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다산의 아내 홍씨가 유배지 남편에게 보낸 시편
“집 옮겨 남쪽 가서 끼니 마련해 줬으면…”

해묵은 신문 기사를 읽다가 문득 만나 눈길을 멈추게 되는 자료가 있다. 91년 전인 1935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다산 서세(逝世)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지면으로 꾸며졌다. 현상윤 선생이 쓴 〈이조유학사 상의 정다산과 그 위치〉란 글의 중간과 위쪽에 맥락 없는 친필 사진 2장이 실려 있었다.
위쪽에는 《다산친필계자첩(茶山親筆戒子帖)》의 한 면을 수록했고, 그 아래 사진에는 ‘다산 부인 홍혜완(洪惠婉)씨가 다산 강진 적중(謫中)에 보낸 4언 시첩 일부’라는 설명과 함께 해당 시의 끝부분 여섯 구절이 실려 있었다. 본문 어디에도 이 글씨가 여기에 어떤 맥락으로 들어갔는지, 소장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산 부인 홍혜완이 쓴 시의 제목은 〈기강진적중(寄康津謫中)〉이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니 과연 시의 전문(全文)이 당시 다산 서세 100주년 기념행사를 주도하였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2년~?) 선생의 《위당 정인보 전집》(연세대 출판부·1983년) 제2책의 〈국학인물고(國學人物考)〉란 글 가운데 ‘다산의 자찬 지명(自撰誌銘)’ 속에 실려 있었다.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강진 귀양지에 부침[寄康津謫中]
歲次丙寅 올해는 병인년(1806)
時維納氷 때는 바로 12월
雪上寒氣 눈 위의 찬 기운에
愁心添增 수심만 더하누나
燈下怨女 등불 밑 한스런 여인
耿耿無寐 말똥말똥 잠 못 드네
君別七年 작별한 지 어언 7년
相逢茫昧 만날 기약 아득해라
吾生難待 기다리기 어려움은
弱草嚴霜 여린 풀에 매운 서리
秋去春來 가을 가고 봄이 옴을
雙眼瞻望 두 눈으로 바라봤지
何日何時 어느 날 어느 때에
親見玉貌 그 모습 친히 보리
已往好事 지난날 좋았던 일
魔障可笑 마장(魔障)이라 우습구나
墳墓不拜 분묘에 절 못 올림
終身至恨 평생에 한이 되리
移家南渡 집 옮겨 남쪽 가서
庶備炊爨 끼니 마련해 줬으면
歲暮病深 세모에 병 깊으니
奈此殘命 남은 목숨 어이할까
一段懷抱 한 자락 품은 회포
千里照映 천리에 비춰 보네.
홍씨 혜완(洪氏 惠婉)〉
시를 통해 볼 때, 홍부인은 1806년 12월에 이 시를 지어 남편 다산의 강진 유배지로 보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을 맞아 병을 앓으며 근심에 잠겨 있던 그녀는 어느덧 7년째로 접어드는 남편의 기약 없는 유배 생활에 지쳐 가는 자신의 심회를 솔직하게 묘사했다. 잠은 안 오고, 된서리가 여린 풀 위에 내린 듯 견디기 힘든 심사를 표현했다.
계절이 끊임없이 바뀌어도 님의 옥 같은 모습을 만나 볼 기약이 없다. 지난날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 보지만, 그것이 마장(魔障)이 되어 오늘의 이 시련을 겪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부친과 선대(先代)의 묘를 찾아 절하지 못하는 불효야말로 죽을 때까지 지극한 원한이 되리란 말이 안타깝다.
이렇게 유배가 무작정 길어질 줄 알았더라면 아예 그리로 내려가서 밥이나 해주며 지냈을 것을 하는 뒤늦은 후회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도 이제 병이 깊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니, 이 안타까운 심정을 천 리 먼 곳으로 시에 담아 보낼 뿐이다. 그러니 이 마음을 비추어 헤아려 달라고 했다.
