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스크랩3 화보

[스크랩] 봉화와 금씨의 역사적 배경

한문역사 2014. 9. 24. 20:55

봉화와 금씨의 역사적 배경

 

                                                     

자료편집 ; 봉화금씨서울경기청장년회

 

청량산 육육봉(六六峯)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 믿을손 도화(挑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부가 알까 하노라.

                                                      --퇴계

□ 봉화(奉化) 연혁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 중에서로 대체 추후 보완 예정

 

꿈의 마을 봉화, 봉화로 가는 길

반변천을 따라 일월산 턱밑까지 찾아온 나의 북부 경북 답사길은 이제 꿈의 마을 같은 봉화로 향하고 있다. 주실에서 가곡을 지나면 곧 청기면 산골을 지나게 된다. 청기면을 지나면 봉화군 재산면, 재산면 지나면 명호면, 차는 사뭇 청량산 동북쪽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첩첩산중은 산중이로되

험하다는 생각도, 외지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편안한 정취가 살아나고 가을이면 경상도 말로 ‘천지 빛깔이 고추’인지라 그것이 볼거리라면 큰 볼거리다. 그리고 명호에 다가서 우리는 다시 낙동강과 만나게 된다. 청량산 서쪽자락을 타고 흐르면서 도산서원 앞을 지나 안동호로 흘러드는 낙동강 상류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봉화군 춘양과 봉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지금 나의 답사기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나는 지금 봉화를 쓸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면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봉화를 첩첩산중의 태백산 아래 땅으로 자연산송이, 춘양의 춘양목, 토종 대추와 복수박 정도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우리의 양반문화 전통이 안동 못지않게 강하게 남아있음을 먼저 말하는 역사와 문화와 전통의 고장이다.

봉화에 가면 봉성면의 향교, 법전의 진주 강씨 마을, 오록의 풍산 김씨 마을, 닭실의 안동 권씨 마을, 해저의 의성 김씨 마을, 황전의 안동 김씨 마을, 북지리의 봉화 금씨 마을이 우리가 안동의 옛마을 답사하듯 두루살필 명소들이다.

........

 더욱이 안동에 비해 봉화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외지인의 상처를 받지 않고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하고 있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민속촌이다. 그래서 봉화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봉화의 전통마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나 같은 이의 답사기를 오히려 두려워하고 미워한다.

....... 

그래서 나는 지금 봉화 답사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는 봉화로 가는 길을 버리고 낙동강을 따라 다시 청량산으로 향하여 안동으로 들어간다. 옛날엔 퇴계가 청량산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웠다고 하더니 나는 지금 차라리 그 청량산으로 갈지언정 봉화엔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시심(詩心)이 모자라 이 마음을 노래하지 못하노니 퇴계가 청량산을 사랑하여 부른 노래에 나의 마음을 얹어본다.

(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 중에서 )

 

□ 봉화(奉化) ()씨의 유래

금씨는 고대(古代) 기자(箕子)와 함께 들어온 금 응(琴 應)이 문장과 도학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개국공신에 오른 금 용식(琴 容式)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후손이 명확하지 못해 고려 명종과 고종 때에 명신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금학사라는 별칭을 가진 영열공(英烈公) 금 의(琴 儀) 1세조(중시조)로 하여 계보를 이어왔다.

 

“ 금()은 동양의 옛 악기다....... 거문고나 가야금, 어느 것이나 선비가 성정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희애의 정서를 펴는 수양과 도야의 그릇이다. 우리나라 249개 성씨 가운데 악기 이름을 성으로 택한 것은 봉화 금씨뿐이다. 수양과 도야의 그릇을 표방한 성씨답게 수는 많지 않아도 학문과 도덕의 기품을 면면히 이어온 가문이다. 전국에 약 2만여명, 성별 인구순의 79, 희성을 넘어 귀성에 든다. 경북봉화를 중심으로 안동, 영주, 영양, 흥해 등 일대에 집단거주해 지역에선 토반으로 꼽혔다. 본관은 봉화 단일본. 문헌에는 김포(계양), 강화 등 몇 몇 본이 전하나 모두가 봉화의 분파이거나 거주지역의 표시로 본다. 봉화의 옛이름을 따 봉성금씨로도 일컬어오다 현재는 봉화금씨로 통일해 쓰고 있다.......... (83년 중아일보 게재)

