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시인- 李玉峰
조선시대에 시로써 이름을 떨친 여인 가운데 이옥봉이란 이가 있다. 옥봉은 그녀의 호이고 이름은 숙원(淑媛)이라 한다. 그녀의 시는 <嘉林世稿 附錄>에 <玉峰集>이라 하여 32편이 실려 전하고 있다. <소화시평>에는 ‘이씨가 국조의 제일’이라고 칭송하고 있으며, 신흠도 난설헌과 더불어 조선 제일의 여류 시인이었다고 평하였다.
옥봉의 아버지는 선조 때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이다. 이봉은 종실의 후예였는데 젊어서 방탕하였으며, 과거공부는 아니하고 명산을 유람하면서 즐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면서도 박식하고 시문에 능하여 정철, 이항복, 유성룡 등 당대 명류들과 교류하였던 사람이다. 옥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아버지가 특히 기이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또한 문자를 가르침에 남보다 뛰어났으며 시짓는 솜씨가 공교로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文才 있고 資色을 갖춘 옥봉이었지만 이봉의 서녀였기에 당시의 庶流禁錮法에 묶여 양반의 정실이 되지 못하고 소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자기의 재주를 자부하여 남에게 쉽게 몸을 허락하려 하지 않은 그녀는 남명 조식의 문인인 雲江 조원(趙瑗)이 단아하면서 문장으로 이름났다는 말을 듣고 자청하여 그의 소실이 되었다. 남편 조원은 옥봉의 문재를 아끼고 인정하여 그의 친구 앞에서 그녀에게 시를 주어주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옥봉은 조원이 외직으로 나갈 때도 언제나 따라다녔으나 한 편의 시 때문에 버림을 받는다. 그녀가 남편과 헤어지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한다.
한번은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어떤 이웃집 여자가 찾아와서 남편이 남의 소를 잡다가 관가에 끌려갔다며 운강공에게 ‘형조에 편지를 보내어 그 죄를 면하게 해달라’고 애걸하였다. 이씨가 불쌍히 여겼지만, 감히 남편에게 알리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비록 감히 공에게 써달라고 청하지는 못하지만, 마땅히 그대를 위해 내 소장을 써주겠다.’고 하고는 절구 한 편을 지어 주었다.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洗面盆爲鏡/ 참빗에 바를 물로 기름삼아 쓰옵니다. 梳頭水作油 /첩의 신세가 직녀 아닐진대 妾身非織女/ 낭군께서 어이 견우가 되리이까 郎豈是牽牛’라고 써주니 형조의 여러 당상관들이 시를 보고 몹시 놀라, 그 여자에게 누가 소장을 써 주었는가고 물었다.
그 여자가 당황하여 사실대로 이야기함에 여러 당상관들이 그의 죄를 억울하게 여기고 곧 석방하였다. 그리고는 시를 소매에 넣고 공에게 찾아가서 ‘공이 이처럼 기이한 재주가 있는데도 우리가 늦게 알게 된 것이 한스럽다.’고 말하였다. 공은 곧 이씨를 불러 ‘그대가 나를 따라서 여러 해 살았지만 여태껏 실수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소백정의 아내를 위하여 시를 지어 주어 관리들이 옥에 가두었던 죄수를 놓아주게 하고 남들의 귀와 눈을 번거롭게 하였느냐? 이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니, 곧 그대의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였다. 이씨가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하였지만 남편은 끝내 용서하지 않고 친정으로 돌려보냈다한다. 이렇게 하여 헤어진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은 이별과 그리움의 시가 옥봉 시의 주류를 이룬다.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에 안부가 어떤지 묻노라니
月到紗窓妾恨多 달빛 비친 사창에서 첩의 한탄 많기도 하여라
若使夢魂行有跡 꿈속의 넋이 자취 있었더라면
門前石逕半成砂 문 앞의 돌길 반쯤 모래밭 되었으리
위의 시는 바로 헤어진 남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잘 그리고 있다. 만약 남편을 찾아헤맨 넋이 흔적이 있었더라면 남편이 계신 문 앞의 돌 길이 허물어져 모래밭이 되었을 것이라는 결구에 시인의 애절한 마음이 응축되어 있다. 이러한 평생의 이별은 뼈아픈 한이 되어 끝내 병이 되었는데 술로도 고치지 못하고 약으로도 고치지 못하게 된다.
다음의 시 역시 별한의 애절함을 노래한 것이다.
시제는 <閨情>이다.
有約郞何晩 약속해놓고 어찌 이리 늦으시나?
庭梅欲謝時 뜨락에 핀 매화 다 떨어지려 하는데
忽聞枝上鵲 홀연히 가지 위의 까치 소리에
虛畵鏡中眉 부질없이 거울 속의 눈썹 그린다오.
매화 피는 봄에 다시 만나자 약속하였건만 뜨락의 매화 다 떨어지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님은 아니 오신다. 갑자기 나무에서 우는 까치 소리를 듣고, 속언에 까치는 반가운 손님이 오는 징조라 하였거늘 혹여 반가운 님이 오시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거울을 보고 단장을 해 본다.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심이 시 전체에 잘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구의 ‘虛’자가 그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대개 옥봉의 시는 이처럼 이별과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 많으나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五日長關三日越 닷새 거리 긴 고개를 사흘에 넘어서자
哀辭唱斷魯陵雲 노릉의 구름 속에서 슬픈 노래도 끊어지네
妾身亦是王孫女 첩의 몸도 또한 왕손의 자손이라서
此地鵑聲不忍聞 이곳의 접동새 울음은 차마 듣기 어려워라
시제는 <寧越道中>이다.
비운의 임금 단종이 묻혀 있는 영월을 지나면서 읊은 시이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이 왕실의 후예였으니 옥봉도 역시 왕손의 자손이라 두견새 소리를 듣자니 단종이 당했던 그 때의 참사가 생각나 차마 듣기 어렵다고 한다. 이 시는 사어가 씩씩하고 힘차며 처량하면서도 아름다우며 비분강개하여 충신절사의 시 같다. 허균이 옥봉의 시를 淸健․淸壯하다고 하면서 여성의 화장기가 없어 가작이 많다고 평가하였는 바 바로 이 시를 두고 이른 것이다.
옥봉은 남편 조원과 헤어진 후 시로써 自娛하며 여도사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조원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으며 임진왜란을 만나 정절을 지키다 죽었다한다. 옥봉의 이름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그녀가 지은 시들을 뽑아서 <列朝詩集>속에 싣고 ‘閨秀 玉峰 李氏’라 칭하였다하니 당시 옥봉의 문명은 황진이․난설헌에 뒤지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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