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4월 12일, 장제스(蔣介石)는 상하이 암흑가를 지배하는 청방(靑幇)과 황색 공회(工會) 요원들에게 공산당이 이끄는 노동조합을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그날 상하이 거리엔 수백 명 공산당원의 피가 뿌려졌다. 이 사건은 22년이 지나 500만 명 이상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막을 내리는 국공내전(國共內戰)의 발화점(發火點)이었다.
국공내전은 중국의 명운(命運)뿐 아니라 세계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 중국은 공산화되어 마오쩌둥(毛澤東)의 1인 지배하에 놓였고, 중소(中蘇)의 이념적 결합 아래 전 세계는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 냉전(冷戰)을 치러야만 했다. 1950년 6·25 전쟁은 냉전이 열전(熱戰)으로 비화될 수도 있음을 알리는 경고였다.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은 그 후속타였다. 이 두 전쟁에는 중국공산당의 세계 전략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930~34년 장제스는 공산군의 근거지를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가 초토화하는 위초전(圍剿戰)을 5차례 전개했다. 마오쩌둥 지휘 아래 공산군은 포위망을 뚫고 대장정(大長征)의 신화(神話)를 쓰며 산시(陝西)의 오지(奧地)로 옮겨갔다. 1936년 시안(西安)사변과 이듬해 시작된 중일(中日) 전쟁을 거치면서 공산당은 기사회생(起死回生)했고, 1945년 일제(日帝)가 항복하자마자 국공 양당은 전면전(全面戰)에 돌입했다.
내전의 결과 1949년 10월 1일 960만㎢의 거대한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1950~70년대 중국이 겪어야만 했던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대혁명의 비극은 전면 내전의 후폭풍, 대량 학살의 후유증이었다.
하필 왜 지금 국공내전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하는가? 그 전쟁이 사실 아직도 안 끝났기 때문이다. 세계 무역 총액의 20%가 지나다니는 타이완(臺灣)해협이 한반도, 페르시아만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일촉즉발의 화약고(flashpoint)가 되어 있는 부조리한 현실이 이 점을 말해준다. 시진핑(習近平)은 날마다 ‘통일’을 외치며 대만을 향한 군사 위협을 강화하고 있다. 전쟁의 참화가 그대로 남아 거친 대륙의 지층 아래서 활화산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럼 왜 다시 장제스와 마오쩌둥인가?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전 세계 각국에 다시 ‘스트롱맨(strongman)’의 시대가 도래하여 좌우파 군중이 갈라진 채 ‘부족(部族) 전쟁’에 빠져드는 정치적 양극화(political polarization)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11년 민국혁명(신해혁명) 이래 현대 중국을 떠받쳐온 두 개의 이념적 기둥은 국민주의와 공산주의였다. 국민주의는 중국국민당의 존재 근거였고, 공산주의는 중국공산당의 궁극 목표였다. 국민주의와 공산주의는 현대 중국의 두 얼굴이다. 그 얼굴 앞면이 공산주의라면 뒷면은 국민주의일 수 있다. 혹은 그 얼굴 왼쪽 절반이 공산주의고, 오른쪽 절반이 국민주의일 수 있다.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의 성원은 모두가 공화, 민주, 헌정의 가치를 내걸고서 부강한 신중국의 건설에 헌신한 애국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세계사의 흐름과 국제 관계의 판도를 읽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엇갈렸다. 역사관과 세계관의 근본적 차이는 인간의 기본 욕구와 사회의 구성 원리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에서 비롯됐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두 세력의 갈등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이라는 두 인물의 대결로 표출됐다. 두 인물 모두 자기가 역사의 정도(正道)를 걷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사람의 투쟁은 선악(善惡)의 대립이 아니라 선의(善意)의 충돌이었다. 서로가 스스로 옳다고 확신했기에 타협의 여지없는 사생결단의 투쟁이 펼쳐졌다. 두 인물의 대결은 모든 중국인을 양분하고 적과 동지로 갈라치는 극단적 진영 대결로 치달았다. 국공내전은 정치적 양극화의 최극단을 보여준다. 14억 명이 일당 독재 아래 놓인 오늘날 중국의 현실은 국공내전의 극한 대립에서 배태됐다.
역사 다큐멘터리 〈국공지: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1927년부터 1949년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치적 대립과 군사적 충돌을 디테일이 살아 꿈틀대는 장쾌한 대서사로 곡진하게 풀어낸다. 특히 장제스와 마오쩌둥 사이의 성격 차이, 가치 충돌, 지략 대결, 의지 대립을 풍부한 사료와 생생한 증언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할 예정이다.
〈국공지〉가 장차 《삼국지(三國志)》 《열국지(列國志)》 《초한지(楚漢志)》처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널리 알려지는 대하 역사 다큐가 될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제1장: 혁명과 반혁명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내전의 발화점
“뿌우뿌~ 뿌우뿌우우우!”
1927년 4월 12일 오전 4시, 난데없는 한 가닥 나팔 소리가 곤한 새벽잠에 떨어진 상하이(上海) 시민들의 귓가를 강타했다. 어린 까마귀 울음에 호응하는 어미 까마귀 울음처럼 멀지 않은 곳에서 고성의 사이렌이 울렸다. 그 신호에 맞춰서 연발탄의 총성이 매캐한 화약 냄새를 내뿜으며 온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잠복 중이던 수백 명의 무장한 사내들이 격한 함성을 지르며 대로로 쏟아져 나왔다. 모두 남색 데님 유니폼을 입고 팔뚝에 백색 완장을 찬 상태였다. 그 완장엔 공인(工人·노동자)을 의미하는 듯 ‘工’자가 적혀 있었다.[Harold R. Isaacs, The Tragedy of the Chinese Revolution(Secker & Warburg, 1938; Haymarket Books, 2009), 150~151]
나팔 소리가 터져 나온 곳은 프랑스 조계(租界)의 치치로[祁齊路·Route Ghisi·현재 웨양(岳陽)로]의 남쪽 끝 다리 건너 중국 영토에 세워진 외교부 건물이었다.
