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김성달 가족10명 모두 시인이었다.. 시집 '안동세고''연주록'발굴
조선시대 한 집안에서 2대에 걸쳐 활동한 시인 10명의 작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부부 시집과 자녀들의 시집이 가계(家系)와 함께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청주(靑洲) 김성달(1642∼1696)과 부인 연안 이씨(1643∼1690)의 시집 '안동세고(安東世稿·사진)'와 그 자녀들의 시를 담은 부록 성격의 '연주록(聯珠錄)'에 수록된 한시 421수가 그것이다.
이 책을 발굴한 한문학자 문희순(44·여·배재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사는 27일 "현장답사 결과 김성달의 다섯 아들 중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8대 조상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고 밝혔다.
조선후기의 가족연가로 평가되고 있는 '안동세고' 중 문 박사가 국역한 <아내의 '회음'시에 차하여>라는 김성달의 시는 "끝없는 정 있음에 끝없이 기쁘니/백발 꺼려 않고 단심 함께 나누고져./다시 모름지기 세세토록 부부되어/저승에서도 복록 누리며 절로 편안하리."라고 노래하고 있다.
문 박사는 "김성달이 조선 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남문루(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서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1561∼1637)의 증손자"라며 "조선의 선비정신이 김좌진 장군의 독립 사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금의 청와대 맞은편에 저택을 갖고 있던 우의정 김상용은 겸재 정선의 그림 '청풍재'에 그의 집이 나올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1636년 왕족을 데리고 강화도 피난길에 올랐고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1570∼1652)은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국에 끌려갈 때 동행한 인물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라는 유명한 시조를 지었다.
김상헌은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그는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돼 4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있으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다 1646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다.
조선의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김상헌의 자손 김창협(1651∼1708,김성달의 8촌)은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아들로 아버지가 진도에 유배된 뒤 숨지자 산중에 은거했다.
실제로 김상용의 순절 뒤 김성달은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당시는 섬)로 내려가 살았다.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생가터는 홍성군 갈산면에 있다.
여성들의 시가 가득한 이 책은 조선 후기 문학평론가인 이규경(1788∼?)이 '시가점등'이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일(鴨東古今未曾有也)"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문학사적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 집안에서 10명이 시인으로 활동한 사례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희귀 사료로 꼽힌다. 문 박사는 "조선시대 여류시인의 발자취를 더듬다가 예학사상의 대가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 후손에게 요청해 대전 송촌동 고택의 다락방에서 책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9명의 자녀 중 4남 3녀가 시인이었고 서모 울산 이씨가 시를 썼기 때문에 김씨 부인 연안 이씨까지 합하면 모두 5명의 여류시인이 2대에 걸쳐 활동한 셈"이라며 "부부와 자녀 7명, 서모까지 모두 시인이었던 것은 이 집안이 여성에게도 사서삼경을 가르친 평등정신의 발로"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대문장가 김창협의 딸이 젖몸살 후유증으로 19세로 사망할 당시 '내가 죽어서 이름 석자 아버지의 붓을 빌려서 남기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이 집안 여성들의 기개가 대단했다"며 "이 같은 여성들의 강한 정신력이 어린시절의 김좌진에게 이야기로 전해졌을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대전 유성구는 양성평등 시각에서 김성달의 막내딸인 호연재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추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