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전설이다. 우리가 잊고 있는 이야기이다. 단월 충렬사에는 추련도(秋蓮刀)라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칼이 한 자루 전시되어 있다. 길이 1.01m, 폭 0.06m, 칼날 길이 0.86m인 이 칼은 실제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평상시 보호용으로 지니던 보검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실제 사용하던 칼은 어디로 갔을까? 1937년 4월 9일자 매일신보에 <임경업 장군의 양개(兩個) 보검, 절취되어 매물로써 유랑(流浪)>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즉, 지금은 실물로 볼 수 없는 용천검(龍泉劍)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추련도(秋蓮刀)가 절취되어 서울 종로통에서 거래를 하려다가 검거된 것이다. 다만 용천검은 이 기사에서 보인 후에 사라졌다. 이 용천검(龍泉劍)에는 전설이 있다. 1931년 10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장백촌 촌방문>이라는 연재기사에 혜산진 주재기자로 충주 출신으로 추정되는 양일천(梁一泉) 기자가 현지에서 이야기를 듣고 쓴 기사의 한 토막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임경업 장군이 소농보(小農堡)의 권관(權管)으로 있을 때에 여가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였는데, 한 큰못에 이르니 못 가운데에서 큰 뱀이 출두하여 칼을 내어준다. 그 칼은 3척 길이로 광채가 섬섬하여 목석도 초개같이 베는 천하보검이었다. 이것은 용이 하사한 것이라고 장군은 기뻐하였다. 삼척용천만권서(三尺龍泉萬卷書; 석자의 용천검은 만권의 서적과 같으니) 황천생아의여하(皇天生我意如何; 하늘이 나를 냄은 어인 뜻인가) 산동재상산서장(山東宰相山西將; 산동에 재상이 나고 산서에 장수가 난다는데) 피장부혜아장부(彼丈夫兮我丈夫; 저들이 대장부면 나 또한 대장부가 아니냐) 라는 검명시(劒銘詩)를 새겼다고 한다. 이 칼은 국난이 있을 때마다 울어서 위급을 알렸는데, 물론 병자호란에도 북방의 호병(胡兵)이 침입할 것을 예지하고 정부에 2만 병력을 청하였으나 간신역자의 모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군마저 원사(寃死)하였으니 이것은 임장군의 천재유한(千載有限)인 동시에 칼도 혼이 있다면 또한 천고의 원한을 금하기 어려울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이 용천검은 1937년 모습을 드러낸 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임경업 장군이 처음 가졌던 또 다른 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1908년 3월 3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전설로, 이름하여 <단월 이무기> 정도의 제목을 붙일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함남의 한 여인의 구술로 정리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충주 단월 큰내(=달천, 달내)에 이슴(이무기)이 있어 때때로 안개와 바람을 일으켜 작난이 심하였다. 충민공 임경업은 그곳 사람이라, 나이 13세에 그 이무기의 해를 덜고져 하여 하로는 옷매무새를 잡고 냇가에 가서 인기척을 하니 물속의 이무기가 과연 나오는데, 길이가 10여 장이오 온몸 빛이 무쇠같더라. 임장군이 몸을 날려 공중에 올랐다가 내려오며 이무기의 꼬리를 두 손으로 잡아서 냇가 바위에 힘껏 내리쳤다. 이무기는 간 데 없고 손에 잡았던 꼬리가 변하여 칼자루가 되어 서기방광(瑞氣放光)하는 8척 장검이 되었다. 그 칼을 가지고 천하를 누볐는데, 청국을 갔다가 나올 적에 압록강을 건널 때였다. 그 칼이 쟁연(錚然)히 소리하며 칼집 밖으로 뛰어나와 압록강에 빠졌더라. 그 이무기를 내려치던 바위에 이무기의 전체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야기의 선후 관계를 보면 함남 여인의 이야기가 앞선다. 13세에 달내강 이무기를 잡아 그것이 변하여 8척 검이 되었고, 이것이 청나라에 다녀오던 중에 소리를 내고 스스로 칼집에서 뛰쳐나와 압록강에 빠졌다. 그리고 용천검은 함남 허천군 소농보의 군관 시절에 얻었다고 하니, 8척 검이 빠진 압록강과 가까운 곳인 점에서 어쩌면 같은 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조금 허황하더라도 이야기는 이야기로 전해져야 한다. 다만 그 주인공인 임경업 장군은 충주 단월동 충렬사에 오늘도 모셔져 있다. 그 강 건너에는 그의 묘소도 있다. 이야기가 잊히면 주인공도 잊히는 법이니, 충주에서 잊힌 이야기와 그 주인공이 얼마나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