치치로는 오늘날도 널따란 이파리가 싱그럽게 드리워진 2차선의 ‘프랑스 오동(法國梧桐·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다. 그 거리 남쪽 끝머리는 이듬해(1928년) 프랑스 영사관이 들어설 만큼 상하이 외교의 중심가였다. 바로 그 길 건너에 놓인 중국 외교부 건물에서 나팔 소리가 울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건물엔 바로 며칠 전 국민혁명군(이하 혁명군 또는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1887~1975년)의 집무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장제스의 공산당 숙청 선언

프랑스 조계에서 기관총 굉음이 건물 벽에 메아리치던 바로 그 찰나, 공장이 밀집한 자베이(閘北), 상업 중심지 난타오, 노동자 밀집 지역 후시(滬西), 황푸강 부둣가 우쑹(吳淞), 공장과 조선소가 있던 푸둥(浦東) 등 중국 영토에서도 동일한 작전이 진행 중이었다. 영국·미국·일본인 등이 거주하던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자오펑(兆豊) 화원(花園) 부근에서도 남색 유니폼을 입고 총을 든 사내들이 대오를 갖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던 상하이 총공회(總工會) 본부와 지부들에 들이닥쳐 강력한 공인규찰대를 무장해제하고 관련된 공산당 간부들을 처형하는 일이었다.
배반당한 상하이 총공회

시가지로 쏟아진 사내들의 대오에 수백 명 사복 차림의 혁명군 병력도 섞여 들었다. 북벌군에 합세한 광시(廣西) 군벌(軍閥) 바이충시(白崇禧·1893~1966년) 휘하의 부대원들이었다. 해 뜰 무렵부터 도시 곳곳에선 총공회 조직원들을 겨냥한 군민(軍民) 합작의 대학살이 자행됐다. 저항하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총살됐고, 체포된 자들은 프랑스 조계에서 대략 5~6km 떨어진 상하이 남서쪽 룽화(龍華)의 혁명군 본부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역사가들은 그날에만 적어도 3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상하이 총공회는 1926년부터 2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165개 공장과 회사에서 169회나 파업을 벌여 절반의 성공률을 보였다.[Isaacs, 110] 그 배후에서 리리싼(李立三·1899~1967년), 류사오치(劉少奇·1897~1969년) 등 중국공산당 주요 인물이 맹활약했다. 혁명군의 북벌이 승전을 거듭하여 상하이 입성이 임박해 오던 1927년 1~3월 총공회는 상하이 노동사에 길이 빛날 3차례의 대규모 파업을 연출했다. 처음엔 임금 인상, 해고 동료 복직, 작업환경 개선, 근무시간 단축 등의 요구를 내건 전형적인 노동자 파업이었으나 총공회를 불법 조직으로 규정한 군벌 정부와 외국 조계 경찰의 탄압이 거세지자 “북벌군 지지!” “군벌 쑨촨팡(孫傳芳·1885~1935년) 타도” “장제스 환영!”까지 외치는 정치 투쟁의 양상을 띠었다.
급기야 장제스가 상하이에 입성하기 네댓새 전, 그러니까 3월 21~22일 총공회는 50만에서 80만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난타오와 자베이 등지에서 군벌 세력을 축출하고 상하이 중국 지역을 점령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이렇게 국공합작 정신 아래 목숨 걸고 투쟁해 온 상하이 총공회 노조원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백주(白晝)의 테러였다. 더군다나 수백 명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을 학살한 무리는 상하이 암흑가를 휘어잡은 청방의 조직 폭력배였다.
‘청당’ 혹은 ‘정변’
불의의 사건을 접한 당시 외국 언론들은 학살의 주체가 “국민당 소속 노동자들”이거나 “상인 단체의 자원자들”이란 오보(誤報)를 쏟아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현장 취재하고,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14년간 체류하며 숱한 탐사 기사를 썼던 미국인 중국통 조지 소콜스키(George Sokolsky·1893~1962년)만이 사태의 진상을 파악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 새벽 상하이에선 “국민당이 동원한 청방과 홍방(紅幇)이 백색 노동자로 둔갑해 공산당원들을 급습하여 총살했다”.[George Sokolsky, “The Kuomintang” The China Year Book, 1928, 1362]
국민당에선 청당(淸黨), 공산당에선 정변(政變·쿠데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22년이나 더 지나 200만 이상의 군인 사상자와 500만 명 정도의 민간인 사망자를 내고서야 끝이 난 국공내전(國共內戰·1946~49년)의 발화점이었다.
1924년 국민당은 ‘연아용공(聯俄容共·러시아와 연합하고 공산주의를 수용한다)’의 명분 아래 공산당원이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입당(入黨)할 수 있게 했다. 군벌을 척결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는 대의를 내걸고 결성됐던 제1차 국공합작은 3년 만에 상하이 가두에 선혈을 뿌리며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장제스는 왜 이날 상하이에서 무엇을 바라 이토록 갑작스러운 백색 테러를 감행했을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는 아편, 도박, 매춘으로 일어선 범죄 조직 청방의 완력까지 빌렸을까? 장제스의 편에 서서 노조원과 공산당원 숙청에 나선 청방 두목들은 어떤 속셈이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신해혁명(辛亥革命)에서 북벌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궤적을 소략하게나마 되짚어봐야만 한다.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어느 문명에나 오랜 세월 널리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 신령스러운 주문(呪文)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예시하는 익숙한 문구(文句)들이 더러 있다. “운명이 일으켜 세우고, 운명이 넘어뜨린다”는 고대(古代) 로마의 속담이나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라는 성경(聖經) 전도서의 말씀처럼. 이런 구절을 익숙하게 듣고 자란 대중은 정치적 위기나 실존적 곤경에 처할 때면 입버릇처럼 바로 이 말을 내뱉으며 한 걸음 비켜서서 혼탁한 세상을 지켜보는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이래 중국사에 등장했던 서른대여섯 개 왕조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되돌아보면,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서두보다 더 통렬한 경종(警鐘)도 없을 듯하다.