다산 큰아들의 글씨

위당은 이 시를 소개한 뒤, 이 시가 “다산의 〈차운기처(次韻寄妻)〉 시와 다산이 자찬한 발문과 함께 장첩(粧帖)한 것이 지금까지 그 종가(宗家)에 전한다”고 썼다. 그러니까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은 이 시첩 중의 한 면이었다. 이에 이어 아내의 시에 차운한 다산의 시와, 장첩 당시 앞뒤 경위를 적은 다산의 친필 발문을 한데 묶은 시첩이 그때까지 두릉 다산 종택에 남아 있었다. 다산의 차운시는 이 시첩이 사라지면서 원문을 알 수 없게 되었고, 다산이 쓴 발문도 현재 따로 남아 있지 않다. 어딘가 분명히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신문 기사 속에 실린 글씨의 서체는 다산의 큰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년)의 젊은 시절 필적이다. 현재 남아 전하는 3종 《견월첩(見月帖)》 중 정학연이 쓴 제2 《견월첩》의 필체와 똑같다. 홍부인은 1805년 10월에 아버지를 뵈러 강진에 갔다가 이듬해 한식 즈음에 두릉으로 돌아온 큰아들에게 주막집 봉놋방에 얹혀 지내는 남편의 열악한 처소와 식사에 대해 듣고 줄곧 마음이 안 좋았고, 자신 또한 당시 깊은 병이 들어 운신하지 못하던 처지라 이래저래 안타까움이 컸다. 그래서 시 한 수를 지어 큰아들을 시켜 베껴 적게 해서는 편지와 함께 다산에게 내려보냈던 사정이다.
위당은 당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출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다산 후손 정규영(丁奎英)을 통해 집안에 전해 오던 묵적들을 열람할 수 있었다. 그 위쪽에 실린 희미한 사진 속 《다산친필계자첩》의 한 면은 확인해 보니 《하피첩(霞帔帖)》 제2첩의 셋째 장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피첩》 3책과 홍부인의 시가 담긴 시첩 1책은 모두 종가에 보존되어 있었다. 훗날 어떤 경로로 이 책이 종가에서 유출되었다. 그나마 위 시가 수록된 한 책은 종적이 묘연하다. 나머지 세 책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끌어온다
신문 기사 한 모서리에 뜻 없이 실린 글씨 한 장을 추적하다가 이 글까지 쓰게 되었다. 다산이 자신의 차운시를 문집에 수록하지 않은 것은 조금 남사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석방의 기약 없는 남편을 유배지에 보내 놓고 6년째 독수공방하던 아내가 남편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을 담아 쓴 시 한 수, 그리고 거기에 화답해 시를 쓰고 전후 사연까지 기록으로 남겼던 다산, 그 마음의 한 자락이 신문 기사 속 토막 사진 하나를 통해 문득 이렇게 오늘로 이어진다.
궁금하면 찾아본다. 납득이 안 가면 납득될 때까지 묻고 따진다. 그러는 사이에 자료가 자료를 불러내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끌어와서 어느새 하나의 장대한 서사로 발전한다. 이때 다산의 아내 홍씨가 보낸 시는, 몇 해 뒤 그녀가 결혼할 때 입었던 낡은 치마를 초당으로 보내와, 다산이 이를 서본(書本) 삼아 아내와 자식을 위한 시와 글을 써준 《하피첩》의 사연으로 다시 이야기가 이어진다.
2.제자의 청탁 편지를 받고 쓴 다산의 답장
“두 손에 모두 떡을 쥐려 들면 마침내 능히 입도 떼지 못하겠지요”

사진을 찍고 상경 후에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산이 해배(解配)로 상경한 뒤 귤동에 보낸 편지에 별지로 끼워 넣은 사연이었다. 내용이 조금 민망해서 본 편지에는 넣지 못하고, 쓰다 남은 조각 종이에 써서 끼워 넣은 메모였다. 내용은 이렇다.
〈내년 봄 과거(科擧)의 일로 그동안 공목(公牧·尹鍾心)이가 편지를 보냈고, 이번에 또 금계(琴季·尹鍾軫)가 구슬피 간청하는구려. 기숙(旗叔·尹鍾參) 또한 반드시 바람이 있을 게요. 설령 아는 사람 중에 시관(試官)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반드시 한 사람만 천거해야지 만에 하나 기억했다가 낙점할 가망이 있을 것이오. 이제 이들 형제가 마구 움직인다면, 실로 그 사이에 취사(取捨)함이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형께서 편지로 3~4인 중에 한 사람만 제비를 뽑아 알려 준다면 혹 유념할 수 있을 겝니다. 두 손에 모두 떡을 쥐려 들면 마침내 능히 입도 떼지 못하겠지요. 반드시 한 사람을 지목해서 답장해 주시구려. 이 편지는 공목이에게도 보여 주십시오.
明春科事, 向來公牧有書, 今又琴季哀愬, 旗叔亦必有望. 而設有知舊中以試官下去者, 必單薦一人然後, 乃有萬一記点之望, 今此兄弟發動, 實無以取捨於其間. 必有兄書於三四人中, 鬮取一人以示之, 然後或可留念. 若兩手執餠, 則畢竟不能發口矣. 必指一回示也. 此紙亦示公牧.〉
제자들의 과거 청탁
상경 후 귤동의 제자들은 우리 선생님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복귀하셨으니 틀림없이 자신들의 뒷배를 보아 주어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듯하다. 10년 넘게 초당에서 함께 지내며 스승의 그 많은 저술을 정리하여 완성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러니 그 정도는 바랄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을 법도 하다. 시관이 ‘내려간다’고 한 표현으로 보아 시험은 이듬해 봄에 열릴 호남 지역 향시(鄕試)였다.
