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한 글 ,문장

병자호란때 유사이래 처음 항복한 조선의 왕 인조 (2014.12.29)

한문역사 2014. 12. 29. 21:53

때는 1637년 음 1월30일 혹한의 날씨속에서

조선의 제16대 국왕 인조임금은 피란처엿던 남한산성을 나섯다.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기 위해서였다.유사이래 초유의 항복이다.

항복의 禮에따라 임금이 입는 곤룡포를 벗고 신하의 옷인 남색전복 차림이었다. 

 남한산성으로 피란한지 꼭 47일 만이엇다.

:전하께서는 남색 전복 차림으로 세자와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섰다.

전하께서는 3公 6卿을 거느리시고 百 步 가량 걸어가 평지에서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한번 절 할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禮,

즉 세번 절하고 아홉번이나 머리를 땅에 찧었었다 ) 의 禮를 행하셨다.

실록에는 또 : 전하께서 삼전도로 나아갔다. 멀리 청 태종이 황옥을 펼치고 앉아있고

갑옷과 투구차림에 활과칼로 무장한 병사들이 방진을 치고 서 있었다.

전하께서 걸어서 陣 앞에 이르렀다. 청 장수  龍骨大의 보고를 받은 청 태종이 말했다.:

 지난날의 일을 다 말하려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다행스럽고 기쁘다.

전하께서 답했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이날 인조임금은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예를 올렸는데

 이 모습에 배열한 신하들이 주상전하를 외치며 울부짖었다.

조선왕의 이마에는 선혈이 낭자하고

이날의 항복으로 조선의 왕자와 대신들이 볼모로 끌려갔고

수 만명의 처녀들이 노예와 성적노리개로 또 끌려간다

이때 끌려간 처녀들이 몸을 더럽힌채 살아 돌아오니

이를 還鄕女 즉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라 비하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외에 항복조건으로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의 예를 다할것,

매년 청나라의 경조사에 예를 행할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때 원군을 보낼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말것 ,

매년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것,

또 2년뒤에는 :대청국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라 : 고 요구한다

비는 만주어, 몽골어, 한자로 쓰여졌는데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소호변에 잇는

높이 5.7m ,너비 1.4m의 삼전도비가 그것이다.

 비명은 大淸皇帝功德碑 이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뒤 청태종이 조선에 폐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했다 는 내용이다

 비문 내용은 조선에서 2개(이경석,장유)를 쓰고 청나라가 둘 중 하나를 택했다.

이 비문을 쓴이가 당시 문장가로 유명한 백헌 이경석(뒤에 영의정 역임 )이란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