“천하의 대세는 갈라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반드시 갈라지나니…(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이 한 문장 속엔 나라가 분열되면 긴 세월의 혼란기를 거치지 않고선 절대로 쉽게 통일될 수 없으며, 통일된 후 그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된다 해도 영원히 분열을 피할 순 없다는 무서운 예언이 담겨 있다. 사회과학적 용어로 풀자면, 대개 중국의 역사는 제국적 통합을 유지하려는 중앙집권의 구심력과 지역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지방분권의 원심력이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끊임없이 밀고 당기고 버티고 맞서는 길항(拮抗)의 작용이라 설명할 수 있다.
중화(中華) 문명은 세계사에 드물게 장구한 세월 동안 통일 제국을 유지했었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그 질서가 붕괴하자 불과 5년 만에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분열기가 도래했다. 제국주의 열강이 오이 쪼개듯 중국을 나눠 먹고 있는데,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천하대란(天下大亂)이 펼쳐졌다. 나관중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었다. 산산이 깨진 기왓장처럼.
제국의 마지막 날들
19세기 중엽 청(淸) 제국은 밖으론 두 차례 아편전쟁(阿片戰爭· 1839~42년, 1856~60년)에서 영국의 함대에 완벽하게 패배했고, 안으로는 중국사 최대 규모의 내란(內亂)에 휩싸여 있었다. 1850년 중국 최남단의 양광(兩廣·광둥과 광시)에서 봉기한 월족(粤族)은 파죽지세로 양쯔강 곡창 지대의 국토를 참절(僭竊)하여 “하늘을 우러르고 요괴를 쳐부수고(敬天滅妖)” “만주족을 무찌르고 한족을 일으킨다(滅滿興漢)”는 구호 아래 태평천국(太平天國·1850~64년)이라는 이단(異端)의 기독교 왕국을 건립했다. 이에 맞춰서 북방의 안후이(安徽),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지역에서도 비적(匪賊) 떼가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끌어들여 염난(捻亂·1851~68년)을 일으켰다.
내우외란(內憂外亂)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청조(淸朝)는 이미 통치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으나 놀랍게도 반세기가 넘도록 붕괴하지 않은 채 전통 국가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물론 청나라는 이미 더 큰 재원을 퍼부어도 중앙정부의 행정력은 갈수록 약해져서 돌돌 안으로 말려버리는 내권(內卷·involution) 상태의 유령 정권으로 추락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제국의 형식만큼은 끈질기게 유지됐다.
중화 제국의 기본 골격은 상당한 내구력(耐久力)을 보였다. 마지막 10년 동안도 청의 조정은 자희태후(慈禧太后·서태후)의 철권통치 아래 제국의 바닥과 기둥은 그대로 남겨둔 채로 근대의 지붕과 헌정의 외벽만 갖다 붙이는 신정(新政) 개혁을 추진했다. 비단 만주족의 청나라가 아니라 2000년 전통의 중화 제국 그 자체가 메이지(明治) 일본처럼 입헌군주제의 근대국가로 거듭나려는 최후의 용트림이었으나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는 벌써 유로(流路)를 틀어 대륙을 휩쓸고 갈 태세였다.
요란한 총성과 포탄으로 시작된 서구 근대 문명의 충격파는 경이롭게 정교한 수리물리학과 까마득히 앞서간 과학 기술과 심오하고 독창적인 철학사상과 예리하고 체계적인 사회과학 이론으로 유가(儒家) 경학(經學)에 빠져 있던 식자층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자강불식론(自强不息論)과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신 승리법은 “대(大)중국인”의 자존감을 잠시 지켜줬을 뿐, 중화 우월주의에 빠져 기술만 배우려는 피상적 근대화는 언 발에 오줌 누기며 수박 겉핥기였다.
황제의 나라는 이미 저물고 국민의 나라가 동트고 있었지만,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역사의 큰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기란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세상이 뒤바뀌어도 성인(聖人)의 교의(敎義)를 묵수(墨守)하고 전통의 지혜를 계승하려는 고루(固陋)하고 과문(寡聞)한 유생들은 처형 직전의 아큐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에 눈을 감았다. 오직 젊은 지식인들만이 강렬한 호기심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의 신문물을 쭉쭉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청년층의 의식 혁명

근대 문명의 맛을 보고 길게 땋아 내린 변발(辮髮)을 싹둑 자른 신청년 사이에선 공화 혁명 사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세우자는 공화 혁명 사상은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관성을 거부하는 도발적 발상이었다. 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살아왔던 노백성(老百姓)이 민국(民國)의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식 혁명이었다.
대표적 사례로 팸플릿 〈혁명군(革命軍)〉의 저자 쩌우룽(鄒容·1885~1905년)을 꼽을 수 있다. 쓰촨(四川)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쩌우룽은 17세 나던 1902년 일본으로 가서 급진적 반만 사상과 공화 혁명 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 상하이로 가 급진 매체 《소보(蘇報)》에 입사한 쩌우룽은 철학자 장빙린(章炳麟·1869~1936년)의 지도 아래 혁명 사상을 배양했다. 1903년 그가 열여덟 살에 집필한 〈혁명군〉은 순식간에 널리 읽혔다.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 중심의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부르짖은 쩌우룽은 곧바로 철창에 갇혔고, 스무 살 나이로 형장(刑場)의 이슬이 되었다. 〈혁명군〉의 서두에서 그는 전 중국인을 향해 노예의 멍에를 벗으라고 일갈한다.
