해도 응할 만했다. 그 길로 핏덩이 손자 얼굴을 보고 돌아왔지만 난데없이 불행한 소식이 뒤따랐다. 아기에게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하고, 왕세자빈 권씨가 죽은 것이다. 아끼던 며느리가 세상을 떠나니 왕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슬퍼했다.

기다려도 아무 말이 없자 황희가 다시 재촉했다.

“옛 법에 이르기를, 사람이 생겨나는 것은 태(胎)로 인한 것이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와 관계있다 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들이 우러러보는데, 다만 태를 간수함에는 묻는 시기를 지나치지 않아야만 복을 얻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전하, 속히 길지(吉地)를 가려 태를 묻으십시오. 그리하여 아기씨의 수(壽)와 복(福)을 기르게 하소서.”

황희의 재촉에 세종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승낙의 표시가 아니었다. 왕세자빈의 죽음 때문에 세종의 몸은 흐느끼고 있었다. 황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서야 지중추원사 권전(權專)이 거들고 나섰다. 그는 죽은 왕세자빈의 친정아버지였다.

“대체로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사랑을 받기란 어려운 일인데, 왕세자빈은 전하의 사랑을 모자람 없이 받았습니다. 이제 빈을 잃으니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손의 탄생이 족히 그 마음을 위로하여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命)이 길고 짧은 것은 수(數)가 있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슬픔을 거두고 신들의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권전의 말에 비로소 왕은 고개를 들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격려가 며느리를 잃은 왕의 슬픔에 약이 된 것일까. 같은 슬픔에 빠진 눈빛이 허공에서 잠시 통했다. 혼자 있을 때 눈물을 쏟아냈던 두 남자의 마른 눈. 얼마 만에 열리는 입인지, 마침내 왕이 말했다.

“성주목(星州牧)의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와 왕자들의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내오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하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왕이 용상에서 무너져가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둘러앉은 신하들을 찬찬히 살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경들은 지체 없이 시행하시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정결한 곳을 찾아 원손의 태를 묻을 것이오. 태실이 정해지면, 괴상하게 생긴 나무나 돌, 옛무덤과 절, 마땅히 철거해야 할 것은 그곳 관리로 하여금 도면을 세밀하게 작성하여 올려 보내게 하고, 대신(大臣)을 보내서 살펴보라 할 것이오.”

“전하, 사악하고 더러운 기운을 씻어내어 나라의 큰 경사에 액이 끼지 않도록 방비해야겠습니다.”

황희의 말을 듣고 왕은 대사면(大赦免)을 내렸다.

“원손이 태어난 칠월 스무사흘 새벽 이전에 대역을 꾸민 것,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일부러 죽였거나 때리고 욕한 것, 처첩이 남편을, 노비가 상전을 고의로 죽인 것, 독약이나 저주로 살인한 것, 강도를 범한 것 외에는 다 용서하겠다. 이미 많은 복을 받았으니 진실로 원손을 얻은 일에 합당하게 할 것이라!”

그때 내관이 지도를 가져와 왕 앞에 바쳤다. 세종은 두루마리를 차분히 살펴 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창을 열어 바깥 세상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어지러운 잠자리를 떨쳐 일어나 동 터오는 새벽이라도 보려는가. 왕의 낯빛에는 깊은 밤을 지나 환해지는 기색이 있었다.

“원손이 태어난 이후로 내가 태를 묻을 길지를 찾기 위해 틈틈이 팔도의 지도를 살펴보았소. 원손은 어미를 잃었지만 어미의 몸에서 생명을 받아들인 태가 남아 있소. 이제 정결한 땅을 골라 태를 묻어 우주의 더 큰 생명의 기운이 왕성히 이어지게 할 것이오.”

왕의 마음에는 이미 짐작한 장소가 있는 듯했다. 신하들은 궁금했다. 권전이 물었다.

“아기씨의 태를 모실 곳을 말씀해주십시오.”

“경상도(慶尙道) 성주(星州) 선석산(禪石山)으로 갈 것이오.”

“그곳은 이미 여러 왕자들의 태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왕자들의 태가 있는 곳이니, 그 기운이 나뉠까 염려됩니다.”

신하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자 왕은 웃음을 띠었다.