 

□ 영열공(英烈公금 의(琴 儀)

“ 금 의는 충헌의 신임을 얻어 요직을 두루 거쳤다 … 강종이 즉위함에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책명할 때 금나라 사신이 궁궐의 정문으로 들어오고자 하거늘 조정에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서로 힐난했다. 왕이 금 의에게 명하여 금나라 사신을 설득케 했다. 금 의가 금나라 사신에게 ‘만약 그대나라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어느 문으로 들어올 것인가’ 하고 물었다, 금나라 사신은 ‘황제의 출입이 정문이 아니고 어느 문이겠느냐’하고 답했다, 이 말을 받아 금 의가 ‘그렇다면 정문은 천자의 출입문인데 감히 신하가 되어 정문으로 들어옴이 옳겠는가’ 하니, 금나라 사신이 크게 탄복하여 주장을 굽히고 서문으로 들어왔다” (고려사 기록)

70에 늙음을 이유로 벼슬 물러나기를 빌거늘, 벽상공신(벽에 이름을 기록하는 공신)을 가하고 물러나게 했는데 거문고와 바둑으로써 스스로 즐기다가 고종 17년에 돌아가니 78세라, 왕이 부음을 듣고 슬픔이 심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상례를 하고 영렬(英烈)이라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열부)

 

금 의의 비문은 백운 이규보가 지었으며 여기에 기록된 바둑이야기는 우리나라 국기사에 최초의 비문으로 기록돼 있다.

 

□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금의

한림별곡은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유생들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기체가로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을 보면 당시 금학사(琴學士)라 불리웠던 영열공 금의를 찬양하는 내용이 나온다.

 

  元淳文(원?문) 仁老詩(인노시) 公老四六(공노?)

  李正言(니정언) 陳翰林(딘한림) 雙韻走筆(솽운주필)

  ?基對策(튱긔??) 光鈞經義(광균경의良鏡詩賦(량경시부)

  위 試場(시?)ㅅ 景() 긔 엇더?니잇고.

  () 琴學士(??)의 玉?門生(옥?뮨?) 琴學士(??)의 玉?門生(옥?뮨?)

  위 날조차 몃 부니잇고.

 

(풀이)

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병려문.

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을 맞추어 내려간 글.

유충기의 대책문, 민광균의 경서 해의(解義). 김양경의 시와 부

아아, 과거 시험장의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 (참으로 굉장합니다.)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제자들,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제자들.

아아, 나를 위시하여 몇 분입니까? (참으로 많습니다)

 

 

□ 조선시대의 금문(琴門)

조선초 금문은 한차례 시련을 겪게 되는데, 다름아닌 제2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일문이 화를 입게 된다. 영열공 금의의 후손인 금인배는 딸을 태조 이성계의 넷째아들 방간(회안대군)에게 시집 보내 이성계와 사돈간이 된다. 그러나 새 왕조가 열린지 10년도 안돼 권력을 놓고 왕자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소동이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데, 금문의 사위인 방간은 방원과 맞섰다가 패배, 귀양가고 그와 함께 처족인 금문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조에서 금문의 이름을 높인 인물은 세조 때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금휘, 청백리로 대사성에 오른 금유, 그리고 금난수, 금응내, 금보, 금응훈, 금천, 금제순, 금서, 금앙성, 금응석, 금응상 등 퇴계문하의 일단의 학자들이다. 특히 금휘는 세종 때 문무양과에 급제하였고, 세조와는 주석에서 주고받은 시가 유명하다. 전라감사를 지낸 금유는 김종직과 시작교류를 가져 김종직 문집에는 그의 시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 퇴계 이황과 금문의 인연

조선중엽, 금문과 퇴계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퇴계의 맏며느리가 바로 금문의 딸.