“오, 혁명이여! 오, 혁명이여!”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무섭도록 존대한 지위에 올라 채찍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며 국가를 제 것으로 삼고 인민을 노예로 부려 전제정(專制政)을 만들고는 갖은 황당무계한 낭설로 어린 백성을 우롱하고 천명(天命)을 가로채선 온 나라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아 독점하여 후대의 제왕들이 대대로 천년만년 군림할 수 있도록 했다.… 다행히도 우리 동포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밀의 《자유론》은 물론, 프랑스 혁명사와 미국 독립선언문 등을 얻게 되었다. 이 어찌 우리 동포의 큰 행운이 아니겠는가? 우리에겐 맏형 워싱턴과 작은형 나폴레옹이 있으니 우리 동포를 이끄는 혁명과 독립의 표본으로 삼을 수 있다. 오, 혁명이여! 오, 혁명이여! 이를 얻으면 살고, 잃으면 죽는다. 퇴보도, 중립도, 방황도 없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다.… 그럼에도 진정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면, 수십 년 아니 100년쯤 더 지나면 평등권을 외치며 흑인 노예를 해방했던 인물들이 다시 나와서 평등을 외치며 여러 겹 예종의 굴레를 짊어진 지나(支那)의 노예들을 해방할지어다.”
18세의 쩌우룽은 근대 문명의 기초에 자유와 평등이 놓여 있음을 직시했다.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선례를 따라 중국도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의 눈엔 황제의 지배를 당연시하는 모든 중국 인민은 학자나 무식자나 모두 노예나 다름없어 보였다. 쩌우룽은 “4만만(萬萬·4억) 황한민족(皇漢民族·위대한 한민족)” 개개인이 모두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나라를 “중화공화국”이라 명명하고서 “중화공화국 만세! 중화공화국 4억 동포 자유 만세!”를 외치며 팸플릿을 마무리했다.
19세기 말엽 중국에선 이미 옌푸(嚴復·1854~1921년) 등이 번역한 토머스 헉슬리, 애덤 스미스, JS 밀, 허버트 스펜서 등의 대표작이 지식 대중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루소, 몽테스키외, 밀의 저작을 인용한 쩌우룽의 〈혁명군〉은 당시 중국 지식계를 휩쓴 의식 혁명의 증거다. 제국의 신민들이 민국의 시민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머나먼 공화 혁명의 길

광둥(廣東) 남단의 작은 마을 추이헝(翠亨)의 농가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쑨원은 열세 살 되던 해 하와이로 먼저 이주한 친형 곁으로 가서 호놀룰루 성공회 계열의 롤라니(Lolani) 학교에서 4년간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았다. 영어를 배우고, 수학, 과학, 서양사를 익히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17세의 소년 쑨원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곧 미신 타파를 외치며 향리 신사(神祀)의 신상(神像)을 부수고는 성난 마을 사람들을 피해 다시 하와이로 갔다.
호놀룰루에서 다시 2년간 정규 교육을 이수한 후 쑨원은 1885년 홍콩으로 갔고, 그곳에서 2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1887년 의대에 입학했다. 영국의 통치 아래 근대 도시로 거듭난 홍콩에서 그는 향후 5년간 의학 과정을 밟아 22세의 나이로 홍콩 정부가 발급하는 내과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마카오, 홍콩, 광저우에서 2년간 의술을 펼치다 환자 수백 명을 돌보는 대신 늙고 병든 나라를 구하겠다는 당찬 포부로 혁명에 투신했다.
1894년 하와이에서 화교 동지를 규합해 흥중회(興中會)를 결성함으로써 그는 공화 혁명을 개시했다. 바로 이듬해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쑨원은 광저우에서 총독 건물을 타격하고 군사 시설을 점령하는 흥중회 명의(名義) 최초의 무장봉기를 기획했으나 내부 첩자의 정보 누설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반란 관련자 15명(?) 정도가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Plot against a Viceroy: The Ringleader kidnapped in London” North-Eastern Daily Gazette, Oct 23, 1896]
‘런던에서의 납치 사건’
쑨원은 일단 홍콩으로 달아났지만, 그의 목에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홍콩, 일본, 대만 등지로 활동 무대를 넓힌 쑨원은 유창한 영어로 공화 혁명의 대의를 알리며 미국과 영국으로 연결되는 국제 네트워크를 넓혀나갔다.
1896년 10월 11일 쑨원이 런던에서 청 정부 요원들에 납치되어 청나라 공사관에 12일간 억류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청 당국은 그를 극비리에 본국으로 송환해 처형할 계획이었다. 다급해진 쑨원은 홍콩 시절 그의 스승 칸틀리에(James Cantlie·1851~1926년)에게 비밀 쪽지를 전했고, 스승은 제자를 살리기 위해 쑨원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런던 주요 언론에 퍼뜨렸다. 쑨원의 억류 사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 주요국 유수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로 청 공사관에 외교적 압력이 가해졌다.
