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끓던 나이라네 신위
초승달 고운 눈썹, 하얀 모시 적삼 입고
마음속 정 둔 말을 꾀꼴꾀꼴 속삭이네
고운이여! 내 나이가 몇인지는 묻지 말게
오십년 전 스물세 살, 피가 끓던 나이라네
澹掃蛾眉白苧衫(담소아미백저삼)
訴衷情語鶯呢喃(소충정어앵닐남)
佳人莫問郞年幾(가인막문랑년기)
五十年前二十三(오십년전이십삼)
이 시를 지은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서예가 가운데 한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말의 대문인 김택영(金澤榮)이 조선조 500년의 한시사에서 제일의 대가라고 평가할 정도로 걸출한 시인이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이랴. 자하는 이정(李霆), 유덕장(柳德章)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묵죽(墨竹) 화가의 한분으로 일컬어지고 있고, 산수화에도 정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그러니까 자하는 시와 그림과 글씨 모두가 대가의 경지에 오른 이른바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의 전방위 예술가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감성이 풍부한 전방위 예술가가 어느덧 일흔 셋이 되었을 때였다. 그에게 한 젊은 여인이 고운 눈길을 보내면서 다가왔다. 기남(畿南) 출신의 변승애(卞僧愛)라는 청순가련형의 참 어여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붓 시중과 먹 시중을 하면서 자하를 모시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소실(小室)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그 때 자하가 이 젊은 여인에게 지어준 것이 바로 위의 시다.
보다시피 그녀는 곱게 그린 눈썹이 초승달 같은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하얀 모시 적삼을 걸쳐 입고, 그 무슨 꾀꼬리처럼 마음속의 사랑을 꾀꼴꾀꼴 속삭이고 있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런 여인을 눈앞에 두고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는 자하의 가슴도 물론 심하게 요동쳤지 싶다. 천둥 번개가 와장창 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고운이여! 내 나이 따위는 묻지를 말아라. 도대체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시인은 엉뚱한 데로 난데없이 말머리를 홱 돌린다. ‘오십년 전만 해도 나이가 스물셋에 불과했다’고. 태권도의 돌려차기에다 이단 옆차기를 겸한 솜씨다. 내 나이가 일흔 셋이나 되었으니 손녀 같은 너를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뜻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내 나이가 만약 스물 셋이라면, 피가 펄펄 끓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어 볼 수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여백에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 그러고 보니 사십년 전에는 나도 또한 스물세 살 나이의 피가 시퍼런 젊은이였네. 혹시 내게 뜨겁게 작업을 걸어오는 어여쁜 아가씨 어디 하나 없나? 그런 얼빠진 아가씨가 있다면 나도 자하처럼 멋진 시 한 수를 지어주고 점잖게 타일러 보내면서 멋이라도 좀 부려보고도 싶은데, 그런 아가씨 어디 하나 없나?
(이종문: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매일신문 9월 3일자 [이종문의 한시 산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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