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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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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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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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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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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대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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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대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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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대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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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대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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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대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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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헌(翼憲) → 충익(忠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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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춘(囿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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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陽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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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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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 정광성(鄭廣成, 1576 ~ 1654)
모친 - 황근중의 딸 |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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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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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인조 6년인 1628년에 별시 문과에 동생 정치화와 같이 합격한 뒤 청요직과 세자 시강원을 거쳐 이조 정랑# 등의 요직을 지냈다. 병자호란 시기에는 도원수 김자점 밑에서 종사관을 맡았고,# 평안 감사를 지내던 인조 18년에 용골대가 병자호란 때 도망간 포로값을 내라고 협박했으나 굴복하지 않은 기개를 보여주기도 했다.# 대사간, 대사헌과 6조의 판서를 모두 거쳐 인조 27년(1649년)에 우의정에 올랐고,# 효종 즉위년(1649년)에 좌의정,# 효종 1년(1651년)에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다.# 이후 현종 14년(1673년) 병으로 면직되기 전까지 23년 동안 5번의 영의정을 지냈으며, 37번의 사직 상소를 낸 적이 있다.[출처1] 정승 자리에 오르기 전에 6조의 참의(정3품), 참판(종2품), 판서(정2품)를 모두 지냈는데, 이 기록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가히 관직 생활에서 경험해볼 것은 다 해본 셈이다.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에서 송시열, 이시백과 같이 자의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결정했으나, 송시열이 의례를 인용해 얘기한 체이부정(體而不正)[7]의 주장이 가진 폭발력을 감지했기 때문에 1년복의 사유를 국제로 들자고 했고, 송시열은 대명률의 경우까지 끌어들여 1년복의 사유에 대한 정치적 포장을 했다. 후에 서인이 갈아엎은 현종개수실록에는 이 부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8]
마지막 상소 즈음에는 정말로 몸이 불편하여 (중풍이었다고 한다.[출처1]) 면직되었고 6개월 후인 현종 14년(1673년) 10월에 사망한다. 초기(숙종 6년) 시호는 익헌이었다가 순종 3년 8월 20일에 충익으로 변경되었다.
현종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들어갔다.[10]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에서 송시열, 이시백과 같이 자의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결정했으나, 송시열이 의례를 인용해 얘기한 체이부정(體而不正)[7]의 주장이 가진 폭발력을 감지했기 때문에 1년복의 사유를 국제로 들자고 했고, 송시열은 대명률의 경우까지 끌어들여 1년복의 사유에 대한 정치적 포장을 했다. 후에 서인이 갈아엎은 현종개수실록에는 이 부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8]
마지막 상소 즈음에는 정말로 몸이 불편하여 (중풍이었다고 한다.[출처1]) 면직되었고 6개월 후인 현종 14년(1673년) 10월에 사망한다. 초기(숙종 6년) 시호는 익헌이었다가 순종 3년 8월 20일에 충익으로 변경되었다.
현종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들어갔다.[10]
남인이 편집했던 현종실록의 졸기에서는 재지가 넉넉하고 명민해서 집안 관리 잘하고 정승이 된 지 25년 동안 세력을 부리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했으나, 시류에만 영합하며 국사를 제대로 책임지려고 한 적이 없고,[11] 뇌물로 구설수에 올랐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현종개수실록에서는 추가적으로 사신의 평을 덧붙여 위와 같이 예송논쟁 때의 처신과, 남인 허목의 의견을 깐 것을 높게 평가하며,[12] 허적이 그의 지모를 두려워 했는데[13] 정태화가 죽자 허적이 멋대로 하는 걸 막을 사람이 없었다고 한탄하기까지 한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정태화를 가뭄과 기근의 대재앙기였던 경신대기근의 리스크를 조선이 넘긴 것은 '리스크 관리형' 재상이었던 정태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정태화를 호평했다. #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정태화를 가뭄과 기근의 대재앙기였던 경신대기근의 리스크를 조선이 넘긴 것은 '리스크 관리형' 재상이었던 정태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정태화를 호평했다. #
졸기에도 나오지만, 그의 집안 관운은 탁월했다. 그의 현조 할아버지가 중종 시절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던 정광필이며, 정광필의 손자이자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정유길은 좌의정을 지냈다. 할아버지 정창연도 광해군과 인조 시절 좌의정을 지냈으며[14] 아버지 정광성(鄭廣成)은 형조 판서, 작은 아버지 정광경(鄭廣敬)은 이조 참판, 동생인 정치화(鄭致和)는 좌의정, 다른 동생인 정만화(鄭萬和)는 예조 참판, 작은 아버지 정광경의 아들인 사촌 동생 정지화(鄭知和)는 좌의정을 지냈다. 후손의 관운도 뛰어나 차남 정재숭(鄭載嵩)은 우의정, 오남 정재륜(鄭載崙)은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가서 효종의 딸 숙정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 장남 정재대의 손자 정석오(鄭錫五)는 정재륜의 외아들 정효선(鄭孝先)이 후사없이 일찍 죽자 효선의 양아들로 후사를 이었으며 좌의정까지 올랐다. 더 많은 사항은 할아버지 정창연(18세) 때부터 그의 7대손까지(27세)의 주요 인사들의 간찰첩인 <선세필적(先世筆蹟)>에 수록된 인물 소개 링크를 참조. 서울시 동작구 솔밭로에 있는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에 증조할아버지 정유길, 할아버지 정창연 등과 함께 묘소가 있다. 그 외에 증조할아버지의 외손자, 그러니까 정태화에게는 고모 할머니의 아들이 훗날 김상헌, 김상용이다.
이런 그 집안의 관운 때문에 다음과 같은 야사도 존재한다. 정태화가 공부하러 절에 들어갔는데, 먼저 들어와 맹렬히 공부에 정진하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얘기를 하다 보니 서로가 생년월일은 물론 태어난 시간까지 동일한 것을 서로 알게 됐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사람은 공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 자신은 가난한 집안의 사람이지만 사주팔자가 워낙에 관운이 좋다고 해서 집에서 무리하게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거였는데, 같은 사주팔자라면 당연히 집안 좋은 당신의 관운이 좋은 것이지 나는 아닐 거니, 집안 사정도 안좋으니 무리해서 공부할 필요는 없다라고.[출처2]
이런 그 집안의 관운 때문에 다음과 같은 야사도 존재한다. 정태화가 공부하러 절에 들어갔는데, 먼저 들어와 맹렬히 공부에 정진하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얘기를 하다 보니 서로가 생년월일은 물론 태어난 시간까지 동일한 것을 서로 알게 됐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사람은 공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 자신은 가난한 집안의 사람이지만 사주팔자가 워낙에 관운이 좋다고 해서 집에서 무리하게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거였는데, 같은 사주팔자라면 당연히 집안 좋은 당신의 관운이 좋은 것이지 나는 아닐 거니, 집안 사정도 안좋으니 무리해서 공부할 필요는 없다라고.[출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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