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 인용문 2집

나 홍범도 ,고국 강토에 돌아왔네(이 동순)

한문역사 2023. 11. 8. 10:40

나 홍범도, 고국 강토에 돌아왔네..."

  • 기자명 권혁찬 기자 
  •  입력 2021.08.25 11:52
  •  수정 2021.10.22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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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홍범도 장군 추모시' 작가 이동순 시인을 만나다

"나 홍범도, 고국 강토에 돌아왔네. 저 멀리 바람 찬 중앙아시아 빈 들에 잠든 지 78년 만일세. 내 고국 땅에 두 무릎 꿇고 구부려 흙냄새 맡아보네. 가만히 입술도 대어보네, 고향 흙에 뜨거운 눈물 뚝뚝 떨어지네."

 

이동순 시인

지난 18일 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 홍범도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추모사에 인용한 이동순 시인의 작품   '홍범도 장군 추모시' 전문이다. 

1인칭 화법을 동원한 짧은 이 추모시는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매우 간결하게 압축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동순 시인의 ‘홍범도장군 추모시’가 화제가 된  가운데 , 이를 계기로 시인이 대하 민족서사시 ‘홍범도 장군’에서 밝힌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장군의 생애를 음미해보노라면 굴곡 많던 시기 평안도에서 태어나 황해도, 묘향산, 금강산, 함경도 산악지대 등을 헤매 다니며 살았다. 늘 쫓기는 삶이었고, 한날 한시도 평온의 날이 없었다. 신분은 머슴, 구한국 진위대의 나팔수, 제지공장 노동자, 승려, 산포수 따위로 밑바닥 삶을 전전하였다.

이처럼 신산한 삶을 겪었으므로 현실의 고통 및 그 원인과 배경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의 근원이 모두 제국주의 침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이 각성을 기초로 해서 일제 침략자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자기 삶의 확고한 신념으로 굳혀갈 수 있었다. 함경도 일대에서의 신출귀몰했던 전투와 빛나는 승리는 오로지 홍범도 의병대만 누릴 수 있었던 영광이다. 이 시기 함경도 지역에서 홍범도장군의 이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설이었다. 하지만 제국주의 세력이 나날이 확장되면서 시운이 불리해지자 홍범도의병대는 두만강을 넘어 만주 땅으로 진출한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보다 확장되고 결집된 역량을 비축하려는 하나의 선택적 디아스포라였다.

만주로 이동한 뒤에는 봉오동 지역에 머물면서 이제는 의병대가 아니라 당당한 독립군 조직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특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치르고 난 뒤부터는 정규 독립군부대의 면모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참으로 광채가 나는 이 두 전투는 만주지역 여러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협력적 조직에 의한 성과였지만 그 실질적 주역은 단연코 홍범도장군이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막대한 패배를 겪은 일본은 만주지역 대한독립군의 완전소탕을 위한 대대적 군사작전을 준비한다. 사단급 병력이 이에 총동원되었다...”(이동순 시인)

이동순 시인은 장편대하서사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를 1983년에 시작해 무려 20년 만에 완성했다.이어  2018년 10월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기, 서거 75주기를 맞이해서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고려인 공동묘지에 묻힌 홍범도장군을 찾아 묘지에 꽃다발과 함께 서사시 ‘홍범도’ 전집 10권을 바쳐 화제가 됐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고려인 공동묘지에 있는홍범도 장군 묘소.아래 이동순 시인이 헌사한 홍범도장군 전집이 보인다@사진 이동순 시인 제공

이동순 시인은 어찌해서 20년간이나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에 천착하게 된 것일까?

이 시인이 밝힌 ‘홍범도 장군을 만나게 된 계기’와 집필과정,출판에 얽힌 이야기 등을  풀어본다.

-홍범도 장군을 접하시게 된 계기는?

충북대 재임시절 부임 초기에 그곳 부근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에서 사셨던 겨레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삶에 흠뻑 빠져들어 형설출판사에서 발간한 '단재전집'을 구입하고 줄을 그어가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독사신론', '조선상고사', '낭객의 신년만필', 그리고 '조선혁명선언'을 읽으며 온몸이 감전된 듯 부르르 떨리는 감동을 느꼈지요. 역사의 발견을 '아'와 '비아'의 대립에서 찾는 놀랍고 명쾌한 정리에서도 감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단재독서로부터 발단이 돼 독립운동사 자료를 많이 읽었습니다.그 중 새로운 발견이 바로 홍범도 장군이었습니다.대부분의 의병장, 독립군 대장은 선비, 양반, 귀족, 지식인 신분이지만 영해의 신돌석, 농민 출신 김백선,포수 출신 홍범도 이 세 분은 서민이었습니다. 독립운동사 읽기에 빠져든 것은 순전히 독립운동을 하시다 순국하신 내 조부님 일괴공 이명균 선생의 유훈 때문입니다.조부께서는 늘 바람결에도 어린 손자의 귀에 시인으로 국문학자로 걸어가야할 길이 따로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지요.