당시 금문은 봉화, 안동 일대에서 행세하는 토박이 양반가문인데 비해 퇴계의 6대 선대는 아전에 불과해서 금문의 완고한 노인들은 퇴계집안과의 혼사를 반대해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혼사가 이루어졌다. 한 때 퇴계를 푸대접했던 금문이지만 이를 인연으로 많은 금문의 젊은이들이 퇴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과 문장으로 저마다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 중에도 성재(惺齋) 금난수와 매헌(梅軒) 금보는 퇴계가 매우 아꼈던 제자로서 매헌 금보는 특출한 필체로 스승이 돌아간 후 비문을 직접 썼다.

일세를 풍미했던 대학자 퇴계는 “ 기고봉(대승)이 아니면 비문을 지을 수 없고, 금매헌이 아니면 글씨를 쓸 사람이 없다”고 유언했다.

그 외 한말 금석주는 일제침략에 국권이 위기에 처하자 1896년 인근유림들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 고산정(孤山亭)과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一歲中間六度歸 한 해에 여섯 번이나 왔었지만

四時佳興得無違 사시의 경치 어김이 없었다네

紅花落盡靑林暗 꽃잎 떨어지자 녹음은 짙어가고

黃葉飄餘白雪飛 낙엽 구른 뒤엔 흰 눈이 날리네

砂峽乘風披? 단사벽에서 바람 쐬니 겹옷 펄럭이고

長潭逢雨荷? 메네 긴 소에서 비 만나 도롱이 걸쳤네

箇中別有風流在 이 속에 인간사 재미 있으니

醉向寒波弄月輝 취해 찬 물결 향해 달빛 감상하네

         󰡔�???惺齋集󰡕�??? 1, ?孤山精舍?

 

          日洞主人琴氏子 날골이라 그 주인 금씨네 아드님

隔水呼問今在否 지금 계신지 강 건너로 물어 보네

耕夫揮手語不聞 농부는 손 저으며 내 말 못들은 듯

?望雲山獨坐久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한참을 앉았네

         󰡔�???退溪集󰡕�??? 2, ?書孤山石壁?

 

 

 

금문의 인물가운데는 벼슬을 했다가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는 가풍을 지켜온 사람이 많다. 성재 금난수가 대표적인 인물인데 퇴계의 제자로 1561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잠시 지내다 낙향,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봉양을 위해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로로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동계서원(東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재 금난수는 월천(月川) 조목의 매부이기도 했는데, 월천 조목 역시 퇴계의 큰 제자로서 밑으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가르쳤다.

성재 금난수는 1563,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둔 별경’인 가송협에 고산정을 지어 독서를 하며 자연과 벗하였다. 고산정은 일명 ‘일동정사(日洞精捨)라 불리는데 성재의 아들인 금각(琴恪)의 ’일동록‘에 고산정 건립의 기록이 전해져 온다.

고산정 주위의 풍광을 읊은 선현들의 시문집인 <고산지(孤山志)>라는 책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현재 전해지지 않고 그 서문만이 남아있다. 서문은 소무헌(素無軒) 금서술(琴書述)이 썼다.

 

□ 청량사와 추원제(追遠齋) 행사에 대한 약간의 단상(斷想)

 

(아래글은 2001 11, 추원재 행사에 참여하고 난 후 여행기 형식으로 인터넷에 올렸던 글 중의 일부입니다.) - 서울경기청장년회 홍섭씀

 

…… 이름 그대로 청량함과 고귀함을 간직하고 있는 청량산... 설악산을 비롯한 강원도의 산들은 다양한 기암괴석들이 화려하고 현란한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삐죽빼죽한 바위와 암봉들이 차가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에 비해 청량산은 기묘한 암봉들이 우뚝 우뚝 솟아있음에도 끝부분이 둥그스름하고 나무로 뒤덮여 있어 육중하지만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연로하신 어르신 몇 분은 밑에 남아있고,10여명이 청량사로 향했다.