편지 속에는 세 사람의 제자 이름이 나온다. 공목은 윤종심(1793~1853년), 금계는 윤종진(1803~1879년), 그리고 기숙은 윤종삼(1798~1878년)이다. 윤종삼과 윤종진은 다산초당 주인인 윤규로(尹奎魯·1769~1837년)의 3남, 4남으로 친형제간이었고, 윤종심은 윤규로 동생 윤규하(尹奎夏·1772~1853년)의 아들로 앞의 두 사람과 사촌간이었다. 이들은 강진 시절 다산 학단에서 다산의 학술 정리를 앞장서서 도왔을 뿐 아니라, 해배 이후에도 두릉까지 드나들며 스승의 여러 심부름과 뒷바라지에 애써 온 제자들이었다.
먼저 나이가 가장 많은 윤종심이 다산에게 선처를 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윤종진도 자기 처지를 말하며 자기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의 사촌인 윤종삼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다산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터였다.
다산은 입장이 아주 난처했다. 그래서 귤동 주인이자 두 형제의 아버지인 윤규로에게 편지를 보내 교통정리를 부탁한 것이다. 세 사람 모두 내게 이렇듯이 매달리니 당신이 셋 중 하나를 찍어 알려 준다면 혹 아는 사람이 시관으로 내려가게 될 경우 부탁을 한번 해보겠다는 취지였다. 사실 시관이 아는 사람이 아닐 경우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을 얘기였지만, 다산으로서는 애쓰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처지였다. 자신을 위해 헌신했고 지금도 강진과 두릉을 오가며 자신을 돕고 있던 이들에게 차마 매정한 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목 윤종심에게도 이 편지를 보여 주라는 당부에 다산의 난감한 형편이 드러난다. 다산의 평소 성정으로 이같은 청탁을 할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졸라 대니 우선은 입막음이라도 해볼까 하여 편지의 별지에 끼워 혹 있을지도 모를 훗날의 원망에 대비하려 했던 것이다.
다산의 이 편지는 좋은 결과를 낳았을까? 그렇지 못했다. 시관과의 연이 닿지 않아 청탁 자체를 못 했을 수 있고, 했더라도 이들의 글이 시원치 않아 도저히 합격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앞뒤로 진진한 사연을 담은 여러 편지들이 더 남아 있다.
윤종심과 다산
윤종심은 다산 학단에서 중요한 책자의 글씨를 도맡아 쓴 인물이기도 했다. 초명을 윤동(尹峒)으로도 썼다. 그는 필치가 다산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산은 《백운첩(白雲帖)》의 한 면에 자신의 시를 그에게 쓰게 했을 정도로 아꼈다. 그는 다산 해배 후에도 두릉에 올라와 스승을 도우며 몇 달씩 머물곤 했다. 윤종심이 두릉에서 고향 귤동 집에 빨리 가고 싶은데 선생님이 붙잡아서 못 간다며 투덜대는 편지도 남아 있다. 이후 스승에게 품었던 기대가 거듭 꺾이면서 다산과 제자 윤종심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한 번 더 쓰겠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노년에 이르기까지 윤종삼·종진 형제와 다산과 그의 아들들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강진에서 만든 햇차도 해마다 두릉으로 올라왔다. 문득 만난 메모 편지 한 장이 참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3.대흥사 천불전 부처 어깨에 적힌 ‘일본(日本)’이란 글자의 내력
“작년 겨울 석불이 동쪽으로 떠내려가”

어떤 자료들은 생각지 않은 순간에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벌써 오래전 얘기지만 하루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작업에 진력이 나서, 인터넷 검색창에 무심코 ‘정약용 친필’이라고 입력했다. 그랬더니 경기도 이천에 사는 한 주부가 쓴 글에 툭 가서 닿았다. 아이와 함께 근처 월전미술관에 들렀는데, 전시장도 예쁘고 거기서 정약용 선생의 친필도 보고 다른 여러 유명한 사람들의 그림도 볼 수 있어서 퍽 유익했다는 내용이었다. 가까이에 이런 유익한 공간이 있어서 자랑스럽다고도 했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1912~ 2005년) 선생을 기리는 월전미술관에 다산의 친필이 소장되어 있음을 그래서 알았다. 다짜고짜 미술관에 전화를 걸었다. 학예사 선생과 통화를 했다.