그 당시 영어권 신문들을 들추다 보면, 쑨원이 청 정부에 잡혀 참수(斬首·beheaded)당할 수 있다는 대목이 다수 보인다. 섬뜩한 이미지에 분개한 영국의 정치인들은 돌아가며 한 목소리씩 냈다. 억류 13일째 되던 10월 24일엔 대영 제국 수상까지 나서서 주(駐)런던 청나라 공사관에 쑨원의 석방을 공식적으로 요구할 정도였다. 국제사회의 감시와 압박에 힘입어 결국 쑨원은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자고 나니 유명해졌더라는 바이런의 시구처럼 쑨원은 중국 공화 혁명의 글로벌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이후 소책자 《런던 납치 사건(Kidnapped in London)》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그의 국제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납치 사건’의 진상
한편 ‘쑨원 납치설’에 배치되는 해석도 있다. 이미 1896년 당시 영국 언론을 통해 쑨원이 납치된 게 아니라는 일각의 주장이 보도되기도 했다. 1930년 칭화대 총장 출신 역사가 뤄자룬(羅家倫·1897~1969년)은 쑨원이 납치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걸어서 청 공사관으로 들어갔고, 미리 짠 각본대로 칸틀리에가 런던 언론에 ‘납치 사건’을 제보했다고 주장했다.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그의 주장은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 외국 언론의 관심 밖에 있던 쑨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일거에 글로벌 혁명가의 반열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John Y. Wong, The Origins of an Heroic Image: Sun Yat-sen in London, 1896~1897,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설혹 쑨원이 자발적으로 공사관으로 가 청나라를 욕보이는 선전전(宣傳戰)을 펼쳤다 해도 목숨을 건 그의 영웅적 용기까지 거짓이라 할 순 없다.
납치당했든 납치극을 꾸몄든 만주족의 청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쑨원의 충심(衷心)을 의심할 순 없다. 만약 그가 자작극을 벌여 서방 세계의 유수 언론들을 움직이고 국제사회에 중국 공화 혁명의 대의(大義)를 널리 알렸다면, 이야말로 효과적인 혁명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분명 쑨원 스스로 혁명가의 기획력과 실행력, 순발력과 선전력을 만천하에 과시한 계기였다.
이후 3년여 동안 쑨원은 일본, 하와이, 동남아, 미국 등을 오가며 중국 유학생과 상인들의 지원을 확보하며 흥중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1900년 10월 8일 5년 만에 다시 광둥성 후이저우(惠州)에서 봉기를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쑨원은 해외에 체류하며 초지일관 공화 혁명의 길을 걸었다.
중국 혁명의 기지 일본

공화 혁명 기지는 우선 일본에 건설되었다. 러일 전쟁(1904~05년)에서 제정(帝政)러시아를 무릎 꿇린 일본의 저력에 감동한 중국 지식인들은 도쿄로 모여들었다. 1905년 당시 일본에 체류하는 중국인은 1만 명 이상이었다. 쑨원은 1905년 8월 5일 도쿄에서 공화 혁명의 핵심 조직으로서 국민당의 전신이 된 동맹회(同盟會)를 결성했다.
도쿄에서 동맹회는 1905년 11월 말 혁명 이념을 설파하는 《민보(民報)》를 창간했다. 이후 1910년 2월까지 모두 26호가 출간된 《민보》의 창간호 발간사에서 쑨원은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미(歐美)의 진화를 돌아보면 무릇 세 가지 큰 주의(主義)가 있다. 바로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이다. 로마가 망하고 민족주의가 흥하여 유럽 각국은 독립했으나 황제들은 각국에서 전제정을 펼쳤고, 그 아래서 시름하던 사람들은 민권주의를 일으켰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전제정이 무너지고 입헌적 정치 체제가 자라났다. 세계가 개화(開化)되고 인간의 지혜가 확충되고 물질문명이 활달해졌으니 지난 100년이 천년의 세월보다 더 예리했다. 경제 문제가 정치 문제의 뒤를 이어서 민생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20세기는 부득불 민생주의가 공론장을 독점하는 시대다.”[孫文, “發刊詞” 《民報》 第1號 1905.11]
삼민주의
쑨원은 로마 제국 멸망에서 프랑스·미국 혁명까지 장구한 서양사를 민족 독립, 민권 확립, 민생 회복으로 간명하게 요약한다. 그는 우활(迂闊)한 학자가 아니라 치열한 혁명가였다. 모름지기 혁명가란 역사의 흐름을 간파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시대의 핵심어를 제시해야 하는 법. 그 당시 중국 현실에서 민족, 민권, 민생보다 더 효과적으로 다수 대중을 격동시킬 구호는 없었다. 자유, 평등, 독립, 인권, 법치, 헌정 등등도 공화주의에 딸려오는 핵심 의제들이겠지만, 쑨원의 머리를 점령한 한 단어를 꼽으라면 그것은 국민의 민(民)이었다. 삼민(三民)을 내세워 그는 “만주족을 몰아내고(驅逐韃虜), 중화를 되살리고(恢復中華), 민국을 창립하여(創立民國)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자(平均地權)”고 부르짖었다.
동맹회가 결성된 이듬해부터 1908년까지 쑨원은 후난(湖南), 장시(江西), 후베이, 광시(廣西) 등지에서 8차례 이상 군사력을 동원한 무장봉기를 이어갔다. 이 모든 군사작전은 실패로 귀결됐으나 이 과정을 통해 쑨원은 공화 혁명을 널리 선전할 수 있었다. 도전과 실패와 재도전과 재실패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 쑨원은 공화 혁명의 영수(領袖)로 떠올랐다. 머나먼 공화 혁명의 길이었으나 역사의 신(神)은 그를 간택했다.
무너진 제국, 납치된 공화국
1911년 10월 9일 오후 1~2시경 후베이 우한(武漢)시 한커우(漢口)의 러시아 조차지(租借地) 한 비밀 장소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사제(私製) 폭탄을 제조하던 신군[新軍·청일 전쟁 패배 후 새로 만들어진 근대식 군대. ‘신건육군(新建陸軍)’의 준말-편집자 주] 내부의 혁명 조직원들의 실수였다. 불과 1시간 만에 현장에 들이닥친 청 경찰은 폭발 현장에서 문학사(文學社), 공진회(共進會) 등 혁명 조직원 명단을 입수했다. 군부(軍部)에 퍼져 있던 혁명 조직의 실체가 발각된 순간이었다.