“우주의 기운은 무한하오. 또한 원손은 나의 핏줄이니 한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요. 숙부들의 태와 함께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소. 일찍이 태종께서도 함흥에 있던 태를 성주 조곡산(祖谷山)자락에 옮긴 일을 기억할 것이오. 경들이 성주의 풍수를 알고 선석산의 기세를 읽어낸다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오.”

왕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곳의 혈(穴)과 통하는 용맥(龍脈)은 백두대간 삼도봉에서 기세를 펼치고 나아가는데, 봉황이 양쪽 날개를 펼치고 나는 듯하며, 화살이 거침없이 뚫고 나가는 듯하오. 그 기운은 수도지맥과 금오지맥을 거쳐 염표봉산에서 갈라져, 우측으로 뻗은 맥은 태종(太宗大王)의 태봉(胎封)이 있는 조곡산을 향하고, 왼쪽으로 뻗은 맥은 백마산을 거쳐 영암산에 이르오. 맥은 선석산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혈을 호위하는 백호를 만들고, 왼쪽으로 뻗은 맥이 선석산 정상을 거쳐 청룡을 만들고 있소. 그리고 본 용맥은 현무로부터 뱃속의 아기 탯줄처럼 가늘고 길게 움직여 혈을 맺으니, 곧 승천하는 비룡(飛龍)의 기세요. 이곳이 바로 천하의 명당이자 원손의 태실이오.”

왕이 태실산도를 들어 신하들에게 보였다. 지도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선석산이 품고 있는 기운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꽃잎 같은 산줄기가 차곡차곡 혈을 싸안아, 마치 한 송이 연꽃이 그려진 연화도(蓮花圖)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외청룡과 외백호가 혈을 감싸니 바람을 막아 생기가 흩어지지 않게 했다. 외백호는 주작을 만들어 냈고, 주작은 명당수를 모아서 혈 아래를 둘렀다. 현무(玄武),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이 완전하고 단단했으며, 혈이 있는 봉우리가 거북이등처럼 단아하고 반듯했다. 백호수와 청룡수 두 물줄기가 합하여 명당에 모였고 명당수는 백천으로 흐르다가 이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에 들었다.

“전하, 과연 생기와 정기가 활달한 땅이며 장수를 누리고 총명할 길지입니다.”

황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청, 전라, 경상 하삼도(下三道)에서뿐만 아니라 조선팔도에 이러한 길지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뜻이 이치에 틀림이 없음을 신들이 알겠습니다.”

목이 메는 듯 권전의 마지막 말은 축축하게 잠겼다. 왕과 신하들은 창으로 들어온 한 장면에 매혹된 사람들처럼 한참 동안 태실산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궐을 나온 권전의 발걸음은 시원시원했다. 왕의 안색이 모처럼 편안해보였으며, 그런 왕을 보고 돌아가니 안심이 되었다. 슬픔과 기쁨이 반씩 섞여 흐르던 공기에 새바람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앞에서 별똥별이 몇 개나 휘휘 떨어졌다.

“아기씨는 별처럼 빛나시오. 달처럼 빛나시오. 캄캄한 하늘에 해처럼 빛나시오.”

권전은 별자리를 짚어가며 집으로 향했다. 뭇별이 저들의 희미한 빛을 모아 흩뿌리는 여름밤. 궐 안팎이 오랜만에 잠잠하고 잠잠하였다.

이로부터 다섯 달 지난 윤달 11월26일, 원손의 태를 묻으니 경상도 성주 선석산이었다. <다음회에 계속>


글=조정일(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기획 : 성주군


◆ Story Tip

네모난 기단석은 땅, 연꽃을 새긴 둥근 뚜껑은 하늘, 그 사이 중동석은 인간 상징

태실은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묻어두었던 곳을 말한다. 조선초기 왕실에서는 자손들의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해 생명존중의 사상을 실천하고 왕권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 태봉(해발 258.2m)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국가지정 사적 444호로 지정된 세종대왕자태실은 1438∼42년(세종 20∼24)에 조성됐다. 당초 태실이 조성된 자리에는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지만,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했다고 전해진다. 왕자의 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으로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또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풍수전문가들은 “세종대왕자태실은 산 사람의 거주지를 뜻하는 양택(陽宅)의 기(氣)를 받는 곳”이라며 “네모난 기단석은 땅을, 연꽃을 새긴 둥근 뚜껑 모양의 돌은 하늘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중동석은 인간을 상징한다. 이는 곧 천(天)·지(地)·인(人)이 한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이창남기자 argus6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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