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천기생 김부용의 시와 사랑
더딘 걸음 재촉하여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다다르니
말고삐를 잡은 하인은
대감의 본가가 있을 북촌을
그대로 지나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기슭의 한 초당으로 안내한다.
새롭게 단장한 아담한 별장에는
"녹천정(綠川亭)"이라는
현판까지 걸려 있어서,
부용을 맞으려는 김이양대감의
따뜻한 배려가 짙게 배어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자기를 데려오는데
여러 달이 걸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때부터
노대감과 단란한 신접살림을
다시 시작한 소녀 김부용은
어엿한 김판서대감의 소실이 되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초당마마"로 불리고 있었다.
달콤한 세월이 덧없이 흘러
판서대감이 80을 넘었고,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려하자
임금 순조는 그에게
봉조하(奉朝賀)를 제수했다.
봉조하란
2품이상의 관직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고령으로 퇴임하는 노대신에게
특별이 내리는 벼슬로서,
실무는 담당하지 않으나
종신토록 녹봉을 지급할 뿐 아니라,
국가에
의식이 있을 때에는
조복을 입고 참여하는
영예로운 지위였다.
뿐만 아니라
대감의 맏손자 김현근이
순조의 딸 명온공주를 맞아
부마가 됨으로서
국가원로가 된 봉조하대감은
시우들을 녹천정으로 불러
부용과 더불어 시를 읊고
거문고를 들으며
한운야학으로 유유자적하는
한일월을 즐겼다.
그러나
노익장을 자랑하던
봉조하대감도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쇠잔해 가는
늙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덧 7~8년이 흘러
대감의 춘추 85세가 되었건만
부용은 아직도 27세의 방년,
풍요로운 물질과
한가로운 풍류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도
젊은 아까운 청춘이었다.
그래서 부용은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지필을 당기어
다음과 같은 낙서를 남겼다.
客子靑靑日遲遲(객자청청일지지) 나그네의 청춘은 아직도 멀고 멀었는데
主人白髮亂如絲(주인백발난여사) 주인의 백발은 파뿌리처럼 어지럽구나.
그래도 대감이 살아 있을 때는
그를 찾아 녹천정으로 모여드는
시인묵객들을 접대하면서
시름을 달랬지만,
세월은
그것마저 용납지 않는 듯,
91세를 일기로
노대감이 세상을 떠나자,
땅이 꺼지는 듯,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던 부용은
다음과 같은 시로서
떠난 임을 위로하고
자기의 삶을 돌아본다.
風流氣槪湖山主(풍류기개호산주)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이요.
經術文章宰相材(경술문장재상재)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재목이었네.
十五年來今日淚(십오년래금일루) 15년 정든 임 오늘의 눈물
峨洋一斷復誰裁(아양일단복수재)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 줄고.
都是非緣是夙緣(도시비연시숙연) 인연 아닌 인연을 맺어온 인연
旣緣何不趂衰前(기연하불진쇠전) 피치 못할 인연이면 젊어서나 만나지,
夢猶說夢眞安在(몽유설몽진안재) 꿈속에서 꿈을 꾸니 진실은 어디 있나
生亦無生死固然(생역무생사고연) 살아도 산 게 아니요 진실로 죽은 것을,
水樹月明舟泛泛(수수월명주범범) 달 밝은 수정에 배는 둥둥 떠 있고
山房酒宿鳥綿綿(산방주숙조면면) 술 익은 산방에 새는 지저귀는데,
誰知燕子樓中淚(수지연자루중누) 누각에서 홀로 우는 남모르는 이 슬픔
洒遍庭花作杜鵑(선편정화작두견) 방울방울 뿌리는 눈물 두견화로 피어나리.
칠언배율(七言排律)
봉조하 김이양 대감은
자기 고향인 충청도 천안의
광덕산 기슭에 장사지냈고,
김부용은
홀로 녹천정을 지키다가
몇 해 후에 세상을 뜨자
그가 생전에 소망했던 대로
대감 곁으로 가기는 했으나,
당시의 법도 상
갈은 묘역에 묻히지는 못하고
같은 산자락이긴 하지만
좀 떨어진 언덕에 잠들었다.
그러나
150 여년이 지난 오늘날,
그토록 명예롭고 지체 높았던
봉조하대감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도,
천기 출신의 운초 김부용을
기리는 사람들은 많아서
그의 시비가 서 있는 자그마한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잊는다고 하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학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할 것이다.
△김부용묘소 바로 뒤(약 10m)에 김이양묘소가 있다.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蓉)
고향은 평안도 성천,
시명(詩名)은 운초(雲楚).
이름은 김부용(金芙容)이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 그리고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을
조선 시대를 통털어
시 잘 짓고 노래 잘하는
조선의 3대 명기라고 칭한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읍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이 멋진말은 조선시대
순조임금때 1820년~1869년까지
한 세상을 살다간 여류시인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容)이
남긴 말이다.
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던 문재다.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하는 부용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
열두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렸다.
출처 : 漢詩 속으로
글쓴이 : 巨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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