신군 내부 혁명 조직원들은 바로 다음 날 저녁 7시를 기해 총을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연대본부를 점령한 후, 순식간에 총독부를 접수하곤 무기고를 털었다. 그날 자정 무렵 도시 전역은 이미 혁명 세력의 수중에 들어갔다. 신해년 민국(民國)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우창(武昌) 봉기’였다. 중화민국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쌍십절(雙十節)이 바로 이날이다.
중화민국의 출범

2000년간 유지돼 온 제국의 질서였지만, 그 철옹성(鐵甕城)에 균열이 생기기 무섭게 전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청(反淸) 투쟁이 일어났다. 우창의 불길은 삽시간에 인근 지역으로 번져갔다. 여러 군부대와 다수의 비밀결사대가 반란에 가세하면서 중국 전역이 혁명의 도가니로 빨려들어갔다. 11월 3일 상하이로 번져가자 바로 이틀 후 장쑤(江蘇)성의 순무(巡撫)는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바로 이틀 후 광시성도 독립을 쟁취했고, 그다음 날엔 안후이성, 다시 그다음 날엔 광둥성도 청 제국에서 이탈했다. 11월 말이 되자 쓰촨을 포함한 양쯔강 이남 지역 대부분이 중앙정부에서 벗어났다. 급기야 12월 11일 난징(南京)에서 모인 각 성의 대표는 임시 정부를 발족하고 쑨원을 임시 총통으로 추대했다.
혁명 기금 마련을 위해 미주(美洲) 화교(華僑) 사회를 파고들던 쑨원은 콜로라도에서 현지 신문을 통해 우창의 무장봉기 소식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쑨원은 치밀한 외교 전략을 세웠다. 중국은 이미 내전(內戰)에 돌입한 상태였다.
그는 우선 유럽으로 넘어가서 외교관, 정치인, 언론인들에게 공화 혁명의 대의를 설파하며 외교적 중립을 호소했다. 기민하게 외교전을 펼친 쑨원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인도양을 돌아 1911년 성탄절에야 상하이에 도착했다. 나흘 후 그는 임시 총통으로 선출됐다. 급기야 1912년 1월 1일 난징에 수도를 둔 중화민국이 공식 출범했다.
위안스카이
중화민국은 들어섰지만, 근대국가 건설은 요원한 꿈이었다. 임시 총통으로 취임한 쑨원은 중화민국이 충분한 재원도, 군사력도, 행정력도 갖추지 못한 껍데기 정부임을 깨달았다. 청 제국은 이미 사라졌으나 6개 사단 병력(대략 8만~10만 명)을 가진 북양군(北洋軍)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1901년 이래 직예(直隸) 총독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년)가 직접 양성한 북양군은 서양식 병법에 따라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청 제국의 최고 정예부대였다. 무릇 국가란 배타적 영토 내에서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유일한 조직이다. 중화민국의 정부가 북양군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중국이 남북으로 찢겨 내전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쑨원은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1912년 2월 12일 위안스카이의 감호 아래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만 6세로 퇴위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새로 건립된 중화민국 총통 직위를 제안했다. 물론 쑨원은 위안스카이가 수도 난징에 와서 통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지만, 이치상 10만 대군을 통솔하는 사령관이 군사적 근거지를 이탈할 리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직속 예하 부대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핑계로 베이징(北京)을 떠날 의사가 없음을 확실히 했다. 쑨원은 결국 베이징 천도를 결정하고, 위안스카이는 3월 10일 자신의 의지대로 베이징에서 총통에 취임했다.
얼떨결에 중화민국의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삼민주의나 공화주의 따위엔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중화민국 대신 유교를 국교(國敎)로 계승하는 입헌군주제의 중화 제국을 구상하고 있었다. 중국 현대사의 큰 흐름으로 볼 때 위안스카이는 민국 혁명을 탈취하여 제국 복원을 시도했던 역사의 일탈자였다.
위안스카이의 반동

1913년 3월 22일 총선거에서 국민당의 압승을 주도하고 총리 임명을 코앞에 둔 쑹자오런(宋敎仁·1882~1913년)이 상하이 기차역에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암살 배후가 위안스카이라 확신한 쑨원은 남방에서 장시, 안후이, 푸젠(福建), 광둥의 반군을 규합해 제2차 혁명을 개시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신속하게 반군을 제압하고 난징을 점령하는 기동력을 발휘했다.
근거지를 상실한 쑨원은 상하이로 피신하여 1913년 9월 3일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1905년 8월 도쿄에서 국민당의 전신 동맹회를 조직하여 공화 혁명의 불길을 댕긴 지 8년 만이었다.
중화민국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군주제의 복원을 추진했다. 그는 1913년 봄부터 미국인 헌법학자 프랭크 굿나우(Frank J. Goodnow· 1859~1939년)를 초빙하여 중국 현실에 맞는 헌법 초안을 작성해 달라고 주문했다. 굿나우는 종신(終身) 총통제 헌법과 입헌군주제 헌법의 초안(草案)을 각각 따로 작성했다. 물론 위안스카이는 입헌군주제를 선택했다.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의 건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황제(大皇帝)를 칭했다. 황위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국내외의 열렬한 지지를 기대했는데, 놀랍게도 긴 세월 그를 최고 수령으로 떠받들었던 직속 부하들이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섰다.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성의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독립을 선언하는 뜻밖의 사태가 이어졌다. 군부의 실세(實勢)들조차 유교 제국의 부활을 시대착오적 망념쯤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2일 황위에 오른 지 불과 석 달 열흘쯤 만에 황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해 6월 6일 위안스카이는 만성 신장병에 요독증이 겹쳐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군벌의 시대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그의 지휘를 받던 장성들은 군부의 명령 계통이 해체됐음을 직감했다. 위안스카이의 장군들은 이제 각자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관할 군구(軍區)를 지배하는 독군(督軍)이 되었다. 군벌이란 군사 독재를 실시하는 소국가의 군주와도 같다.