1982년 여름, 특별한 계획을 실천에 옮겼습니다.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방대한 서사시의 구조로 엮어보겠다는 웅대한 포부였습니다.시창작에 몰두해서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1,870행의 1차 작품 원고를 탈고했습니다. 그 전문이 <창작과비평> 복간호에 발표됐습니다.문단과 학계의 찬사와 호평을 들었습니다. 그게 전체 5부작 10권으로 구성된 민족서사시 "홍범도"의 제1부에 실렸습니다.

-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당시 잊을 만하면 국내에 홍범도 관련 사진이나 자료를 발굴소개하던 핀란드 헬싱키대학의 모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관련자료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그런데 무서운 답이 왔습니다.자료는 돈이며 시간이며 노력과의 싸움인데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협조를 해줄 수가 있다는 답변이었습니다.크게 실망했지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가 컸던 지라 허탈감과 실망도 컸습니다. 웅대한 포부로 막상 창작을 시작했지만 국내 자료는 너무도 부족했고 홍 장군 관련 서술은 극히 부정확했습니다.자유시참변 이후 러시아에 남아 사셨으므로 구소련에 사시다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홍범도를 빨갱이 취급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졌습니다.

-집필에 시간이 꽤 오래 걸린 편입니다.

연재 첫회를 발표한 뒤로 작품쓰기는 저절로 의욕이 떨어지고 휴식이 길어지면서 시적 의욕과 상상력도 점차 고갈되며 마치 짓다만 농토처럼 차츰 황폐해져갔습니다.그리하여 민족서사시 "홍범도" 집필은 2003년 완성된 전집이 발간되기까지 17년 동안 잡초만 수북히 돋아난 묵정밭이 되고 말았지요.

오랜 기간 버려둔 민족서사시 "홍범도" 작품을 다시 꺼내어 쓰게 된 것은 2000년 미국 체류시절입니다. 당시 1년 동안 시카고대학에 방문교수로 가 있었습니다.그곳 도서관에 작은 방을 받았는데 창문조차 없는 두 평 정도의 공간이었습니다.막막한 일과를 보내는데 주로 독서와 글쓰기였죠. 문득 이 멋진 집중의 시간에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이런 궁리와 탐색의 끝에 17년 전 쓰다 만 서사시 "홍범도"를 떠올렸습니다. 미국에 와 있는 동안 기필코 이 작품을 완성해서 가리라. 바로 그날부터 도서관 한국 코너를 검색했습니다.

이동순 시인의 역작, 민족대서사시 '홍범도' 전집 (전5부작 10권)

-미국체류가 집필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준 셈이네요.

네~ ~ 미국 대학들의 한국학 소장자료가 엄청납니다. 단연 보스톤 하버드대학의 동아시아학과 옌칭도서관이 으뜸이죠.한 학과 도서관인데도 규모나 장서 숫자가 대단합니다.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중동까지 어마어마한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습니다.한국의 현대문학 전공 교수들 중 어떤 사람은 이곳에서 찾아낸 옛 자료를 발굴이란 이름으로 신문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홍범도 자료를 찾아내기 위해 시카고에서 보스턴까지 15시간 거리를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서 달려갔습니다. 옌칭도서관 규모는 듣던 대로 엄청났습니다.가장 놀랍고 감동적인 모습은 남북한 도서들이 아무런 격의 없이 서로 몸을 기댄 채 가지런히 다정하게 알파벳 순서로 꽂혀있는 것이었습니다.북한에서 발간된 최신자료까지 빠짐없이 모두 구입해서 비치해놓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북한자료를 일반도서관에서 만날 수 없어요. 그러니 도서관 자료도 그대로 분단상황입니다.통일원 도서관에는 북한자료가 있는데 아무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2급비밀 취급인가'를 사전에 얻은 경우만 볼 수 있습니다.그나마 충분한 자료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옌칭도서관에서 흥분상태에 빠져 무려 3박4일 동안 날마다 틀어박혀 필요한 자료를 찾았습니다.북한 학계에서는 홍범도 연구논문이 많았습니다.중국쪽 자료, 러시아쪽 자료까지 찾았지요.홍범도 장군의 구술을 정리한 '홍범도 실기',홍범도 부하들이 장군의 추억을 회고한 서술들,꽤 풍성한 자료를 수집해서 돌아왔습니다. 서부의 버클리대학도 한국학이 강한 곳이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할 때 일부러 가봤지만 그다지 특별한 게 없었습니다.

-미국대학들의 소장자료가 엄청난 도움이 됐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구해온 자료를 방바닥에 모두 펼쳐놓고 읽으며 생각하며 상상력을 키웠습니다.

