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의당 한시모음

[스크랩] 김삼의당의 하일/삼도헌의 한시산책 165

한문역사 2015. 4. 4. 17:38

 

 

 삼도헌의 한시산책 165  /  김삼의당의 夏日

 

 

 

 

 

    

          

                      夏日 - 여름 날

 

김삼의당(金三宜堂

 

 


 日長窓外有薰風(일장창외유훈풍)  날은 길고 창밖엔 향기로운 바람부네

 

 安石榴花個個紅(안석류화개개홍)  어찌하여 석류화는 하나씩 붉게 피는가

 

 莫向門前投瓦石(막향문전투와석)  문앞으로 기와 돌 조각 던지지 마소

 

 黃鳥只在綠陰中(황조지재녹음중)  지금 녹음 속엔 꾀꼬리가 있다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여름더위가 한창일 때 필자는 무작정 일자산을 올랐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계곡에서 듣는 물소리가 청량하기 그지없다. 밤새 내린 비로 말끔하게 세수를 한 초목들이 맨얼굴로 반긴다. 생기 띤 여름 숲속 나뭇잎들이 수런거리며 볕쪼임을 즐긴다. 어디선가 간드러진 꾀꼬리 소리가 들린다. 꾀꼬리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삼의당 김씨의 여름시가 생각났다.

 

 해가 긴 여름날 삼의당이 거처하는 시골집 작은 창으로 훈풍이 불어온다. 창 밖에는 석류꽃이 하루가 다르게 피어오르고 있다.

 

 석류는 껍질 속에 알맹이가 많은 과일이서서 다산(多産), 특히 아들의 생산을 상징한다. 그 열매는 요즘 여성들이 갱년기 호르몬이 부족할 때 좋다고 해서 인기가 절정이다. 석류의 모양과 내용이 보석을 간직한 복주머니 같아서 사금대(沙金袋)라는 별명까지 겸하여 부귀다남의 뜻을 지니고 있다. 문인화나 민화의 소재로 즐겨 다뤄지는 석류의 꽃봉오리는 사내아기의 고추를, 열매는 사내아이의 음낭을, 보석같이 많은 씨앗들은 아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석류 그림은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또한 석류는 불로초와 함께 그려질 때 백자장생(百子長生)의 의미를 지니며, 황조와 함께 그릴 때는 ‘금의백자(金衣百子)’의 뜻을 나타낸다. 특히 혼례복인 활옷이나 원삼의 문양에는 포도문양과 석류문양·동자문양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포도·석류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과 같이 자손을 많이 낳고 특히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기복적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석류꽃이 피는 그 숲을 향해 기와조각이나 돌조각을 함부로 던지지 말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 그 숲속에 꾀꼬리가 있기 때문이다.

 

 꾀꼬리는 까치나 비둘기처럼 흔한 새가 아니다. 이 새는 따뜻한 남쪽에 머물다 4월말경 우리나라에 오는 여름철새다. 그렇지만 새 가운데 치장이 화려하고 아주 잘 생겼으며 소리 또한 곱다. 그래서 내숭떠는 고운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한자어로는 황작(黃雀) 또는 황조(黃鳥)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꾀꼬리 울음소리가 아름답다 하여 귀엽거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꾀꼬리에 빗댄다. 유리왕이 지었다고 하는 〈황조가〉에 꾀꼬리가 등장한다. 월령체 고려가요〈동동〉에서 4월령에도 '곳고리새'라 하여 꾀꼬리가 등장한다.

 

 꾀꼬리가 노니는 숲속을 향해 함부로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고 하는 시적화자의 섬세한 배려가 묻어나는 고운 시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이지만 석류꽃을 완상하고 꾀꼬리소리에 취해 무더위를 잊고자 하는 삼의당 김씨의 마음을 느끼면서 초복날을 시원하게 보내시기 바란다.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

 

 

삼의당은 전라도 남원의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났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2-1498)의 후손인 김인혁(金仁赫)의 딸이며,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笠)의 부인이다. 삼의당은 어려서부터 재예에 뛰어나 여공의 틈틈이 책을 놓는 일이 없어 일찍이 중국의 시문집을 비롯하여 경서며 사기류를 널리 섭렵하였다. 삼의당과 하립은 남원 출신인데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두 사람의 집안은 존경받는 학자 집안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데다가, 하립이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자 서른 살이 넘어서 낙향하였다. 부부는 진안(鎭安)에 땅을 마련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고 시문을 화답하며 살았다. 삼의당은 평생을 유교적인 규율과 부도(婦道)를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

 

 그녀의 시집인 「삼의당김부인유고(三宜堂金夫人遺稿)」에는 253편의 시와 22편의 문이 실려 있다. 그녀의 문집에서처럼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렸다 한다. 그녀의 평생소원은 남편이 과거에 등과하는 것이어서 산사에서 독서하고, 서울로 유학하는 일을 철저히 권장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였기 때문에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머리자락을 자르기도 하고 비녀를 팔기까지 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등과하지 못하였으며, 그는 평생을 두고 남편에게 권학하는 글을 많이 썼고, 가장 규범적이요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남긴 조선의 여류시인이었다.


2011. 7. 14

 삼도헌 정태수 발송

 

 

 

 

 

 

 

출처 : 서예세상(삼도헌정태수)
글쓴이 : 서예세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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