국가 권력의 맨 밑바탕에는 군사력이 놓여 있다. 정상 국가에선 민간의 행정부가 군부를 통제하지만, 난세의 위기에선 군부가 곧 정부로 군림한다. 위안스카이의 죽음에 따른 중앙 권력의 공백은 거대한 중화 대륙을 수백 개 군사 정권으로 조각나게 했다.
신해혁명으로 2000년 전통의 제국이 무너진 지 불과 다섯 해 만이었다.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군벌 시대(1916~28년)가 12년간 펼쳐졌다. 한 역사가의 집계에 따르면, 1916년부터 1928년까지 이 짧은 12년의 세월 동안 1300여 명의 다양한 군벌이 우후죽순(雨後竹筍) 등장하여 140회 이상의 대규모 성급(省級) 전쟁을 쉴 새 없이 치러야만 했다.
군벌 종식을 위해 쑨원이 코민테른과의 협의 끝에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이루는 정치 드라마는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한다. 지금은 다시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대학살로 돌아가보자.
장제스는 언제부터 반공 투사였나?
장제스는 왜 암흑가 범죄 조직 청방의 완력을 빌려 대학살극을 벌인 것일까? 장제스의 잔혹한 성품이나 공산당에 대한 그의 사무친 원한 때문이라 볼 근거는 없다. 1925년 5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전국적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이 격렬하게 일었을 때까지도 장제스는 거의 날마다 일기장 첫머리에 “역도미멸(逆徒未滅), 열강미평(列强未平)”이란 문구를 적어넣었다. “역도는 아직 박멸되지 않았고, 열강도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1925년 상황을 볼 때 장제스가 말하는 ‘열강’이란 당시 시위 군중에 발포하여 다수 중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공공조계의 영국인, 일본인 등을 가리킨다. 아울러 1925년 중·하반기 현실에서 장제스가 박멸하려 한 ‘역도’란 공산당이 아니라 광둥·광시 등지에서 병변(兵變)을 일삼던 군벌이나 반군 집단을 지칭한다. 그 당시 장제스는 영국, 미국 등 구미 열강에 대해선 적개심을 보였고, 소련에 대해선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외동아들 장징궈(蔣經國·1910~88년)를 1925년 10월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냈을 정도였다.
장제스는 원래 좌파였다!

영국·미국과 달리 소련은 중국 공산화의 장기 목표를 내걸고 국민 혁명군에 기름, 총기, 포탄, 비행기까지 지원하고 있었다. 코민테른이 내건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국공합작이었다. 이 점을 잘 아는 장제스가 섣불리 반소(反蘇)나 반공(反共) 노선을 취할 리 없었다. 날마다 일기장에 “열강미평”이라 적으며 구미 제국주의를 질타하던 장제스는 그 당시까지도 ‘연아용공’ 노선에 충실한 강경 좌파 인사였다. 장제스는 공산당원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년)를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직에 임명했고, 공산당원들이 주도하는 정치부의 대중 동원력에 감탄하여 다시 저우언라이를 국민혁명군의 최고 엘리트 부대였던 제1군단 제1사단 최고 주임으로 발탁했다. 게다가 장제스가 사관생도 중에서 공산당원 린뱌오(林彪·1907~71년)를 총애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장제스가 1925년 말까지도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여러 대목에서 읽힌다. 특히 그는 1925년 말까지도 국민당 지도부의 반공 우파 영수 후한민(胡漢民·1879~1936년)과 척을 지고 있었다.
관련 사건을 되짚어보면, 1925년 3월 12일 쉰여덟 나이로 쑨원이 베이징에서 타계하자 국민당 지도부의 좌우파 갈등이 곧바로 표출됐다.
그 첫째 징후는 바로 랴오중카이(廖仲愷·1877~1925년) 암살이었다. 랴오중카이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화교 출신으로 17세에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가서 쑨원을 만나 함께 동맹회를 창립했고, 이후 쑨원과 함께 국공합작을 구상했던 국민당 3대 영수 중 한 명이었다. 쑨원이 세상을 떠나고 고작 다섯 달 지난 8월 20일 국민당 중앙 집정위원회에 참석하러 가던 랴오중카이는 5인 암살조의 피스톨 세례를 받아 만신창이가 되며 즉사(卽死)했다. 사건 직후 국민당 우파 영수 후한민이 그 배후로 의심받아 조사를 받고 구속당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1925년 11월쯤 되자 국민당 최고 영도자 그룹의 좌우파 대립이 폭발 직전으로 치달았다. 그때 우파 조직 서산파(西山派)가 본격적으로 공산당원 축출, 러시아 코민테른 요원 파면, 공산당원이 장악한 정치부 해산 등을 외치며 반공 랠리를 이어갔는데, 장제스는 격분하여 서산파를 비판했다. 같은 달 장제스는 사관생도들 앞에서 스스로 쑨원의 “삼민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공산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발언까지 남겼다.[Jay Taylor, The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Struggle for Modern China(Cambridge, MA: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53~54; C. Martin Wilbur, The Nationalist Revolution in China, 1923~1928(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30~33; Yu Miin-ling. “A Reassessment of Chiang Kai-shek and the Policy of Alliance with the Soviet Union in the 1920s” In The Chinese Revolution in the 1920s: Between Triumph and Disaster, edited by Mechthild Leutner, et al.(RouteledgeCurzon, 2002), 98~124] 그가 민족, 민권, 민생 중에서도 특히 민생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해석했던 당시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상황을 보면, 장제스가 적어도 1926년 7월 9일 북벌 개시 이전까지는 공산당 숙청을 계획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장제스가 암흑가 왈패들을 동원하여 학살할 만큼 공산당원들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면, 1926년 7월 9일 북벌 개시 이후 심경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장제스의 심경 변화에 관해선 앞으로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지금은 군인 장제스의 매서운 결단력과 비상한 집행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에피소드를 짚어보자.