당시 시카고의 내 숙소는 미시건 호수가 조금 내다보이는 방 하나 짜리 소박한 원룸,거기에 간이탁자와 의자를 갖춰놓고 노트북으로 작품쓰기를 시작했습니다.한창 흥이 달아오르면 종일 쓰고 후딱 저녁끼니를 때운 뒤 곧바로 책상에 앉아 새벽까지 몰두하기도 했습니다.만상이 잠든 깊고 고요한 밤 홍범도 장군과의 영적 대화는 무릇 몇 번이었던가? 작품의 순조로운 진행이 막힐 때마다 홍범도 장군이 찾아오시어 출구를 열어주시는 그런 놀라운 실감을 자주 했습니다.

-장군과의 영적대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실감했습니다. 작품의 전체 윤곽이 갖춰지던 그해 11월,시카고에는 큰 눈이 내렸습니다.이틀을 퍼부었는데 거의 1m도 넘게 왔습니다.눈보라가 창문에서 닝닝거렸습니다.그 순간 창밖에 누군가가 백마를 타고 다가와 작품 쓰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깜짝 놀라 보니 홍범도 장군이 아니신가. 온몸에 눈보라를 뒤덮어 쓰신 채 당신의 작품을 쓰고 있는 나를 창밖에서 한참동안 바라보시다 사라졌습니다.어찌 이런 환상이나 백일몽이 다가온 것일까? 깊은 침잠과 몰입의 과정에서 이처럼 놀라운 경험도 일어날 수 있는가 싶었습니다.그후 12월 초순, 민족서사시 "홍범도" 전체 분량이 어느 정도 윤곽이 완성됐습니다.

2001년 미국에서 돌아와 줄곧 서사시 "홍범도" 작품을 다듬고 또 다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그 방대한 작품 전체를 날마다 읽고 또 읽는 작업을 되풀이했습니다.표현이 잘못 된 곳, 역사적 사실의 부정확한 부분,실감이나 현장감을 강화시킬 곳,전체 리듬에서 현저히 약하게 느껴지는 부분,혹은 너무 액센트가 지나치게 들어간 곳,읽으면 읽을수록 허술한 부분이 자꾸 드러났습니다.

-작품완성 연도가 2002년이라고 하셨지요

2002년 여름, 영남대 해외봉사단이 꾸려지고 나는 베트남팀 단장으로 학생들과 호치민 외곽 투득지구 직업기술학교에 갔습니다.그곳 낡은 학교 건물을 새로 도색하고 실습장비를 교체해주고 베트남 학생들과 함께 오락, 스포츠, 함께 우정쌓기 등으로 1개월을 그곳 기숙사에 머물렀습니다.

호치민에서도 거의 매일 같이 "홍범도" 작품 다듬기에 깊이 골몰했습니다.남국의 여름밤, 1인용 모기장 속에서 노트북을 켜고 밤 깊도록 작품읽기에 온힘을 쏟았습니다.온 생애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친 호치민의 삶과 홍범도 장군의 삶은 닮았습니다.홍 장군은 아내를 일본군의 악질적 고문으로 잃었고 큰 아들 양순은 아버지 부대의 의병대원으로 일본군과 교전 중 정평 바배기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결핵을 앓던 막내아들은 혼자 남의 집에서 병사했지요.장군은 전가족을 나라에 바쳤습니다.

실질적 작품완성은 베트남 호치민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한국과 미국, 베트남을 돌면서 드디어 완성이라는 단계에 도달한 과정은 홍범도 장군이 함경도를 거쳐 만주 봉오동, 청산리, 러시아의 스보보드니, 이르쿠츠크, 마침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어 알마티, 크질오르다 등지로 떠밀려다닌 그 고단한 유랑의 세월과도 닮아있습니다.

-당시 출판시장 상황으로 보면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2002년 가을, 나는 탈고한 "홍범도" 서사시를 가제본해서 들고다니며 여러 출판사와 접촉했습니다.

하지만 국내 유수의 출판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지금은 서사시의 시대가 아니다' '10권 짜리 전집을 발간해도 상업성이 전혀 없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등등 이런 이유로 모두 퇴짜를 맞았습니다.실망과 무기력에 넋을 놓고 있던 어느 날,대학에 자주 오던 국학자료원 정찬용 대표를 만나 그간의 정황을 무심코 털어놓으니 뜻밖에도 자기가 흔쾌히 출판을 맡겠다고 했습니다. 민족서사시 "홍범도"는 이런 곡절 속에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동순 시인=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시,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좀비에 관한 연구』, 『강제이주열차』, 『독도의 푸른 밤』 등과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한국인의 세대별 문학의식』을 비롯해 한국가요사를 다룬 『번지 없는 주막』, 『마음의 자유천지』, 민족서사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또한 분단시대 매몰시인들의 작품을 수집 정리하여 『백석 시전집』, 『조벽암 시전집』, 『박세영 시전집』 등을 엮었다. 신동엽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영남대 명예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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