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蘇東坡) - 본명 : 蘇軾, 1037.1.8 ~ 1101.8.24
북송 인종 때 메이산(眉山)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 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라고 하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후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려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대문장가였고, 중국 문학 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또한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소동파는 본명이 식(軾)이고 자(字)는 자첨(子瞻)이며, 동파(東坡)는 그의 호이다. ‘동파’라는 호는 그가 황주(지금의 후베이성 황강현) 유배 시절에 마몽득(馬夢得)이라는 이가 옛날 군대 주둔지 황무지를 얻어 주었는데 그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게 되면서 ‘동파(東坡)'라고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소동파는 ‘동파(東坡)'라는 시에서 그때의 일을
“황폐한 밭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겼지만
높은 곳과 낮은 곳이 나름대로 쓰일 테니
낮고 습한 곳에는 볍씨를 심고
동쪽의 둔덕에는 밤 대추를 심으리라.“
라고 읊기도 했다.
소동파(소식)의 동생은 소철(蘇轍)로서 자(字)는 자유(子由)였다. 김부식(金富軾)과 김부식의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동파와 소철 형제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이 두 형제의 시문(詩文)이 출중했고 우리나라에도 이들의 시풍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이규보는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라고 쓸 정도였다.
소동파와 소철은 형제애가 무척 돈독했다. 소동파는 헤어져 돌아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높은 곳에 올라가 되돌아보니/ 언덕이 가로막혀 자네 모습은 안 보이고/ 두건만 흔들흔들 보이다 말다 하는구나./(……)/ 등불 아래 마주 누워 밤비 소리 들으며/ 옛날 얘기 할 날이 언제이려나?”(‘정주 서문 밖에서 자유와 작별하고(辛丑十一月十九日, 旣與子由別於鄭州西門之外, 馬上賦詩一篇寄之)’)라고 써 동생과의 이별을 애석해 했다.
소동파의 대표작이면서 ‘눈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라는 뜻의 설니홍조(雪泥鴻爪)라는 말이 비롯된 것도 동생 소철이 쓴 ‘면지의 일을 생각하며 자첨 형에게 보낸다(懷澠池寄子瞻兄)'라는 시에 화답한 것이었다. 인생의 무상을 노래한 이 시 ‘자유의 면지회구에 화답하여(和子由澠池懷舊)’는 이렇게 되어 있다.
정처 없는 우리 인생 무엇과 같을까?
기러기가 눈밭 위를 배회하는 것 같으리.
진흙 위에 어쩌다가 발자국을 남기지만
기러기가 날아간 뒤엔 행방을 어찌 알리?
늙은 스님은 이미 열반해 사리탑이 새로 서고
낡은 벽은 허물어져 글씨가 간데없네.
힘들었던 지난날을 아직 기억하는지?
길이 멀어 사람은 지칠 대로 지치고
나귀는 절뚝대며 울어 댔었지.
‘적벽에서의 옛일을 회고하며(적벽회고, 赤壁懷古)'는 소동파가 47세에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황주의 적벽에서 오나라 장수 주유가 위나라 조조의 대군을 무찌른 적벽대전을 회고하고 있다. 자신도 주유처럼 공적을 세우고 싶지만 정쟁에 휩쓸려 유배를 당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기색도 역력하다. 아울러 이 시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감개는 인생의 허망함에도 닿아 있다. “고향으로 내 마음 달리나니”에서의 고향(故國)은 소동파 자신의 고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옛 땅 즉 적벽의 전쟁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다정한 그대”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죽어 고향에 묻혀 있는 소동파의 첫 번째 아내 왕불(王弗)로 읽을 수 있고, 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다정한 그대”는 위세 당당했던 주유의 무리로 해석할 수 있다. 한 잔의 술을 강물 속의 달에게 부어 주는 행위는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한 추모와 존앙심의 표현이면서 신속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쓸쓸한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동파의 일생은 지방관 생활, 모함으로 인한 투옥, 유배, 중앙 정계 복귀를 반복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이 주도하는 신법파 인사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왕안석은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등의 신법(新法) 입안과 시행으로 물가의 안정, 국가 재정 문제 해결 등을 시도했고, 인재도 문학적 능력의 뛰어남보다 실제 행정 능력 등을 중시해 뽑아 썼다. 그러나 이 신법파의 개혁은 많은 반대에 부딪쳤고, 소동파도 점진적 개혁 쪽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신법파와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너무나 깊고 유원하여 그 참된 면모를 알기 어렵다는 뜻의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이라는 성어를 낳은 시 ‘제서림벽(題西林壁)’ 또한 여주로 유배지를 옮겨 가던 길에 여산을 본 소회를 서림사(西林寺) 벽에 써 놓은 것이었다. 시의 전모는 이렇다. “가로로 보면 산줄기 옆으로 보면 봉우리/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보는 곳에 따라서 각기 다른 그 모습/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은/ 이 몸이 이 산속에 있는 까닭이리.”