1926년 중산함(中山艦) 사건, 무장(武將)의 결단력
1926년 3월 20일, 북벌 개시를 석 달 스무날쯤 앞둔 시점이었다. 불현듯 장제스는 직속 수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광저우 황푸 앞바다에 정박한 중산함(中山艦)을 나포하고 해군 제독 대행 리즈룽(李之龍·1897~1928년, 공산당원)을 전격 체포했다. 곧이어 광저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러시아 조차지에 병력을 급파하여 러시아인 거주지 경비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저우언라이를 포함한 주요 공산당원 50여 명을 잡아들였다. 장제스의 급격하고 돌발적인 군사행동에 국민당 내부 좌우파 인사와 코민테른 요원 모두가 공포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중산함 사건
장제스는 본부 근처로 불쑥 입항한 전함이 자신을 납치해 러시아로 추방하려는 음모라 여기고 기민하게 선제(先制)공격을 감행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국민당 내에서 쑨원의 후계자를 자임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왕징웨이(汪精衞·1883~1944년)가 소련인들과 공모하여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고 의심했다. 과민 대응일 수도 있겠지만, 본래 지장(智將)은 적장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법.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자객의 흉탄이 심장을 뚫을 수 있는 난세였다. 일찍이 젊은 시절 장제스의 멘토였던 천치메이(陳其美·1878~1916년)조차 괴한의 습격으로 비명횡사했다. 권력이 커질수록 목숨줄이 위태로워짐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장제스로선 사전 통보 없는 전투함 입항을 북벌군 총사령관인 자신에 대한 무장 시위로 느꼈을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장제스가 이런 기미를 감지한 순간 사태를 180도 역전시키는 놀라운 군사적 기동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다.
어리둥절해진 코민테른 요원 보로딘(Mikhail Borodin·1884~1951년)은 4월 29일 장제스와 만나서 담판을 벌였다. 스탈린이 직접 발탁해 중국에 파견한 노회한 볼셰비키 혁명가 보로딘이었지만, 장제스의 단호한 태도와 저돌적인 기세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논리 대결과 기싸움 결과 보로딘은 장제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선 장제스는 보로딘의 요구에 따라 국민당 내부의 보수 인사를 축출하고, 중·소 협력을 지속한다는 원칙에 동의했다. 대신 장제스는 보로딘에게서 중국에 대한 소련의 군사 지원을 지속하고, 국민당 내부에서 공산당의 정치 활동을 제한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아울러 보로딘은 과거 코민테른의 미온적인 태도를 버리고 장제스가 이끄는 북벌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장제스는 사사건건 자신과 충돌했던 코민테른 요원 3인을 소련으로 돌려보내고, 가장 중요한 제1군단에서 공산당 정치위원들을 모두 쫓아낼 수 있었으며, 중대사를 앞두고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국민당 최고 영수 왕징웨이까지 잠시 프랑스로 내치는 실력을 과시했다.[Wilbur, C. Martin. “The Nationalist Revolution: From Canton to Nanking, 1923~1928” in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12, Republican China 1912~1949, Part 1, edited by John K. Fairbank and Denis C. Twitchett(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236~349]
이렇게 유리한 조건으로 군사력과 정치력을 증폭시킨 장제스는 여세를 몰아 공산당 활동을 제한하는 세부 규정을 입안했다. 장제스의 제안에 따라 코민테른의 중재로 국공 양당의 대표단은 공동위를 결성하고 다음의 조건들에 합의했다.
첫째, 국민당 내부의 다른 당은 국민당 영수를 비판하거나 삼민주의에 반대할 수 없다.
둘째, 공산당은 국민당에 당원 명부를 제공해야 한다.
셋째, 공산당원은 중앙과 지방 모든 단위에서 3분의 1 이상을 점할 수 없다.
넷째, 공산당이 자기 당원들에게 명령을 내릴 땐 사전에 국민당에 통보하여 허락받아야 한다.
다섯째, 이를 위반하는 자들은 즉시 파면된다.
이렇게 분명한 조건을 내건 후 장제스는 마지막으로 모든 당원의 재입당을 요구했다. 재입당의 절차엔 삼민주의와 국민당 강령에 대한 충성 맹세가 포함되었다. 이로써 장제스는 전국의 군벌 세력을 제압해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북벌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위하여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북벌 전쟁의 성공으로 예상보다 훨씬 빨리 상하이에 입성한 장제스는 왜 불과 며칠 만에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여 국공합작을 깨버려야만 했는가?
장제스를 위해 ‘악마의 변호’를 하자면, 북벌군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갈라진 국토를 다시 통일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대업(大業)을 달성하기 위해선 당내의 반대 세력을 조속히 척결하는 청당이 불가피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근대 국민국가 건설이란 무거운 중책을 수행하기 위해선 국민당 내부에서 빠르게 전이(轉移)되는 공산주의라는 바이러스를 한시바삐 박멸해야 한다는 군사 지휘관의 절박감 말이다. 그의 절박감을 이해하기 위해선 1927년 1월부터 3월까지 상하이 총공회가 전개했던 3차례에 걸친 대규모 파업 투쟁의 진상을 파헤쳐야 한다. 화약 연기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혼탁한 그 사건의 내막 속에 ‘혁명과 반혁명’의 교차로가 숨어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