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퇴계 이화의 매회 시조

이황 퇴계 선생은 매화시만으로 한 권의『매화시첩』에 91수를 남겼으니, ‘매화 시선(詩仙)’으로 칭송할 만하다.

   “뜰 앞 매화나무가지 가득 눈꽃 피니(一樹庭梅雪滿枝)
   풍진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風塵湖海夢差池)
   봄밤 옥당에 홀로 달 바라보자니(玉堂坐對春宵月)
   기러기소리에 내 마음 산란하네”(鴻雁聲中有所思)

  매화 핀 봄밤 홀로 앉아 달을 바라보는데 기러기 소리에 마음이 산란한 데는 매화를 끔찍이 좋아한 그 이상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가 단양군수로 부임(48세)하자, 관기인 두향(杜香)(18세)이 사모하게 되고, 그도 시, 서, 가야금에 능한 두향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풍기군수로 임지가 바뀌자 함께한 세월은 고작 9개월이었지만, 이미 뼈 속까지 뻗어난 연정은 매화나무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1570년 7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21년 동안 살아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플라토닉 러브, 퇴계적 ‘시선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이별의 밤 두향은 붓을 들어 시 한수를 바쳤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 어느 듯 술 다하고 님마져 가는구나 / 이 몸 꽃 지고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단양을 떠날 때 선생의 짐 속엔 두향이 준 수석 두 점과 매화분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이때부터 선생은 평생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고 한다. 일찍이 부인과 아들을 떠나보낸 선비의 삶이 이리도 맑은 강물이었을까, 텅 빈 하늘 사이 흐르는 달빛이었을까.
 
  
▲ 안개 속 꽃다운 풀 모두 보았네. 그래도 매화는 찾을 수가 없네  
 
말년에 병약해져서 누추한 모습을 매화에게 보이기 싫어 다른 방으로 매화분을 옮겼다 하니, 가히 매화를 닮은 ‘시선’이라 할 만하지 않는가.

  두향은 선생과 헤어진 뒤 관기에서 벗어나 남한강기슭에 움막을 치고 평생을 퇴계선생을 그리며 살다가, 선생이 운명하리라 여겨 나흘을 걸어서 안동 도산에 이르렀는데, 이미 선생은 숨을 거둔 뒤였으니 기막힌 숙명적 사랑의 고고지절(孤高之節)이 아닐 수 없다.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해야했다. 세상을 떠날 때 퇴계선생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도산서원에 심겨진 그 두향의 매화가 지금도 피고지고 반 천년 가까이 향기를 뿜어왔으니, 하마 이봄도 지금쯤 서늘하게 제 몸에 불붙고 있으리라.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퇴계선생의 매화시 절편이 아닐 수 없다.

   만해 한용운 시인이 고우 최린에게 주었다는 ‘증고우선화’라는 ‘매화’ 시다. 일제 강점기 조국의 현실을 벗어나려는 절절한 기원이 서려있다.

   “어여쁜 온갖 꽃 모두 보았고 / 안개 속 꽃다운 풀 모두 보았네 / 그래도 매화는 찾을 수가 없네 / 땅에는 눈보라만 가득하니 이를 어쩌랴.”

   고려시대 외로운 한 도공 총각이 죽은 약혼녀 무덤가에 피어난 매화나무를 집에 옮겨다 심고, 평생 그녀를 그리며 살다가 홀아비 도공으로 늙어 죽었는데, 매화나무 밑 도기에서 예쁜 새가 나와 매화나무에 올라 슬피 울었다. 그게 바로 도공의 넋인 휘파람새란다.

   지금 갓 피어난 매화꽃 가지사이 뉘 숨결인가 바람결인가 휘파람새 우는 소리 아련히 물드는 봄이다. 늦었지만, 마음 속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한 번 그려보면 어떨까. 중국 화북지방에서 비롯된 풍습으로, 동짓날 여든한 장의 매화꽃 가지 하나를 그려놓고, 매일 꽃 하나씩을 색칠해서 여든한 송이가 다 꽃 칠해질 무렵이면, 봄이 무르익어 활짝 피어났으니.

  나의 봄이 활짝 필 때까지 마음속 ‘소한도’에 매화꽃잎 하나하나 칠해가면서 나 자신에게 속삭여 보리라. “매화에게 물을 주어라.”

 

출처 : 孤雲 文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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