“저는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있는 정민이라고 합니다. 거기 미술관에 다산 선생의 친필 글씨가 있지요? 제가 가면 혹시 그 글씨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나요? 다산을 연구하고 있는데 편지 내용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뜻밖에도 그 학예사 선생이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내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너무 반갑다며, 사진 찍어 둔 것이 있으니 오실 것 없이 바로 보내 주겠다는 것이다. 불과 5분 뒤에 고해상도의 친필 사진 한 장이 내게 전송되어 왔다. 무심코 검색 화면에 ‘정약용 친필’을 입력하고 나서 20분도 안 된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본으로 떠내려간 대둔사 석불
편지는 다산의 편지 중에서도 필치가 특별히 빼어났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이 아주 대박이었다.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작년 겨울 석불(石佛)이 동쪽으로 떠내려가 눈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누군들 노인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바람을 받아 배가 와서 뜻하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누군들 노인을 위해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소동파의 〈대아라한찬(大阿羅漢贊)〉에 말하기를 “어느 것이 셋이고 어느 것이 일곱인지 아는 자가 없다”고 했는데, 이제 대둔사의 석불도 또한 이같은 염려가 있습니다. 훗날 뉘라서 어느 것이 먼저 온 300개의 부처이고, 어느 것이 동쪽으로 떠내려갔던 700개의 부처인 줄 알겠습니까? 반드시 부처의 등에다 모두 작은 전자(篆字)로 ‘일(日)’자를 써서 표시로 삼아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어 둔 뒤라야 서로 뒤섞이는 탄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뜻은 모름지기 의순(意恂·초의 선사)과 함께 의논하십시오. 편지를 받고서 기뻤는데, 게다가 온 사람에게서 안색이 전보다 좋아졌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다행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늙은이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입니다. 부쳐 주신 훌륭한 향은 《주역》을 공부할 때 사르기에 마침 맞습니다.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무인년(1818) 8월 11일 다수(茶叟) 드림.
昨冬聞石佛東漂, 淚眼厓返, 孰不爲老人憐之. 及聞便風送帆, 志事竟成, 又孰不爲老人喜之. 東坡〈大阿羅漢贊〉曰: “是三是七, 未有知者”, 今芚寺石佛, 亦有此慮. 他日孰知何者爲先來之三百佛, 何者爲東漂之七百乎. 必於佛背, 皆以小篆寫日字爲標, 以識其自日本來, 然後庶無相混之歎. 此意須與意洵議之. 得書爲慰, 且聞來人言, 顔色勝於日來云, 可幸可幸. 此老不生不滅, 古猶今耳. 寄來名香, 政合玩易時燒過, 珍謝珍謝. 不具. 戊八月十一日, 茶叟頓.〉
《표해록》과 〈조선표객도〉

1811년 2월 가리포 첨사가 대둔사 절 창고에 보관된 군용미를 점검하러 왔다가 실화(失火)로 대둔사 남원(南院) 일대가 모두 불타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초의(草衣)의 스승인 완호 윤우(玩虎 倫佑·1758~1826년) 스님이 중창의 책임을 맡아,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을 경주 기림사에서 쪼아 와 배로 운반하던 중, 그중 768좌의 부처님을 실은 배 한 척이 부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조난하여 일본까지 표류한 일이 있었다.
위 편지는 1년 뒤 기적적으로 그 부처들이 봉환되어 대둔사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이를 축하하면서, 봉환된 부처의 등에 초의를 시켜 일본에서 돌아온 부처라는 표시를 써두게 한 사연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과연 대둔사 천불전 부처의 왼쪽 어깨에 붉은 글씨로 ‘일본(日本)’이라 쓴 글자가 확인되었다.
이 편지와의 만남을 계기로 대둔사 천불전 부처의 표류 경위 추적에 나서게 되었고, 당시 표류선에 탔다가 나가사키까지 갔던 대둔사 승려 풍계 현정이 쓴 《표해록(漂海錄)》까지 구해 읽었다. 그러다가 전혀 뜻하지 않게 한림대학교 박물관에 다른 자료를 보러 갔다가 그곳에서 당시 일본 화가가 표류선의 700불과 조선 승려를 그린 〈조선표객도〉라는 그림까지 찾아내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쓴 논문이 〈대흥사 천불전 부처의 일본 표류와 ‘조선표객도’〉(《문헌과 해석》 51호·2009년 겨울·102~120면)라는 글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만난 한 구절을 통해 구한 편지 한 통이 실로 장대한 서사로 이어지는 멋진 경험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