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 유배를 온 노산군(단종)이 1457년 10월 24일 酉時(17~19시)에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아 영월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당시 영월호장 이었던
엄흥도는 아들과 함께 몰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先山인 冬乙旨山
(동을지산:지금의 장릉이 있는 곳)에 묻고 영남지방으로 몸을 숨겼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한다. 그 후 242년 후인 1699년 (숙종25년)단종이
복위되어 노산묘가 장릉으로 추봉이 되기까지 엄흥도 일가는 三族滅門刑
을 피하여 전국각지로 흩어져서 살았다고 하다.
조정에서 :누구라도 노산군의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3족을 멸하리라:
는 至嚴한 御命이 내려져 있는데도 엄흥도는 가족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겁이나서 한사코 그 일을 못하게 말리는 중에
爲善被禍 吾所甘心(위선피화 오소감심)이란 말씀을 남기신다
:착한 일을 하고 나서 화를 당하더라도 내 달게 받으리다.:하였다.
엄흥도가 세상떠난지 370년이 지난 1726년(영조19년)에 그의 忠義에
대한 재평가를 받아 贈 공조참의에 추증되고 1833년(순조33년)다시
贈 공조판서로 증직된다. 1876년 (고종13년) 忠毅公 의 시호를 받는다.
또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성삼문, 이개 박팽년,하위지,유성원,유응부,
6명의 사육신과 함게 六臣祠에 배향되었다.
이러한 조선 최고의 충신 엄흥도(1404~1474) 충의공이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잠들어 있다. 실제 화본2리에 가면 엄흥도의 묘가 있는데
보통 묘 보다 훨씬 큰 3기의 묘가 있다.이곳 영월엄씨 종친에 따르면
당시 剖棺斬屍(부관참시:파묘를 하여 관을 쪼개고 시신을 끊는 형벌))
를 면하기 위해 묘 2기는 假墓를 했었단다.
후손들이 매년 음력 10월 7일 墓祭를 모신다고 한다.
충의공 엄흥도 묘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의흥면 금양2리에는
현재 30여 가구 중 25가구가 영월엄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현재 18세손에서 21세손까지 살고 있다.
주:軍威文化 제8집 80쪽~82쪽에서 抄하다. 樂冊 書.
추기)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선생의 창녕성씨 족보책엔
성삼문의 1子는 夭死했고 ,2子 孟瞻의 부인 순천박씨는
丙子禍起屬於判內府事 田畇之家婢라 쓰여있다.
병자년(1456년)에 화가 일어나서 판내부사 전균의 집 종(婢)이
되었다,는 말이다.
위의 田畇이란 자는 단종때 수충협찬정난공신에 책록이 된 자이다.
또 성삼문 선생의 7子는 今年生으로 쓰여있는데 족보엔
丙子禍起 逆臣之子孫幼年而死 라고 쓰여있다.
병자(1456년)년에 화가 일어나서 역신의 자손이라 어린 유년에 죽었다
丙子被禍與兄五人同死라 했다.
병자년에 화를 입을때 형 다섯사람과 함께 죽었다 란다
此史知後幾多鳴이라
이 역사를 알고 난 뒤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하고 내 써 본다..
2025.4.24.아침 6시 17분 구 본훈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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