모든 고찰들이 명당에 자리잡고 있지만 청량사 또한 참 기가막힌 명당자리에 세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육중하지만 온화한 암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깊은 산속의, 세인들의 발길이 적은 소담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산사다.

 

일주문부터 대웅전에 이르는 길과 절채 사이를 모두 침목으로 깔아 놓았는데, 참 인상적이다. 경사도 완만하게 해 놓아 발바닥으로부터 탄력을 느끼며 기분 좋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대부분의 절에서처럼 침목이 아니라 기계로 깍은 차가운 느낌의 돌들로 계단을 해 놓았더라면 절집 분위기가 꽤나 황망했으리라. 만만찮은 공력이 들어갔을 침목계단을 보노라면 스님들의 수고와 자연과의 조화와 절을 찾는 중생들의 걸음 하나하나에 따뜻함을 제공하려는 석지현 주지스님의 깊은 혜안에 머리가 숙여진다.

 

경내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이란 전통찻집이 있는데, 여기에서 ‘명시’와 ‘명차’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1)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어느 먼 나라의 눈 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연기 가늘게 피어

오르는

청량의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 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

-----------(청량산인)

 

♣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2)

 

그의 소리를 만나면

나도

바람이 된다

가을 잎 떨어지는

어느 저녁 무렵

내가

그의 소리를 만나면

그는

웃음이 될까 아니면

우수수

사랑이 될까

---------(청량산인)

 

이 찻집은 석지현 주지스님이 오대산에서 너와나무를 직접 베어다가 지붕으로 얹고, 흙벽돌을 손수 찍어 지은 집이라 한다. 여기에 “솔잎이 바람을 만났을 때”란 명차가 있는데, 한 잔 마시면서 추사 김정희의 흉내를 잠시 내보는 것도 일생의 추억의 되리라.

 

고요히 앉아

차를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묘용(妙用)의 때에

물은 흐르고

꽃은 피도다

 

 

(중략) 어찌보면 제사라는 게 죽은 조상을 받들고 섬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산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제사는 가문의 결속과 질서를 세우는 중요한 형식으로 작용하는, 죽은 조상을 통한 산 자손들의 만남이라는 속뜻이 서려있다는 말이 맞다. 갈수록 삭막해지고 핍박해져가는 우리네 삶에 그나마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고 우리의 우수한 전통과 문화와 공동체적인 삶의 끈을 이어주게 하는 게 바로 제사라는 훌륭한 의식이 아닌가 한다. 동양에는 특히 우리나라는 ‘제사’라는 훌륭한 죽음에 대한 문화가 있지만, 서양에는 아예 장례에 관한 문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제사가 꼭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쁜 면 보다는 좋은 면이 훨씬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제례문화가 그나마 금문에서는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중략) 나는 이 지역을 올 때마다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전통의 '과잉'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의 '결핍'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기초로 새로움을 추구한다.)이라 했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해오고 있지 못하다. 서양문물이 우리 전통문화를 일방적으로 잠식해 왔던 것이 우리 근대역사의 자화상이 아닌가?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지 못하는 민족은 그 정체성이 균열되고 세계역사의 주역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정작 우리자신은 우리의 옛 문화와 전통을 업신여기고 홀대하고 있는 기막힌 역설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시제가 모두 끝나고 음복을 위해 떡과 고기와 과일들이 참여한 모든 종친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졌다. 묵과 온갖 나물들이 얹어진 밥 한공기와 따뜻한 국물로 점심을 달게 먹은 후, 언제 또 다시 오랴, 쉼 호흡 크게 한번 하고 뿌우연 서울로 향했다.

 

---- 작성 및 편집자 : 봉화금씨 서울경기청장년회 금 홍섭

 

출처 : 두리,해인,은나.... 그리고 호정
글쓴이 : 금호정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