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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구곡담 시 병풍

한문역사 2025. 6. 19. 10:08

아버지와 이상화 시인의 추억, 88년만에 돌려드립니다"

독립운동가 김정규 지사 子 김종해씨, 대구시에 병풍 기증
1932년 이상화 시인이 서예가 서동균에게 부탁해 선물

입력 2020.12.05. 14:38업데이트 2020.12.0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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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대구 수성구 삼덕동 대구미술관에서 김종해(오른쪽)씨가 부친이 이상화 시인에게 선물받은 '금강산 구곡담 시' 병풍을 소개하고 있다. 김씨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故 김정규 지사로서 대구에서 활동했다. 대구는 이상화 시인이 나고 자라며 활동한 고향이다./독자 제공

지난 3일 오전 대구미술관에서 김종해(82)씨가 흰 장갑을 낀 채 병풍을 한폭 한폭 펼쳤다. 날개를 펼치듯 모습을 드러낸 4m 길이, 병풍 10폭 안에는 금강산 내 9개의 담(潭·못)을 노래한 시가 흘림 글씨로 쓰여 있었다. 대구의 이상화 시인이 서예가 서동균 선생에게 부탁해 독립운동가 김정규 지사에게 보낸 선물이 제작 8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날 ‘금강산 구곡담 시’가 담긴 병풍을 기증한 김씨는 김정규 지사의 셋째 아들이다. 김 지사는 1974년 별세하기 전까지도 “상화 시인이 선물한 것”이라며 병풍을 소중히 간직하고 시를 따라썼다고 한다. 구곡담 시는 조선 철종 대 학자인 난사 최현구가 내금강 만폭동 인근을 답사하고 지은 것이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고희동의 유화라며 공개한 시인 이상화 초상. 오른쪽은 이상화 사진./조선일보DB

이 병풍이 탄생하던 1932년 민족시인 이상화는 32세, 포해 김정규는 34세, 죽농 서동균은 30세였다. 세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치하 대구에서 활약한 청년들이었다. 병풍 마지막 10번째 폭에는 “죽농 서동균이 포해 김정규를 위해 쓰다. 이상화 드림”이라는 글이 쓰여있다.

대구가 고향인 이상화 시인은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통해 저항 의식을 드러내고 독립 운동에도 참여했다. 병풍을 제작한 서동균 선생 역시 당대 대구를 대표한 서예가이자 수묵화가였다. 김정규 지사는 경남 합천 출신으로 대구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며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다.

전문가들은 예술과 독립 운동 등을 통해 교류하던 세 사람이 병풍을 통해 마음을 나눈 것으로 보고 있다. 병풍에 담는 시로 금강산 구곡담을 소재로 택한 이유 역시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기개를 잃지 말자는 뜻을 서로 공유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이상화 시인은 금강산 일대를 찾은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여명’ 9월호에 ‘금강송가’를 발표했다.

지난 3일 대구 수성구 삼덕동 대구미술관에서 김종해(오른쪽)씨가 부친이 이상화 시인에게 선물받은 '금강산 구곡담 시' 병풍을 대구시에 기증했다/대구시

서화연구자 이인숙 박사(경북대 외래교수)는 “세 청년은 금강산을 통해 일제의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호연지기를 얻고 싶었을 것”이라면서 “이 병풍은 이상화를 비롯해 대구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교유 관계, 국토에 대한 생각 등을 알려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했다.

부친이 작고한 이후로도 40여년간 병풍을 보존해 온 김씨는 80세를 넘긴 이후 당시의 독립 정신이 담긴 이 작품을 본 고장에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다 최근 대구시에서 문화·예술 아카이브 구축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증을 결정했다. 김씨는 “병풍과 관련된 세 분이 모두 대구와 연이 깊은만큼, 이 작품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역시 대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3일 대구 수성구 삼덕동 대구미술관에서 독립운동가 故 김정규 지사의 아들인 김종해(왼쪽)씨와 이상화 시인의 종손 이원호(가운데)씨가 악수를 하고 있다./독자 제공

기증식에 참석한 이상화 시인의 종손 이원호씨는 “선대께서 뜻 깊은 교류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견뎌냈듯이, 코로나 시대를 맞은 우리도 그 뜻을 본 받아 이어 가겠다”고 했다. 이씨는 김씨에게 선물을 증정하며 감사를 표했다. 대구시에서도 채홍호 행정부시장이 직접 참석해 김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임언미 대구시 문화예술 아카이브 담당은 “오래도록 보관했던 소중한 작품의 기증을 결심해주신 김종해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면서 “예술 작품은 이야기가 덧입혀질 때 더욱 빛이 나는데, 병풍에 담긴 이야기의 힘이 대구의 근대 문화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지난 3일 대구 수성구 삼덕동 대구미술관에서 김종해(오른쪽 두번째)씨가 부친이 이상화 시인에게 선물받은 '금강산 구곡담 시' 병풍을 기증했다. 이날 기증식에는 채홍호(김씨 왼쪽)행정부시장, 이상화 시인 종손 이원호(김씨 오른쪽)씨, 최은주(왼쪽)대구미술관장이 참석했다./독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