芙蓉相思曲 / 雲楚 金芙蓉
別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依孤枕驚殘夢
望歸雲 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
容貌憔悴把鏡下淚
歌聲鳴咽對人含悲
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부용상사곡 / 운초 김부
이별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글월은 더디옵니다
생각은 님께 있으나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읍니다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읍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을 어찌 그리 신의가 없읍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리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읍니까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아타깝게도 홍안만 늙어가고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 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 계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기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읍니까
오직 바라옵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는 강을
건너 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이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 이란 특이한 '보탑시(寶塔詩)'를 쓴 사람은 1820년에 태어나 1869년까지 살다간 부용(金芙蓉)이란 기생이며 황진이,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시대 삼대 시기(詩妓)로 꼽히는 여류시인이라고 한다.
'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여간한 문재가 아니였던 모양이다. 열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부용(芙蓉)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하는 부용(芙蓉)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고 한다.
열두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재기를 칭찬하고, 수령의 수청을 독차지해 동료 기생의 시샘을 받았다.
그러나 부용(芙蓉)의 인생의 전부에는 김이양(金履陽)이라는 인물이 있었다.열아홉살이 되었을때 부용(芙蓉)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성천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으로 부용(芙蓉)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소개를 하였다고 한다.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호가 연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 때 성천부사로 부임해온 사또가 있었는데 신임 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부용(芙蓉)을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金履陽)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金履陽)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練光亭)'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芙蓉)을 소개하였는데, 그때 김이양(金履陽)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芙蓉)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金履陽)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芙蓉)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金履陽)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고 하는데, 천거에 대해 김이양(金履陽)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라고 말하여 부용(芙蓉)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김이양(金履陽)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芙蓉)을 끔찍히 사랑하였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두사람은 비록 김이양(金履陽)이 나이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이양(金履陽)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金履陽)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芙蓉)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생이별을 한 부용(芙蓉)은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芙蓉)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그때 부용(芙蓉)이 지었다는 이 詩가 바로 부용(芙蓉)이 남긴 시중 가장 아름다운 시인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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