소동파는 나아가 세상을 구하려 했으며, 백성들의 생활고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가령,
“벼이삭이 논바닥에 누운 꼴을 보았지요./ 논 두둑에 거적 치고 한 달 동안 지내다가/ 날이 개자 벼를 베어 수레에 싣고 돌아왔지요./ 땀 흘리며 멍든 어깨로 시장에 지고 가니/ 벼값이 헐값이라 싸라기처럼 줘 버렸지요./(……)/훌륭한 관리 많다건만 백성들은 더 괴로워/ 차라리 하백의 아내가 되고 싶었지요.”(‘오중 지방 농촌 아낙의 탄식(오중전부탄, 吳中田婦歎)’) 같은 시는 이러한 그의 생각과 태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반면에 그는 때로 세상을 등진 듯 불서(佛書)를 즐겨 읽었고, 스님들과 두터운 교분이 있었으며, 명상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가령 “산 불로 산 물을 끓여야 하매/ 낚시터에 직접 가서 깊고 맑은 물을 펐네./ 바가지로 달을 떠서 항아리에 담고/ 국자로 강물을 덜어 병에 넣었네.”(‘강물을 길어다 차를 끓여 마시고(급강전다, 汲江煎茶)’) 같은 시는 한가하고 담담한 생활의 정취를 드러낸 것이었다. 현실 참여적인 성향과 초연하고 현실도피적인 성향을 함께 갖고 있었던 만큼 소동파 시의 영역은 다채롭고도 광원(廣遠)한 것이었다.
◆ 吳中田婦歎(오중전부탄) 오중땅 농부 아낙의 탄식
今年粳稻熟苦遲(금년갱도숙고지) 금년에는 메벼가 유난히 늦게 익어
庶見霜風來幾時(서견상풍래기시) 조만간 서릿바람 불 것만 같더니
霜風來時雨如瀉(상풍래시우여사) 서릿바람 불때에 큰 비가 쏟아지니
杷頭出菌鐮生衣(파두출균렴생의) 고무래와 낫자루에 곰팡이 피어나네
眼枯淚盡雨不盡(안고루진우부진) 눈물이 다 마르도록 비는 멎지 않아
忍見黃穗臥靑泥(인견황수와청니) 벼이삭이 잠기는꼴 차마 못보겠네
茅苫一月隴上宿(모점일월롱상숙) 한달을 띠풀거적 덮고 논둑에서 잠자다
天晴穫稻隨車歸(천청확도수거귀) 날 개이자 수레에 벼를 싣고 돌아오네
汗流肩赬載入市(한류견정재입시) 땀 흘리며 멍든 어깨로 시장에 지고 가니
價賤乞與如糠粞(가천기여여강서) 값이 낮아서 왕겨와 싸라기처럼 내어주네
賣牛納稅拆屋炊(매우납세탁옥취) 소 팔아 납세하고 집 헐어 밥 지으며
廬淺不及明年饑(여천불급명년기) 명년에 굶을 일은 생각할 수 없었네
官今要錢不要米(관금요전불요미) 관청에선 쌀 대신에 현금만을 받으며
西北萬里招羌兒(서북만리초강아) 서북쪽 만리 밖의 강족을 달랜다네
龔黃滿朝人更苦(공황만조인갱고) 유능한 관리 가득해도 백성들은 괴롭고
不如却作河伯婦(불여각작하백부) 차라리 하백의 부인이 되고 싶어 한다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고 싶다네)
- 粳 메벼 갱.
- 杷 비파나무 파. 비파나무, 자루, 써레(마소에 끌려, 갈아 놓은 논바닥을
고르거나 흙덩이를 잘게 부수는 농구), 밭 고무래(곡식을 그러모으고 펴거나,
밭의 흙을 고르거나 아궁이의 재를 긁어모으는 데에 쓰는 '丁'...
- 鐮 낫 겸. ※赬 붉을 정. 붉다, 붉은빛
- 乞 빌 걸, 줄 기. 빌다, 구걸하다(求乞--), 가난하다, 취하다(取--),거지,
독촉(督促)하여 받다, 구하다(求--), 청구하다(請求--), 소원(所願), 요청(要請)
주다 (기) ,급여하다(給與--) (기), 기운(氣運),...
- 糠 겨 강 .
- 粞 싸라기 서.
- 招羌兒는 宋나라는 서북쪽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하여 많은 비용을 썼다.
- 龔黃은 龔遂(공수)와 黃覇(황패)로 유능한 관리였다.
- 河伯婦는 戰國時代 수해예방을 위하여 젊은 여자를 河神에게 재물로 바치는
河伯娶婦를 말한다.
※ 雪泥鴻爪(설니홍조) (蘇軾 , 和子由澠池懷舊)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이 눈이 녹으면 없어진다는 뜻으로, 인생의 자취가 흔적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인생도 뭐 지나고 나면 별것이 아니라는 의미.
人生到處知何似 (인생도처지하사)
應似飛鴻蹈到雪泥(응사비홍도도설니)
泥上偶然留指爪 (니상우연류지조)
鴻飛那復計東西 (홍비나복계동서)
사람의 한 평생은 무엇과 같을까?
큰기러기 하늘을 날다 눈 내린 벌판에 잠깐 내려섰음과 같은 것....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겼으되
기러기 하늘을 날음에 어찌 동쪽 서쪽을 가렸을 것이랴
老僧已死成新塔(노승이사성신탑)
懷壁無由見舊題(회벽무유견구제)
往日崎嶇還記否(왕일기구환기부)
路長人因蹇驢嘶(로장인인건려시)
나이든 스님 이미 세상을 떠나시고 새로 탑이 들어섰지만
허물어진 벽에는 옛날 써놓았던 글씨 찾아볼 길 없나니
지난날 기구했던 일 지금도 기억하는지
길은 멀고 사람은 지친데다 당나귀 절름거리며 그리도 울던 것을.....!
鴻(큰기러기홍) 蹈(밟을도) 泥(진흙니) 爪(손톱조) 澠(고을이름민) 蹇(절름발이건) 驢(당나귀려) 嘶(울시)
인생이 무엇과 비슷한지 아는가?
기러기 눈 내린 땅위에 내려섬과 같은 것....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기지만,
기러기 날아간 뒤 간 곳을 어찌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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